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주표묘록-63화 (63/360)

63

5장. 창 (5)

희제 8년 3월.

천계성 수호사인 리국공 영무예가 황제에게 상소를 올리고 황제는 주칠조서(朱漆詔書)를 내려 무황제가 제정한 <11종(宗)세법>을 되살린다. 동륙에서 후작 이상의 봉읍을 받는 제후들은 매년 거두는 비단과 곡식 중에서 황성에 세금으로 내는 것을 제외하고 반드시 10할 중의 1할을 종실 특세로 더 납부해야 했다.

제후들은 동요했고 상소문이 빗발치듯 황성으로 날아들었다. 리국의 적갑 기병은 황성의 소부경 깃발을 내걸고 제후국을 핍박해 종세를 징수했다. 성격이 거칠고 사나운 순국공 오태천은 3만 풍호 철기병을 이끌고 당양곡을 지키며 세금을 징수하러 온 리국 사절에 항거했다.

4월, 리국공의 경기병 3천이 북상해 야간 전투에서 오태천을 죽이고 순국을 공국(公國)으로 격하시켰다. 오태천의 어린 아들은 천계성 감옥에 수감되었고 열 살인 조카 오지윤이 즉위했다. 조정과 재야에서는 왕실에 충성을 다하는 제후가 또 하나 사라졌다며 한탄했다.

세금은 계속 리국공 영무예의 수중에 들어갔고 월주는 기근에 시달렸다.

그해, 섭우열왕1)은 열두 살이었다.

완주 남쪽에 자리한 남회성은 봄가을이 길고 적당히 온난했다.

희야는 가산(假山)을 등지고 정원에 누워 있었다. 나무 그늘 아래에서 무언가가 한 장, 한 장 넘어갔다. 희야가 책을 보고 있었다. 희겸정이 대놓고 말한 적은 없지만 서재는 사실 창야에게만 허락된 공간이었다. 그래서 희야는 한 발짝도 들이지 않았다.

헐렁하고 도톰한 비단옷을 걸친 희겸정은 화분대 뒤로 지나가면서 포도 덩굴로 가득한 격자 너머로 홀린 듯 맏이를 쳐다보았다. 그는 늘 희야의 성격이 별나다고 생각했다. 글공부를 딱히 하고 싶어 하지도 않았고 심지어 무술도 너무 높은 수준까지 연마시키는 것은 원하지 않았다. 그런데 최근 들어서는 창 연습도 전만큼 부지런히 하지 않고 독서를 더 즐겨했다. 매번 소리 없이 나가 책방에서 책을 한 아름 안고 돌아왔다.

처음에는 아우가 공부하는 게 부러워서 그런가보다 생각했다. 직접 가르쳐주고 싶지 않다고 해서 독학하는 것까지 상관할 생각은 없었다. 글공부는 절대 혼자서는 할 수 없다는 걸 깨달으면 알아서 그만둘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희야는 책을 한 번 손에 잡더니 반년 째 계속 붙들고 있었다. 원래 사람들과 대화를 잘 하지 않는 희야는 밖에 나가 객기를 부리는 것 빼고는 집에 있을 때면 늘 창술 연습을 하거나 책을 읽었다. 문무를 겸비한 듯한 모습이었다. 다만 안타깝게도 희야가 읽는 것은 <구원장략>과 <오경주소> 같은 고전이 아니었다. 희겸정이 희야의 책 더미를 뒤적여 보면 죄다 <장미종횡록>, <사주장전사>, <경룡전기> 같은 야담집뿐이었다. 희겸정은 이런 책들을 눈에 담고 싶지도 않았다. 한 번 보는 것만으로도 두 눈이 더러워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큰 도련님. 아침 드세요.”

시녀는 멀리서 소리치고는 돌아가 버렸다. 위아래 할 것 없이 집안의 모든 사람이 냉담한 희야를 대하기 꺼려했다. 더구나 사랑받지 못하는 맏이란 걸 모르는 사람이 없었기에 하인들은 희야를 함부로 대했다.

이런 데 진즉 익숙해진 희야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들은 체 만 체 하고 계속 책을 읽었다.

희겸정이 눈썹을 우그러뜨렸다. 마음속에 누르고 있던 불덩이가 치밀어 올랐다. 그러나 희야를 꾸짖을 시간이 없었다. 국주가 최근 또 인재를 등용하려 해서 희겸정은 고관들이 아침 사냥할 때를 기회 삼아 만나러 가야 했다. 추천서를 한 통이라도 얻을 수 있다면 창야가 관직에 오르는 일은 식은 죽 먹기일 테니까. 가문의 부흥을 기다려온 희겸정에게 더 이상 그 일은 꿈이 아니었다.

희겸정은 세게 콧방귀를 뀌고는 고개를 돌려 문을 나섰다.

얼마 안 남았던 책장을 다 넘기고서야 희야는 책을 품에 쑤셔 넣고 한마디 말도 없이 대청으로 들어갔다.

창야가 다리를 꼬고 탁자 앞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탁자에 놓인 그릇들에는 잔반만 남아 있었다.

희야가 앉기도 전에 창야가 갑자기 손을 흔들며 말했다.

“치워.”

“큰 도련님께서 아직…….”

시녀가 머뭇거렸다.

“성인의 가르침에 매사 모든 행동에는 규범이 따른다고 하셨다. 밥을 먹을 때도 치울 때도 그에 맞는 법도가 있어. 우리 희씨는 사대부 가문이니 사대부의 법도를 따라야지.”

희창야는 엄격한 척하려 안간힘을 썼다.

“지금이 밥을 먹을 때냐?”

시녀가 재빨리 상을 치웠다. 희야는 입구에 서서 아무 소리도 하지 않고 그들을 쳐다보았다. 시녀는 그릇을 담은 쟁반을 들고 돌아섰다. 희야와 눈이 마주친 그녀는 저도 모르게 손이 떨려서 와장창창 쟁반을 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어떻게 된 거야? 굼떠 가지고는!”

창야는 비단 바지에 국물찌꺼기가 잔뜩 튀자 고함을 지르며 탁자 옆에서 펄쩍 뛰었다.

희야는 펄쩍펄쩍 뛰는 창야와 놀라서 안절부절못하는 시녀를 보면서 조용히 밖으로 나왔다. 고개를 들어 쪽빛 하늘을 보았다. 하얀 구름 사이로 맹렬한 불처럼 화려한 연 하나가 긴 꼬리 두 개를 펄럭이며 높이 날고 있었다.

희야는 조용히 바라보다가 갑자기 달려가더니 민첩하게 문 옆의 받침돌을 넘어갔다. 창야는 곁눈질로 그 광경을 쳐다보았다. 제 형의 뒷모습이 반쯤 벌어진 담벼락 가에서 번쩍하더니 이내 사라졌다.

“야, 너희 바보냐? 무식하게 힘을 쓰면 어떡해. 힘으로 잡아당기면 떨어지잖아!”

연한 청색 치마를 입은 소녀가 두 다리를 흔들며 나뭇가지에 앉아 있었다. 가녀린 모습은 꼭 꼬리 깃털이 파란 참새를 닮았다. 소녀는 입을 모아 연줄을 잡아당기는 아이들에게 소리를 지르고 있었는데 눈썹을 치켜세운 것이 화가 난 듯했다.

연둣빛 평지에서 세 아이가 열심히 연줄을 잡아당겼지만 거대한 연은 다루기가 만만치 않았다. 높은 하늘에 부는 작은 바람에도 연은 바르르 떨리며 고꾸라지려 했다. 세 아이는 서로 연을 잡아당기려 다퉜다. 누구 하나 양보하는 사람이 없었다.

“멍청하긴!”

우연이 결국 참지 못하고 나뭇가지에서 뛰어내렸다.

사뿐히 착지한 우연은 직접 연줄을 빼앗아 손에 들었다.

“바보, 바보, 바보들. 희야는 잘 날리는데.”

소년 셋은 우연을 둘러싸고서 그녀가 손을 높이 들고 연을 날리는 모습을 구경했다. 우연은 왼쪽 오른쪽으로 폴짝폴짝 뛰어다니며 연을 날렸다. 우족은 바람의 자식 같았다. 바람이 어떻게 변하든 연은 우연의 손에서 매우 안정적으로, 더 높이 날아올랐다. 우연이 잡고 있던 연줄이 거의 다 풀렸다. 고공에서 센 바람이 연 쪽으로 불어왔다. 우연은 하늘 높이 날아올라갈 듯 가벼웠다.

“내가 너 잡아줄게.”

뚱뚱한 소년이 한참을 망설이다가 옷자락에 손을 슥슥 닦고는 우연을 잡아당기려 했다.

“됐거든!”

우연은 탁 소리 나게 소년의 손을 치고 눈을 부릅떴다.

“쭈그리고 앉아봐.”

소년은 쭈그리고 앉았다. 우연은 훌쩍 뛰어 소년의 어깨를 사뿐 밟았다. 바람이 불자 우연은 하늘하늘 바람에 끌려가기 시작했고 모두의 시선이 하늘 위 우연의 청색 치마로 향했다. 우연은 거의 1장 높이, 희씨 가문의 저택 담벼락 꼭대기 너머까지 올라갔다.

“희야! 희야! 나와서 연 날리자!”

우연의 또랑또랑한 목소리는 하늘과 땅 사이를 메아리치는 것 같았다.

그녀의 목소리에 대답하듯 희야는 한 마리 매처럼 담벼락 위를 휙 넘어가더니 한마디도 하지 않고 내달렸다. 소년들은 희야가 조금 무서웠는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희야는 우연의 손에서 연줄을 받았다. 희야는 풀밭 위를 나는 듯이 달렸고 아이들은 그 뒤를 쫓았다.

희야는 마지막 줄까지 다 풀었다. 손에는 마지막 줄 끄트머리만 남았다. 희야는 줄 끝을 돌에 비끄러매 그곳에 던져두고 나무 가장귀 위에 드러누워 파란 하늘을 보며 넋을 놓았다. 붉은색 연이 하늘에서 오르락내리락했다. 희야의 시선이 연을 쫓아 움직였다.

“희야.”

우연이 나무 아래에서 소리쳤다.

“문묘에 갈래? 오늘은 문묘에 가보자. 거기 가게들에서 좋은 물건을 많이 판다더라. 전부 다 상단이 하락에서 운송해 온 거래. 넌 상상도 하지 못할 물건들일걸?”

“가고 싶지 않아. 어차피 살 돈도 없고.”

희야가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하락족은 평생 몇 가지밖에 못 만든다던데 운송해 왔다고? 상단의 무사들이 강탈한 게 아니고?”

“네 걸 빼앗은 것도 아니잖아. 우리가 가서 빼앗겠다는 것도 아니고.”

우연이 입을 비죽거렸다. 치마를 입어 나무 위로 올라가기 불편했던 우연은 희야가 있는 곳에 손이 닿지 않자 나무 아래에서 해 지난 솔방울을 집어 희야에게 던졌다.

희야는 자신의 몸에 솔방울이 던져지든 말든 아랑곳하지 않았다.

“난 책이나 읽을래.”

“책, 책, 그놈의 책. 몇 날 며칠을 읽었잖아. 내가 오랫동안 책 같이 봐줬으니까, 너도 나랑 놀아줘야지.”

우연은 잔뜩 골이 나서 쀼루퉁하게 말했다.

희야는 잠시 망설이더니 소년 셋을 가리켰다.

“난 문묘에 가기 싫어. 쟤네들이나 데리고 가.”

우연은 위를 향해 눈을 흘기며 소리쳤다.

“난 바보는 안 데리고 다녀.”

“누가 바보야?”

사내아이 하나가 작은 소리로 투덜거렸다.

우연이 사납게 눈을 부릅떴다.

“연도 제대로 못 날리면서 바보가 아니고 뭐야?”

“저기 봐! 연이 떨어지고 있어!”

다른 소년이 소리쳤다.

우연은 껑충 뛰어올라 자기 치마를 잡아들고선 쏜살같이 달려갔고 아이들은 우연의 뒤를 쫓았다. 희야는 잠시 망설였지만 결국 아이들의 뒤를 따라갔다.

우쭐대는 한 소년이 불새 연의 연줄을 잡았다. 소년은 곁눈질로 화가 난 우연과 소년 셋을 흘끗 보며 느릿한 어조로 말했다.

“이곳 땅은 전부 우리 집에서 샀어. 일 없으면 마음대로 드나들지 못하는 곳이야.”

“연도 못 날려?”

소년 하나가 씩씩대며 물었다.

소년의 집은 상점을 운영했다. 거부(巨富)는 아니지만 그래도 공동으로 경영하는 점포가 몇 개 되어서 평소에 상당히 오만했다. 하지만 소년은 희씨 집안의 둘째가 누구인지 잘 알았다. 원래 희가(家)가 황성에서는 대귀족이었다고 그의 아버지가 말했었다. 창야의 몸에 흐르는 상인과는 다른 귀티에 소년은 조금 열등감이 느껴져 목소리를 높이지 못했다.

“이 저택을 뭐라고 부르는지 알아?”

창야가 자기 뒤편의 집을 가리키며 말했다.

“‘독역동(讀易棟)’이라고 해. 조용히 공부하는 곳이지. 근데 너희가 이렇게 시끄럽게 떠들면 어떻게 성현의 책을 읽겠어?”

우연이 불쑥 한 걸음 나아가 창야의 어깨를 밀쳤다.

“야! 너 괜히 시비 거는 거지? 글공부한다는 애가 이러면 길 막고 돈 뺏는 사람하고 뭐가 달라? 땅 산 게 뭐 대단해서?”

소년들은 번득 정신이 들었는지 창야를 반 에워쌌다.

“원하는 게 뭐야?”

창야는 돌연 불안해졌다. 길거리 아이들의 만횡을 직접 겪어본 적도 없거니와 남회에 처음 왔을 때만 해도 설융화2) 같던 우족 소녀가 이토록 사납게 사람을 몰아붙일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내가 여기서 연 날리라고 했어. 왜?”

갑자기 뒤편에서 희야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난 책 읽는 거 싫어. 연 날리는 게 좋지.”

“형이 튀어나올 줄 알았지! 아버지가 저 여자애랑 어울리지 말라고 했잖아!”

창야가 제 형에게 삿대질을 하며 말했다.

“어울리든 말든 너랑 무슨 상관인데? 지금 연 날리는 얘기하고 있잖아.”

“그것도 내가 아까 말했어!”

“야! 너 왜 이렇게 막무가내야? 너도 이 집 사람이고 쟤도 이 집 사람인데 네 말대로만 해야 해?”

우연이 창야의 앞으로 바짝 다가갔다. 햇살 아래로 우연의 피부는 우윳빛을 띠었고 은은한 나무향이 풍겼다. 창야는 얼굴이 살짝 발그레해졌다. 집밖에 나와 까탈을 부린 것도 사실 담벼락 위에서 이 소녀를 보았기 때문이었다.

“이건 우리 집안일이야.”

창야는 우연이 희야 편을 들어 말하자 몹시 언짢아졌다. 그는 앞으로 한 걸음 나와 우연을 한쪽으로 밀어내려 했다.

우연은 경계하는 표정으로 단번에 창야의 손을 쳐냈다. 그녀는 친한 사람을 제외한 다른 사람이 자기 몸에 손대는 것이 몹시 싫었다.

희야가 잽싸게 우연의 앞을 막아서며 창야의 손을 잡았다.

“감히 누굴 건드려?”

“흥!”

우연은 몸을 앞으로 기울여 희야의 등에 기댄 채 창야를 향해 짓궂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손이 붙잡힌 창야는 수치심에 화가 나 희야의 얼굴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형이 뭔데 쟤를 싸고돌아? 쟤랑 무슨 사이인데? 뻔뻔스럽긴. 다른 사람들이 형을 중요하게 생각이나 하는 줄 알아?”

희야는 멍해져 한 걸음 물러났다.

“몰래 역적 집안이랑 왕래하면서 어디서 감히 입을 놀려? 이 땅하고 집하고 여기 모든 게 아버지 거야. 형 거 아니야. 형이 무슨 능력이 있다고 여자애 편을 들어? 쟤가 뭐 형한테 감동해서 나중에 희씨 가문 큰 도련님께 시집이라도 오길 바라?”

창야는 감추고 있던 악랄한 성미를 드러냈다.

“얘는…….”

희야의 낯빛이 돌변하더니 우연의 손을 꼭 잡고 한 발짝 앞으로 나갔다.

“얘는 내 거야! 네가 어쩔 건데?”

모두가 멍해졌다. 희야에게 손이 붙잡힌 우연은 얼굴이 새빨개졌다. 소년들의 눈빛이 모두 우연의 얼굴에 닿았다. 결국 이 상황을 견디지 못한 우연이 매섭게 희야의 손을 떼어내며 말했다.

“누가 네 거야?”

휙 돌아선 우연은 뒤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달아나 버렸다. 소년들도 우연을 뒤쫓아 갔다.

“하하하하하하.”

잠시 넋을 놓았던 창야가 폭소를 터뜨렸다. 그는 웃느라 비틀대면서 도망쳤다.

희야는 그곳에 서서 우연이 떼어내 버린 자신의 손을 말없이 쳐다보고만 있었다.

* * *

1) 훗날의 희야.

2) 에델바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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