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주표묘록-72화 (72/3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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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 창 (14)

“버틸 수 있겠냐?”

철안이 아우가 무대에 남겨둔 장도를 집어 들며 희야에게 물었다.

철안은 공격하고 싶지 않았다. 무술에 자부심이 있는 것과는 별개로 피투성이인 상대를 어떻게 공격해야 할지 난감했다. 이대로는 상대를 참혹하게 도륙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무시하지 마! 난 반드시 이길 거야!”

희야가 눈을 부릅뜨고 철안을 쳐다보며 말했다.

“네 아우에게 전랑봉이 있듯 내게도 나만의 초식(招式)이 있어! 난 지지 않아…. 내겐 아직… 아직…….”

극도로 피로와 대량 출혈로 희야는 현기증이 일었다. 심지어 철안의 칼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마지막 남은 힘으로 어쩌면 완벽한 마지막 일격까지는 버틸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해 보자!”

희야가 오른손 수갑을 붙잡아 맨 끈을 풀고 그 아래의 반지를 꼭 쥐며 말했다.

“한번 해 보자고! 북극성의 신이자 창청(蒼青)의 주인이 가없는 하늘을 자유로이 비상(飛翔)하리라.”

희야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또박또박 명문을 읊었다. 고개를 들었다. 하늘이 빙글빙글 도는 듯했다. 하지만 희야는 두렵지 않았다. ‘푸른 하늘의 주인’이라 불리는 커다란 매를 떠올렸다. 그것의 영혼이 다시 깨어나 희야의 마음속 부름에 응했다. 하늘을 휩쓸 거대한 날개를 펼치자 그것이 닿는 곳마다 햇빛이 가려졌다. 그것은 모든 사람의 위에 군림했다. 어느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았지만 희야만은 볼 수 있었다. 그것이 이곳을 향해 덮쳐왔다. 그리고 희야에게 절대적인 힘과 용기를 주었다!

“창술은 긴 날에 담겨 있다.”

달빛 아래. 노인과 희야가 무형의 원을 둘러싸고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정방향이었다가 역방향이었다가 다시 정방향으로 돌았다.

“모든 무기에는 저마다의 원이 있다. 검에는 검권(劍圈)이, 창에는 창원(槍圓)이 있지. 무기의 길이가 직경이 되며 적이 그 중심이 되는 것이 하나의 원이다. 또 적의 반격 범위가 또 하나의 원이 되지. 네가 공격한 후 막는 범위가 또 하나의 원이다. 전투 중에는 수많은 원이 존재하며 모든 원이 네 승패와 관련이 있다.”

“어떻게 모든 원을 계산해내죠?”

“그것은 창의 변화에 내포되어 있다.”

노인이 말을 이었다.

“지금 말해주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세상에는 ‘극렬지창’이라 불리는 창술이 있다.”

“극렬지창요?”

“소위 극렬지창이란 모든 원을 뛰어넘는, 원을 파괴하는 창이다!”

노인의 창이 희야의 미간을 향했다.

“네 창이 극도로 사납고 빨라질 때 너는 시간이 멈춘 듯하다고 느낄 것이며 네 창은 모든 원을 꿰뚫고 일격에 전투를 끝낼 것이다. 시간이 멈추었을 때 세상에는 원이 없고 하나의 선만이 존재하며 모든 것을 관통한다!”

희야의 눈빛이 자신의 창끝에 닿았다. 이 세상에 호아창의 창끝만 존재했다. 희야는 2장 밖에 선 철안을 겨눴다.

“창끝은 하나의 점. 그것으로 원을 부수는 직선을 그린다. 다른 생각은 말고 모든 정신을 창끝에 집중할 때 네 몸은 자연스럽게 창을 내지를 가장 적절한 위치에 맞춰질 것이다.”

몸에서 일어나는 미세한 변화를 희야 자신도 깨닫지 못했다. 손목, 팔꿈치, 허리와 다리까지 온몸이 완벽한 공격 자세에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창을 쓰는 이유를 알아야 한다. 네 마음에는 들끓는 불이 있다. 대지의 타오르는 탄광이다. 그것의 화염이 어느 날 지면을 불사르고 하늘에 불을 지필 것이다. 너는 울부짖게 될 것이다. 그 화염을 내뱉지 않으면 그것이 네 가슴을 태워버릴 테니까. 그것은 분노 같고 우렁찬 노래 같기도 하다. 용과 호랑이의 울부짖음이 시간을 멈출 것이다.”

극렬지창. 모든 원을 파괴하는 창.

오금색 빛 한 줄기가 희야의 손바닥을 떠나갔다. 호아창은 희야의 손아귀에서 그것이 지닌 속도의 한계를 돌파했다. 희야와 그의 창은 날카롭고 긴 이빨처럼 변했다. 희야의 포효와 호아창의 바람소리가 함께 끓어올랐다. 선대의 강력한 창술 속에 잠재되어 있던 난폭함과 피비린내가 소년의 미숙한 찌르기 공격 속에서 재현되었다.

철안은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흡사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억눌린 느낌이었다.

여귀진이 벌떡 일어났다.

수천수만 개의 긴 바늘이 온몸을 찌르는 것만 같았다. 여귀진은 전율을 느꼈지만 또 한편으로는 흥분되었다.

그날 밤 초원의 늑대 떼의 냄새와 피비린내, 살육의 내음이 또다시 그의 코를 찔렀다. 희야가 창을 내지름과 동시에 늑대를 베던 순간의 모호한 감각이 불현듯 깨어나기 시작했다.

하마터면 그는 자신의 적을 위해서 팔을 휘두르며 소리를 지를 뻔했다.

창의 궤적을 제대로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삽시간에 희야는 철안의 등 뒤로 이동했다. 창은 흩날리는 피를 스치며 무대에 꽂혀 들어갔고 희야는 휘청하더니 철안의 발아래 쓰러졌다. 사람들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깨닫지 못한 채 망연한 얼굴로 두리번거렸다.

‘동륙 제1의 창’, ‘45자루의 장도를 부러뜨린 창’, ‘거대한 용을 도륙한 마목이두사과리아.’ 식연은 이 모든 전설이 한순간 진실로 변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비록 10년 후 그가 매의 깃발 아래에서 쏘아낸 독룡의 ‘봉단일창(封斷一槍)’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희야는 현재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공격을 완벽하게 실현해냈다. 격렬한 공격에 희야는 완전히 힘이 다 빠져버렸고 그 바람에 마지막 순간 창이 치우치며 철안의 가슴을 비껴나 그의 팔을 스치고 지나갔다.

철안은 묵묵히 자신의 팔을 더듬었다. 팔에는 가느다랗게 생채기가 났고 손에는 새빨간 피가 묻어났다.

“철안!”

9왕이 좌석에서 탁자를 탁 내리치며 고함을 질렀다.

철안은 번뜩 정신이 들었다. 그에게 청양의 명성이 달려 있었다. 그런데 이곳에서 넋을 놓고 상대의 창술을 회상하고 있다니. 철안은 황급히 몸을 돌려 군도를 머리 위로 높이 들어 올렸다. 철안은 칼을 든 채 희야와 눈이 마주쳤다. 철안은 자신이 가볍게 베기만 해도 이 대결이 끝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희야는 자신을 방어할 힘을 완전히 잃은 상태였다. 부상을 입은 데다가 완벽히 장악할 수 없는 창술을 무리해서 사용한 탓에 희야는 지금 갓난아기보다도 더 연약했다. 철안은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았다. 이 상대를 죽인대도 처벌이 따르지는 않을 것이었다.

그러나 철안의 칼은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그 어느 때보다도 칼이 무거웠다.

모두의 시선이 철안의 칼에 쏠렸다. 사람들은 멍해서 어찌할 바를 모른 채 이 전투에 대해 숙덕거렸다. 철안이 희야에게 물었다.

“방금 그 창술은 뭐라고 하지?”

“극렬지창 최성(摧城).”

철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몇 걸음 물러났다. 그는 군도를 저 멀리 희야에게로 던졌다. 군도가 쌩 소리를 내며 바닥에 꽂혔다. 희야의 뺨에서부터 반 척도 안 되는 거리에.

“네가 이겼다!”

철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언변이 뛰어나지 않은 철안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을 이었다.

“네가 말한 대로야. 네가 정말 우리 모두를 이겼어.”

철안은 뒤돌아 연무장을 떠났다. 그제야 사람들은 정신이 들었다. 철안이 군도를 던진 행위는 철엽이 군도를 던진 것과 완전히 같은 의미였다. 그는 자신의 무기를 넘겨줌으로써 패배를 인정했다.

왁자지껄함 속, 관람대로 올라온 철안은 좌석 옆에 무릎을 꿇었다.

“세자. 제가 졌습니다.”

“정말 진 거야?”

“이유는 모르겠습니다만.”

철안이 허리를 숙이고 머리를 조아렸다.

“원래 저 아이는 저를 죽일 수도 있었습니다.”

“하당국, 희야 승.”

군중은 다시 조용해졌다.

결과는 이미 정해졌다. 하당은 불가사의하게도 거의 완승을 거뒀다. 환호해야 할 때였다. 그러나 하당의 예법은 고대의 제도를 따르는지라 번거롭고 엄격했다. 모든 시선이 국주의 좌석에 집중되었다. 모두가 백리경홍이 먼저 갈채를 보내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백리경홍은 그런 것들을 신경 쓸 새가 없었다. 그는 희야를 보지도 않고 멀리 금장국 좌석의 9왕만 쳐다보았다. 9왕은 사람을 거북하게 만드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러다가 끝내는 못 견디겠는지 탁자를 툭 치고는 아무런 말도 없이 일어나 자리를 떠났다.

백리경홍이 만류하려는 듯 손을 뻗었지만 떠나는 9왕의 뒷모습을 보며 아연해할 수밖에 없었다.

식연은 국주의 표정을 보고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는 유은이라는 소년을 쳐다보았다.

유은의 푸르스름한 얼굴 위로 으스스한 창백함이 서렸다. 마지막으로 식연의 시선이 희야에게 닿았다.

희야는 창을 뽑아 들고 무대 한가운데에 꼿꼿하게 서 있었다. 서둘러 무기를 거두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창에 기대지 않고서는 제대로 서 있을 수도 없었다. 철엽의 공격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피가 계속 흘렀다. 희야는 있는 힘껏 자신의 허리를 눌렀다. 안 그랬다면 전투복 절반이 피에 흠뻑 젖었을 것이다. 희야의 체력은 이미 버틸 수 없는 지경이었다. 줄곧 희야를 지탱해온 용맹함도 피와 함께 서서히 흘러갔다. 희야는 어지러움을 느꼈다. 통증도 점차 무뎌졌다. 무감각이 희야를 뒤덮었다. 온몸이 무거운 비단에 휘감긴 듯했다. 온몸의 기가 다 빨려 나가는 듯한 피로감이 느껴졌다.

흐리멍덩한 와중에 희야는 약하고 의지할 데 없던 유년 시절로 돌아갔다. 그런데 등 뒤에서 누군가가 살며시 그를 안아주었다. 고요하고 향기로우면서도 아득하게 느껴지는 포근함이었다.

“엄마…….”

희야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혼미한 상태에서 하는 잠꼬대였다.

그 소리는 연무대에 있던 식연의 귀에만 들렸다. 식연은 희야의 눈을 응시했다. 소년 무사의 검은색 눈동자 속에서 식연은 아이의, 그저 어린아이의 눈빛을 보았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운명이 식연에게 희야의 내면 깊숙한 곳을 들여다볼 수 있는 창문을 내려준 것 같았다.

누구도 알아채지 못했다. 희야를 응시할 때 식연의 눈꼬리가 살짝 떨렸다는 것을. 일종의 고통을 머금은 떨림이었다.

희제 9년 8월. 희야가 그의 어머니를 불렀을 때 20년 후 광의태후로 추봉(追封)되는 이 여인은 이미 죽고 없었다.

희야는 환호성을, 자신의 승리를 인정하는 갈채를 기다렸다. 그는 일어서서 자신의 승리를 맞고 싶었다.

그러나 한참이 지났는데도 옷자락이 펄럭이는 소리만 들렸다. 그제야 희야는 변고가 생겼음을 깨달았다. 그는 온 힘을 다해 눈을 뜨고 살펴보았다. 국주는 내시와 신하들을 데리고 황급히 일어나 자리를 떠나버렸다.

“국주…. 부장에 봉하는 포상을 아직 안 내리셨습니다.”

장사가 국주에게 알렸다.

“어서 9왕의 마차를 쫓아라!”

국주가 나직하게 외쳤다.

“저런 거칠고 몰상식한 놈! 저놈 얘기는 입에 담지도 마라.”

“금군에 전해 국주를 거가로 모셔라.”

더는 권할 수 없었던 장사는 그저 아랫사람에게 큰소리로 명령할 뿐이었다.

동궁의 소년들을 포함한 모두가 우르르 국주의 뒤로 밀려들었다. 주위를 호위하던 대류영 병사들도 빠르게 현장에서 철수해 신속하게 정돈된 대열을 이루었다. 그들은 길 양쪽으로 늘어서서 국주를 보호했다. 희야는 모두가 자신을 떠나가는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았다. 심지어 그의 아버지와 아우도 그를 떠났다. 희겸정은 이렇게 공개적인 장소에서 망신을 당하자 수치심에 분노해 맏이를 챙길 생각조차 하지 않고 창야의 손을 잡아당기며 신하들의 대오 뒤를 따랐다. 희야에게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승리를 얻은 소년은 바보처럼 연무대 위에 버려졌다. 순식간에 아무도 그를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희야는 어쩔 줄 몰랐다. 저들을 쫓아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쓰러질 수도 없었다. 혈관 속에 흐르는 증조부의 용맹함으로 여전히 무대 중앙에 버티고 서 있을 수 있었다. 희야는 호아창을 무대 바닥에 꽂은 채 싸늘한 눈초리로 자신을 떠나가는 이들을 바라보았다.

다급한 발소리 속에서 문득 작은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희야는 고개를 들어 소리가 나는 곳을 보았다. 박수 소리의 주인공은 뜻밖에도 아직 연무장을 떠나지 않은 금장국의 작은 주인이었다. 위화감이 느껴지는 박수 소리였지만 작은 주인은 최선을 다해 박수를 치고 있었다. 인영이 어른거리며 두 사람 사이의 간격을 더 벌렸다. 둘은 인파가 몰렸다 흩어졌다 하는 사이로 시선을 맞췄다.

“세자. 얼른 따라가시는 게 좋겠습니다. 9왕도 가셨잖아요.”

여자 하인이 계속 여귀진을 재촉했다.

여귀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제 몸을 더듬어 보았다. 승리한 저 무사에게 선물을 하나 주고 싶었다. 만족은 연습 대련에도 포상을 내렸기에 여귀진은 승리한 하당의 소년이 왜 혼자 무대에 버려져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수중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사촌형 용격진황이 아버지에게 준 작은 칼, ‘청사’뿐이었다. 그가 소중히 여기는 물건이었기에 몹시 망설여졌다.

여자 하인이 다짜고짜 그를 잡아끌고 앞선 사람들을 쫓아가는 바람에 여귀진은 저항조차 하지 못했다.

난세를 다스린 군왕들의 첫 만남이었다. 당시 두 사람은 모두 무거운 권력에 억눌려 있었다.

미래의 우열왕과 소무공은 멀리 떨어진 거리에서 서로 마주 보았을 뿐 한마디 말도 나누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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