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주표묘록-79화 (79/3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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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장. 검 (4)

마침내 조용해졌다. 한 점 불꽃이 바르르 떨리더니 다시 환하게 타올랐다.

우두머리는 출혈로 인한 현기증을 꾹 참으며 고개를 들었다. 멀찍이 문가에 선 여인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부싯깃을 들고 있었다. 그녀는 더 이상 웃지 않았다. 그렇다고 목적을 달성해 기뻐하는 표정도 아니었다. 무심한 여인의 얼굴은 아름다운 가면 같았다.

미미한 불꽃에도 우두머리는 똑똑히 확인할 수 있었다. 작은 실내에는 은색 선이 잔뜩 설치되어 있었다. 그물처럼 빽빽하게 설치된 선은 그들과 여인을 완전히 떼어놓았다. 그 선은 눈으로 식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가늘면서도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질겼다. 흡사 은색 광선이 교차한 듯했다. 주위에 널려 있는 금속 고리를 통과한 선들의 끝부분은 여인의 손가락에 끼워진 비취반지에 묶여 있었다.

“천… 천라의 거미줄! 대체 정체가 무엇이냐?”

우두머리는 마지막 남은 힘을 다 끌어 모아 소리쳤다.

“그래. 거미줄이다. 너희 무사들은 늘 힘으로만 이기려들지. 하지만 사람을 죽이는 데 그런 큰 힘을 들일 필요는 없어. 1촌의 칼날이면 충분하다.”

“천라의 자객이냐? 대체 왜 이러는 거지? 설마 천라에서도…….”

여인이 고개를 저었다.

“천라의 자객이었던 건 옛날 일이다. 천라를 위해 사람을 죽이지 않은 지 오래되었지. 내가 너희를 죽이는 건 내 낭군의 물건을 노렸기 때문이다.”

“낭군…. 네 부군이 누구이기에?”

“내 낭군? 아까 내 낭군의 반지를 보지 않았나?”

“네… 네가 유장길의…….”

“아까 네 아버지가 어리석다고 했는데 왜 그리 하셨는지 생각해본 적은 있느냐? 어떤 것들은 오랜 세월이 지났다 해도 모독해서는 안 되는 법이다.”

천천히 다가온 여인은 시신 하나를 사이에 두고 우두머리를 마주했다.

“살… 살려줘…….”

“이제 와서 후회라니. 너무 늦지 않았나?”

머리카락을 털 듯 여인은 가볍게 손을 휘둘렀다. 비취반지에 묶여 있던 수많은 은사 가닥이 순식간에 팽팽하게 조여졌다. 흡사 보이지 않는 날카로운 칼날 수백수천 개가 우두머리의 몸을 긋고 지나가는 것 같았다. 우두머리의 몸은 삽시간에 산산이 쪼개지며 거대한 피보라를 일으켰다.

주점 밖으로는 바람이 불고 있었다. 소나무 숲에서는 망망대해의 파도 소리 같은 솔바람 소리가 들려왔다.

태양빛이 작렬하는 오후.

식연은 실눈을 뜬 채 폐허를 훑어보았다. 나무로 된 집은 전부 잿더미로 변해 있었다. 유일하게 반 토막 난 대들보만 요행히도 살아남아 비스듬히 흙벽돌이 쌓여 만들어진 ‘人’자형 담장 한쪽에 기대져 있었다. 바싹 탄 냄새에 오심이 치미는 누케한 냄새가 섞여 있었다. 담장 한쪽으로 다가갔다. 하얀 수건으로 얼굴을 가린 검시관 몇 명이 새카맣게 타들어간 시체를 둘러싸고 있었다. 계급이 낮은 정위군 하나가 전전긍긍하며 쟁반을 받쳐 들고 다가갔지만 말할 엄두를 내지 못한 채 고개만 푹 숙이고 한쪽에 서 있었다. 그는 평범한 방화 사건에 어째서 금위군 통령까지 나선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멀찍이 에워싸고 선 채 목을 길게 빼고 구경하는 사람들도 실은 하당 제1명장의 풍채를 구경하러 온 것이었다.

식원이 쟁반을 받아 숙부에게 건넸다. 쟁반 위의 새카만 철패(鐵牌)를 집어 든 식연은 손바닥에 놓고 손대중해 보더니 식원에게 다시 건네 주었다. 식원은 그것을 받아들고 자세히 살펴보았다. 철패의 재질은 무쇠였다. 두드려보니 낮고 두터운 소리가 났으며 표면에는 가닥가닥 얼음무늬가 나 있었다. 팻말의 정면은 무시무시한 송곳니가 툭 튀어나온 호랑이 얼굴에 뒷면은 구름무늬 바탕에 한 줄의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이 명을 받드는 자, 호랑이처럼 빠르게 스쳐가리.

중구, 31위, 775.

“풍호 철기군의 철첩(鐵牒)이다. 순국의 어린철(魚鱗鐵)만이 이런 재질을 띠지. 순국 풍호 철기병이 자랑스러워하는 풍호 철갑도 이런 철로 만든 것이다.”

식연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당당한 기도위가 죽을 만한 곳은 아니로구나.”

“기도위요?”

식원은 심장이 철렁했다.

대윤의 군 제도에 따르면 기도위의 신분은 일반 도위보다 위였다. 군 계급이 결코 낮지 않으며 휘하에 최소 수백 명을 거느렸다. 기도위 우두머리는 장군이라 존칭했다. 이러한 순국 군관이 뜬금없이 하당에서 죽었다. 하당국에든 순국에든 곤란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철첩 뒤의 글자를 봐라. ‘중구, 31위, 775.’ 중구는 이자의 계급, 즉 기도위지. 순국 풍호는 30개 위소(衛所)로 나뉘며 각각 1천 병사를 둔다. 이자는 31위소 소속이며 군번은 775다. 하지만 본래 풍호군에는 31위소가 없다. 31위소는 사실 풍호 철기군의 비밀 척후 부대지. 소속 병사들은 모두 최정예 기병 중에서 선발한다. 이자는 척후 중에서도 계급이 낮지 않은 자다.”

식연이 정위군을 향해 손을 내두르며 말했다.

“너희는 먼저 물러가라.”

정위군이 모두 물러가고 식원이 숙부의 귓가에 대고 말했다.

“이자들이 저희가 놓친 그 풍호군인가요?”

“그렇다.”

“국주께 아뢰어야 할까요?”

“반드시 보고해야 한다.”

식연이 고개를 내저었다.

정위군 병사는 금군 무전도지휘사의 직책 중 한 가지가 바로 삼군의 척후를 맡아 각 제후국의 정보를 수집하고 다른 제후국이 보낸 밀정을 경계하는 일임을 알지 못했다. 식연이 없을 때는 이런 일들을 모두 식원이 처리했다. 두 달 전, 식원은 이미 정체불명의 세 무리가 신분을 숨기고 남회성에 들어왔다는 밀고를 받았다. 이들이 순국 풍호 철기군의 척후병임을 알게 된 하당에서도 척후병을 붙여 줄곧 이들 뒤를 몰래 쫓았다. 그러나 그저께 상대의 행적을 놓치고 말았다. 그리고 고작 하루 만에 이들이 뜬금없이 성 밖 주점의 화재 현장에서 죽은 채 발견된 것이다.

“풍호 척후병이 성 내에 잠입했다라…….”

식원은 곰곰이 그들의 의도를 헤아려보았다.

“순국이 우리에게 말 못 할 저의를 품은 걸까요?”

식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오태천이 지난 3월 막 전사했고 현재 순국공 오지윤은 겨우 열넷이다. 지금 순국은 하당을 상대로 절대 군사를 일으키지 못해. 더구나 누가 뭐래도 지금 최대의 적은 리국공이 아니냐.”

“다들 명창현후가 야심가라고 하던데요.”

“맞다. 하지만 어쨌든 양추송은 순국공이 아니니 풍호 철기군을 동원할 수 없어. 추호 화엽이 그리 쉽게 풍호 군권을 내주지는 않을 터이니 10년 내에 순국은 하당에 큰 위협이 되지 못할 것이다.”

식연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말을 이었다.

“내가 진정 우려하는 바는 양추송이 왜 위험을 무릅쓰고 척후를 보냈는가 하는 점이다. 하당의 노여움을 살 각오를 할 만큼 막대한 이익을 얻을 수 있는 일이 아니라면 신중한 성격의 양추송이 나섰을 리 없어.”

“장군…….”

식연이 돌아보자 아까 그 정위군이 한쪽에 서 있었다.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정위군 병사가 떠듬떠듬 말했다.

“행여 장군께서 역해하실까 봐 감히 꺼내지 못했습니다.”

“괜찮다. 꺼내 봐라.”

식연이 설렁설렁 담뱃대를 흔들며 말했다.

“네.”

정위군은 그제야 아래쪽에 두었던 쟁반 하나를 올렸다.

쟁반에 놓인 물건은 두꺼운 삼베에 가려져 있었다. 코를 찌르는 악취에 식원은 황급히 코를 틀어막았다. 정위군이 뭘 올린 것인지 알 것 같았다. 식연은 무표정한 얼굴로 한 걸음 나아가 삼베를 젖혔다. 쟁반 위에는 절단된 사체 일부가 놓여 있었다. 겉은 새까맣게 탔지만 잘린 단면에 벌건 색이 스며 나와 있었다.

“뭐지?”

“손입니다.”

정위군은 식연이 별다른 거부감을 보이지 않자 한숨을 내쉬며 사체를 가리켰다.

“장군. 보십시오. 원래 여기는 손가락이 있던 자리입니다. 네 손가락은 모두 불에 탔고 엄지만 남았습니다.”

식연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 말을 듣고 보니 손 같구나.”

식원은 누케한 냄새를 견디지 못하고 물었다.

“죽은 자의 손은 왜 가져왔지?”

“조급해 마라.”

식연이 조카를 제지하며 말을 이었다.

“일단 얘기부터 들어보자. 전쟁터에서야 정위군은 네 적수가 되지 못하겠지만 범인을 잡고 사건을 해결하는 수완에서는 네 평생 이 늙은 여우들을 당해내지 못할 것이다.”

정위군은 허리 숙여 예를 올렸다.

“이 손은 맹렬한 불길에도 다섯 손가락 중에서 네 손가락만 떨어져 나갔습니다. 그렇다면 이 손은 어떻게 불에 떨어져 나간 걸까요? 사람의 팔은 손가락에 비해 훨씬 두꺼운데 말이죠.”

그는 쟁반을 돌려 절단된 사지의 다른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가 잘린 단면입니다. 비록 불에 탔지만 그래도 너무 가지런해 보입니다. 추측건대 이 척후들은 불에 타 죽은 것이 아니라 불이 나기 전에 살해된 것 같습니다.”

“당연하다.”

식연이 웃으며 말했다.

“척후병 한 부대가 영문도 모른 채 남회성 밖에서 불타 죽었다. 눈먼 자라도 뭔가 잘못되었음을 알 수 있지. 하지만 대체 누가 이들을 죽이고 불을 냈을까. 단서는 없느냐?”

“장군 말씀이 맞습니다! 맞아요!”

정위군이 고개를 끄덕이며 허리를 굽혔다. 그러고는 몸을 돌려 검시관들을 불렀다.

검시관 우두머리는 의관을 정돈하고 종종걸음으로 식연을 알현하러 왔다. 이번에 그가 올린 쟁반은 아까 정위군이 올린 것보다 몇 배는 더 컸으며 훨씬 농도 짙은 악취가 코를 찔렀다. 식원은 하마터면 토할 뻔했다. 검시관이 삼베를 젖히자 웃고 있는 둥글둥글한 얼굴이 나왔다.

“냄새가 역하지도 않습니까?”

식원이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 말했다.

“향초(香草)가 있는 방에 오래 앉아 있으면 그 향기를 맡지 못하듯 어물전에도 오래 머물면 그 냄새가 비린 줄 모르지요.”

검시관은 으쓱하며 말했다.

“소신의 가문은 9대가 검시관이었습니다. 이 능력 또한 선조의 유산으로 향기와 악취를 가리지 않은 지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누군가가 전부 조각낸 것 같군.”

식연이 침음했다.

검시관은 미소를 거두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렇습니다. 모아진 시신은 총 10구이나, 잘린 사지는 총 32조각입니다. 이들은 불에 타기 전에 분명 누군가의 극도로 예리한 칼에 손발이 베어진 게 분명합니다. 그리고 한 구는 갈가리 찢어져 거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습니다. 범인은 칼솜씨가 매우 뛰어나며 머리털이 쭈뼛 솟구칠 만큼 심성이 잔인하기 그지없습니다.

“극도로… 예리하고 빠른 칼이라? 그리 말하는 이유가 있는가?”

“동이 틀 무렵 내린 보슬비에 불길이 꺼지는 바람에 시체가 다 타지 않았습니다. 그 덕분에 깨끗한 단면을 볼 수 있었지요. 그러나 20년 넘는 검시 경험에도 어떤 칼이 사람 몸을 이렇게 자를 수 있는지 알아낼 수가 없었습니다. 잘린 단면이 몹시 매끈하고 근육과 뼈가 동시에 잘려 나갔으며 살가죽도 말리지 않았지요. 뜨거운 칼로 초를 베어낸 것처럼요.”

“뜨거운 칼로 초를 벤 것처럼?”

식연은 흠칫 놀랐다.

“네. 장군. 인체의 힘줄은 질기고 뼈도 매우 단단합니다. 백정이 고기를 자를 때도 힘줄은 쇠뿔로 만든 가는 칼을 사용하고 뼈를 칠 때는 칼등이 넓고 날이 두터운 칼을 사용하지요. 절대 일반인의 솜씨로는 단칼에 사지를 자를 수 없습니다. 더구나 단면이 매끈하니 분명 칼 힘을 한데 응집해 매우 빠른 속도로 칼을 썼을 것입니다. 그리고 범인이 사용한 칼은 극히 얇은 칼입니다. 일반 칼은 칼등이 살짝 두꺼워 베는 힘이 이런 식으로 응집될 수가 없지요…….”

검시관이 겸연쩍어하며 말을 멈추었다. 식연은 어느새 소리 없이 자리를 떠나 폐허를 천천히 거닐며 부러진 들보와 기왓장 잔해를 눈으로 훑어보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타다 만 서까래 가에 멈춰 선 그는 쭈그리고 앉아 잿더미를 불어 보았다. 그러자 육안으로는 분별하기 어려운 흑철로 된 작은 고리 하나가 나타났다. 고리는 서까래 안에 단단히 박혀 있었다. 식연의 손힘으로도 얼마간의 공을 들여서야 뽑아낼 수 있었다. 식연은 눈을 가늘게 뜬 채 무표정한 얼굴로 그 쇠고리를 햇빛에 대고 살펴보았다.

“그게 뭡니까?”

식원이 다가와 물었다.

“그 무기의 일부분이다. 검시관의 말이 맞구나. 하지만 칼로 사람을 죽였다면 상처 부위가 말리지 않기 어렵지. 세상에 칼 몸은 없고 칼날만 있는 무기가 정말로 있구나.”

“칼 몸이 없다고요?

식연은 식원을 향해 손을 내두르고는 돌아 서서 정위군과 검시관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이것들은 문서에 기록하지 말게. 사람을 시켜 주위를 꼼꼼하게 청소하고 이런 쇠고리가 보이면 모아서 내 쪽으로 보내도록 해. 시신은 되도록 빨리 태우고 그 어떤 흔적도 남기지 말게.”

식연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정위군은 저도 모르게 부르르 몸서리가 쳐졌다. 주시하는 식연의 눈빛에서 느껴지는 은근한 위세가 그를 압박해 왔다. 고요한 게 마치 커다란 산이 짓누르는 듯했다.

“네!”

그는 고개를 숙이고 식연의 시선을 피했다.

“식원. 우리는 가자.”

식연은 자신의 흑마, 묵설을 잡아끌었다.

정위군이 따라오지 않는 것을 흘끔 확인한 식원이 제 숙부의 귓가에 다가가 말했다.

“숙부.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요?”

식연은 깊게 숨을 들이쉬며 말했다.

“더는 묻지 마라. 가서 내 명을 전해라. 당장 사람을 더 파견해 나머지 두 무리의 풍호 척후병을 뒤쫓고 어떤 움직임이든 보는 즉시 보고하라 해!”

“네!”

식원이 말머리를 돌려 떠나려는 그때였다.

“잠깐!”

식연은 나직한 목소리로 조카를 불러세웠다.

“귀복영을 파견해라. 가장 민첩하고 칼솜씨가 가장 뛰어난 이들로 최대한 많이 보내도록 해. 풍호 철기군에 들킬 걱정은 말고 반드시 그들을 잘 주시하고 보호해야 한다.”

“보호요?”

식원은 깜짝 놀랐다.

“누가 움직였는지 알았다. 거미의 그물이 이미 펼쳐졌구나. 그 여인이 사냥감 전부를 죽이려 한다면 귀복영 전체가 출동한다 하더라도 살리지 못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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