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주표묘록-65화 (65/3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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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 창 (7)

주인장이 몸을 돌리며 물러갔다. 오후의 나른한 햇살 속에서 손님은 호기심에 절임 채소를 한 젓가락 집어 들었다. 물 잔에 넣고 휘휘 씻어낸 다음 입에 넣고 우걱우걱 씹자 저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그는 주인장에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

“차가운 표주박 술 한 병과 맛있는 이 채소 절임 하나 더 주시오.”

주인장은 아까보다 더 환하게 웃으며 흰 도자기로 된 병 하나를 내갔다. 손님이 직접 술을 따라 마시도록 두고 물러나던 그때였다. 발이 들춰지며 점원이 달려 들어왔다.

“매사 조심하라고 가르쳤건만. 어디 급히 장례라도 치르러 가느냐?”

주인장이 무섭게 눈을 부릅떴다.

“아주 큰 손님이에요. 부자 손님이라고요.”

점원은 창문의 대나무 발을 젖히며 말을 이었다.

“근데 들어오지는 않고 저더러 이 명첩을 가져다주라잖아요. 우리 같은 작은 가게에서 무슨 손님 명첩을 받아요?”

주점 문 밖으로는 단순한 시골 마을의 황톳길 하나뿐이었다. 지금 그 길에는 정교한 대나무 수레가 멈춰 있고 푸른색 화려한 옷을 입은 유생 하나가 가노 네 명을 데리고 꿈쩍도 하지 않고 장읍을 올리고 있었다. 그러고 얼마나 서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가노는 선물인 듯한 정교한 함을 들고 있었는데 순금 장식이 붙어 있었다.

“비켜.”

주인장이 점원을 한쪽으로 밀어냈다.

“이게 우리 주는 명첩 같으냐? 키만 컸지 보는 눈이 없어.”

주인장은 명첩을 나무 쟁반에 놓고는 검은 옷을 입은 손님의 탁자 가까이 다가가 고개를 숙이고 조심스럽게 바쳤다. 손님은 한참 동안 절임 채소를 씹다가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더니 명첩을 받아들고 조용히 읽었다.

“고(故) 황성 대홍려 희란의 아들, 전 황성 소부부사 희겸정이 삼가 어전우장군 식 선생의 평안을 기원하오며…….”

그는 고개를 내저으며 직접 옆 창문의 대나무 발을 걷고 말했다.

“희 선생? 들어와 얘기하시지요.”

희겸정은 재빨리 들어와 손님의 탁자 옆에 섰다. 공손하게 옷소매를 정리하고 인사를 올리려는데 손님이 걸상을 건네며 말했다.

“너무 예의 차릴 것 없습니다. 초야의 작은 가게인지라 좋은 의자가 없군요. 접대가 소홀하니 예는 삼가시지요. 조악한 시골 술이라도 괜찮다면 한잔 드십시오. 그래도 이곳의 절임 채소는 끝내줍니다.”

희겸정은 가벼이 대할 수 없어 옆걸음으로 자리에 가 앉았다. 그는 목을 가다듬고 말을 꺼냈다.

“후학 희겸정, 식 장군의 명망은 익히 들었으나 뵐 기회가 없어 몹시 안타까웠습니다. 한데 오늘 이곳에서 장군을 뵙게 되어 더할 수 없이 기쁩니다.”

장군이라 불리는 손님이 대충 손을 내두르며 말했다.

“연배로 보나 관직 경력으로 보나 희 선생께서 저보다 한참 위입니다. 어전우장군은 그저 허울뿐인 직책이지요. 이왕 초야의 가게에서 만났으니 예법에 얽매이지 마십시다. 무슨 일인지 기탄없이 말해 보십시오. 희가는 역대 왕조의 기둥이니 내 능력이 닿는 일이라면 거절하지는 않겠습니다.”

희겸정은 살짝 어리둥절했지만 이내 몹시 기뻤다. 오기 전까지만 해도 이처럼 신분이 존귀한 인물에게 쉽게 말을 붙일 수 있을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국주께서 또 소년 장수를 뽑으신다 들었습니다…….”

식 장군은 직접 잔에 술을 따라 마시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이번에 만족 동맹국인 청양의 세자 방문과 더불어 하당의 국위(國威) 선양을 위해 소년 무사 7인과 만족 세자 종복들의 무예 대결을 준비하고 계시지요. 상으로 9냥짜리 황금 국화 한 송이를 하사하며 최종 우승자에게는 부장(副將)의 직함을 추가로 내립니다.”

“소년 무사 일곱 명의 후보는 나왔는지요?”

“국주께서 이미 추천서 하나를 제게 보내셨습니다. 유씨 자제로 이름은 은이라 하더군요. 태자의 동궁에도 누군가가 추천서를 써준 소년들이 몇 있습니다. 그 밖에 제 부족한 조카인 식원이 있고요. 검술과 병법을 조금 배웠는데 녀석이 뜻밖에도 스스로를 추천하더군요.”

“바로 그 일로 뵙고자 했습니다.”

희겸정은 벌떡 일어나 공손하게 큰 절을 올렸다.

“역대 왕조의 명문 세가였던 저희 가문은 난세에 무너지고 저 희겸정만이 남았습니다. 그러나 나라를 위해 출정하고픈 마음은 한시도 잊은 적이 없지요. 제게 부족하지만 희창야라고 아들이 있습니다. 검술을 배웠고 문리(文理)를 깨우쳤으며 나라에 충성하고자 하는 포부를 지녔지요. 안타깝게도 연고가 없으니 청하옵건대 식 장군께서 힘을 보태주십시오!”

식 장군이 고개를 끄덕였다.

“희가의 출중한 재목에 대해서는 저도 들어보았습니다. 안 그래도 무사 두 명이 부족합니다. 요즘 배첩을 적잖이 받고 있는데 대부분 그 일 때문이지요. 선생께서도 큰 기대를 하고 이 누추한 곳까지 찾아오셨을 거라 생각합니다. 물론 제가 직접 추천서를 써드릴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잘 생각하십시오. 만족은 미개하고 잔혹하며 살인을 일삼습니다. 상대가 아이라고는 하나 가벼이 보면 안 됩니다. 무예 대결 중에는 어떤 부상을 입을지 예측하기 어려운데 희가의 인재가 다치게 될까 봐 두렵지 않으십니까?”

“나라를 위한 일에는 죽을지언정 후퇴란 없지요. 한데 부상이 대수겠습니까?”

“좋습니다.”

식연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제가 희 선생을 위해 추천서를 써드리지요.”

희겸정이 다시 큰절을 올리려 했으나 식 장군이 하지 못하게 붙잡았다.

“됐습니다. 선생께서는 지나치게 정중하시군요.”

식연이 고개를 살짝 저으며 물었다.

“술은 좋아하십니까?”

희겸정은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저었다.

“부친께서 살아 계실 때 타이르길 술을 줄이고 책을 많이 읽으라 하셨지요. 그래서 성인이 된 후로 더는 술을 마시지 않습니다.”

식 장군이 허허 웃었다.

“그렇다면 할 수 없겠군요. 희 선생과 앉아서 술이나 한잔 기울일까 했는데 안 드신다니 아쉽게 됐습니다.”

희겸정은 잠시 어리둥절했다. 그러나 이내 상대가 완곡하게 손님을 배웅하는 뜻으로 한 말임을 깨닫고 황급히 뒤쪽에 손짓을 했다. 희가의 가노가 고개를 숙인 채 함을 올렸다. 희겸정이 함의 자물쇠를 잡자 다른 손 하나가 그의 손을 지그시 눌렀다. 식 장군은 살며시 미소를 지으며 가늘게 뜬 눈으로 희겸정을 잠시 쳐다보았다. 식 장군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열 필요 없습니다. 저는 희가의 선조를 존경합니다. 그 존경심은 이곳에 이런 상자를 가득 쌓는다고 해도 살 수 없지요.”

희겸정은 선을 넘을 수는 없어서 다시 상자를 거둬들였다.

“그럼 멀리 안 나가겠습니다.”

식 장군은 다시 태연하게 의자에 앉았다.

희겸정은 얼굴이 약간 발개졌다. 서른 살 이전까지 줄곧 황성의 귀족 자제였던 그는 이렇게 선물을 주면서 아부해본 경험이 없었다. 비록 지금 가세가 기울었다고는 하나 선물을 거절하는 식 장군의 말속에 어린 냉담함이 내심 서운했다. 그러나 감히 더 말을 보태지 못하고 장읍을 올린 후 종종걸음으로 뒷걸음질 쳐 나왔다. 몸을 돌려 주점 문의 발을 젖히던 그때였다.

“희 선생.”

등 뒤에서 불쑥 식 장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 가지 이해가 안 돼서 말입니다.”

희겸정이 급히 돌아섰다.

“말씀하십시오.”

“희 선생의 명첩에는 분명 황성 대홍려 희란의 아들이라 쓰여 있는데 희씨 조상 중에 관직이 가장 높은 분은 춘부장이 아니라 희양 조부님이 아닙니까. 진무후 순국 삼국도지휘사로 풍염 철려군의 북벌 당시 3천 보병을 이끌고 북륙에 쳐들어가셨으며 금장궁 5만 대군의 추격 아래 만족의 성지인 동운산까지 싸워 나갔고 무쇠로 비석을 세우고 산을 태워 하늘에 제를 올렸다고 전해지지요. 풍염 황제는 물론 소근심, 이릉심 두 장군도 그렇게 북륙 깊은 곳까지는 들어가 본 적이 없고요. 한데 어째서 그분의 이름을 쓰지 않은 겁니까?”

희겸정은 대답을 주저했다.

“그것은…….”

“훗날 반역자로 필지성에서 죽임을 당했기 때문입니까?”

“그렇습니다. 사실 조부께서는 왕조를 배반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천구. 조부께서는 천구 무사셨지요.”

“맞습니다.”

식 장군은 낮게 한숨을 내뱉으며 고개를 숙였다. 허리춤을 더듬어 작은 가죽 부대를 꺼낸 그는 그 안에서 살담배를 덜어 가느다란 흑단 담뱃대에 꾹꾹 눌러 담았다. 한쪽 등불에 담뱃대를 대고 불을 붙여 깊게 한 모금 들이키고는 가볍게 웃었다.

“사람은 평생 잘못을 저질러서는 안 되는 것 같습니다. 한 번의 잘못으로 후손까지 욕보니까요. 한데 말입니다…. 희양 조부님의 무기인 호아창은 동륙 제일로 이름난 창이잖습니까. 과거 황성의 태청각 아래에서 무예를 선보이실 때 장도(長刀) 45자루를 격파하셨지요. 혹시 이번 무예 대련에서 그 창을 볼 기회가 있을는지요?”

희겸정은 잠시 주저하다가 입을 뗐다.

“장군, 창야는 무기로 검을 사용합니다. 말씀하시는 호아창은 제 장자인 희야가 씁니다. 녀석이 창술은 강하지만 성격이 고집스럽고 사나워 저도 함부로…….”

“창술이 강하다고요?”

식 장군이 잠시 생각하더니 말을 이었다.

“그럼 희야 공자를 위한 추천서도 한 통 써서 인원수 일곱을 채우겠습니다.”

“장군…….”

“거대한 용을 무찌른 신의 창이라지요.”

식 장군이 담담하게 말했다.

“한번 보고 싶군요.”

희겸정 일행이 점점 멀어져갔다. 날씨도 차츰 흐려졌다. 주점 주인은 조심스럽게 눈을 뜨고 살펴 보았다. 검은 옷을 입은 손님은 조용히 앉아 술만 마셨다. 손가락 사이의 담뱃대에서 빨간 불이 명멸했다. 그는 내심 불안해 안절부절못했다. 단골손님은 여전히 술을 마시고 있었지만 무언가가 달라진 듯 보였다.

식연이 벌떡 일어나더니 금수 몇 냥을 탁자에 던져두었다. 그는 주인장을 스쳐 지나가면서 그의 어깨를 툭툭 쳤다.

“나는 오늘 이후로 안 올 거요. 이번 달 술값은 저것으로 한 번에 청산하겠소.”

“손… 손님.”

주인장이 말을 더듬었다.

“술맛이 별로이십니까? 지하실에 술이… 더 있는데…….”

식연은 고개를 저었다.

“됐소. 이 집 술은 원래 별로였소. 그나마 저 요리가 맛이 좀 있더군. …당신이 날 팔아넘겼겠지. 그렇지 않다면 보통 사람이 내가 매일 오후에 여기서 술을 마신다는 걸 어찌 알겠소?”

주인장은 우두커니 서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는 고개를 숙이고 손님의 허리춤에 걸린 길고 장중한 검을 흘끔 보았다. 아무런 장식도 없는 거무스레한 검이었다. 이 검으로 손님의 신분을 추측한 주인장은 방금 전 다녀간 중년 문인에게 금수 열 냥에 정보를 팔았던 것이다.

입구로 다가간 식연이 손을 내밀어보았다.

“비가 오는군…….”

점원이 우산을 받쳐 들고 다가가자 그는 은화 한 닢을 하사하고 우산을 받아 펼쳤다.

“이 넓은 세상, 우리 같은 이들에게 남겨진 곳이 얼마나 되려나?”

손님이 문을 나서기 전 나직하게 개탄하는 소리가 주인장의 귀에 들려왔다.

입구로 쫓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검은 옷을 입은 손님은 이미 저 멀리 남회성으로 들어가는 좁은 길 끄트머리에 가 있었다. 평생 저 손님을 다시 보지 못하리라는 것을 깨달은 주인장은 조금 후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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