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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 창 (8)
희야는 왼손을 창대에서 떼고 높이 들어 올리며 말했다.
“한 손만 쓸 테니까 공격해 봐.”
“다치고 후회나 하지 마시지!”
창야가 검자루를 쥔 손에 천천히 변화를 주었다. 창야는 자신의 공격 방향을 보여주지 않으려고 희야의 주위를 천천히 돌았다.
“난 너처럼 자주 후회하지 않아.”
희야가 차가운 눈초리로 창야를 쳐다보았다.
희야의 까만 눈동자는 여전히 밉살스러웠다. 살짝 고개를 숙인 창야는 창을 움켜쥔 희야의 오른손을 내려다보며 시선을 피했다. 호아창이 하늘을 가리켰다. 희야는 손을 전혀 떨지 않고 안정적으로 창의 중간 부분에서 조금 아래쪽을 잡고 있었다. 창의 무게를 아는 창야는 공격을 서두르지 않았다. 사람이 아무리 힘이 세다고 하더라도 저렇게 무거운 창을 오래 쥐고 있으면 버티기 힘들었다.
“이대로 대결하면 재미없지. 우리 내기하자. 지는 사람이 이번 달 용돈 내놓는 거야.”
창야는 말을 하면서 느리게 걸음을 옮겨 희야의 등 뒤로 왔다.
그러나 희야는 몸을 돌리지 않았다.
“넌 용돈이 부족하지도 않잖아. 용돈 걸어봤자 무슨 재미야.”
매달 두 형제는 아버지에게 은화 두 닢을 용돈으로 받았다. 그러나 창야는 어머니에게서도 돈을 받았고 그 금액은 은화 두 닢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창야가 웃으며 대꾸했다.
“내기 몰라? 어쨌든 상금인데 뭐든 걸어야지. 형이 지면 내가 돌려주면 되잖아?”
그러나 희야의 목소리는 싸늘했다.
“난 그딴 거 몰라. 그나저나 내 손이 저릴 때까지 기다리려면 한참은 더 기다려야 할 거다. 할 거야, 말 거야? 안 하려면 말아.”
창야는 희야가 자신의 생각을 간파하자 말문이 막혔다. 그는 살짝 고민했으나 곧장 공격할 용기는 나지 않았다. 형이 자신을 등지고 있긴 하지만 희야의 몸은 어느 한구석 떨리는 곳 없이 바위처럼 견고했다.
두 형제는 말이 없어졌다. 날은 점점 더 어둠침침해졌다. 창야는 검을 내던지고 방으로 돌아갈까 하고 몇 차례 생각했으나 형이 움직이지 않으니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동안 형과 대련을 해서 이기기는커녕 공격 한 번도 제대로 못 막아내기 일쑤였다. 형이 자신을 등지고 있는데도 창야는 마치 자기 검집 위에 뱀이 한 마리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창야는 조용히 기회를 엿보았다. 검을 뽑아 뱀을 베어버리자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감히 검을 버리지도 못했다. 온몸의 관절에 힘이 풀리는 것 같았다. 걸음을 옮기려다가도 대치 국면의 고요함을 깰 엄두가 나지 않았다.
호아창은 여전히 하늘을 가리킨 채 꿈쩍도 하지 않았다.
하늘에서 은근한 굉음이 울리더니 부슬부슬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차가운 비가 창야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창야는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제 형의 몸도 살짝 떨린 것 같았다.
창야가 갑자기 한 걸음 앞으로 내디뎠다. 그는 몸을 옆으로 반쯤 틀며 허리를 돌리는 힘으로 칼을 뽑았다. 일단 돌진해 나가자 온몸의 노작지근함이 사라졌다. 창야는 회전하면서 미끄러지듯 나아가 희야의 허리를 향해 칼을 베었다.
거의 그와 동시에 희야도 몸을 돌렸다. 오금(烏金)색 창날이 쌩 하는 바람 소리와 함께 내리쳐졌다. 희야는 한 손만 사용했다. 창날이 검날 위를 한 차례 튕겼으나 두 손으로 정면 공격을 하는 창야의 힘을 막아낼 수는 없었다.
희야는 밀려나면서 튕겨져 나온 창날을 제압하며 다시 내질렀다. 창야는 크게 놀라 검을 거두어 가슴 앞에 가로놓았다. 창끝이 중검의 혈조에 박혔다.
일진일퇴의 국면은 다시 정지 상태로 변했다. 창야는 힘을 쓰고 싶었지만 힘이 나지 않았다. 제 형을 보았다. 희야는 한 손으로 창을 받치고 창대를 겨드랑이 사이에 끼우고 있었다. 희야는 높은 바위 위에서 덮칠 때를 기다리는 호랑이처럼 자세를 살짝 낮췄다.
우렁찬 포효와 함께 엄청난 기세의 힘이 폭발해 나왔다. 창야의 두 팔은 이런 무시무시한 힘을 막아낼 수 없었다. 검의 면이 묵직하게 창야의 가슴에 부딪쳤다. 창야는 숨을 들이켜며 진정하려고 했으나 더 큰 힘이 서슴없이 몰아쳐 왔다.
창야는 중검으로 앞을 가로막은 채 그 힘에 밀려 계속 뒤로 물러났다. 온몸이 식은땀에 흠뻑 젖었다. 모든 힘과 담력이 식은땀과 함께 흘러내렸다. 창야는 이를 악물고 자기 검을 밀어내며 검의 얕은 혈조로 창끝을 막아낼 뿐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꿰뚫린 것은 창야, 그의 가슴일 터였다.
희야는 격렬하게 밀어내는 기세를 몰아 갑자기 몸을 돌리더니 다리를 옆으로 들어 올렸다. 창야는 아래에서 위로 올라오며 자신의 검에 더해지는 힘을 느꼈다. 검이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날아올랐다. 희야가 검을 단번에 낚아챘고 창야는 질퍽한 땅에 넘어졌다.
“약속했다! 은화 두 닢. 졌다고 생떼 쓰기 없어.”
“흥!”
창야는 성을 내며 벌떡 일어났다. 허리띠를 더듬어 은화 두 닢을 꺼내 먼 곳으로 사정없이 내던졌다.
“그 계집애한테 뭐 사주려고 그러는 거 내가 모를 줄 알아? 그 애의 환심을 사면 무슨 소용이야? 걔가 정말로 형을 좋아해 줄 것 같아? 그 애 눈에 형은 아무것도 아니야. 걔한테 선물 사주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네가 알아? 개뿔도 모르면서!”
희야의 목소리는 얼음장처럼 차디찼다.
“너… 욕했어!”
“네가 알기는 개뿔!”
희야는 왼손에 검을, 오른손에 창을 들고서 그대로 성큼 나아갔다.
창야는 두려움에 살짝 한 걸음 물러서더니 몸을 휙 돌려 방 안으로 들어가며 소리쳤다.
“어머니! 어머니!”
희야는 단풍나무 아래로 가 방금 전 창야가 내던진 은화 두 닢을 파내 빗물에 씻었다. 문가로 다가가 막 문을 열려던 희야는 우산을 들고 황급히 달려오는 아버지를 보았다.
“창야, 창야! 문 열어라!”
반쯤 젖은 몸으로 우물우물 문을 열라고 외치던 희겸정은 맏이를 보고 흠칫 놀라 우산을 접고 옷차림을 매만졌다.
희야는 한 번도 창야처럼 사랑스럽게 마중 나오는 법이 없었다.
희야가 고개를 돌리며 나가려는데 희겸정이 희야를 붙잡았다.
“노는 데만 정신 팔려서는. 중요한 일이 있다! 네 아우를 불러 함께 서재로 가자.”
“앉아!”
잠시 어리둥절했던 희야는 돌아서서 창야와 나란히 책상 앞에 앉았다.
“이 추천서를 봐라!”
희겸정이 서신 하나를 책상에 펼쳐놓았다.
“부인도 와서 보시오.”
창야의 어머니는 서신을 들고 대충 훑어보더니 돌연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이 추천서가… 식 장군의 추천서가 정말 유효한 거예요?”
“당연하지!”
희겸정도 뿌듯함을 감추지 못했다.
“식연 장군은 우리 하당 군 사회에서 제일가는 인물이오. 삼군통사 탁발산월도 그보다는 아래이지. 또한 황제가 봉한 백작에 어전우장군이니 홍려경, 광록경은 말할 것도 없고 국주께서도 함부로 대하지 않는 사람이라오!”
희겸정은 아들들을 향해 몸을 돌렸다.
“잘 들어라. 다음 달에 북륙 금장국의 사절이 남회에 국주를 알현하러 온다. 하당과 청양부는 친교를 맺고 곧 동맹 서약을 체결할 예정이지. 청양부에서는 인질로 남회에 오는 금장국의 작은 주인, 여귀진을 호송하도록 일곱 명의 소년 무사를 보냈다. 만족은 거칠고 사나우며 무예를 숭상한다. 국주께서는 우리 동륙 제후국의 당당한 풍모를 내보이고자 8월 보름에 만족의 소년 무사 일곱과 대결을 펼칠 소년 무사 일곱을 선발하라 명을 내렸다. 여기서 국주의 눈에 들면 최소 부장(副將)의 관직을 받게 된단다!”
“소자가 뽑히면 우리 가문의 위엄을 널리 알릴 좋은 기회가 되겠네요?”
창야가 제 아버지의 의중을 금세 깨닫고 맞장구쳤다.
“그렇다! 그러나 출전하려면 일곱 명 안에 들어야 하니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많은 명문 세가의 자제들이 두각을 나타낼 기회를 얻고 싶어도 얻지 못해. 그러나 우리는 금위군 식 장군의 추천서가 있으니 선발되는 것은 떼 놓은 당상이지. 나머지는 너희들의 무예 실력에 달렸다.”
“만족이라고요?”
희야가 시큰둥하게 말했다.
“태자 동궁의 무사들더러 죽이라고 하면 되잖아요? 그 자식들 맨날 길거리에서 싸우는데.”
“어린놈이 뭘 안다고!”
희겸정이 희야를 꾸짖었다.
“만족은 매우 용감하다. 체질도 우리 동륙인과는 다르지. 특히 작은 주인을 호위하기 위해 뽑힌 무사들이니 만만히 봐서는 안 된다. 예전에 너희 증조부께서 절세의 창술로 만족과 분투를 벌이실 때도 퇴각하면서 싸우셨다. 그 말은 곧 동운산 아래까지 싸워나갔다기보다 동운산 아래까지 도망쳤다는 얘기지.”
“그럼 아우를 보내서 대제 검법의 위력을 보여주시죠.”
희야가 말했다.
희야는 자신에게까지 기회가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저 주머니에 든 은화 두 닢을 가지고 우연과 나가 놀 생각뿐이었다.
“너는 독룡세를 그리 오랫동안 연마했으면서 가문을 위해 영예를 떨칠 생각은 조금도 없느냐?”
희겸정이 노기를 띤 얼굴로 말했다.
“내 괜히 입만 아프게 너를 추천했구나.”
놀라 멍해진 희야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제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어떻게…. 저도 가도 돼요?”
“너희 둘 다 간다!”
희겸정이 책상을 탁 치며 말했다.
“자! 오늘부터 내가 매일 너희에게 무술을 가르칠 것이다. 우리 희씨 가문이 기를 펼 날이 머지않았다!”
기뻐서 깡충깡충 뛰며 검을 가지러 방에 가려던 창야는 빗속에 검을 놔두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우산도 펴지 않고 달려 나갔다. 희겸정도 그런 창야를 막지 않았다. 그는 웃으며 희야의 어깨를 툭툭 쳤다.
“빗속에서 무술을 연습하자꾸나. 독수리가 날개를 펴고 하늘을 나는데 이깟 가랑비가 무슨 대수겠느냐?”
밖으로 나가던 희겸정의 등 뒤에서 희야가 불쑥 말을 꺼냈다.
“감사합니다, 아버지.”
희겸정은 자기가 잘못 들은 줄 알고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희야는 어느새 빗속으로 가버린 뒤였다.
정원 안. 세 부자가 삼각형 대형으로 서 있었다.
“잘 들어라!”
희겸정이 검을 뽑으며 말했다.
“우리와 만족이 각각 무사 일곱 명을 내보낸다. 승자는 상대측에 더 이상 겨룰 무사가 없어질 때까지 도전을 받아들여 싸운다. 만족 무사 중에서는 두 명이 명장의 자식이라고 하니 절대 조심해야 한다. 우리 쪽에서는 태자의 동궁에서 함께 공부하는 소년 중에서 셋, 식 장군의 조카 하나를 내보낸다. 그리고 국주의 친척 중에서도 한 사람이 나오는데 국주가 깊이 신임하는 사람이라고 하더구나.”
“그럼 우리가 이겨도 그자가 공로를 다 차지하지 않을까요?”
창야가 다급하게 물었다. 희겸정이 웃으며 대답했다.
“맞다. 나도 그리 짐작하고 있다. 그러니 너희는 만족과 겨루는 것 외에도 무슨 수를 써서든 국주의 친척이라는 소년 무사가 출전하지 못하게 해야 해.”
“출전하지 못하게 해요?”
“간단하네.”
희야가 차갑게 말했다.
“만족의 마지막 무사까지 물리쳐 버리면 우리가 이기는 거잖아요. 그럼 국주의 친척이라는 그 무사도 없는 셈이나 마찬가지죠!”
“바로 그거다!”
희겸정이 모처럼 맏이를 칭찬했다.
“식 장군의 조카가 먼저 출전하고 두 번째가 희야, 세 번째가 창야다. 태자와 국주가 선발한 무사는 그 뒤이지.”
“세 사람이 어떻게 일곱 명을 이겨요?”
창야의 낯빛이 조금 어두워졌다.
“식 장군 조카의 무공이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출전하면 나머지 만족을 전부 널브러뜨려 버리겠어.”
“오만한 말이지만 그래도 기개는 있구나.”
희겸정이 희야를 격려하며 말을 이었다.
“식 장군의 조카는 남회성에서도 유명한 소년 무사다. 최소 두 명은 물리칠 수 있을 것이야. 희야는 아우보다 무공이 뛰어나니 네가 최소 세 명은 물리쳐야 한다.”
희겸정은 막내의 어깨를 바로 잡으며 말을 이었다.
“나머지 둘은 창야 네가 반드시 이겨야 한다. 그러면 네가 하당의 소년 무사 중에서 최후의 승자가 될 테니 부장의 직위도 네 것이 된다.”
창야의 어머니는 그래도 걱정스러웠다.
“어쨌든 3 대 7이잖아요. 창야는 고작 열 살인데 어떻게 만족을 두 명이나 감당하겠어요. 더구나 희야가 세 명을 내리 이기지 못해 창야가 위험해지면 어떡해요.”
“허허.”
희겸정이 밝게 웃으며 대답했다.
“내가 가르친 무사인데 당연히 자신 있지. 희야가 없다면 창야는 고생하겠지. 그러나 희야가 있잖소. 생각할수록 절묘한 한 수구려. 동궁 무사들은 자신들이 뒤의 순서라서 유리하다고 생각하겠지. 창야 앞에 희야와 같은 창술 실력자가 있으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할 거요.”
“희야요?”
부인이 조심스럽게 희야를 흘끗 쳐다보았다.
“쟤를 믿어도 돼요?”
부부는 말을 주고받느라 희야의 얼굴에 간만에 번졌던 미소가 사라져가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희야는 멍하니 그곳에 서서 기대에 찬 제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날카롭고 강렬하던 눈빛이 돌연 어두워진 듯했다.
“희야.”
희야의 기색을 알아차린 희겸정이 말을 건넸다.
“낙담할 것 없다. 창야가 부장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게 네가 지켜주면 나중에 창야가 더 좋은 자리로 영전할 때 당연히 너를 부장 자리에 추천할 것이다.”
잠시 넋을 놓았던 희야가 뜻밖에도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희겸정은 예상외로 순순히 따르는 희야에게 놀랐다. 희야도 부장 자리에 마음이 움직인 듯싶어 절로 흐뭇해졌다. 하당에는 소년 무사가 많아서 무술을 연마하는 소년들을 부러워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희야도 부러움을 안다는 점에서 싹수는 있는 셈이었다.
“자, 오늘은 해가 질 때까지 연습한다.”
희겸정이 패기 넘치게 말했다.
희야는 창을 들고 창야의 맞은편에 섰다. 희야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고 그런 탓에 희겸정은 희야의 눈을 보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