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주표묘록-84화 (84/360)

84

6장. 검 (9)

깊고 고요한 밤.

서배전은 아직 등불이 밝혀져 있었다. 창호지에 서너너덧 사람의 인영이 비쳤다. 어렴풋이 말소리도 들렸다.

한 명이 콧방귀를 뀌며 웃었다.

“야만족 같으니! 글자도 몇 개 모르면서 우리 천조상국의 문화를 배우려 하다니. 그야말로 쇠귀에 경 읽기지요!

“글의 이치는 총기 있는 학생에게나 들려 주어야지요. 야만족들은 평생가도 그 진수를 배우지 못해요. 국주의 명이 아니었다면 이리 선비를 욕보이는 일은 죽어도 안 했을 겁니다.”

누군가가 노기등등하게 탁자를 내리치며 말하자 온화한 목소리가 로방동을 달랬다.

“로공. 진정하세요. 양국이 동맹을 맺었으니 서로의 체면을 생각해서라도 해야 합니다. 국주께서도 의도가 있으니 저리 보란 듯이 만족과 세자가 같은 음식을 먹고 같이 머물게 하는 게지요. 이게 다 금장국 사절에게 보여 주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오늘 국주를 뵈었는데 여전히 욱 세자 저하와 함께 생활하도록 하고 조금의 차이도 두지 말라 하시더군요. 미개한 만족을 얼마나 더 참아줄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더구나 이 만족이 학문을 배우고서 훗날 다른 뜻을 품어 우리 동륙에 해가 된다면 내 천고의 죄인이 되겠지요. 내 조상님들을 무슨 낯으로 뵌단 말입니까?”

온화한 목소리의 사람이 웃으며 말했다.

“글을 깨우치고 못 깨우치고는 그의 자질에 달렸지요. 로공은 욱 세자 저하를 가르치면서 구관조 한 마리 옆에 놔뒀다 생각하십시오. 오래 시간이 흐르면 저도 두어 마디는 배우겠지요. 학문의 진수가 그리 쉽게 배울 수 있는 거랍니까? 짐작컨대 일개 만족인 녀석은 뭘 제대로 배워가지 못할 겁니다!”

“산공 말이 맞소! 그래도 탁발산월을 경계해야 하오. 혹시라도 만족 세자의 뒷배가 될지도 모르니. 국주께서 지금 그를 총애하고 신임하시니 그걸 믿고 거만하게 굴지 못하도록 막아야 합니다.”

“추공. 국주를 과소평가하는 말씀이십니다. 국주께서 만족을 총애하시기는요? 정말 국주께서 탁발산월을 심복으로 생각하셨다면 그자와 무전도지휘 식 대인 사이의 원한을 방임하셨겠습니까? 탁발은 명목상 삼군을 장악하고 있지만 우리 하당군의 1인자는 어전우장군 식 대인이지요! 식 대인이 명리를 좆는 성정이었다면 그 자리에 탁발산월이 앉을 수나 있었겠습니까?”

작게 숙덕대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 처마 아래의 소년은 묵묵히 손에 든 책을 보았다. <정전발몽>의 삼가주본과 항연의 <고창구문록>이었다. 원래는 이 책을 읽고 나면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한데 이곳을 지나면서 소년은 뜻밖에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결국 모든 이야기는 ‘야만족’이라는 세 글자로 귀결되었다. 약간 서러웠다. 울고 싶을 만큼. 하지만 울지 못했다. 그는 만족이었으니까. 청양부 여씨 파소이 가문의 자손인 그는 동륙 땅을 밟으며 초원 소년의 귀감이 되자고 절대로 두 번 다시 나약해지지도 눈물을 흘리지도 말자고 다짐했다.

여귀진은 쥐 죽은 듯이 회랑을 지나왔다. 인적이 없어 고요했다. 깊은 밤, 개구리 소리가 쟁쟁하게 울려 퍼졌다.

소년은 갈림길에서 잠시 주저했다. 한쪽은 백리욱의 량풍원으로 가는 길이고 다른 한쪽은 자신이 머무는 귀홍관으로 가는 길이었다. 그러나 지금 귀홍관은 어떤 인기척도 들리지 않는 어둠뿐이었다.

여귀진을 시중드는 유유아와 소소는 원래 백리욱의 시녀였다. 이 시각이면 그녀들은 새장을 벗어난 새처럼 지체 않고 량풍원으로 갔다.

새장?

여귀진은 정말 새장 같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그곳은 여귀진 혼자만의 새장이었다.

그는 세 번째 길에 올랐다. 한없이 거닐기로 한 것이다. 걷다가 멈췄다가, 걷다가 또 멈췄다. 그러다가 빗장을 걸지 않고 닫아둔 궁문을 발견했는데 약간 낯이 익었다. 그곳은 처음 그가 동궁에 들어올 때 백리욱이 지내고 있던 미란궁이었다. 이후 백리욱은 량풍원으로 거처를 옮겼는데 여귀진이 지내는 귀홍관과는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었다. 미란궁은 이내 황량해졌다. 낮에도 사람이 별로 없었다. 여귀진은 손이 가는 대로 문을 밀어보았다. 보도(步道) 가득 달빛이 쏟아졌고 나무 그림자가 땅 위로 흔들흔들 늘어졌다. 불어오는 바람에 나뭇잎이 쏴아, 쏴아 소리를 냈다. 여귀진은 안쪽으로 더 들어갔다. 정전 안은 텅 비어 있었다. 사면의 투각된 창문으로 달빛이 비쳐들어 바닥이 수은 같았다. 피로를 느낀 여귀진은 바닥에 앉아 무릎을 감싸 안고 서까래에 휘감긴 금사가 산들바람에 오르락내리락하며 펄럭이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여귀진은 동륙이 사실 정말 좋은 곳이라고 생각했다. 전에는 금사를 이렇게 얇게 짜는 사람이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더랬다. 금사 너머로 소녀들의 피부가 고스란히 비쳤다. 소녀들은 하나같이 공주처럼 아름다웠고 머리에는 장미 기름을 발라 멀리서도 꽃향기에 취할 것 같았다. 동륙은 집들도 정교했다. 특유의 지붕 받침에 처마 네 귀퉁이도 높이 들렸다. 회랑 구석의 가림벽 뒤로는 난초와 소죽(小竹)도 섬세하게 심어져 있어 늘 새롭고 신기했다. 동륙의 국주도 무척 위엄이 있었다. 그는 늘 차분한 미소를 띠고 있었으며 한 마디, 한 마디 침착하고 우아하게 말했다.

그래도 북륙이 그리웠다. 아버지, 어머니도 보고 싶고 대합살과 아마칙, 소마도 보고 싶었다.

동륙에는 없는 게 없었지만 그가 원하는 것은 없었다.

점점 졸렸다. 춥기도 했다. 여귀진은 일어나 겅중겅중 뛰면서 금사를 모두 떼어내 제 몸에 둘둘 감았다. 그리고 벽에 기댄 채 구름 같은 얇은 천 속에 앉았다.

얇은 천은 얼음처럼 차갑고 매끈했지만 몸에 감고 있으니 유난히 따뜻했다. 졸음이 밀려왔다. 머리도 수그러들었다. 서늘한 달빛이 가리개가 없는 창문의 창살 사이로 스며들어 여귀진의 머리를 비추었다. 여귀진은 따듯한 소가죽 담요와 발갛게 불이 붙은 화로를 생각했다. 곧 잠이 들 것 같았다.

그때 발소리가 들렸다!

가슴이 두방망이질 쳤다.

“아악…….”

애통한 울부짖음이었다. 그런데 소리가 나오다가 울컥한 듯했다.

여귀진은 눈을 뜨고 귀를 기울였다. 희미하던 목소리가 사라졌다. 바깥 정원 안, 바람에 떨어진 낙엽이 바닥을 쓰는 소리만 남았다. 달빛이 온 땅을 비추자 궁전 바닥은 서늘한 청색을 띠었다. 등줄기가 오싹해지면서 궁 안의 불길한 전설들이 생각났다. 온몸의 솜털이 바짝 곤두섰다. 누군가가 궁전 둘레를 빠른 걸음으로 도는 것 같았다. 하지만 발소리가 끊겼다가 이어졌다가 했다. 호흡 소리가 들려왔다. 바로 귓가에서 들리는 듯했다. 심장이 목구멍에서 튀어나오기라도 할 것처럼 쿵쿵 뛰었다.

“잡아! 잡아서 죽도록 패!”

음산한 외침이 벽을 뚫고 들어왔다.

발소리는 더욱 또렷해졌다. 바로 미란궁 담벼락 밖에서 나는 소리였다. 한 사람이 아닌, 여러 사람의 어지럽고 다급한 발소리가 멀리서부터 매우 빠르게 다가왔다.

누군가가 궁 안에서 싸우는구나. 여귀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이내 불안해졌다. 한밤중에 버려진 낡은 궁 안에 있었던 이유를 설명하기가 곤란했다. 잠시 망설이던 그는 살그머니 까치발을 하고서 서쪽 담벼락의 측문으로 달려갔다. 측문은 잠겨 있지 않아 손을 대자 곧장 열렸다. 문 밖으로 한 걸음 내딛자 누군가가 비스듬히 옆쪽에서 달려 나와 담에 세게 부딪쳤다. 여귀진은 물러나려 했지만 한발 늦었다. 표범처럼 흉맹한 검은 그림자가 뒤에서 쫓아오더니 팔꿈치로 앞사람의 아랫배를 거칠게 쳤다. 문밖은 양쪽으로 높은 담장이 세워진, 폭이 3척도 안 되는 좁은 길이었다. 여귀진은 그자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지만 방금 전 팔꿈치에 실린 포악한 힘을 느낄 수 있었다. 상대는 즉시 작은 새우처럼 바닥에 몸을 오그렸다. 더 많은 사람들이 뒤쫓아 왔다. 표범 같은 인영은 얼른 발을 들어 올려 마구잡이로 사납게 발길질을 몇 번 하며 뒤편의 추격병들을 저지했다. 그의 숨소리는 무겁고 거칠었다. 부상을 입었는지 아니면 기진맥진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는 숨을 고를 새도 없이 두 손으로 궁벽을 짚고 비틀거리며 몇 걸음 뛰어가더니 여귀진 앞을 지나 다시 힘차게 내달리기 시작했다.

“어딜 도망가? 아주 이곳에서 죽여주마!”

쫓아오던 이들은 부상당한 동료는 신경도 안 쓰고 표독스럽게 으르렁대며 한 발짝도 물러나지 않았다.

여귀진은 똑똑히 보았다. 일고여덟 명이 한 사람을 쫓아가 구타하는 상황이었다. 방금 전 팔꿈치 공격을 한 사람이 쫓기고 있었다. 추격하는 일고여덟 명은 전부 손에 목도를 들고 있었으나 도망치는 이는 빈손이었다. 그는 한쪽 다리를 접질린 듯했지만 뛰기 시작하자 외려 민첩하고 힘이 있었다. 추격병들은 담벼락 사이가 좁아 일직선으로 늘어서게 되었고 앞사람이 뒷사람의 길을 막는 꼴이 되어 점점 따라잡을 수 없게 되었다.

“멈춰!”

전방의 갈림길에서 갑자기 누군가가 나직하게 외쳤다. 아까 그 음산한 목소리였다. 이어 목도가 휙 칼바람을 일으키며 바닥을 쓸었다. 도망치던 이가 뛰어오르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목도가 매우 정확하고 힘 있게 도망치던 이의 정강이뼈를 쳤고 심장이 철렁해지는 둔탁한 소리가 났다. 여귀진은 그자의 다리뼈가 부러졌을 거라고 생각했다. 뒤쫓아 가던 이들이 단숨에 그를 덮쳤다. 모두가 온 힘을 다해 공격했다. 실성한 것처럼 목도로 맹렬하게 한 사람을 내리쳤다. 마치 수박 한 덩이를 마구 깨부수는 듯했다. 둘러싸여 공격당하는 이는 두 손으로 제 머리를 감싸고 계속 데굴데굴 굴렀다.

“죽도록 패! 네깟 게 계속 날뛸 수 있나 보자!”

또다시 아까 그 음산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우두머리인지 공격은 하지 않고 목도를 끌어안은 채 한쪽에 비켜나 있었다. 칠흑 같은 밤, 두 눈이 반짝였다. 여귀진은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의 눈빛에 초원의 사나운 늑대가 떠오른 까닭이었다.

“항복 안 해? 언제까지 버티나 보자!”

“다 죽어버려… 뒈져!”

구타당하던 이가 쌓인 분노를 풀어내는 듯 낮게 욕을 뇌까렸다. 여귀진은 다들 자신과 나이가 엇비슷한 사내아이들이라는 것을 목소리로 알아챘다. 그들은 궁 안의 금군 복장을 입고 어깨에는 은색 국화 휘장을 늘어뜨렸다. 동궁 군영은 명문가의 어린 무사들이 모이는 곳이었다. 일렬로 줄을 세워보면 태반이 입가에 털도 안 난 애들이었다. 남자아이들은 한동안 목도로 내리치더니 잇달아 발로 그 아이의 등과 가슴을 짓밟았다.

여귀진은 의아했다. 시종일관 구타당하는 아이는 찍 소리도 내지 않았다. 그저 머리를 감싼 채 피하면서 공처럼 이리저리 차이기만 했다.

마침내 누군가가 기회를 잡았다. 그는 발로 머리를 감싼 소년의 손을 차내고 옆얼굴을 밟았다. 이를 악물고 소년의 머리를 밟은 발에 모질게 힘을 주었다. 다른 아이들은 그제야 공격을 멈추고 허리에 손을 얹은 채 히히 웃으며 땅바닥의 소년을 훑었다.

“뇌운정가. 더 세게 좀 밟아요. 나 이 망할 새끼 얼굴에 오줌을 갈겨줄라니까.”

누군가가 말하면서 허리띠를 끌렀다.

“방기소! 저 지독한 놈!”

무리 속에서 작은 환호가 터져 나오더니 다들 그 뒤에 줄서며 허리띠를 끌렀다.

여귀진은 마음이 불편했지만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 여기는 그의 고향이 아니며 그는 그저 동궁에 머무는 일개 만족일 뿐이었다. 여귀진은 살그머니 되돌아가 문을 닫으려 했다. 그때 달빛이 구름을 뚫고 나오며 은빛 광채가 쏟아져 내렸다.

번개와도 같은 갑작스러운 달빛에 여귀진은 그 소년의 얼굴을, 부릅뜬 그의 두 눈을 똑똑히 보았다. 타인의 장화 아래에서도 힘껏 부릅뜬 까맣디까만 두 눈은 벼루처럼 짙었다. 여귀진은 불현듯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그는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제 얼굴을 가렸다. 달빛이 구름을 뚫고 나오던 순간 그 소년이 자신의 얼굴을 보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니 소년은 애당초 그 누구도, 어떤 무엇도 보고 있지 않았다. 독하게 눈을 부릅뜬 채 끝없이 먼 곳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한 시대의 불을 지피는 눈빛이었다. 그것은 곧 칼이자 검이고 창이었다. 부러질지언정 절대 굴하지도 후회하지도 않는 그런 눈빛이었다.

달빛은 눈 깜짝할 사이에 또다시 구름 사이로 숨어들었다.

“그만둬!”

여귀진이 소리쳤다. 스스로도 소리를 지르고는 화들짝 놀랐다.

“누구야?”

오싹해진 금군 소년들이 냉큼 물러났다. 그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목도를 단단히 움켜쥐고 나란히 서서 적을 방어하는 대형을 이루었다.

“그 만족이네.”

시력이 좋은 소년 하나가 중얼거리듯 말을 뱉었다.

소년들은 약간 난처한 듯 서로 눈짓만 주고받았다. 어쨌든 욱 세자와 함께 생활하는 귀빈이었기에 대놓고 기분을 상하게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별것도 아닌 만족 때문에 고생해서 잡은 사냥감을 놓아주자니 그것 역시 썩 내키지가 않았다. 한 무리의 소년들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고개를 돌려 목도를 끌어안은 채 담 모퉁이에 기대 있던 이를 쳐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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