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주표묘록-83화 (83/3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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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장. 검 (8)

“성인은 온갖 곤경에 처해도 속마음을 지키고 바꾸지 아니한다. 비난하지 않고 입장을 바꿔 헤아리며 득실을 두고 일희일비하지 않고 성패에 치우치지 않으니 이는 범인(凡人)에게는 불가능한 일이라. 무릇 천지는 넓고 도(道)와 지위는 하나이니 성인은 그 이치를 깨달아 성인이라 부르나니.”

로 선생의 다채롭고 음률미 넘치는 목소리가 서재 안에 낭랑하게 메아리쳤다.

동궁 서재에는 양쪽으로 각각 책상이 하나씩 놓여 있었다. 동쪽에는 하당의 어린 세자가, 서쪽에는 만족 세자가 앉아 있었다. 두 사람은 똑같은 무지 비단 장포를 입고 마주 보고 앉았다. 여귀진은 서툴게 붓을 쥐고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맞은편에서는 백리욱이 손에 뺨을 괴고 앉아 있었다. 그는 손가락으로 볼을 일정한 박자에 따라 톡톡 두드리면서 곁눈질로 여귀진을 살폈다.

“생과 사의 갈림길, 존립과 멸망의 순간에도 인생은 끝나지 아니하나니. 성인은 놀라지도 않고 두려워하지도 않으며 서두르지도 않고 느긋하지도 않노라. 가슴에는 저마다의 언덕이 있으며 넓은 길을 걷듯 깊은 못에 발을 디디고 설령 기름 솥이 앞에 있고 도검이 옆에 있어도 발길 닿는 대로 갈 뿐이니.”

“이봐! 야!”

여귀진이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백리욱이 두 손을 입에 모은 채 작은 목소리로 그를 부르고 있었다.

“이봐!”

백리욱이 자기 책상에 놓인 종이를 들고 흔들며 물었다.

“답 다 썼어?”

“나는…….”

잠시 망설이던 여귀진은 고개를 숙이고 자기 시험지를 보았다.

“무릇 스승은 성실히 수업하고 제자는 성실히 학문을 탐구해야 하지요.”

멀리서 들려오던 로 선생의 낭랑하고 힘찬 목소리가 고함으로 돌변했다.

“제가 언제 몰래 묻고 답해도 좋다 했습니까! 이제 그만 쓰십시오!”

소매 안을 더듬어 성목(醒木)1)을 꺼낸 로 선생은 교탁을 한 차례 세게 내리치고는 성큼성큼 두 제자 앞으로 다가와 시험지를 잡아채 갔다. 서슬이 시퍼런 눈빛이었다. 백리욱은 놀라 옷깃 안으로 머리를 쑥 집어넣고 두 눈만 껌뻑거리다가 로 선생이 돌아서자 재빨리 혀를 내밀고 익살맞은 표정을 지었다. 로 선생은 큰 걸음으로 자기 교탁에 돌아가 앉아 엄숙하게 시험지를 펼쳤다. 그는 입꼬리를 살짝 아래로 내리고 가느다란 수염 몇 가닥을 훑으며 첫 번째 시험지를 흘끗 보았다. 곤두섰던 표정이 약간 누그러졌다.

“그래도 열심히는 하셨군요. 특히 ‘남쪽을 배회하는 기러기, 천 리를 날아오면서도 반려를 버리지 않으니 그것이 믿음이라.’ 이 구절에서는 선현의 여운도 조금 느껴지네요. 욱 세자께서 그래도 요 며칠 공부를 열심히 하더니 국주의 기대를 저버리지는 않겠군요. 이 시험지는 우수한 편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로 선생은 다음 시험지를 펼쳤다. 시험지를 보자마자 수염이 급격히 떨리기 시작했다. 가늘게 뜨고 있던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그야말로 화가 폭발할 듯했다.

“이봐!”

백리욱이 울화통을 터뜨리기 전 무서운 모습의 로 선생을 보고 목소리를 낮춰 여귀진에게 소리쳤다.

“한 글자도 못 쓴 거 아니지?”

“이… 이것이…. 사람을 업신여겨도 분수가 있지요! 스승에 대한 존엄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군요?”

한참을 부들부들 떨던 로 선생이 마침내 고함을 내지르며 시험지를 있는 힘껏 내던졌다.

얇은 종이는 멀리 가지 못하고 공중에서 펼쳐져 흩날리듯 바닥에 떨어졌다. 백리욱은 호기심에 목을 빼고 보았다. 대체 무엇이 고루하고 예를 중시하는 선생을 저리도 화나게 만들었는지 궁금했다.

붓으로 듬성듬성 그린 그림이었다. 맨 처음에는 불규칙한 검은 점 몇 개인 듯했는데 그것들이 모여 멀리 있는 양 떼의 등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가까운 곳의 몇 획은 오르락내리락하는 초원의 지형 같았다. 종이의 한쪽 구석에는 기러기 떼가 석양이 지는 하늘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백리욱은 혀를 내둘렀다. 그야말로 붓 가는 대로 더덕더덕 먹칠을 한 것으로 보였다.

로 선생이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그는 표정을 가다듬고 전방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여귀진에게는 곁눈도 주지 않고 말했다.

“재능이 부족하고 학식이 얕은 소신이 국주의 부탁을 받아 세자 저하 두 분께 글을 가르치고 있으니 송구하기 짝이 없습니다. 여귀진 세자 저하께서 거듭 가르침을 듣지 않고 제멋대로 하시는 이유는 분명 북륙 금장궁의 영웅은 칼과 말에 무적이라 저 따위 고리타분한 유생이 눈에 차지 않아서이겠지요. 시골의 훈장도 자기의 역량을 깨닫고 물러날 때를 아는 법인데 소신은 그리하지 못했으니 세자를 뵐 면목이 없군요.”

로 선생은 자리에서 일어나 여귀진을 향해 너른 소매를 휙 내두르며 말했다.

“감당할 수 없는 자리이오니 소신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그는 뒤돌아 성큼성큼 동궁을 떠나갔다.

여귀진은 여전히 서툴게 붓을 쥐고서 멍하니 제 자리에 앉은 채 로 선생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백리욱은 깡충깡충 쫓아가 로 선생의 뒷모습이 회랑 끄트머리에서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았다.

“대단하다! 존경해! 너 진짜 간도 크다!”

껑충껑충 뛰어 돌아온 백리욱이 여귀진에게 엄지를 세워 보였다.

“저 늙다리 완전 성질머리가 똥통 안의 구린내 나는 돌멩이 같아서 나는 함부로 못하거든. 틀림없이 아버지께 일러바칠 거야.”

“나… 어떡하지?”

여귀진은 어찌할 바를 모르는 얼굴로 백리욱을 쳐다보았다.

“이미 저질러놓고 뭘 어떡해?”

백리욱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말을 이었다.

“무서웠으면 늙은이 성질을 돋우지 말았어야지.”

“이… 일부러 그런 게 아니야.”

여귀진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나 스승님 말을 하나도 못 알아듣겠어.”

“동륙 글자를 알잖아?”

“글자는 배웠지만 스승님이 말하는 것들은 정말 이해가 안 돼. 성인이니 이치니, 대도니 하나도 모르겠다고. 욱 세자, 대체 성인이 뭐야?”

“성인?”

백리욱은 순간 당황해 이마를 긁적였다.

“그건… 나도 명확하게 설명하기 어려워. 대충 말하면 옛날 옛적의 엄청 현명한 사람, 맨날 글을 쓰고 제자에게 글공부를 가르치는 사람, 되게 고지식한 그런 사람이야. 서원에서 등 꼿꼿하게 세우고 있는 그런 사람. 수백 년이 지나고 로 선생도 썩어서 뼈만 남으면 아마 성인의 호칭을 얻게 될걸?”

“아…….”

여귀진은 무언가 깨달은 듯했다.

“맞다. 있잖아.”

백리욱은 점점 만족 소년에 대한 두려움은 사라지고 조금씩 호기심이 생겨났다.

“너희 북륙의 명문가에서는 평소에 글을 안 써? 맨날 말을 타고 저기 가서 방목하고 또 여기 가서 방목하고 그러다 사이가 틀어지면 칼로 상대를 샥샥샥 베고 그래? 승자가 패자의 목을 베어서 술잔으로 만든다며? 패자의 여자도 빼앗고 말이야. 책에는 다 그렇게 나와 있었어. 근데 넌 만족 같지가 않아.”

한참을 묵묵히 생각에 잠겼던 여귀진이 입을 뗐다.

“사실 꼭 그렇지도 않아…….”

여귀진은 자신의 마음속 삭방원을 묘사할 적절한 단어를 찾을 수 없어 끝내 이렇게 말했다.

“그냥 넓은 초원이야.”

가볍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세 번 울렸다.

등불 아래의 여인은 깜짝 놀라 손에 들고 있던 물건을 소매 안에 집어넣고 나직하게 말했다.

“들어오세요.”

문이 열리고 방 안으로 들어온 이는 고개 숙인 소년이었다. 상아잠으로 상투를 틀어 올린 시커먼 앞머리만 보였다. 상아잠을 알아본 소첩여가 물었다.

“여귀진 세자 저하. 야심한 밤에 이곳에는 어쩐 일이십니까?”

“저…….”

여귀진이 우물쭈물 말을 꺼냈다.

“읽을 책을 몇 권 빌릴까 해서요.”

“책을요?”

여인은 냉담하게 고개를 저었다.

“여기에도 책이 좀 있지만 서고에는 책이 더 많습니다. 저하께서 원하시는 책은 거기 가시면 다 찾으실 수 있어요.”

여귀진은 잠시 망설이다 말을 꺼냈다.

“그럼…. 실례했어요.”

여귀진이 돌아서자 소 첩여가 그를 불러 세웠다.

“저하. 왜 오신 겁니까?”

“책 이름을 몰라서요.”

여귀진이 기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책을 몇 권 찾아서 보면 로 스승님이 가르친 것들이 이해가 될 거 같은데 무슨 책을 봐야 하는지 모르니 서고에 가도 찾을 수가 없어서…….”

소 첩여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로 선생께 혼나셨어요?”

“아뇨. 하지만… 다들 저보고 야만족이라고…….”

“로 선생께서 지금 무슨 책을 가르치십니까?”

“<정전발몽(政典發蒙)>요.”

“가르쳐서 깨우치게 한다는 뜻으로 발몽이라 이름 붙은 책이기는 하나 이미 매우 어려운 책입니다. 이해가 안 되는 것도 무리가 아니지요.”

소 첩여는 몸을 일으켜 벽 한 면을 뒤덮은 책꽂이에서 책 몇 권을 뽑았다.

“<정전발몽>의 삼가주본(三家注本)2)과 항연의 <고창구문록>입니다. 전자는 가장 완전한 주석본이고 후자는 나라를 다스리는 법을 담은 정전이라고는 하나 이야기로 되어 있어 재미있게 읽을 수 있습니다.”

여귀진은 순간 멍했다가 공손하게 책을 받았다. 그는 로 선생에게 배운 예법대로 머리 위로 높이 손을 올리고 뒷걸음질 쳐 물러났다.

“책읽기를 좋아하십니까?”

여인이 불쑥 물었다.

“네!”

여귀진은 책을 아래로 내리고 소 첩여를 바라보았다.

“북륙에는 책이 많지 않거든요. 책에는 평생을 가도 알 수 없는 많은 지식이 담겨 있는 것 같아요.”

“꼭 책을 많이 읽어야 하는 것은 아니지요. 책읽기로 얼마나 깨달을 수 있겠습니까?”

“소 첩여도 책읽기를 좋아하지 않나요?”

그녀는 잠시 생각한 뒤 대답했다.

“사실 사람도 한 권의 책과 같지요. 하지만 자기를 읽고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여귀진에게는 너무 심오한 말이었으나 자연스럽게 친밀감을 느낀 여귀진은 부친의 당부를 떠올리며 공손하게 장읍(長揖)3)을 올리고 물었다.

“소 첩여께서 가르쳐주실 것이 있는지요?”

소 첩여는 살며시 여귀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오래도록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웃으며 말을 꺼냈다.

“없습니다. 저하의 시녀가 머리를 잘 못 빗나 봅니다. 머리카락이 헝클어졌네요. 제가 다시 빗겨 드리겠습니다.”

소 첩여는 여귀진의 머리를 감기려고 목에 흰색 비단을 받쳤다. 머리를 감고 나자 머리숱이 많지 않아 보였다. 머리통도 약간 동글동글한 것이 더욱 아이 같았다. 여귀진은 얌전히 머리를 숙인 채 소 첩여가 머리를 만지도록 두었다. 창문에 놓인 자색 꽃 화분 두 개에 여귀진의 시선이 닿았다.

“소 첩여가 기르는 꽃은 처음 보는데 꽃 이름이 뭐예요?”

“자림추입니다. 벗이 선물해 주었지요.”

소 첩여는 입에 물고 있던 상아잠을 빼 여귀진의 상투를 단단히 틀어 올렸다.

“즐겁게 지내십시오. 타향에 있는 것은 저하만이 아니십니다.”

* * *

1) 말하는 이가 책상을 두드려 청중의 주의를 환기시키는 데 사용하는 작은 나무토막.

2) 세 가지 주석이 들어간 책.

3) 두 손을 마주 잡아 눈높이만큼 들고 허리를 굽히는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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