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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 창 (6)
희겸정은 결국 집안에 전해 내려오는 대나무 채찍을 들었다.
무력을 즐겨 사용하는 아버지가 아니었다. 그러나 창야의 고자질을 듣고 잠잠해졌던 노인에 대한 두려움이 다시 희씨 가문 가주인 그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그는 맏이 희야가 그야말로 불길하다고 생각했다.
희겸정은 호되게 질책하며 대나무 채찍으로 연신 희야의 등을 후려쳤다.
“그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아느냐? 널 키우는 것은 우리 가문 평생의 불행이로구나! 내 대 이후로 우리 희씨 가문이 망한다면 전부 불효막심한 네놈의 죄악 때문일 게야!”
희야는 꿈쩍도 하지 않고 책상에 기댄 채 조용히 제 아버지를 응시했다. 분노나 두려움의 눈빛이라기보다는 멸시에 가까운 눈빛이었다. 아무런 감정도 없이 싸늘했다.
노발대발한 희겸정은 한 시진이나 희야를 때렸다. 그는 모두를 내쫓았고 대청에는 희야만 홀로 남았다.
달빛은 차갑고 바람은 선선했으며 세상은 적막했다. 아주 오래전의 그날 밤 같았다. 희야는 두 다리를 끌어안은 채 조용히 지붕 꼭대기에 앉아 있었다.
“희야, 희야…….”
누군가가 등 뒤에서 작은 목소리로 그를 부르는 것 같았다.
희야는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결국 고개를 돌려 보았다. 붉은 장미색 두 눈이 희야의 등 뒤에 있었다.
“누가… 너 때렸구나…….”
우연은 희야의 얼굴에서 대나무 채찍에 맞아 생긴 핏자국을 보고 깜짝 놀랐다.
“괜찮아.”
희야가 자신의 얼굴을 어루만지는 우연의 손을 밀어내며 말했다.
“며칠 지나면 괜찮아져. 왜 왔어?”
“난… 그냥 놀러.”
우연은 희야를 보러 도망쳐 나온 것이라고 말하기가 쑥스러웠다. 우연이 짐작한 대로 희야는 두 사람이 처음 만났던 날 밤의 그 지붕 꼭대기에 앉아 있었다. 우연은 희야에게 다가가 앉아도 될지 말지 몰라 전전긍긍하며 엉덩이를 꿈지럭댔다. 그런데 희야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겸연쩍어진 우연은 볼만 빵빵하게 부풀린 채 속으로 끙끙대고만 있었다.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우연은 놀라 멍해졌다.
“다시는 나 거들떠보지도 마. 난 네 생각처럼 그렇지 않아. 사실 난 쓸모없는 놈이야…. 나도 내가 가진 게 없다는 건 알아. 창야 말 하나 틀린 것 없어.”
희야가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창야 말이 맞아. 내가 글을 읽고 쓸 줄 알게 된 것도 다 네가 가르쳐준 덕분이지.”
“무슨 소리야?”
우연은 화가 났다. 희야도 가끔은 마음이 약해질 수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느꼈다.
한참을 망설이던 희야가 작게 말했다.
“미안해…. 그런 의도로 말한 건 아니었어…. 실수로 그만…….”
“괜찮아. 우리 호숫가에 꽃배나 구경하러 가자.”
“밤이 늦어서 꽃배에 등불을 다 껐을 텐데.”
“그럼 호수 구경하면 되지.”
“밤이라 추워. 일찍 들어가서 자.”
“난 안 추운데.”
“하지만…. 나 졸려. 가서 잘래.”
희야가 일어섰다.
우연의 인내심이 드디어 한계에 달했다. 소녀는 성질이 나 펄쩍 뛰면서 희야에게 삿대질을 하며 소리쳤다.
“너 왜 이렇게 소심해? 아까 내가 잠깐 도망쳤다고 이제 아는 척도 안 하는 거야? 이 밤에 몰래 너 보러 나왔잖아!”
희야는 새카맣고 깊은 눈동자로 우연의 쀼루퉁하게 내민 입을 바라보았다.
결국 희야의 눈빛에 우연이 한 발 물러났다. 우연은 희야의 손을 잡아끌며 말했다.
“알았어. 알았다고. 나 네 거야. 됐지? 네 거 하면 되잖아.”
희야는 멍하니 우연을 바라보았다. 그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그래도 안 돼?”
우연은 초조해졌다.
“대체 어쩌고 싶은 건데? 네 거 하겠다는데도 뭘 어떻게 하고 싶은 거냐고. 세상에서 제일 멍청하고 쩨쩨하고 예의도 없고 사람들 앞에서 창피나 주고 말이야. 넌 내 연도 밟아서 너덜너덜하게 만들고 내가 좋아하는 비녀도 잃어버렸지. 내가 훔친 대추도 혼자 다 먹어버리고…. 그래도 한밤중에 몰래 너 보러 나왔잖아. 할아버지한테 들키면 혼쭐이 날 거라고! 근데도 나한테 이래?”
우연은 몹시도 억울했다.
“넌 바보에다가 고집불통에 무심하고 멍청한 목석이야!”
우연이 팔을 흔들며 지붕 꼭대기에서 방방 뛰고 하는 바람에 기왓장이 거의 부서졌다.
그러나 우연이 어떻게 소란을 피우고 소리를 치고 팔을 흔들어도 희야는 아무 말이 없었다. 조용히 우연을 바라볼 뿐. 새카만 희야의 눈동자에 별빛이 비쳤다.
우연이 마침내 차분해졌다. 두 사람은 잠자코 시선을 맞췄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희야를 보고 있자니 우연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희야는 난감했던 그날에 대해 다시는 입에 올리지 않았다. 눈 깜짝할 사이, 20년의 세월이 흐르는 물처럼 지나갔다.
대섭신무 6년, 우열왕은 태청각에서 연회를 열고 ‘섭초 8주국’ 중 하나인 사 태부에게 그때의 일을 이야기했다.
제왕은 술잔을 들고 먼 곳을 바라보았다.
“내 평생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네. 이 드넓은 세상에 창야의 것이 아닌 내 것이 있을 수 있다는 걸. 그날 밤 뜬눈으로 지새운 나는 해가 뜰 때 결심했지. 동생의 부장이 아닌 내 일을 하겠다고. 우연이 내 편에 서준다면, 세상 모든 신이 창야만 보살핀다고는 할 수 없지 않겠나. 이 세상에 나의 것이 점점 많아지길 바랐네. 다시는 남의 뒤를 쫓고 싶지 않았어. 두 번 다시 남의 뒤를 쫓고 싶지 않았다네!”
한참을 침음하던 사 태부가 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이 이야기를 후대에 전해도 되겠습니까?”
제왕이 미소를 지었다.
“그대 생각은 어떤가?”
태부는 오랫동안 숙고한 끝에 말문을 열었다.
“한 문장으로 말씀드리지요. 존경하면서도 두려울 만하며 증오하면서도 겁낼 만하다.”
우열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숙고 끝에 어렵게 얻은 말이니 허면 태부가 내 대신 사서에 기록해 전하도록 하게.”
사 태부는 죽을 때 이 기록을 세상에 공개했고 사관(史官)은 <우열제 기거주1)>에 기재했다.
당시는 경덕제 희창야가 재위하던 때였다. 황제는 그 글을 읽고 분노해 낯빛이 변하더니 석 달 동안 사관 열일곱을 죽였다. 그러나 열여덟 번째 장사(长史)도 이 대화를 <우열제 기거주>에 기록했다.
“경은 죽음이 두렵지 않은가?”
경덕제의 물음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옳고 그름을 떠나 사관은 진실만을 기록할 뿐입니다. 선대 황제와 폐하는 친형제이십니다. 선대 황제께서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신보다 폐하께서 더 잘 아시겠지요. 이 대화의 진위는 폐하만이 아실 터 소신은 얼마나 살 수 있겠습니까? 사관이 대대로 붓을 드는 것은 금을 새기는 일과 같습니다. 말을 빠뜨려서도 안 되고 허튼소리를 해서도 안 됩니다. 대대로 이어온 원칙을 소신의 손으로 망칠 수는 없습니다. 소신은 고치지 않을 것이니 폐하께서는 신을 죽이십시오.”
경덕제는 한참을 침묵하더니 손을 칼 모양으로 만들어 사관의 목을 베는 시늉만 하고는 뒷짐을 지고 떠나갔다. 종국에 이 일화는 우열왕의 다른 육필 원고와 함께 인쇄되어 고경궁 서가에 버젓이 진열되었다.
“남아 있는 그의 위엄이 아직도 막강하구나!”
오랜 세월이 흐르고 경덕제는 그 사관에게 말했다.
“그대들이 옳았다. 선황제가 일부러 나 들으라고 남긴 말이다. 어릴 때부터 그는 그랬지. 분노하거나 못마땅할 때면 차가운 눈초리로 사람을 보았어. 하지만 그런 자가 천하를 통일할 줄 누가 알았겠나?”
누구도 알지 못했다. 희야가 늘 고개를 숙이고 있었기에 그의 눈 속 깊이 어린 고독을 아무도 보지 못한 것임을.
그 시각, 머나먼 중주 고원에서는 기병 부대가 말없이 표범 깃발을 들고 줄줄이 전진하고 있었다.
보름달이 깃발 사이로 아른거렸다. 열 살 된 소년은 마차의 바람을 막아주는 가죽 휘장을 젖히고 말없이 달빛을 바라보았다. 나이 많은 여자 노예가 황급히 달려와 서둘러 발을 닫았다.
“세자. 날이 아직 춥습니다. 몸도 안 좋으신데 찬 공기 쐬지 마세요.”
“괜찮아.”
배시시 웃는 소년의 안색은 창백했다.
“동륙의 달과 우리 초원의 달은 같은 거였어. 정말 같은 거였어.”
여자 노예가 웃으며 말했다.
“아유. 달이 어떻게 다를 수 있겠어요? 반달 천신께서 우리에게 달은 한 개만 만들어주셨는걸요.”
“같다니 다행이야.”
소년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아버지, 어머니와 영원히 같은 달을 볼 수 있겠어.”
끼익, 끼익. 마차 바퀴가 지면을 누르고 지나가며 내는 소리가 두 사람의 대화를 집어삼켰다. 길에는 먼지가 자욱했다. 운명의 세 번째 인물이 초원의 나라에서 천리 길을 달려 하당의 남회성으로 가고 있었다.
희겸정도 끝내는 맏이에게 두 손 두 발 다 들고 말았다.
희야는 가법에 따라 대나무 채찍으로 모질게 매를 맞았고 몸에 든 멍은 보름이 지나서야 가셨다. 그러나 그 소녀는 하루가 멀다 하고 희겸정의 저택 근처에 나타났다. 담벼락 너머에서 대나무 호루라기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리면 희야는 뭘 하고 있던지 간에 쏜살같이 뒷담을 넘어 달려 나갔고 희겸정은 쫓아가려야 쫓아갈 수가 없었다.
처음에는 대나무 채찍으로 아들에게 겁을 줄까도 생각했지만 채찍을 들 때마다 희야는 뒤로 한 걸음 물러나 숨을 죽인 채 온몸에 바짝 힘을 주고서 맞을 준비를 했다. 이후에도 제 아비가 채찍을 높이 들어 올리면 희야는 맞을 준비부터 했다. 이런 상황은 항상 희겸정이 긴 한숨을 내쉬며 문을 쾅 닫고 나가 버리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
희겸정은 희야 몰래 두어 번 뒤를 밟아보고서야 조금 마음을 놓았다. 우연과 희야는 그냥 놀기만 했다. 과일을 훔치거나 왕잠자리를 잡거나 불꽃놀이를 구경하거나 귀뚜라미 싸움을 했다. 그렇지 않으면 지루하게 담벼락 위를 왔다 갔다 했다. 아주 이따금 우연이 희야에게 글자를 가르쳐 주었는데 그때 희야는 제일 조용했다. 희야가 마음먹고 몇 시간씩 앉아서 다른 사람이 하는 말을 듣고 있다니, 희겸정으로서는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이었다.
희야가 그 신비한 노인하고만 왕래하지 않는다면 희겸정이 걱정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었다. 비록 일원은 아니지만 희겸정은 그 조직의 힘과 강철 같은 규칙을 아주 잘 알았다.
그 외에도 희겸정에게는 소홀히 할 수 없는, 더 중요한 일이 있었다.
남회성 밖, 양천의 한 주점.
양천은 남회의 서쪽에 있는 지방 소도시였다. 도시 이름을 딴 이 주점도 그리 크지는 않았다. 교외의 자작나무 숲 바깥에 자리한 주점은 숲을 드나드는 사냥꾼이 저녁에 성으로 돌아가면서 싼 술 한잔 걸치는 곳이었다. 해지기 전에는 늘 텅 비어 있었고 종종 한 사람도 없을 때가 있었다.
새카만 장삼에 흰색 요대를 한 유일한 손님은 볕이 가장 좋은 자리에 앉아서 술을 마셨다. 양념간장에 조린 건두부와 소금에 절인 땅콩이 곁들여졌다.
주인장이 굵은 소금에 절인 채소를 한 접시 내오며 빙그레 웃었다.
“좀 더 계시다 가십시오. 이건 저희 집의 절임 채소인데 술과 먹으면 최고죠. 공짜로 드리는 겁니다.”
검은 옷을 입은 손님이 그를 흘끗 보고는 입을 열었다.
“굵은 소금투성이인데 짜서 죽으란 거요?”
주인장이 웃으며 말했다.
“맹물도 있잖습니까. 씻어 먹으면 안 짭니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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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황제의 일상 언행을 기록한 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