소설리스트

구주표묘록-86화 (86/3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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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장. 검 (11)

“선생. 뵙기를 청합니다.”

누군가가 문밖에서 작게 말했다.

노인은 얼음 창고에 떨어지기라도 한 듯 동공이 돌연 커졌다. 노인은 창대를 꽉 움켜쥐고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처럼 온몸의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는 홱 고개를 틀어 투명하게 빛나는 보름달을 올려다보면서 휙휙 쏟아져 내릴 은색 우전(羽箭)을 맞을 준비를 했다. 달빛 아래 날아다니는 인영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아는 그였다. 땅에서 보면 날개가 하얀 기러기 같지만 그들이 지나는 곳에는 언제나 피로 붉게 물든 깃털만이 남았다.

그러나 사위가 조용했다. 달빛은 고요하고 부드럽게 주위를 비추었고 노인이 걱정하는 것처럼 살인의 하얀 깃털은 나타나지 않았다.

손 하나가 문틈으로 서신 한 통을 끼워 넣었다. 손의 주인은 모습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제 명첩입니다. 부디 시간을 내 후배를 만나주시기를 청합니다.”

명첩을 건넨 자의 기척이 멀어져갔다. 명첩을 건넨 뒤 말을 하면서 물러난 것이 분명했다.

노인은 정신을 바짝 차리고 천천히 문가로 다가가 봉투를 뽑았다. 자작나무 종이로 만든 흰색 편지 봉투였다. 열어보니 명첩이라는 것이 글자 하나 없는 한 장의 좁고 긴 편지지였다. 그 한가운데에는 오래된 상징 같은 무늬가 있었다. 노인의 몸이 살짝 떨렸다.

노인은 정원으로 돌아왔다. 일곱 걸음 후 노인이 불쑥 몸을 돌렸다. 은색 창날이 바닥의 낙엽을 쓸어내며 선을 한 줄 그었고 선은 정원 입구를 가리켰다. 노인은 돌연 조각상이 된 것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정원 한 귀퉁이의 화로에서는 차가 보글보글 소리를 내며 반쯤 끓고 있었다.

“들어오시게.”

“영광입니다.”

마침내 말한 이가 걸어 들어왔다. 걸음걸이는 완만하면서도 침착했다. 인영이 온통 시커멨는데 갑옷은 입지 않았고 허리를 동여맨 넓은 소매의 검은 도포를 걸치고 있었다. 그는 조용히 입구에 서 있었다. 우뚝하고 늘씬한 모습이 등 뒤로 높다랗게 자란 자작나무와 어우러졌다. 노인의 시선이 허리춤의 삼엄한 중검에 닿았다. 노인은 천천히 몇 걸음 물러나 아까 희야가 서 있던 원의 정중앙에 섰다. 낯선 손님은 그제야 몇 걸음 들어와 정원에 발을 디뎠다. 그는 허리춤의 검을 뽑았다. 검빛이 찬란했다.

“정도(靜都)?”

“그렇습니다. 하지만 검 한 자루로 선생의 신임을 얻기를 바라고 온 것은 아닙니다.”

손님은 천천히, 그리고 진중하게 검을 자신의 앞에 가로 들었다.

노인은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털어 긴 창을 거두어들였다. 노인은 두 손으로 창대의 양 끝을 잡고 천천히 가운데로 다가갔다. 마침내 두 손이 거의 한 곳에 이르렀다. 노인은 느른하게 창의 중간을 쥐었다. 가볍게 한 걸음 내디딘 노인은 표범처럼 몸을 낮추고 고개를 돌려 손님을 응시했다.

“쌍라만단수진입니까?”

손님이 살며시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얹었다.

“영광입니다.”

그와 동시에 반사된 달빛이 손님의 중검과 노인의 창날 위에서 약동했다. 두 사람의 공격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터져 나왔다. 두 사람이 일으킨 바람에 낙엽 한 무더기가 바람 속에서 파르르 소용돌이치며 검과 창의 은빛을 가렸다. 챙 하며 부딪치는 울림만 들렸는데 팽팽하게 당겨진 은빛 선을 튕기는 듯한 소리였다.

가까이 달려든 두 사람은 순식간에 맞닿았다가 약속이라도 한 듯 물러났다. 노인과 손님은 동시에 원 위에서 좌측으로 피하며 미끄러지는 걸음을 급히 멈췄다. 다시 두 사람은 동시에 오른쪽으로 번쩍 움직이며 미끄러지듯 걸음을 멈추었다. 그들은 방향을 바꾸지 않고 다시 기합을 넣으며 그대로 우측으로 달려갔다.

노인과 손님 사이의 거리는 1장 남짓. 공격하면 상대를 정확히 맞출 수도 있는 거리였다. 그러나 두 사람은 다시 공격하지 않았다. 극히 짧은 순간 나는 듯한 속도로 번쩍 움직이기만 했다. 속도와 움직이는 시기가 거울을 마주 보고 있는 것처럼 완전히 똑같았다. 정원 안은 저벅저벅 발소리로 가득했다. 낙엽과 먼지가 물살이 여울치듯 두 사람의 발아래서 떠올랐다가 내려앉았다.

두 사람이 다시 동시에 서로에게로 달려들었다. 노인은 한 손으로 창을 조종했다. 창날이 완벽한 반호를 그리며 아래에서부터 쓸고 올라왔다. 상대는 완전히 노인과 반대 방향인 위에서 아래로 중검을 내리쳤다. 창날과 검날이 맞부딪쳤다가 튕겨 나갔다. 긴 창은 완전히 힘을 못 쓰는 듯싶었으나 창 꼬리 부분이 튕겨져 나온 힘에 따라 빠르게 흔들렸다. 노인은 삽시간에 창을 쥔 방향을 바꾸었고 창 꼬리 부분의 짧은 은침이 소리 없이 내질러졌다. 중검의 회복 속도 역시 조금도 뒤처지지 않았다. 상대가 물러나지 않자 손님은 연달아 힘차게 검을 베었다. 검 위로 반사된 달빛이 기이하게 연이어 번득였다. 손님이 칼을 몇 번이나 벤 것인지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다. 모든 동작이 거의 동시에 이루어진 것 같았다. 위에서, 아래에서, 왼쪽에서, 오른쪽에서 다시 오른쪽 위에서, 오른쪽 아래에서, 왼쪽 위에서 또 왼쪽 아래에서 베어 나갔다. 순간 눈앞에서 철로 만든 국화가 활짝 피어난 것 같았다. 느리면서도 움직임을 종잡을 수 없는 노인의 가시가 국화 꽃술을 향해 내질러졌다. 노인은 기존 공격을 지속할 수 없었다. 긴 창이 바르르 떨리며 변화하기 시작하더니 전 방향에서 중검과 연달아 부딪쳤다. 모든 타격음이 하나로 연결되며 끊어지지 않는 긴긴 울림이 이어졌다.

두 사람은 다시 물러나 정지했다. 호흡이 무겁고 거칠었다.

노인은 여전히 공격하기 전처럼 몸을 낮춘 자세였다. 한 번도 이동한 적 없어 보였다. 상대도 전처럼 꼿꼿하게 서 있었다. 몸 앞에 가로놓인 검이 처량하게 번쩍였다. 노인은 고개를 숙이고 손님의 발아래를 보았다. 상대의 두 발은 마침 노인이 앞에 그려두었던 ‘검권’ 위를 딛고 있었다. 두 사람이 시선을 맞추었다. 서로를 보는 눈빛은 차분했다. 일말의 긴장이나 불안은 드러나지 않았으며 조용히 앉아 승부를 겨루는 고수 같았다.

“서로가 서로의 변화를 전부 짐작할 수 있으니, 이래서는 둘 중 하나가 녹초가 될 때까지 소모전만 되겠군.”

노인이 나직하게 말했다.

상대도 고개를 끄덕였다.

“선생께서 새겨두신 원들이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검권과 창원이 다는 아니지.”

노인이 휙 손목을 털었다. 긴 창이 앞으로 쏘아져 나가며 창을 쥔 노인의 손이 창 꼬리 부분으로 이동했고 창날은 지면을 짚었다. 노인이 몸을 더 낮추었다. 천천히 힘을 눌러 모으는 자세였다.

“그 창술을 쓰실 겁니까? 꽤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그 아이에게 모든 원을 깨부수는 열호독룡지아(烈虎屠龍之牙)를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은 선생뿐이지요.”

상대는 찬탄하는 듯했다.

손님은 갑자기 검을 거두고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며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지금 이 순간 그의 가슴은 빈틈투성이였다. 그러나 노인의 창은 조용히 멈춰 있었다. 노인은 묵묵히 창날을 응시할 뿐 공격할 의도는 털끝만큼도 없었다. 손님이 고개를 내려 노인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는 두 다리를 벌리고 두 손으로 천천히 중검을 들어 올렸다. 두 손으로 검을 잡는 것은 처음이었다. 원래 한 손으로도 자유자재로 다루었던 검인데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도 무거운 느낌이었다. 검을 들어 올릴 때 검날이 불안하게 떨렸다. 마치 전력을 다해 커다란 바위를 들어 올리는 것 같았다.

마침내 머리 위로 들어 올려진 검은 돌연 움직임을 멈추었다.

바로 그 순간, 극도로 날카로운 소리가 정적을 깨트렸다. 노인의 은색 창이 뛰어올랐다. 자작나무 껍질 같은 은빛을 띠는 창대 위로 용이 꿈틀꿈틀 약동하고 있었다. 그 순간 시간이 멈춘 듯했다. 노인이 포효하며 기를 내뱉자 포탄이 터져나가듯 하얀 수염이 쫙 퍼지며 끊어지지 않는 힘이 연이어 창신으로 쏟아져 들어갔다. 창 위에서 꿈틀대던 불안한 용은 돌연 속박에서 벗어나 그대로 손님의 목구멍을 향해 찔러 들어갔다.

애초에 사람의 시력으로는 포착할 수 없는 순간이었다. 귓가에는 고함의 여음이 남아 있지만 사위는 어느새 고요했다. 노인과 손님 사이의 거리는 5척. 두 사람은 꼼짝도 하지 않고 서로를 응시했다.

노인의 창이 손님의 목구멍 앞 딱 한 치 거리에서 멈추어 있었다. 손님은 장검으로 베는 동작 그대로 멈추어 있었는데 검날 아래가 바로 노인의 미간이었다.

마지막 순간, 두 사람은 약속이나 한 듯 성난 파도와도 같은 공세를 거둔 것이다. 흡사 시간이 창과 검에서 뿜어져 나오는 극한의 냉기에 얼어붙은 것 같았다.

식은땀이 두 사람의 구레나룻 옆으로 흘러내렸다. 그때야 그들은 서로를 모르는 상태에서 단지 호기심만으로 생사를 건 놀이를 했음을 깨달았다.

“북극성의 신은 궁지에 이르러도 동요하지 않으며 만리 고공의 매처럼 침착하리라.”

손님이 깊게 숨을 들이켜며 나직하게 그 문구를 읊조렸다.

“청악검이 자네 수중에 있다니…. 스승은 죽은 것인가?”

노인이 창을 거두고 물러나며 물었다.

“벌써 8년 전의 일이지요.”

은색 창날이 바닥에 떨어졌다. 불어오는 바람에 노인의 백발이 흩날렸다. 그는 묵연히 별하늘을 바라보며 오래도록 말을 하지 않았다.

“만나서 반갑구나, 나의 아이야.”

그는 반 무릎을 꿇고 앉아 오른손으로 창을 왼쪽 어깨에 바짝 붙이고 왼손으로 오른 손목을 꾹 눌러 잡았다.

“천구 종주의 예로서 너의 가입을 반가이 맞이한다. 북극성 신의 광휘가 네 두 어깨에 비추리라. 우리는 존엄으로 긍지를 느끼고 용기로서 영예를 얻노라. 철갑은 영원하리.”

“영원하리!”

상대는 노인과 똑같은 자세로 반 무릎을 꿇고 말했다.

“동륙 하당국 무전도지휘 식연이 사달극 성방 영주 대인 익천첨 전하를 뵙습니다.”

노인이 질항아리에 물을 더 넣었다. 다시 물이 보글보글 끓어올랐다. 은은한 차 향기가 정원 가득 자욱하게 퍼졌다. 두 사람은 이미 질항아리 옆의 돌 위에 어깨를 나란히 하고 앉아 있었다. 식연은 중검을 내려놓고 허리띠를 풀러 도포를 활짝 펼쳤다. 밤바람이 스며들어 온몸의 눅눅한 열기가 가시자 조금 상쾌해졌다. 입고 있던 내의는 이미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원을 깨는 무시무시한 찌르기 공격이 일으킨 살기가 아직도 목구멍 언저리에 남아 있는 듯했다.

살며시 차를 한 모금 마신 식연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우족의 장차(樟茶)가 아주 유명하다 하여 저도 상인에게 사보았지만 뒷맛이 이리 오래 남지 않더군요.”

“청주 땅이 실은 매우 척박해서 그렇다네. 담청색을 띠는 장차 나무 한 그루가 십수 년을 자라야 차를 생산할 수 있거든. 동륙으로 옮겨 심은 장차 나무는 1년이면 찻잎을 생산할 수 있지만 맛이 달라질 수 있네.”

차향을 세세히 음미하던 익첨천은 돌연 말머리를 돌렸다.

“자네 스승은 어찌 죽었나?”

식연은 맑은 찻물을 응시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꼭 물으셔야 합니까?”

익천첨은 잠시 침묵했다.

“존엄한 무사로 죽지 못했는가?”

“풍염 황제의 북벌 이후 무사의 존엄을 지키며 죽어간 천구 무사가 몇이나 되겠습니까.”

식연이 담담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선생께서 듣고 싶으시다면 훗날을 기약하지요.”

익천첨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주에서 남하하며 4개 주를 지났네. 그해 남긴 주소지를 따라 동료들을 찾아가 보았지만 아무 소득이 없었어. 멸문되었거나 집안 전체가 이사를 갔더군. 남은 건 희양의 손자인데 그 녀석마저도 지금은 벼슬길에 올라 명예를 얻기 급급한 순한 양일 뿐이지. 맹호마저도 순한 양이 되어 버렸는데 다른 누구를 기대하겠나? 내 오늘 자네 검술을 보고 뜻밖이라 놀랐다네.”

식연은 묵묵히 잔만 돌릴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이번 남하에는 다른 사명이 한 가지 더 있네. 식 장군은 이미 하당군의 1인자가 되었으니 사정을 모르겠지.”

익천첨은 불쑥 고개를 돌려 식연을 보았다. 익천첨의 두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가늘게 뜬 눈 사이의 맹렬한 눈빛이 위협적이었다.

“대종주의 패검 때문이지요?”

식연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칼 같은 상대의 시선을 전혀 알아채지 못한 것처럼.

“맞네! 창운고치검이 아직 남회성에 있을 것이야. 그 검에 대해 얼마나 아는가?”

식연이 한숨을 내쉬었다.

“천구의 성물 아닙니까. 천구 무사단의 구성원이라면 누구라도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지요. 안타깝게도 유장길이 남회성에 들어왔을 때 저는 천계성 우림천군의 일개 금오위였을 뿐입니다. 차츰 계급이 높아져 더 많은 문건을 찾아볼 수 있게 되었을 때는 이미 쓸 만한 정보를 찾을 수 없었지요. 남회성의 문건들 중에 유장길과 관련이 있을 만한 글귀는 아마 정위부 문서에 기재된 것이 마지막일 겁니다. ‘12월 12일 밤, 염룡 역참에서 무기를 든 싸움으로 32명이 사망. 모두 머리가 파열되어 죽음.’”

“머리가 파열돼?”

식연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전부 한 사람 손에 죽었습니다. 당시 검시관을 찾았는데 현장에 부러진 무기가 적어도 수십 개였고 죽은 자들 전부 예외 없이 정수리를 가격당해 죽었으며 차마 눈 뜨고는 볼 수 없을 정도로 참혹한 상태였다 하더이다. 저는 그것이 창운고치검이 만든 걸작이 아닌가 싶습니다. 지극히 무거운 검이라 사용하는 이가 반드시 들어 올려서 내리쳐야 하지요. 상대가 무기를 들어 막았으나 중검에 무기가 부서지고 머리가 내리쳐져 쪼개진 것으로 보입니다.”

“그 후로 다른 단서는 없는가?”

“없습니다. 유장길이란 자는 그 후로 남회성에서 사라진 것 같더군요. 그 검도 가져간 듯하고요. 더는 정보가 없습니다.”

“자네도 알아낼 수 없을 정도로 단서가 모두 끊겼다면 함정에 빠진 것은 아닌가 싶군.”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 익 선생께서는 아직도 창운고치검이 남회성에 있다고 믿으시는군요. 들으신 이야기라도 있습니까?”

익천첨은 잠시 망설였다.

“자네 스승이 말해 주지 않았나? 그 검 자체가 비술의 주문일세.”

“용혈골결의 주문 말씀이십니까?”

식연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세상에 정말 그런 주문이 있습니까?”

“바로 그 주문이네. 하지만 자네는 그 주문이 얼마나 무시무시한지 모를 걸세.”

익천첨이 침음했다.

“하락인들이 처음 태양빛 아래에서 그 검을 들어 올렸을 때 그들은 그 검을 영혼을 갉아먹는 ‘지옥의 쇄혼룡의 검’이라 불렀지. 전설에 따르면 그 검에는 용의 혼이 봉인되어 있다고 해. 혼이 봉인된 그 어떤 무기보다 흉포하게 영혼을 빨아들이지. 절대 아무나 잡을 수 있는 검이 아니야. 그 검을 물려받는 자는 북극성이 떠오르는 새벽에 맹세를 해야 해. 필생의 힘과 선혈로 이 검의 존엄을 지키겠노라고. 유장길도 예외는 아니었지. 제검 의식에서 그는 손가락을 베어 피가 검에 스며들게 했네. 난 그 장면을 직접 보았어. 당시 검 전체의 구름 무늬가 마치 파도처럼 일렁이더군. 검 안에 봉인된 무수한 영혼이 포효하며 선혈을 빨아들였어. 그들은 미친 듯이 검의 뼈대를 들이받았네. 하지만 하락족이 ‘성분술(星焚術)’로 주조한 무기라 함거(轞車)1)처럼 그들을 구속했고 빠져나올 수 없었지. 마침내 그들은 조용해졌고 검신(劍身)의 핏빛도 사라졌네. 새로운 주인을 받아들였음을 표명한 것이지. 검의 주인은 죽으면 더 이상 자신의 영혼을 지킬 수 없네. 그 역시 검 안의 무수한 영혼에 저항하지 못하고 빨려 들어가 결국 검 안에 봉인되지. 새로운 계승자가 없으면 검에 숨겨진 용혈골결의 주문이 스스로 깨어난다네. 우족의 비술 중에 풍산용야음(楓山龍夜吟)의 진에 비견될 만큼 강력한 수호야. 검의 주인이 아니면 검을 드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다가갈 생각조차 버려야 하네.”

“검에 다가가면 어찌 됩니까?”

“혼백이 급속도로 빨려 들어가네. 그러나 몸은 완전히 죽지 않아서 종종 걸어 다니는 산송장, 행시(行尸)로 변하니 죽느니만 못하지.”

* * *

1) 죄인을 호송하거나 맹수를 잡아 가두는 데 사용하던 우리처럼 만든 수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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