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주표묘록-80화 (80/360)

80

6장. 검 (5)

단풍빛의 붉은색 얇은 천이 소녀의 어깨를 한 바퀴 둘렀다. 투명한 피부색이 천 아래에서 남실거렸다. 소녀의 새하얀 신발이 대리석 지면 위에서 사뿐사뿐 뛰놀았고 어깨에 걸친 얇은 천은 나비의 날개처럼 나풀거렸다. 열서넛의 애티가 나는 아이였지만 약간 소녀다운 분위기를 띠기도 했다.

“좋아, 좋아. 유유아의 피부색은 가장 희고 깨끗하지. 이 붉은색이 유유아를 더욱 돋보이게 해줄 거야!”

유유아에게 얇은 천을 걸쳐준 소년이 손뼉을 치며 소녀의 주위를 빙빙 돌았다. 눈꼬리는 한껏 흡족한 기색을 띠고 있었다.

“아유. 욱 세자 저하. 궁에 딱 한 필 남은 운영사(雲影絲)예요. 며칠 전 국주께서 왕비마마의 덧옷을 지어 주시겠다며 아껴두신 건데 이렇게 함부로 두르고 이러시면 어쩝니까?”

나이 많은 하녀가 소년의 손을 잡아당기며 안타까운 눈으로 천을 바라보았다.

“잔소리 좀 집어치워.”

소년이 휙 고개를 돌렸다. 그는 불쾌해하며 하녀의 손을 뿌리쳤다.

“어머니 나이가 몇인데 이런 색 옷을 입어? 결국엔 함에 방치해 두실걸. 단념에게는 청색을 골라주었고 월정에게는 밝은 하늘색을 주었지. 소소에게는 살구색을 줬고 이슬빛 녹색은 월미를 줬어. 이제 붉은색 하나 남았는데 이거 아니면 다른 거라도 찾아다 줄 테야?”

노기를 띤 얼굴이었지만 윤기가 흐르는 백옥처럼 보기 드문 수려함이 어려 있었다.

하녀는 전전긍긍하며 물러났다. 소년은 웃으면서 유유아의 몸을 빙빙 돌리며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유유아를 에워싼 소녀들은 찬탄을 그치지 않았다. 재잘대는 소녀들의 목소리에 전각 밖의 발소리가 묻혔다.

“저도 이런 단풍빛깔 붉은색 천을 갖고 싶습니다. 저하께서는 맨날 유유아만 편애하세요.”

가장 어린 소소가 실망을 감추지 못한 채 입술을 쀼루퉁하게 내밀고선 소년의 옷소매를 잡아당겼다.

“소소. 삐치지 마라.”

소년은 얼른 나긋한 목소리로 소소를 달래며 내리깐 소녀의 눈썹을 살며시 어루만졌다.

“살구색 천이 운영사만은 못하다만 이 또한 매우 얇게 짠 좋은 천이란다. 네가 지금 입은 월백색 치마와 황옥 목걸이에 가장 잘 어울리지. 여기에 붉은 천을 걸친다면 도리어 꼴이 이상할 거야. 하지만 여기에…….”

소년은 소소를 한 바퀴 빙 둘러보더니 말을 이었다.

“금색을 몇 점 더하면 완벽하겠구나.”

소년은 황급히 상자에 머리를 파묻고 뒤적였다. 인영이 비치는 얇은 천과 아름다운 견사가 한 폭, 한 폭 내던져지며 온 바닥에 흐트러졌다. 하지만 금색은 나오지 않았다. 수놓은 비단 더미에서 목을 뺀 소년은 씩씩대며 목에 휘감긴 비단들을 잡아당겼다. 그리고 펄쩍 뛰며 소리를 질렀다.

“왜 금색이 없어! 왜 금색만 없는 건데?”

“저하. 성내지 마셔요. 소리 지르시면 목 상해요.”

하녀가 얼른 소년을 어르고 달랬다.

“저번에 저하께서 궁 안을 분홍색과 금색으로 꾸미겠다고 하시면서 분홍색 면지(綿紙) 수만 장을 주문해 벽에 바르고 금색 천이란 천은 전부 천장에 거셨잖아요.”

하녀가 손가락으로 머리 위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금색 천은 다 저기에 걸려 있는걸요.”

소년이 고개를 들자 역시나, 금사남목으로 된 서까래 사이사이가 얇은 금색 천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사다리 가져와! 사다리!”

소년은 신나서 손뼉을 쳤다.

소녀들이 우르르 달라붙어 사다리를 들고 왔다. 하녀는 말리고 싶었지만 차마 그러지 못했다. 그저 벌벌 떨면서 소년이 사다리 높이 올라가 서까래 사이의 천에 있는 힘껏 손을 뻗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키가 크지 않은 소년은 억지로 몸을 곧추 세우고서야 금색 천의 한쪽 귀퉁이를 낚아챌 수 있었다.

끼이익. 그때 갑자기 궁문이 열리고 사다리가 그대로 쓰러졌다. 소녀들과 하녀들은 놀라 소리를 질렀고 수십 척 길이의 눈부신 금색 천과 함께 소년은 온 바닥에 널브러진 비단 위로 쿵 떨어졌다.

“저하! 저하!”

“나 여기 있어! 여기!”

비단 속에서 금색 천을 뒤집어쓴 머리 하나가 툭 튀어나왔다. 심장이 철렁했던 하녀는 그제야 한숨을 돌렸다.

소년은 비틀거리며 달려들어 한 사람을 꼭 끌어안았다.

“잡았다! 잡았어! 소소지? 어서 걸쳐 봐.”

소년은 품안의 사람을 끌어안은 채 웃으며 깡충거렸다.

“음?”

소년은 어리둥절해져 안고 있는 사람의 몸을 더듬었다.

“누군데 이렇게 살집이 많아? 바닥 쓸던 하녀인가 보네. 눈치 없게 왜 이럴 때 끼고 난리야?”

소년은 힘껏 품안의 사람을 밀쳐내고는 후다닥 얼굴을 뒤덮은 금색 천을 잡아뗐다. 눈앞의 사람을 확인한 소년은 돌연 미간을 찌푸렸다.

“방 도위가 내 침궁까지 무슨 일이지?”

금군 도위 방산은 얼굴이 살짝 발그레해졌다. 그러나 모처럼 위엄 있게 손을 내두르며 시시덕대는 소녀들을 물렸다. 소년이 화를 내려 하자 방산이 재빨리 소년의 손을 붙잡았다.

“욱 세자 저하. 오늘은 중요한 일입니다. 멋대로 구시면 안 돼요.”

몸을 돌려 비켜선 방산이 문가를 가리켰다.

“국주의 어명으로 북륙 금장국의 여귀진 세자 저하께서 오늘부터 동궁에 머무시게 되었습니다. 거처는 귀홍관이며 백리욱 세자 저하와 식음을 같이할 것입니다. 또한 동륙 문자와 예절을 익혀 양국의 우의를 드높일 것입니다.”

방산은 문가의 소년에게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건넸다.

“이분이 우리 하당국의 백리욱 세자 저하이십니다. 앞으로 두 분 자주 왕래하며 친분을 쌓으셔야 합니다.”

방산은 흠칫 놀랐다. 곁에 있어야 할 소년이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던 것.

“욱 세자 저하?”

방산은 고개를 돌려 그를 찾았다. 백리욱은 방산의 뒤에 숨어서 그의 허리띠를 꽉 움켜쥐고 있었다.

“만족?”

백리욱이 조심스럽게 방산의 등 뒤에서 고개를 내밀고 물었다.

“만족이 어디 있어?”

“만족이라니요.”

방산이 목소리를 낮추었다.

“여귀진 세자이십니다. 장래 북륙의 왕이 되실 분이죠. 세자 저하께서도 예를 갖추어 대하시라고 국주께서 특별히 분부하셨습니다.”

백리욱은 마침내 무리 속에서 하얀 옷을 입은 소년을 발견했다. 소년은 용모가 매우 수려하고 백리욱 자신보다도 유약해 보였다. 그가 알던 만족과는 전혀 달랐다. 그러나 옷차림이 북륙 금장국에서 온 사람이라고 분명하게 말해주고 있었다. 소년은 긴 머리카락을 땋아서 하나로 묶고 머리 위에 잠(簪)을 꽂았다. 몸에 딱 붙는 여우 가죽 갑옷을 입고 겉에는 오색으로 가장자리를 장식한 하얀 장삼을 걸쳤으며 가슴 앞으로는 1척 길이의 작은 검을 차고 있었다. 무더운 여름인데도 오른쪽 손목에는 흰색 털가죽으로 만든 손목 보호대를 차고 있었다.

“쟤가 그 야만족이야?”

백리욱이 의아한 얼굴로 방산을 쳐다보았다.

만족 소년은 쭈뼛쭈뼛 주위 사람들을 둘러보고는 이내 고개를 숙였다.

“아이고! 세자 저하! 이러시면 안 됩니다!”

방산이 백리욱을 제지하려 했지만 한발 늦고 말았다. 백리욱은 월미라는 소녀의 머리에서 비단을 엮어 만든 모란을 떼어내 만족 소년의 머리를 향해 내던졌다. 비단뭉치는 정확히 소년의 옆얼굴에 맞았다. 미란궁이 돌연 고요해졌다. 소녀들도, 하녀들도, 금위군들도, 그리고 방산까지도 당황한 나머지 전부 어안이 벙벙해졌다. 백리욱만이 아랑곳하지 않고 연신 만족 소년을 향해 짓궂은 표정을 지었다. 모두의 예상과 달리 만족 소년은 바닥에 굴러다니는 비단 뭉치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자신의 얼굴을 슥슥 닦았다.

“얼빠진 거위 같네…….”

누군가가 나긋한 목소리로 작게 말했다. 그러자 누군가가 살며시 웃음을 터뜨렸고 이내 모두가 따라 웃기 시작했다. 만족에 대한 동륙인의 두려움이 돌연 사라졌다. 얼빠진 거위 같은 소년은 그들에게 어떤 위협도 되지 않았다.

방산은 이를 악물고 발버둥치는 백리욱을 억지로 만족 소년 앞에 끌고 갔다. 소녀와 하녀들은 주위를 에워싸고 구경했다.

“욱 세자 저하! 장난 그만 치시고 어서 여귀진 세자 저하와 인사를 나누십시오!”

백리욱은 목덜미를 붙들린 새끼 고양이처럼 방산의 손아귀에서 몸을 뒤틀더니 여귀진에게 다가가 들입다 코를 킁킁거렸다.

“누린내도 안 나네. 이런 만족이 다 있다니…….”

소녀들은 고개를 갸웃한 채 소년을 바라보면서 손뼉을 치고 웃어댔다. 하녀들은 언행을 주의하려 입을 반쯤 가리고 쑥덕댔다.

“이런 만족 아이는 처음 봐. 신선하네.”

“꼭 계집애 같이 생겼는데 어떻게 만족이래?”

“그러게. 나이는 열 살 남짓 됐겠지?”

“크면 민첩하고 용맹해질지도 모르지만 아직은 어린애네.”

“큭, 큭. 만족, 만족, 야만족, 야만족.”

돌연 괴이한 곡조가 울려 퍼졌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금사 선반 위에 있는 빨강 부리 구관조였다. 궁 안의 구관조는 혀가 잘 구부러져 새로운 단어를 생생하고 실감나게 따라했다. 모두가 일순 멍해졌으나 이내 장내는 웃음바다가 되었다. 웃음소리 속에서 만족 소년은 얼굴이 발개진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야만족?’

여귀진은 묵묵히 속으로 뇌까렸다.

문 밖의 빛이 날카로운 도검처럼 실내로 뚫고 들어왔다.

서배전.

사람들이 양쪽으로 마주 서 있었다. 한쪽은 여귀진을 데리고 온 방산, 다른 한쪽은 궁 안에서 시중을 드는 사람들이었다.

“여귀진 세자 저하.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동궁의 일을 담당하는 사람들입니다. 시키실 일이 있으시면 저들에게 물으시면 됩니다.”

방산이 여귀진의 손을 놓고 광대뼈가 툭 튀어나온, 잿빛 눈썹을 아래로 늘어뜨린 사내를 가리켰다.

“여기 로방동 선생은 우리 하당에서 박식하기로 유명한 분이시지요. 국주께서 욱 세자 저하의 학업을 지도해 주십사 초빙하셨습니다.”

“로 선생님.”

여귀진이 고개를 숙여 예를 올렸다.

“음!”

로방동은 만족이 이리 예를 갖출 줄 안다는 사실에 의아해하면서 몸을 살짝 숙여 답례를 올렸다.

“여귀진 세자 저하의 학업도 로 선생께 부탁드리겠습니다.”

방산이 로방동을 향해 장읍을 올렸다.

“이분은 동궁 수라간을 책임지는 마구동 주사(主事)입니다. 앞으로 드시고 싶은 게 있거나 바라는 게 있으시면 저이를 찾으시면 됩니다.”

나이 든 내감이 한 걸음 앞으로 나와 예를 올리고 물러났다.

“여기 이들은 서재 청소 담당입니다. 공부를 준비하는 일도 하지요.”

젊은 내감들이 눈을 데굴데굴 굴리면서 깍듯이 인사를 올렸다. 그들은 가까이 다가오면서 곁눈질로 여귀진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여기 궁녀 둘은 명문가의 여식으로 소소와 유유아라 합니다. 세자께서도 방금 전에 만나보셨지요? 이전까지는 욱 세자를 모셨습니다. 둘 다 학식과 교양을 갖춘 규수들이지요. 앞으로 세자 저하의 잡무는 이들에게 시키시면 됩니다.”

여귀진도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런데 문득 유유아의 눈꼬리에 맺힌 눈물이 보였다. 소소도 울적한 얼굴로 치마끈을 배배 꼬고 있었다. 아까 미란궁에서도 유유아는 울면서 백리욱의 손을 꼭 붙잡고 놓지 않으려 했다. 백리욱도 대성통곡하면서 방산에게 삿대질을 하며 호통을 치다가 백리경홍의 친필 조서를 보여주자 마지못해 두 소녀를 여귀진에게 보냈다. 그때 잠자코 한쪽에 서서 생이별을 하는 듯한 광경을 지켜보던 여귀진의 머릿속에 불쑥 소마가 떠올랐다. 마지막으로 수레 앞의 가로장에 올라 북쪽을 바라보았을 때 소마는 가장 높은 풀 비탈에 서 있었다. 소마는 울지 않았다. 그저 두 손을 맞잡은 채 먼 곳을 바라보았고 그녀의 붉은색 치마가 바람에 나부꼈더랬다. 방산이 소개를 이어갔다.

“이분은 동궁 녹서방 관리자 소 첩여입니다. 동궁에서 가장 고참이기도 하지요.”

방산이 손가락으로 그늘 속에 서 있는 한 사람을 가리켰다. 동궁의 정전 한쪽 면은 투각(透刻)으로 무늬를 새긴 나무창이라 볕이 아주 잘 들었는데 소 첩여가 서 있는 곳에만 약간의 그늘이 져 있었다. 소 첩여는 그곳에 가만히 서 있었다. 가까이 다가오지도 않고 멀리서 허리 숙여 인사를 했다. 방산이 가리켜 보여주지 않았다면 여귀진은 그곳에 사람이 있는 줄도 몰랐을 것이다.

“잠시 후에 동궁을 산책시켜 드리겠습니다. 국주께서 가을 옷을 하사하셨으니…….”

말을 하던 방산이 주위를 한 바퀴 둘러보았다. 남자 아니면 안색이 좋지 않은 소녀 둘뿐이었다. 결국 그는 그늘 속의 여인을 향해 몸을 살짝 숙이더니 말을 이었다.

“소 첩여께 세자의 의관을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그러지요.”

여인은 담담하게 대답하고는 천천히 그늘 속에서 걸어 나왔다.

소 첩여가 햇빛 속에 온몸을 드러냈을 때 여귀진은 놀라 멍해졌다. 순간 숨을 쉬는 것마저도 잊어버렸다. 얼굴에 티를 내지는 않았지만 아까 백리욱을 둘러싸고 있던 소녀들을 보고서도 이미 감탄을 금치 못했더랬다. 북륙을 통틀어서도 그처럼 맑고 아리따운 소녀들은 찾기 힘들었다. 흰색 생명주(生明紬)처럼 조금도 때 묻지 않은 소녀들이었다. 소마가 그들 못지않다고 해도 여리하고 고운 느낌은 부족했다. 그런데 이 여인이 걸어 나오자 대전 안의 모든 것이 색을 잃었다. 유유아와 소소의 깨끗함도 그저 허연 교백1) 같은 것이 화려한 색상의 치마도 광채를 더해 주지는 못했다. 순간 모든 색이 소 첩여의 몸으로 빨려 들어간 것 같았다. 산뜻하고 다채로우며 유달리 이목을 끄는 여인이었다. 소 첩여는 궁중 치마를 입고 머리를 높이 틀어 올렸다. 눈부신 아름다움 속에 엄숙한 정취가 묻어났다. 두 팔은 무늬 없는 명주로 감쌌고 알알이 꿰어진 수정 팔찌가 손목에서 댕그랑 소리를 냈다.

조용히 선 소 첩여의 모습에서는 궁녀를 정밀하게 그려낸 옛 그림처럼 고색창연한 화려함이 묻어났다.

“저하. 저를 따라오시지요.”

여인이 여귀진의 손을 잡았다. 소 첩여의 손은 살짝 차가웠고 목소리는 나긋했다. 여귀진은 저도 모르게 그녀를 따라 궁전을 나갔다.

* * *

1) 깜부깃병에 걸려 비대해진 줄의 어린 줄기를 가리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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