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주표묘록-70화 (70/3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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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 창 (12)

희야가 호아창을 들었다. 오금색 창날이 바닥을 향했다. 그는 한 손으로 창 뒷부분을 받쳐 들고 꼿꼿하게 서 있었다. 만족 소년이 몇 걸음 뒤로 물러나 희야와 거리를 벌렸다. 두 사람은 곁눈질로 서로를 쳐다보면서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주위 좌석이 약간 술렁였다. 앞선 두 판 모두 깔끔했고 지금처럼 따분하게 기다리지 않았다.

만족 소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다시 한 걸음 물러나며 왼손에 힘을 주었다. 그러자 2척 7촌 길이밖에 되지 않는 송곳창 가운데에서 예리한 쇠 장침(長針)이 튀어나오며 5척 남짓하게 길어졌다. 소년은 두 손을 회전해 오른손의 단창(短槍)을 왼손으로 바꾸어 들었다.

“전면 공방(攻防)이라. 훌륭하군!”

식 장군이 미소를 머금고 고개를 끄덕였다.

“금장국에도 이렇게 영리한 기관(機關)과 무사가 있었군.”

희야도 한 걸음 물러서며 천천히 장창을 벌려 잡았다. 여전히 극도로 고요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좌석의 그 누구도 소리를 내지 않았다. 송곳창의 장침도, 창을 벌려 잡은 희야의 자세도 살기가 등등했다. 그동안 연무를 쭉 보아왔던 대신들도 이렇게 긴장감이 팽팽한 경우는 간만이었다.

“사마공이 보기에 이번 대결에서 우리 하당의 승패가 어떨 것 같소?”

“긴 것으로 짧은 것을 부수고, 움직이지 않음으로써 지친 병사를 공격한다지요. 우리 측은 처음이나 상대는 이미 한 판을 싸웠으니 승수가 8할은 되겠소.”

“사마공은 상당히 낙관적이구려. 내가 보기에 이전 판에서 저 만족은 전력을 다하지 않았소. 아니면 어찌하여 왼손의 장창을 내던지고 아까까지 버텼겠소? 두 개의 짧은 것이 하나의 긴 것을 무찌르지요. 말 위에서도 아니고 두 손 무기가 우세하오.”

“그것도 몸에 가까이 가야 가능한 것이지요.”

“그게 뭐 어렵겠소? 짧은 송곳창으로 막으면서 앞으로 한 걸음 나아가면 긴 송곳창으로 몸 가까이까지 공격할 수 있지요. 그때가 되면 긴 창은 거둬들일 수도 없소.”

식 장군은 좌석에 앉은 사람들의 분분한 의견을 들으며 그저 웃을 뿐이었다.

만족 소년이 갑자기 움직였다. 그는 짧은 송곳창으로 가슴을 보호하며 긴 창을 앞으로 내밀었다. 희야의 얼굴을 향해 번쩍이는 쇳빛 한 줄기가 내질러졌다.

그와 동시에 긴 창이 들어 올려졌다.

“포기해!”

호아창이 공기 중에서 진동하며 포효했다. 오랫동안 군대를 이끌었던 장군들의 눈에도 한 줄기 오금색 흔적만 보였다. 만족 무사가 짧은 창으로 호아창을 막아냈다. 둔중한 힘에 부딪힌 팔에는 거의 아무런 느낌이 들지 않았다. 그는 크게 놀라 공격했던 긴 송곳창을 거두어 짧은 송곳창을 눌렀다. 호아창을 막아낸 순간 만족 소년은 잠시 숨을 돌리고 긴 송곳창에서 힘을 뺀 뒤 번개처럼 짧은 송곳창의 창대를 따라 내려가며 희야의 손을 쳤다.

“포기해!”

희야가 고함을 지르며 창대를 흔들었다. 격렬한 원형의 힘이 창대에서 뿜어져 나왔다. 사람들의 귀에는 두 종류의 힘찬 공진(空震) 소리만 들렸다. 만족 소년은 비틀거리며 바닥에 고꾸라졌고 두 자루의 송곳창은 쌩 하고 하늘 솟구쳐 올랐다.

모두의 시선이 하늘로 향했다. 두 자루의 송곳창이 나란히 떨어졌다. 펑. 거의 동시에 창 두 자루가 흙바닥에 꽂혔다. 하당 국주의 자리 바로 앞이었다. 창 꼬리 부분은 여전히 빠르게 진동하고 있었다. 순간의 적막이 흐르고 초대된 후궁 하나가 놀라 소리를 질렀다. 좌석의 모든 사람도 놀라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자환궁의 무사들도 허둥지둥 달려와 두리번거렸지만 바닥에는 두 자루의 송곳창이 꽂혀 있을 뿐이었다.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많은 사람이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국주의 호흡이 가빠졌다. 얼굴에도 핏기가 가셨다. 백리 가문은 문을 중시하고 무를 경시했다. 태평한 군주로 지내온 수십 년 동안 백리경홍에게 이렇게 예리한 날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위험 따위는 없었다. 저쪽 좌석에 앉아 있던 청양 9왕의 안색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그는 아연실색한 자신의 수하들을 곁눈질로 싸늘하게 쳐다보았다. 연무장 전체가 쥐 죽은 듯 적막에 휩싸였다. 모두가 넋을 놓았다. 원래 치열한 전투가 될 것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뜻밖에도 이렇게 한순간에 승패가 갈릴 줄은 몰랐다.

우렁찬 징 소리에 사람들은 놀라서 번뜩 정신을 차렸다. 식 장군은 미소를 머금은 채 만족 소년을 쳐다보았다.

“맨손으로 싸울 테냐?”

만족 소년은 멍하니 자신의 두 손을 보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겨루지 않겠습니다. 내가 졌어요.”

“세 번째 대결, 하당국의 희야 승!”

“네 번째 대결, 하당국의 희야 승!”

“다섯 번째 대결, 하당국의 희야 승!”

재차 징 소리가 울리고 하당의 승전보가 이어졌다. 금장국의 좌석에 앉은 만족 무사들은 입을 꾹 다물었다. 9왕의 낯빛도 서늘하고 엄하게 변했다. 하당의 좌석에서는 군신 모두 흥미진진하게 이야기꽃을 피웠다. 한 판, 한 판 하당이 순조롭게 승리를 거머쥐었다. 연무는 본래 적의가 없는 대회로 최종 승부가 어떻게 나든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그러나 연달아 세 판 모두 단 몇 번의 공격에 상대의 무기가 부서졌다. 금장국 왕야의 표정은 대신들 눈에도 보였다. 연무가 끝나고 나면 청현 고성에 가서 함께 술을 마시기로 되어 있는데 이대로 계속 이긴다면…….

합륵찰이 고개를 푹 숙인 채 9왕의 좌석 옆으로 불려왔다. 9왕을 볼 엄두가 나지 않았던 그는 조심스럽게 여귀진을 흘끗 쳐다보았다.

9왕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떻게 된 일이냐? 합륵찰, 네 아버지는 우리 북도성의 유명한 쌍창수(雙槍手)다. 이번에 칸들께서도 세자와 함께 동륙에 보낼 이로 너를 추천했지. 그런데 동륙인의 창 하나도 못 막아낸단 말이냐?”

합륵찰이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9왕야, 그게… 저 녀석 힘이 너무 셉니다.”

“9왕야.”

심복 하나가 다가왔다.

“합륵찰을 나무랄 수만은 없습니다. 저희도 단 몇 차례 만에 무기를 빼앗겼는걸요. 이 연무는 하당에서 특별히 준비한 게 아닐까요?”

“멍청한 것들.”

9왕이 낮게 호통을 쳤다.

“어떤 준비를 했든 저놈도 열댓 살 먹은 애가 아니냐. 나이도 같은데 우리 청양의 무사들은 저놈을 못 이기다니. 그럼 특별히 준비를 해온 우리는 창피하지 않은 게야?”

무대에서는 다시 환호성이 들려왔다. 9왕은 합륵찰을 휙 밀치고 무대를 보았다. 날카로운 검이 하늘에서 떨어져 흙바닥을 찌르고 들어갔다. 연무장 안의 만족 소년은 바닥에 누워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검은색 무소 가죽 갑옷을 입은 하당 소년의 창날이 상대의 목 한 치 앞을 겨누고 있었다. 만족 소년은 고개를 들고 싶어도 그럴 기회조차 없었다.

몇 차례 겨루기 만에 또 한 사람이 패했다. 청양부의 정예 소년 일곱 명 중에 이제 단 두 사람만이 남았다.

“쓸모없는 놈들!”

옆에서 키가 크고 마른 소년 하나가 천천히 일어났다. 혈색이 적동(赤銅) 빛을 띠는 소년은 가슴 앞에는 한쪽이 단단한 쇠거울을, 몸에는 만족이 즐겨 쓰는 칠합 각궁을 걸고 있었다.

“철엽. 가봐.”

여귀진이 자기 심복을 보며 말했다.

“저들도 네 칼에는 어림없을 거야. 동륙인에게 지지 마.”

“주인님을 실망시키지 않겠습니다!”

철익의 아들 철엽이 각궁을 내려놓고 허리춤의 군도를 툭툭 쳤다.

“잠깐!”

한쪽에 있던 형 철안이 자기가 차고 있던 칼을 아우에게 건넸다.

“내 칼을 가져가. 저 녀석 좋은 창을 갖고 있어.”

철엽은 제 형의 묵직한 군도를 들고 성큼성큼 무대로 내려갔다.

희야가 숨을 몰아쉬었다. 연달아 네 명을 무찌른 탓에 아무리 체력이 왕성한 희야라고 해도 버티기가 만만치 않았다. 그저 상대가 무대에 내려오는 잠깐 사이에 기력을 회복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희야의 마음은 기쁨으로 가득했으며 조금도 물러날 생각이 없었다.

희야는 자신이 국주를 놀라게 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그는 난생처음 진정으로 자신의 상대가 되는 사람들을 만났다. 과거 창술을 연마하며 깨달은 모든 것을 해체하고 다시 조합했다. 노인이 시범을 보인 맹렬한 창술이 머릿속에서 형체를 갖추기 시작했다. 용맹한 만족 소년들을 보면서 희야는 세상에 자신과 비슷한 사람이 이토록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끊임없이 만족 무사의 무예를 모방하면서 복잡한 공격과 방어의 기술이 차츰 그의 창술 안에 하나하나 모였다. 희야의 최종 목표는 유일한 창술로 응집하는 것이었다.

극렬지창.

등 뒤에서 왈가왈부하는 소리가 어렴풋하게 들려왔다.

“사마공. 저리 용맹한 장수일 줄은 미처 몰랐네. 이번 판은 버틸 수 있을 거 같은가?”

“다 국주께서 계획한 바라네. 금장국의 만족에게 위엄을 보이시려는 게지! 근데 연달아 네 판을 이겼으니 상대의 체면을 구겨도 너무 구겼어. 버틸 수 있든 없든, 이번 판은 항복할 걸세.”

“저 녀석이 물러나면 남은 대결은 이길 수 있나?”

“만족은 두 명이 남았으니 번갈아 싸운 데도 이겼지. 만족이 용맹하긴 해도 머릿속에는 온통 말똥뿐인데 어쩔 수 있겠는가.”

희미한 웃음소리가 전해졌다. 그러나 연무장 가의 식연의 얼굴에는 감동의 기색이 어렸다.

“매 공격이 다르군. 매 회합 발전하고 있어. 대체…….”

희야는 처음에 힘만으로 합륵찰의 송곳창을 날려 버렸지만 점차 맹렬하고 무시무시한 창술에 익숙해졌다. 희야가 반드시 이길 거라고 말했을 때 식연은 그저 소년의 솔직함과 용기가 마음에 들었다. 그런데 지금은 어쩌면 이 소년이 신화를 진실로 바꿀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믿게 되었다. 희야는 한 번도 누군가와 창을 겨뤄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처음 남의 무예에서 자원을 발굴해내더니 그의 창술은 공격할 때마다 완벽해졌고 차츰 식연도 눈에 띄는 결점을 찾기가 어려워졌다.

하지만 희야가 걸출한 무사와 겨뤄본 적이 없다면 그의 창술 기초는 대체 어디에서 왔단 말인가?

“일곱 번째 대결, 금장국 철엽 대 하당국 희야.”

식 장군이 다시 징을 쳤다. 키가 크고 말라빠진 만족 소년이 한 걸음, 한 걸음 천천히 연무장으로 들어왔다.

“난 철엽이다. 철엽 파찰. 너 창이 정말 멋지다!”

무대에 오른 소년은 뜻밖에도 희야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컸다. 보통 만족은 동륙인보다 약간 작았다. 그런데 이 소년은 키가 큰 편인 희야보다도 더 컸다. 철엽이 손에 든 무광 군도가 햇빛을 받자 갑자기 한 줄기 예리한 반사광이 생겨났다. 이어 그가 손목을 한 번 털자 맞은편의 군사들이 저도 모르게 눈을 가렸다.

희야의 마음속에 처음으로 서늘한 경계심이 스치고 지나갔다. 철엽의 칼은 평범하지 않았다. 이런 칼을 지닌 것을 보면 평범한 무사는 아닐 터. 희야는 자연스럽게 방어하기 시작했다.

“내 칼도 아주 멋져!”

겸손한 동륙인과 달리 철엽은 대놓고 자신의 군도를 찬미했다.

“영월의 칼을 모방해 만든 거야. 우리 형 칼이지.”

철엽이 당당하게 말했다.

“우리 한번 겨뤄보자.”

“덤벼!”

희야가 호아창을 왼팔 위에 받쳐 놓고 천천히 벌려 잡았다. 팔이 시큰거려서 움직이기 조금 어려웠지만 이를 악물고 고통을 눌렀다. 희야는 답답해 터질 듯한 가슴으로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체력이 달리면 안 겨뤄도 돼.”

철엽은 희야의 무거운 호흡 소리를 듣고 알아챘다.

“창술이 뛰어난 너를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아.”

“내가 못 하면 내 동생이 날 대신하겠지.”

희야는 적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래서 난 못 할 수 없어!”

무대 아래에 있던 희겸정이 그 말을 들었다. 맏이가 이렇게 자신의 뜻을 따르리라고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그는 순간 넋을 잃었다. 희겸정이 보기에도 철엽의 무술은 확실히 창야가 막아낼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철엽은 금장국 작은 주인의 뒤에 서 있던 두 명 중 하나였다. 그는 다른 무사들과 달랐다. 현재 유일한 희망은 희야가 철엽의 힘을 최대한 소모시키는 것이었다. 그래야 창야에게도 기회가 있었다. 그는 손을 뻗어 막내아들의 손을 잡았다. 자신의 손바닥에 맺힌 식은땀이 느껴졌다.

“기회를 동생에게 남겨주려고?”

철엽은 무시하는 눈초리로 희야를 흘끗 쳐다보았다.

“형에 의지해 적을 무찌르면 그게 무슨 영웅이야? 너희 동륙인은 늘 이런 수작을 부린다니까!”

초원의 무사는 동륙 군대의 계략을 경멸했다. 철엽도 그중 하나였다. 그러나 그의 예상과 달리 희야는 고개를 저으며 무겁고 갈라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런 거 아니야! 우리 동륙에도 진정한 무사가 있어!”

별안간 오금색 빛이 번쩍였다. 철엽의 장도가 순식간에 창부리를 치며 긴 창을 떨쳐냈다. 양측 모두 상대의 맹렬한 힘에 충격을 받았다. 성인이라면 대수롭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 철엽은 겨우 열서너 살짜리 소년이었다. 그런데 역으로 진동하는 힘이 무기 너머 상대의 팔을 다치게 할 수 있을 정도였다. 두 사람은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거의 동시에 다음 공격을 시작했다. 방어는 하지 않고 공격에 공격으로 맞섰다. 흉포하고 거친 공격에 동궁에서 선발된 소년들은 간담이 서늘해졌다. 만족 소년을 본 적도 없지만 참혹하기 그지없는 격투도 난생처음 보았다. 낯빛이 굳어진 소년들이 한데 모여 작은 목소리로 의견을 나눴다. 약속이라도 한 듯 생각이 한 가지로 모였다. 저 이름 없는 평민 소년이 반드시 버텨주어야 한다는 것.

그처럼 사나운 범과 같이 흉맹해야만 만족의 흉포함에 맞설 수 있었다.

“진정한 무사?”

식연이 고개를 저었다.

“애석하게도 점점 줄어들고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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