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주표묘록-69화 (69/3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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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 창 (11)

대류영 안. 무수한 깃발에 하늘이 거의 다 가려졌다. 금장국의 검치표와 하당의 금국화 깃발이 바람에 한데 뒤엉키며 펄럭이는 소리가 났다. 격앙된 군고(军鼓) 소리는 점점 더 격렬해졌고 연무장 안의 무기들이 서로 부딪치며 나는 날카로운 소리가 귀를 찔렀다. 하당은 자색을 중시했다. 자색 옷을 입은 하당국 대신들이 높은 자리에 앉은 국주를 둘러쌌다. 다른 한쪽의 귀빈석에는 만족 무사가 겹겹이 둘러앉았다. 그 가운데의 중년 무사는 손목에 흰색 표범 갖옷을 휘감고 있었다.

연무장으로 들어서던 식 장군은 마침 고개를 숙인 만족 무사의 우두머리와 눈이 마주쳤다. 겹겹의 인파를 사이에 두고 시선이 부딪친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 고개를 돌려 피했다.

붉은 옷을 입은 자환궁 내감이 종종걸음으로 마중 나왔다.

“아이고, 장군. 장군이 오시기를 기다렸습니다. 국주께서 소신에게 여기서 장군을 기다리라 하셨지요. 안 오실까 봐 얼마나 걱정하셨다고요.”

“식원의 승부는 어찌 되었소?”

“벌써 첫 대련은 이겼습니다. 과연 장군 가문의 자손이더군요. 이대로라면 이번 상대도 이길 듯합니다.”

식 장군은 걸음을 멈추고 연무장 가운데로 방향을 틀었다. 하당 금위군의 검은색 가죽 갑옷을 걸친 소년이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오른손에 중검을, 왼손에는 동으로 된 방패를 들고 맹렬하게 공격했다. 소년은 방패도 무기로 사용하며 두 손을 휘둘렀고 매 일격 온 힘을 실었다. 상대의 무기는 송곳창 두 자루였다. 찌르기용 무기였지만 식원의 과감하고 패기 넘치는 공격에 압도되어 한 번 제대로 찔러보지도 못하고 한 걸음, 한 걸음 후퇴할 뿐이었다.

“기운은 좋군.”

식 장군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이 숙부는 검을 망치처럼 휘두르는 전술을 가르쳐준 적이 없거늘.”

식 장군은 더 머무르지 않고 내감을 따라 국주를 알현하러 갔다. 국주가 명을 내리지도 않았는데 내감들은 이미 기민하게 의자를 가져와 국주의 옆자리에 놓고 식 장군을 모셨다.

“역시 장군의 조카는 용맹하군. 그간 왜 한 번도 언급하지 않았나?”

국주가 감탄하며 말을 이었다.

“장군은 왜 조카를 동궁에 보내 함께 공부하게 하지 않았소? 훗날 욱이와 함께 출정하면 식씨 가문에 또 하나의 명장이 더해질 것인데 뛰어난 인재를 이대로 묻어버릴 순 없지 않나.”

식 장군이 웃으며 대답했다.

“이번에는 본인이 나가겠다고 한 것입니다. 홍려경에서 제 얼굴을 보고 나갈 수 있게 해주었고 저도 막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녀석은 아직 침착함이 부족합니다. 소신, 국주의 선의는 마음만 받겠습니다. 저 녀석이 정말 뛰어난 인재라면 누가 일부러 감추려 해도 절로 두각을 드러낼 것입니다.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국주가 고개를 끄덕이며 멀지 않은 곳에 반듯하게 앉아 있는 만족 무사를 가리켰다.

“저기 가운데 있는 사람이 북륙 금장국의 세자라네. 지난번에 사절로 온 금장국의 대합살은 장군도 만나 보았지.”

잠시 만족 세자 쪽을 눈여겨 본 식 장군이 입을 열었다.

“옆에 있는 사람이 청양부의 9왕 여표은 액로지요? 2년 전 북륙의 일곱 부족 중에 진안부가 멸족되었는데 바로 저자의 솜씨라지요. 금장국에도 저런 명장이 있다니 간담이 서늘해지는군요.”

그러나 국주의 온 신경은 9왕이 아닌 다른 이에게 가 있었다.

“저기 금장국의 작은 주인이 대체 진짜인지 가짜인지 장군이 나 대신 한번 봐보게. 난 아무래도 이상해. 저들 사이에서 세자만 북륙의 만족 같지가 않아. 금장국의 세자가 정말 저리도 허약하단 말인가?”

여귀진은 고개를 들고 하늘가의 기러기를 보았다. 연무장 안의 함성은 그의 귓가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듯했다. 그는 이렇게 사람이 많은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고개를 숙여 새카만 인파를 보고 있으면 짓눌려 숨이 막히는 기분이었다. 유일하게 이곳의 하늘만 북륙과 같았다. 파랗디파랗고 흰색 구름도 있었다. 무리에서 떨어진 큰 기러기가 하늘을 날아갔다. 홀로 말을 타고 초원을 질주하는 유목민처럼 그들은 자유롭게 가고 싶은 곳에 갈 수 있었다.

“세자를 위해 마련된 연무 대련이다. 봐야 할 것은 봐주어야지. 결례를 범해서는 안 된다.”

옆에서 숙부가 나직하고 힘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네.”

여귀진은 하늘에서 시선을 거두었다.

멀지 않은 곳으로 눈을 돌렸다. 하당국 대신들이 공손하게 손을 모으고 깃발 아래 서 있는 모습에 약간 경외감이 들었다. 여귀진은 가슴이 두근했다.

문득 누군가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것 같았다. 자세히 보니 화려한 복장을 한 국주 곁에 까만 갑옷을 입은 장군이 자신을 주시하고 있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부딪쳤고 장군은 그를 향해 살짝 미소를 지었다. 여귀진은 순간 놀랐지만 그를 향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고 두 사람은 시선을 돌렸다.

식 장군은 여귀진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국주의 물음에 답했다.

“경하드립니다. 금장국의 작은 주인이 확실합니다.”

“장군은 그리 확신하는가?”

식 장군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약한 몸은 타고난 것일 수 있으나 사람의 눈빛은 숨기기 힘듭니다. 열 살짜리 아이가 이런 상황에서 조금도 허둥댐이 없으니 성정이 차분하다는 뜻이겠지요. 무예 대결은 아랑곳하지 않고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는 것이 아마도 금장국에서는 이보다 더 격렬한 대련이 많아 흥미를 끌지 못한 듯합니다. 소신은 저 아이가 금장국의 세자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매우 부귀한 집에서 태어나 과한 화려함을 경험해 보지 않았다면 저리 담담하고 지긋지긋한 눈빛은 하려야 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국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장군이 그리 말하니 마음이 놓이는군.”

“탁발 장군이 북륙에서부터 세자를 데려왔으니 신분을 자세히 조사했을 텐데요?”

“탁발은 어쨌든 이민족이 아닌가.”

국주는 실언했다는 생각에 멈칫했다가 말을 이었다.

“비록 그가 우리 하당에 충성하고 있다지만 그래도 주의하는 게 좋지.”

국주는 연무장 가에서 검을 차고 돌아다니는 소년 무사 하나를 또 가리켰다.

“장군. 보게. 유은은 나이도 몇 살 많고 태도도 신중하지. 현재 동궁에서는 녀석의 상대가 없어. 일대 명장이 될 재목이다 싶네. 장군이 보기에는 어떤가?”

식 장군이 눈썹을 살짝 치키며 웃었다. 유은이라는 소년은 열서너 살밖에 되지 않았는데 몸집도 건장하고 골격도 탄탄하며 안색은 푸르고 차가웠다. 매 걸음 반 척 보폭으로 조용히 연무장 가를 순시했다. 함께 동궁에서 공부하는 소년 몇이 부근에서 따랐지만 가까이 다가가지는 못한 채 그저 고개를 숙이고 한쪽에 있었다. 유은은 연무장의 식원만을 쳐다볼 뿐 옆의 동료들에게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식 장군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큰 전투를 앞두고 얼굴이 붉게 변하면 혈용(血勇)이고, 희게 변하면 골용(骨勇), 푸르게 변하면 기용(氣勇)이라 하지요. 유은은 기용으로 기개가 용맹하고 의지가 굳으니 크게 될 재목입니다.”

“그렇다니 마음이 놓이는군.”

국주가 수염을 매만지며 미소를 지었다.

“유은이 후위를 맡으니 이번 대결에서 우리 하당의 체면이 깎일 일은 없겠지?”

식 장군은 대답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그의 시선은 동궁 소년들 근처의 다른 두 소년에게로 향했다. 그날 양천의 주점에서 만난 희씨 가문의 가주가 차남 주위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며 팔목 보호대를 정리해 주고 가죽 투구 아래 맺힌 땀을 닦아 주었다. 그리고 다른 한 명은 홀로 아무도 없는 곳에 서서 제 창을 끌어안고 연무장을 지켜보았다. 땀이 가죽 투구 아래로 흘러내렸지만 느끼지 못한 듯했다. 희야는 누구도 쳐다보지 않았다. 주위의 북소리와 환호성도 그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는 고집스러운 바위처럼 홀로 조용히 있었다.

품에 안고 있는 창이 하늘을 가리켰다. 창날 위로 처절한 오금색 빛이 불규칙적으로 감돌았다.

연무장 안. 식원은 벌써 상대를 연무장 가장자리로 몰아붙였다.

“흐압!”

식원이 돌연 중검을 높이 들어 올리고 온 힘을 다해 돌진했다.

그는 마지막 남은 힘을 다 쏟았다. 식원은 어릴 때부터 제 숙부에게 검술을 배웠다. 그의 숙부인 식 장군은 ‘30년 내 동륙 도보전의 1인자’로 무능한 제자는 거두지 않는 사람이었다. 이미 한 판을 이긴 식원은 체력이 따라주지 않았다. 두 번째 만족 소년은 방패를 뚫는 짧은 송곳창 한 쌍을 사용했는데 민첩한 발걸음으로 계속 이리저리 피하기만 했다. 식원은 상대가 무엇을 기다리는지 알기에 이번 일격에 승패를 걸고 체중을 다 실어 공격했다. 상대는 물러날 곳이 없으면 반드시 긴장할 테고 그렇다면 정면으로 덮쳐오는 칼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었다.

만족 소년은 역시나 막는 것을 선택했다. 중검의 힘에 한 걸음 밀려난 소년은 연무장 가의 말뚝에 등을 치받히며 가까스로 식원의 검을 받아냈다.

“에이!”

국주도 애석해했다. 식원의 공격은 약간의 힘만 더 있었더라면 상대의 송곳창을 손에서 떨어뜨릴 수 있었을 것이다.

“포기해!”

식원이 갑자기 큰 소리로 외쳤다!

만족 소년은 갑자기 두 배로 늘어난 검의 힘이 느껴졌다. 뜻밖에도 식원은 숨을 참고 완전히 정지한 상태에서도 힘을 낼 수 있었다. 송곳창이 그 힘에 의해 멀리 진동하며 떨어져 나갔다. 식원은 고함을 지르며 재차 검을 들어 올렸다. 하당 신하들의 좌석에는 이미 한바탕 환호가 일었다.

칭찬하려던 국주의 옆에서 나직한 탄식이 흘러나왔다.

“청악지검이군. 안타깝지만 약간의 변통이 부족했구나.”

식 장군이 고개를 저었다.

사람들이 진정하고 다시 자세히 보았다. 식원의 검은 상대를 베지 못한 채 공중에 머물러 있었다. 만족 소년의 송곳창 한 자루는 떨어져나갔지만 다른 한 자루가 전력으로 틈새를 찌르고 들어가 식원이 왼쪽 손에 들고 있던 방패의 구리 가죽을 뚫고 들어갔던 것이다! 두 사람은 순간 멍해졌다. 식원은 얼른 방패를 놓고 물러나 다시 기회를 엿보려 했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만족 소년이 방패가 꽂힌 송곳창을 그대로 휘둘러 식원의 가슴 한가운데를 내리쳤다.

식원의 손에서 중검마저 떨어져나갔다. 이제 그에게는 아무런 무기도 없었다. 만족 소년은 바닥에 떨어진 동 방패를 밟아 우그러뜨리면서 송곳창을 곧게 내질렀다. 징 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리고 식 장군이 벌떡 일어섰다. 이미 균형을 잃은 식원은 좌우 어디로도 이 공격을 피할 수 없었다.

그때 금속의 울림이 바늘처럼 귀를 찔렀고 두 번째 송곳창이 지면에 붙은 채 미끄러져갔다. 만족 소년은 비틀거리며 몇 걸음 물러났고 식원은 뒤로 털썩 주저앉았다. 그 찰나의 변화를 제대로 본 사람은 거의 없었다. 다만 그들의 눈에 들어온 것은 식원과 만족 소년을 떨어뜨려 놓은 한 자루의 묵직하고 낡은 창과 연무장 가에 서 있는 금위군 차림의 소년이었다.

식원이 고개를 들어 낯선 소년을 보았다. 그 소년이 창을 던져 자신을 공격해 오는 송곳창을 밀쳐냈음을 알았다.

“고맙다.”

소년이 몸에 묻은 먼지를 털고 일어나며 말했다.

“난 식원이야.”

소년의 새카만 눈이 식원을 흘끗 보고는 돌아서서 그 만족 소년을 보았다.

“난 희야다.”

“두 번째 대결은 금장국 무사 합륵찰 승!”

진행을 보는 교관이 고함을 치며 달려와 매섭게 희야를 제지했다.

“내려가라! 연무의 규칙도 모르느냐? 아직 네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정말 교양 없는 아이로군.”

국주가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금장국 왕자 앞에서 저리도 본데없이 굴다니.”

희겸정은 멀리서 국주의 표정을 보고 안색이 살짝 창백해졌다. 맏이가 또 사고를 쳤다. 안 그래도 늦게 와놓고 또 경솔하게 나섰다. 금장국 좌석의 9왕은 태연한 얼굴로 술잔을 들고 멀리 국주를 향해 술을 권했다.

“아이들이 무예가 뛰어나군요.”

국주는 깜짝 놀라 얼른 술잔을 들고 답주를 권했다. 양쪽 좌석에서 부드럽고 나직한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식 장군이 일어섰다.

“국주. 다들 진짜 무기로 싸우니 다치는 사람이 생기면 양국의 체면도 상하고 구경하는 귀족들도 놀랄 겁니다. 소신이 내려가 중재하는 게 좋겠습니다.”

“좋네! 그리하게!”

국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희야는 저 멀리 국주 곁에서 검은색 갑옷을 입은 장군이 내려오는 모습을 보고 고개를 숙인 채 조마조마했다.

“장군. 이 녀석이…….”

교관이 희야를 가리켰다.

장군은 손을 흔들고는 허리춤을 더듬어 작은 가죽 자루를 꺼내 담뱃대 가득 연초를 채웠다. 그러고는 고개를 들어 희야를 보았다.

“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명령을 따르는 일이다. 모든 사람이 장군도 아니며, 본분을 지키지 않고 마음대로 행동해서도 안 된다. 설령 장군이라 할지라도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 안 되지. 오늘 네 차례가 되지도 않았는데 멋대로 무대에 나간 것도 명령 위반이다.”

“네.”

장군은 고개를 돌려 만족 소년을 쳐다보았다.

“양손 무기를 쓰면서 필요할 때 한 손을 버리고 적을 무찌르는 것은 훌륭한 전술이지. 식원이 네 손에 질만 했구나. 다만 네 양손 송곳창의 길이를 늘일 수 있다면 공수(攻守)가 동시에 가능해질 것이고 그랬다면 처음부터 식원의 중검에 제압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만족 소년은 대답이 없었다. 그는 고개도 들지 않았다. 바닥에 꽂힌 창만 뚫어져라 노려보며 경계하고 두려워하는 기색을 드러냈다. 식 장군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창이군. 아쉽게도 동륙에서 그 창을 알아보는 사람은 이제 많지 않지만.”

장군은 돌연 희야의 등을 쳐 무대로 들이밀었다.

“기왕 명령을 어겼으니 공을 세워 속죄해라. 몇 명이나 이길 수 있는지 어디 한번 보여다오!”

돌아선 식 장군이 징채를 잡고 크게 휘둘렀다. 징 소리가 쩌렁쩌렁 울리고 다음 무대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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