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주표묘록-73화 (73/3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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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 창 (15)

사방이 텅 비었다. 백리경홍의 의장도 대류영을 빠져나갔고 희야 혼자만 무대에 서 있었다.

등 뒤로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검은 갑옷에 검은 도포를 걸친 장군이 엷은 미소를 띤 채 희야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나는 식연이다. 무전도지휘사지. 네게 부장의 직위를 내려줄 힘은 없지만 군에 몸 바칠 뜻이 있다면 언제 나를 찾아오너라.”

“식… 식연 장군!”

희야는 그의 이름을 듣고 놀라 얼이 빠졌다.

“마목이두사과리아. 맹호의 이빨이 비겁한 자들의 영혼을 찢어발기리라.”

식연이 멀리서 돌아보았다.

“하늘이 내린 창이다. 나는 네 창술이 좋구나.”

대류영 밖으로 걸음을 내디딘 식연은 정오의 햇살을 마주하고서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64명이 짊어지는 국주의 금장식 자란화 어가가 조용히 대류영 문 앞에 놓여 있었다. 식연을 마중 나와 있던 내시는 가마 아래에 선 채 공손하게 장읍을 올리고는 손짓을 해 보였다.

식연은 어가 앞에서 먼저 예를 올린 후 계단을 밟고 올라가 발을 젖혔다. 널찍한 가마 안에는 국주 혼자 반듯하게 앉아 있었다. 국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손에 든 찻잔을 내려놓았다.

“소신을 기다리시게 해 송구합니다.”

“식 장군. 편히 앉게. 설마 승리한 무사와 이야기를 나누려 혼자 남았던 것인가?”

국주는 새끼손가락에 낀 비취반지를 돌리며 무심하게 물었다.

“그렇습니다.”

식연이 미소를 머금고 대답했다.

“장군은 본디 천성이 도도하여 그대의 호의 어린 눈길을 받는 사람이 매우 드물지. 한데 오늘 그 아이를 꽤나 높이 평가하는 듯하더군. 식 장군의 눈에 들다니 그 아이는 우리 하당에서 명성을 날리겠어.”

“보기 드문 인재입니다. 누구도 그 아이가 지닌 광채를 억누를 수 없지요. 소신의 평가는 그저 금상첨화에 불과합니다.”

“장군의 입에서 그 얘기를 오늘만 벌써 두 번째 듣는군.”

국주가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일단 그 얘기는 접어둠세. 이번 연무 대회를 준비한 내 의도를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장군은 잘 알겠지?”

“네. 동궁의 젊은 무사 유은이 국주의 친족이라 들었습니다. 무술이며 병학(兵學)에 있어 동년배를 훨씬 뛰어넘는다지요. 국주께서는 그가 승리해 부장의 군직을 차지할 거라 생각하셨기에 맨 뒤에 배치하셨겠지요?”

“맞네. 장군도 알았으니…….”

“국주.”

식연이 국주의 말을 끊었다.

“군직을 수여하고 싶으신 거라면 국주의 친필 서신 한 통이면 부장은 말할 것도 없고 참장군에 아장군도 문제가 되지 않겠지요. 한데 왜 국주께서는 유은에게 부장의 직함을 쟁취하게 하신 겁니까?”

국주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을 꺼냈다.

“장군도 알다시피 우리 하당은 군의 위력이 강하지 않아. 지금 영무예가 광기를 부리며 황성을 주름잡고 있네. 순국공 오태천이 그의 손에 죽었는데 황성의 고관들 누구 하나 나서서 말하는 이가 있던가? 강한 군대가 없는 우리 하당은 급변하는 난세에 스스로를 지키기 어렵네. 본공이 의도적으로 소년을 발탁하는 것도 하당군의 환골탈태를 위해서라네. 내 친필로 명을 내려 부장의 직함을 유은에게 하사하면 과거 명문세가의 소년들이 조상의 공로로 군에 들어오는 것과 뭐가 다르겠는가? 그리하면 사람들에게 신망을 얻을 수 없네.”

“소신 우매하여 잘 모르겠나이다.”

“우매하다니? 장군은 왜 그리 말하는가?”

식연은 허리춤의 오래되고 소박한 검집을 살며시 어루만졌다. 그의 목소리에는 금속 같은 딱딱함이 묻어났다.

“소신은 정말 그렇게 신망을 얻을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소신의 명성은 미천합니다만 어릴 때부터 검을 배워 지금까지 전쟁터에서 수백 명을 죽였습니다. 그중 소신이 적의 칼에 죽을 뻔한 적도 몇 번이나 되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소신은 지금 뭇 사람들을 진심으로 따르게 할 수 있지요. 국주께서는 유은을 위해 방법을 달리하여 군직을 하사하신다지만 이와 같은 생사의 일까지도 깨우치게 해주실 수 있으신지요?”

잠시 잠자코 있던 국주가 입을 열었다.

“칼과 검에 있어 구주 대륙에서 장군과 탁상공론을 펼칠 이가 몇이나 되겠는가? 연무 대회 일은 이대로 넘어가지. 하지만 유은은 본공과 피가 섞인 관계네. 내 보기에 드문 장군감인 듯하여 훗날 하당의 기둥으로 키우고 싶네. 이미 열넷이나 되었지. 내내 동궁에서 공부했는데 최근 들어 적당한 스승을 찾기가 어려워졌네. 내 여러모로 생각해 보았는데 장군 밑에서 무전청영위를 시키면 어떨까 해.”

식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군직은 무전도지휘사이고 무전청영위는 그의 명령을 전달하는 부하였다. 식연은 전쟁에서 공을 세워 이름을 날린 지 여러 해였지만 아직 문하에 둔 진정한 제자는 하나도 없었다. 국주는 분명 그가 유은을 거둬주길 바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끝내 식연은 고개를 저었다.

“국주. 명을 받들지 못함을 용서하십시오. 소신은 승리를 차지한 희야에게 제 곁에 와서 잡무를 처리하라고 이르느라 뒤늦게 나온 것입니다. 물론 유은도 거둘 수는 있으나 소신에게는 한 명을 가르칠 정도의 시간과 힘밖에는 없습니다.”

“희야를 제자로 거두려는 것인가?”

국주는 돌연 자세를 바로 했다.

식연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미소를 지었다.

“소신의 마음은 그리하고 싶으나 그 아이가 아직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국주가 미간을 치키며 매서운 표정을 지었다.

“장군 말은 지금 그 아이의 자리를 비워두고 기다리겠다는 뜻인가? 위풍당당한 대윤의 백작이자 어전우장군이 이름 없는 소년의 허락을 기다린다고? 정녕 유은은 장군이 만족할 만한 자질이 못 되고 그 희야라는 아이가 더 자질이 뛰어나다는 겐가? 장군 입으로 내게 유은이 기용이라며 칭찬하지 않았나?”

“소신의 경솔함을 용서하십시오. 그 말도 틀림은 없습니다. 어릴 적 스승님께 그리 배웠지만 그것이 다는 아닙니다.”

식연이 나직이 대답했다.

“스승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자기만의 용기를 가진다 하셨습니다. 큰 전투를 앞두고 얼굴이 붉게 변하면 혈용이고 희게 변하면 골용, 푸르게 변하면 기용이라 합니다만… 이 모든 것은 진정한 용기라 할 수 없습니다.”

“그럼 희야는 어떠한가?”

국주가 큰소리로 물었다.

“얼굴색이 변하지 않고 죽을 각오로 검을 뽑으니.”

식연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연히 신용(神勇)입니다!”

국주는 놀라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잠시 잠자코 있던 국주는 탄식을 뱉고는 손을 흔들어 어가를 전진하라 명했다.

밤이 되었다.

하당은 동륙 제후국 중 유일하게 완주에 위치한 국가로 깊은 밤이 가장 번화할 때였다.

낮에 소년 무사가 금장국을 크게 이겼다는 소식이 벌써 남회성 전체에 퍼졌다. 큰길이며 골목이며 곳곳이 놀라움과 기쁨으로 가득했다. 주점 안의 사람들은 본국 소년의 창에 초인적인 용기를 지닌 만족 무사도 놀라 물러났다며 이리저리 말을 전했다. 그러나 아무도 그 소년의 이름은 알지 못했다. 게시된 문방(文榜)에도 소년의 이름은 언급되지 않았다.

희씨 집안 정원의 오래된 단풍나무 아래에서는 분노한 가주가 손을 휘두르며 하인들에게 큰 소리로 명령했다.

“문을 닫아라. 앞문도 잠가. 녀석이 돌아오든 말든 상관하지 마라. 어디를 가든 제멋대로 하라고 해!”

대문이 끼이익 소리를 내며 닫혔다. 문 위의 포수(鋪首)1)가 험상궂게 바깥사람들을 향해 있었다. 문 앞이 휑했다. 한참이 지나고 인영 하나가 어둠 속에서 걸어 나왔다. 묵묵히 희씨 가문의 휘장이 있는 등롱 아래로 걸어온 그는 대문 앞에서 오랫동안 서 있다가 살며시 대문을 밀어보았다. 문은 단단히 잠겨 있었다. 밀어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는 문을 두드리는 동고리를 손으로 쓸어보았지만 그것을 잡아당기지는 않았다.

돌아선 그는 고개를 숙이고 한 걸음, 한 걸음 멀어졌다. 그의 몸집에 다소 어울리지 않는 기다란 창대를 끌고서. 문 앞의 등롱이 멀어져가는 그의 뒷모습을 비췄다. 조금 우스꽝스러운 모습이었다.

자량가는 남회성에서 가장 번화한 구역이었다.

주점과 기방의 등불이 밤새 꺼지지 않았지만 길가의 으슥한 골목은 비추지 못했다. 돈 많고 권세가 있는 사람들의 마차가 길을 지나갈 때만 마차 주위의 등불이 잠깐씩 골목 안을 비출 뿐이었다. 골목에는 한 사람이 무릎을 감싸 안고 어둠 속에 앉아 있었다. 지나가는 등불이 그의 얼굴을 비추어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번에야말로 우리 하당도 기를 좀 폈구먼…….”

바깥의 마차에서 누군가가 아직도 말을 하는 듯했다.

말소리가 바람을 타고 흩어졌다. 여름밤의 바람은 차갑지는 않았지만 몹시도 외롭게 불었다. 정처 없이 휩쓰는 바람이 골목 안의 사람에게도 불어왔지만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누구게? 맞춰봐.”

누군가가 뒤에서 말을 걸었다.

일순 멍해진 희야는 환각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얼굴을 가리는 부드러운 손은 너무도 진짜처럼 느껴졌다.

“새끼 돼지?”

우연이 깡충깡충 뛰어와 희야의 옆에 와 앉았다. 그러고는 진지한 얼굴로 희야를 쳐다보며 손을 내밀었다.

“내놔!”

“뭘?”

“금국화! 오늘 내 생일이잖아. 나한테 선물해 준다면서. 오늘 이겨서 하당의 영웅이 됐는데 고작 금국화 선물에 쩨쩨하게 굴진 않겠지?”

우연이 말하면서 검지로 희야의 코를 만졌다.

희야는 고개를 푹 숙인 채 한참을 말이 없다가 기어드는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해. 금국화를 얻지 못했어. 다른 걸 살 시간도 없었고 돈도 다 써버렸어.”

우연은 순간 멍해졌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서야 희야의 표정을 언뜻 볼 수 있었다. 진한 갈색 머리카락이 뺨 옆을 짓궂게 살랑였다.

“못 이겼으면 못 이긴 거지, 뭘. 사실 너희 하당 황제의 금국화는 별로 신기하지도 않은걸.”

우연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국주는 황제가 아니야. 공작이지.”

우연이 희야를 노려보며 말했다.

“너희 국주가 뭐 하는 인간인지 상관할 기분 아니거든!”

“여긴 어떻게 왔어?”

“너 내가 정말 금국화 달라고 온 줄 알아? 너 찾아 왔지! 아무 데도 안 보이니까…….”

우연이 입을 삐죽 내밀었다. 우연은 희야가 정말 목석같다고 생각했다. 그녀에게 고마워할 줄도 모르다니. 우연은 골목골목 희야를 찾아다니느라 얼마나 많은 시간을 버렸는지 몰랐다. 봉황지의 등불놀이를 구경하는 석방(石舫)에도 가보고 문묘 앞의 날개 달린 돌사자에도 가보았다. 심지어 대추가 아직 익지도 않은 나무 아래까지 갔다. 희야와 그녀는 여름의 절반을 그 나무를 어떻게 할지 고민하느라 보냈으니까. 그러나 그 어디에서도 희야는 보이지 않았다.

“나 찾아 왔어?”

희야가 물끄러미 우연을 바라보았다. 깊은 밤 망망한 인파 속에서 그를 영원히 잃어버릴까 봐 걱정하며 찾아주는 이가 이 세상에 있었던 것이다.

“야! 지금 시간이 몇 시야? 한밤중이라고! 내가 너 찾으러 나온 거 아니면 뭐, 별이라도 보러 나왔겠냐?”

우연은 성깔을 부리며 희야의 머리를 때렸다. 희야는 피하지 않고 머리를 무릎 사이에 묻고 있었다.

희야를 때리고 또 때리던 우연은 갑자기 멍해졌다. 손을 뻗어 희야의 얼굴을 만져보았다. 손이 축축했다.

“하아! 너… 왜 울어?”

“아냐…. 모래가 눈에 들어가서 그래…….”

희야가 고개를 저었다.

“알았어, 알았어. 웃기는 자식 같으니. 가자. 우리 집에서 재워줄게.”

* * *

1) 중국식 대문에 장착된 문을 두드리거나 잠그는 데 사용하는 장치로 보통 반입체적인 짐승 머리가 고리를 물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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