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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장. 검 (2)
같은 시각, 성 외곽의 양천 주점. 음력 그믐날.
어둑한 등잔불에 어렴풋한 인영이 판자벽에 비쳤다.
판자벽은 등불 연기에 그을려 시커멨고 손가락으로 쑥 찌르면 그대로 뚫릴 만큼 얇디얇았다. 탁자 위에는 두꺼운 기름때가 한 겹 끼어 있었다. 손으로 만져보니 끈적거렸다. 대나무 덮개가 씌어 있는 동유(桐油) 등롱 하나가 허공에 매달려 있었다.
판자벽 밖에서 바람소리가 들려왔다. 바람은 나뭇가지 사이를 스치고 지나가며 은근하게 윙윙댔다. 문틈으로 가닥가닥 스며드는 바람에 등불이 깜빡이며 불안하게 흔들렸다.
이곳은 남회성 가의 작은 주점이었다. 근처는 부유한 상인인 저씨의 채벌장으로 한눈에 끝이 다 보이지 않는 소나무와 삼나무 숲이 펼쳐져 있었다. 매일 벌목한 일꾼들이 오솔길을 지나 성으로 돌아가는 까닭에 이런 누추한 주점이 생겼다. 깊은 밤, 주점 안에는 마지막 손님 한 상만 남았는데 그 누구도 먼저 입을 떼지 않았다. 분위기가 간담이 서늘할 정도로 고요했다.
“돈은 문제가 안 되오. 우리는 그 검의 행방을 원할 뿐이오.”
긴 탁자 한쪽에 앉은 우두머리가 먼저 침묵을 깼다. 그는 무거운 상자를 다른 한쪽으로 밀었다. 상자 뚜껑이 열렸다. 그 안에 빽빽이 들어찬 것은 순금 덩어리였다. 금덩어리 위에는 안엽의 낙인이 찍혀 있었다. 완주 상회 강씨가 주조한 금덩이로 황성에서 주조한 화폐보다 더 품질이 좋다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황가의 금고를 가득 채운 것도 대윤의 금수가 아니라 이처럼 순도가 높은 금덩이였다.
황금의 반사광이 언뜻 맞은편 여인의 눈을 스친 듯 그녀는 살며시 웃으며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손으로 눈을 가렸다. 손가락에 끼워진 비취 한 점이 등불 아래에서 화려한 진청록 빛을 띠었다.
누추한 주점에 이런 여인이라니 의아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옅은 등불 빛이 대나무 덮개에 갈라져 그녀의 드러난 피부에 비쳤다. 비할 데 없이 아름답고 화려한 색채의 오래된 그림이 떠오르는 풍경이었다. 여인은 옅은 자색 치마를 입었는데 정교하고 호화로웠으며 드러난 두 어깨와 팔의 피부색은 눈부시게 하얬다. 한데 겹쳐 건 네댓 개의 파란 팔찌에서 딸그랑 소리가 울렸다.
“검의 행방을 알아내는 데 이리 높은 값을 지불하시려고요? 정말 후회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여자가 입을 다문 채 픽 웃었다. 통통한 입술 위로 화장이 지워지지 않고 남아 있었다. 새빨간 연지에 금가루를 섞은 호화로운 색이었다.
“그것까진 알 것 없소.”
맞은편의 우두머리가 미간을 구기며 매서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대는 아는 것이나 말하면 되오. 밖에 마차가 한 대 있으니 오늘밤 그대가 이 금덩이를 갖고 남회에서 떠나게 해주겠소. 오늘 이후로 남회에서의 일은 그대와 아무 상관이 없는 거요.”
탁자 한쪽에는 여인이 홀로 앉아 있었고 반대편에는 군장을 한 무사들이 질서정연하게 앉아 있었다. 그들은 금테를 두른 소가죽 갑옷을 걸치고 있었는데 세공이 매우 정밀했다. 허리춤에는 장도를 차고 암홍색 외투를 둘렀으며 옷깃을 높이 세워 얼굴을 반쯤 가렸다. 그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홀쭉하게 야위었고 피부는 짙은 갈색이었다. 따스한 등불이 그들의 눈을 비추자 눈빛은 불현듯 냉혹하게 변했다. 모두 20대의 건장한 사내였지만 반쯤 드러내다시피 한 여인의 가슴에 눈길을 주는 이는 하나도 없었다. 그들은 사냥감을 노리는 뱀처럼 끊임없이 주위를 순시했다.
역시나 이런 작은 주점에 나타날 법한 이들은 아니었다.
“조급해하지 마세요. 알았다고 했잖습니까.”
여인은 아쉬운 듯 금덩이를 잠시 어루만지더니 말을 이었다.
“이만한 가치가 있을지 없을지 한번 보십시오. 근데… 여러분도 말씀은 해주셔야지요. 저는 아직 여러분의 정체를 모르지 않습니까. 이 정보를 팔고 제가 남회성을 떠난다고 하더라도 국주에게서 정말 달아날 수 있다는 보장도 없지요. 의지할 곳 없는 여인의 몸으로 이 나라 고관에게 미움을 샀다가 정위부에서 수배령을 내리면 어쩝니까? 하늘 끝까지 도망친다고 한들 다시 붙잡혀 오지 않는다고 누가 보장할 수 있겠어요? 설마 이 황금을 무덤에 가져가라고 주신 것은 아니겠지요?”
“검의 행방을 말하면 그대의 안전은 보장해줄 것이오. 우리도 백리 국주가 그대를 천리 밖에서 도로 잡아오는 것은 원하지 않소. 난들 그대가 백리 국주에게 우리를 팔아넘기지 않을 거라고 믿을 수 있겠소?”
우두머리가 차갑게 조소했다.
“하하하하하…….”
여인도 덩달아 웃음을 터뜨렸다.
“번거롭게 그리할 것 뭐 있습니까? 입을 막아버리면 그만인 것을요!”
여인이 돌연 미소를 거두었다.
우두머리의 얼굴에서도 삽시간에 웃음기가 가셨다. 그가 눈을 부라렸다. 기회를 엿보던 뱀의 눈빛은 흉악한 독니로 변해 여인의 아리따운 두 눈동자를 노려보았다.
“애제 8년 겨울, 유장길은 란주에서 남하해 묵리군을 경유하고 비운포를 지나 상양관의 봉쇄를 뚫고 완주에 왔지요. 황성에서 정위군 327명이 명을 받들고 그를 죽이러 왔으나 유장길은 혈혈단신이었죠. 궁내의 서찰을 정리하다가 천계에서 온 밀서를 한 통 보았습니다. 서명은 없었고 백리 국주에게 유장길을 잡아 죽이도록 도와 달라는 내용이었지요. 왜냐하면 유장길은 지금까지 알려진 천구 무사의 마지막 우두머리였으니까요. 천구 무사들은 그를 대종주라 불렀지요.”
여인은 맞은편 사내의 음산한 눈빛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긴 머리칼을 만지작거리며 돌연 이야기를 시작했다. 거리에서 이야기꾼이 떠들어대는 그런 이야기 같았다. 하지만 이야기가 시작되자마자 모든 무사가 숨을 죽였고 우두머리는 새카만 눈썹을 치켜떴다.
“유장길의 행첩은 진북국에서 발급한 것으로 행첩상 그의 이름은 사풍이었습니다. 성문 밖의 행서(行署)에도 그의 출입 기록이 있었습니다. 그날은 12월 9일로 그가 휴대한 물품 중 장도 한 자루와 중검 한 자루까지 모두 행첩에 기록되어 있었지요. 그러나 사흘 후 황성 정위군이 남회에 들어왔고, 당일 밤 자량가의 명룡 역관에서 잔혹한 살인이 일어났습니다. 나중에 총 30여 명의 시신을 거두었지만 그 안에 유장길은 없었습니다. 사실 사체는 모두 황성의 정위군이었으나 황성의 관료들은 이를 언급하지 않았고 하당의 국주도 더 추궁하지 않았습니다. 이 일은 그렇게 묻혔고 이후 어떤 기록에도 남지 않았지요.”
“기록이 없다?”
우두머리가 끼어들었다.
“행서에는 성을 나간 기록이 없습니다. 유장길이든, 사풍이든 남회성 안에서 사라진 것이지요. 아무도 그가 어디로 갔는지 모릅니다. 행방을 궁금해하시는 검도 그와 함께 사라졌고요.”
“사라져?”
“네. 그렇게 사라져 버렸습니다. 희한할 일도 아니지요. 여기는 남회성이 아닙니까. 널린 게 사람이니 하나쯤 없어져도 알아채는 이가 없지요.”
여인은 큭큭 가볍게 웃었다. 머리카락 사이에서 구슬을 머금은 봉황 장식의 비녀가 가볍게 흔들렸다. 꽃 한 송이가 나뭇가지 끝에서 살며시 떨리는 것 같았다. 여인은 웃고 싶으면 그냥 웃었다. 맞은편 탁자에 앉은 사람을 전혀 개의치 않았다. 주변은 그녀 홀로 연기하는 무대이고 여인은 홀로 웃다가 울다가 하는 전통극 배우 같았다. 우두머리는 속으로 흠칫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여인의 웃음에서 희미한 슬픔이 느껴졌다. 우두머리는 마음속 불안을 억누르고 더욱 강한 어조로 말했다.
“그리고? 검의 행방을 안다 하지 않았소!”
“검요? 유장길이 가지고 있던 그 중검 말입니까?”
여인은 여전히 입을 가린 채 키득거렸다.
“자환궁 무기고에도 가보았는데 그 안의 검은 적게 잡아도 천 자루는 되겠더이다. 모두 명검이고요. 원하시는 검이 어떤 모양인지요? 저는 일개 여관(女官)이라 검을 다룰 줄 모릅니다. 제가 뭐든 다 알 거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청동색 중검이오. 아주 길고 무겁지. 적어도 길이는 4척 5촌에 무게가 30근은 나갈 거요. 검 위에는 구름 조각 같은 무늬가 있지. 절대 비슷한 검은 없소. 그대도 보면 바로 알아볼 거요.”
“오. 그 검 말씀이시군요. 말씀하시니까 생각이 납니다. 맞아요. 본 적 있습니다.”
“정말이오? 어디에서 보았소?”
우두머리의 눈이 희색을 감추지 못하고 반짝였다.
여인은 살포시 자신의 치마끈을 비비 꼬며 기다란 속눈썹을 깜빡이더니 우두머리를 흘겨보았다.
“제가 이렇게까지 말씀드렸는데도 여러분께서는 정체를 밝히지 않는군요.”
“그건 그대가 알 필요 없는 문제요!”
“흥. 완주의 여인을 너무 쉽게 보셨습니다.”
여인은 멸시하듯 웃었다.
“신분을 감출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마십시오! 당신네들이 자랑스러워하는 철갑옷을 입지 않고 일부러 가죽 갑옷을 입었지요. 손에 익지도 않은 곧은 칼날의 칼을 들고 말도 내력을 알 수 없도록 야북의 수레를 끄는 말로 바꾸었지요. 그러나 풍호 철기병 여러분께서 한 가지 잊으신 게 있습니다…….”
짧은 적막이 흐르고 방안에는 돌연 금속의 낮은 울림이 가득 찼다. 조용히 앉아 있던 무사들은 동시에 탁자를 밀고 2척 뒤로 물러나며 일제히 허리춤의 칼을 뽑아들었다. 반짝이는 칼날에 눈이 부셨다.
“하하하하, 하하하하…….”
여인이 또다시 웃기 시작했다. 여인은 가볍게 손뼉까지 치면서 소리 내어 웃었다. 무사들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로.
등잔불이 들어간 대나무 등롱이 여인의 머리 위에서 유유히 돌았다. 실내 밝기가 기괴하고 오묘하게 달라졌다. 무사들은 칼을 손에 쥐었지만 베지 못했다. 살벌한 전쟁터를 오래도록 경험한 용맹한 장수들이었지만 완주라는 낯선 지방에서 조금 실성한 듯하면서도 꽃처럼 아름다운 여인을 마주하고 있자니 꿈을 꾸는 기분이었다. 공기 중에 감도는 기이한 기운에 주위의 모든 것이 가물가물 비현실적으로 보였다.
여자가 웃음을 거두었다.
“여러분이 풍호 철기병의 도위들이라는 것을 몰랐다면 저도 감히 정보를 팔 생각을 못했겠지요. 천구의 마지막 대종주에 관한 정보인데 그 값어치가 황금으로 얼마나 될까요? 여러분께서 저보다 더 잘 아시겠지요. 여인인 제가 들고 갈 수 있을 정도의 황금이라니 천구의 비밀을 교환하기에는 턱없이 싼 값은 아닌지요?”
“얼마를 원하시오?”
우두머리가 나직하게 물었다.
“저는 비호를 원합니다. 여러분께서 그 검을 찾아 순국으로 돌아가면 분명 상을 받으시겠지요. 저는 이런 것들에 욕심 없습니다. 그저 그때가 되었을 때 이 황금 상자를 제게 주시고 순국으로 데려가 남은 생을 잘 보낼 수 있게만 해주시면 됩니다. 명창현후의 커다란 그늘도 없이 이 드넓은 동륙에서 하당 국주 백리경홍의 미움을 사고 싶은 자가 몇이나 되겠습니까?”
무사들은 서로 눈을 맞췄다.
“어떤 비호를 원하시오?”
우두머리가 다시 탁자로 돌아와 앉았다.
“유장길은 남회성에서 죽은 것이 맞습니다. 천구 대종주의 패검은 하당에서도 보물로 소장하는지라 제가 가져오고 싶다고 가져올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순국이 원한다고 해도 쉽지 않지요. 제가 여러분과 한배를 타기로 한 이상 목숨을 걸고 작당을 하는 것이니 서로를 속이는 짓은 서로에게 해가 될 뿐입니다. 그러니 동료인 셈치고 툭 터놓고 아는 것을 다 이야기하는 게 어떨는지요. 제가 여러분을 검이 있는 곳으로 데려가 드릴 테니 순국으로 저를 데리고 가십시오. 그리고 명창현후께서 황성에 아뢰어 제게 봉호를 하나 내려주셨으면 합니다.”
“그대가…….”
우두머리가 의심스럽게 여자를 쳐다보며 물었다.
“우리에게 합류하겠다는 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