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주표묘록-62화 (62/3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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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 창 (4)

밤이 깊어지자 인적이 드물었다. 모두가 잠자리에 든 시각. 희씨 저택의 본채에는 아직 초가 몇 개 켜져 있었다. 희겸정은 책상 앞에 앉아 아무 말 없이 뚝뚝 떨어진 촛농이 굳어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에휴. 일찍 주무세요. 그리고 수비 대인께 알리는 게 좋겠어요.”

희겸정의 부인은 남편의 청색 비단 도포를 벗기며 투덜댔다.

“대체 무슨 일인데 그래요? 나도 말하면 안 되는 거예요? 저녁 내내 우거지상을 하고서는 정말. 설령 진짜 악독한 자라고 해도 이 넓은 남회성에서, 그것도 수만 명이 지키고 있는데 살인이야 하겠어요? 그리고 그자가 문제를 일으켜서 당신까지 연루되면 우리 집안도 끝장날 거 아녜요.”

“더는 묻지 마시오.”

희겸정의 목소리는 드물게 냉담했다.

“부인도 알다시피 이 넓은 세상에는 절대로 우리가 관여할 수 없는 일이 있소. 날 내보내준 것만으로도 나는 무척 기쁘오. 더는 이 일을 입에 올리지 마시오.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고!”

한참 뒤 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부인은 영원히 이해하지 못할 거요. 그자들은 한 사람도 열 사람도 아니오. 어쩌면 수백, 수천일지도 몰라. 그들이 대열을 맞춰 돌격하면 하늘의 별자리도 변하고 제후의 대군도 기가 꺾여 퇴각한다오. 그들은 무신의 사도(使徒)요.”

등불 아래 희겸정의 안색은 이루 말할 수 없이 괴이했다.

“그들은 정말 그런 자들이오!”

“무신요? 당신도 놀라서 간이 콩알만 해진 모양이네. 창야가 그러는데 노인이 희야를 칭찬했다면서요?”

“희야는 확실히 무술에 천부적이오. 오늘 노인을 죽이려던 희야의 창이 내 가슴을 향했지. 절대로 피할 수 없는 것이라 난 죽을 각오를 하고 있었소. 그런데 그 녀석이 과연 창을 멈추더군.”

희겸정은 한숨을 내쉬고는 말을 이었다.

“창의 기세가 너무나도 강했소. 어쨌든 포악한 성질을 지닌 창이니까.”

“애초에 당신이 희야에게 창을 가르치겠다고 고집을 부려서 그런 거 아녜요.”

부인이 원망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창술까지 익혀서 새카만 두 눈이 더 사나워졌어요. 평소에 날 힐끗 쳐다만 봐도 얼마나 놀란다고요. 첩실의 아들을 창야보다도 더 잘 가르치다니 편애가 심한 거 아니에요?”

희겸정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심혈을 기울이는 건 창야요. 큰애가 연습하는 독룡세는 성질이 사납지. 올바르고 자연스러운 창술이 아니기 때문에 창야보다 빠르게 발전하는 거요. 내가 창야에게 가르쳐준 대제 검술이야말로 우리 희씨 가문 최고의 무술이오. 시작은 어렵지만 나중에는 희야를 뛰어넘을 거요. 그리고 창야는 무술 연마는 물론 글공부도 하니 희야보다 열 배, 백 배 더 큰 성취를 이루는 것도 어렵지 않지. 무사는 그저 몇몇 적을 막을 뿐이지만 창야에게는 일국을 통솔할 재능이 있으니 큰애와 어찌 비교하겠소.”

“그럼 희야는 뭐 하러 가르쳐요? 성질머리도 비뚤어졌는데 그자나 따라가게 두지.”

부인은 눈썹꼬리를 다소 누그러뜨렸지만 여전히 볼멘소리를 했다. 희겸정이 웃으며 말했다.

“친형제가 함께 전쟁에 나가야지. 큰애가 전도유망한 인재는 아니지만 무술을 좀 연마해두면 훗날 우리 창야가 큰 인물이 되었을 때 지켜줄 수도 있고 창야를 쫓아 무관이든 뭐든 될 수도 있지 않겠소. 다 창야에게 좋은 것이오.”

“역시 당신이 생각이 깊네요.”

부인은 더는 할 말이 없자 남편의 팔에 제 팔을 걸며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안쪽의 목소리는 차츰 낮아지더니 나중에는 킬킬대는 웃음소리만 들렸다. 분명하지는 않지만 미래의 일을 이야기하는 듯했다.

집 밖. 별빛과 달빛이 쏟아져 내렸다. 모처럼 고요하고 향기로운 밤이었다. 수많은 집 지붕 위로 흡사 수은이 한 겹 흐르는 듯했다.

아주 멀리, 널따란 처마 아래 야윈 인영 하나가 달빛도 비추지 못하는 어둠 속에 홀로 서 있었다.

집 안에서 흘러나오던 가느다란 목소리는 더 이상 잘 들리지 않았다. 희야는 고개를 들고 제 품의 맹호소아창을 응시했다. 창날의 한기에 가슴이 바르르 떨렸다. 희야는 집 뒤편의 작은 소나무 숲을 보았다가 다시 자신이 지내는 북쪽 곁채를 보았다. 그리고 다시 뜰 안의 푸른 풀로 가득한 돌바닥을 보았다. 하지만 어디로 가야 할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한 바퀴 돈 희야는 창을 안고 묵묵히 뜰 안을 거닐었다. 집 안의 희겸정도 희야가 왔다 갔다 하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희야의 발걸음은 몰래 숨어다니는 고양이를 닮았다. 희겸정은 늘 떳떳한 발걸음이 아니라고 했지만 사실 사나운 호랑이와 고양이의 발걸음은 별 차이가 없다. 희겸정이 사나운 호랑이를 본 적이 없을 뿐.

담벼락을 따라 걷던 희야는 좌우를 두리번거리더니 커다란 돌 몇 개를 옮겨와 사다리처럼 켜켜이 쌓고 소리 없이 담장 꼭대기로 기어 올라갔다. 희야는 잠자코 담장 위를 걸었다. 끝없이 펼쳐진 남회성이 희야의 발아래 깊이 잠들어 있었다. 계속 왔다 갔다 해 보아도 희야는 도무지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결국 희야는 자기 집 지붕에 앉아 두 다리를 감싸 안고서 무릎을 벴다. 찬 기운이 감도는 밤바람 속에서 잠이 든 것 같았다.

“희야, 희야…….”

가느다랗고 작은 목소리가 등 뒤에서 흘러왔다.

깜짝 놀라 깬 희야가 고개를 돌렸다. 눈앞에 붉은 장미색 두 눈이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꽃잎 같은 입술 가에는 짓궂은 웃음기가 어려 있었다.

“우연?”

희야는 낮에 찾아왔던 소녀를 알아보았다.

“네가 왜 여기 있어?”

“할아버지랑 나는 저쪽 여관에 묵고 있어. 바깥 구경을 하고 싶은데 낮에는 나오기가 불편해서 말이야.”

“불편하다니?”

우연이 눈을 크게 뜨고 목 옆의 연한 금빛 머리카락을 집었다.

“내 눈 색깔하고 이 머리칼을 봐. 내가 대낮에 어떻게 나올 수 있겠어? 오는 길에는 내내 쓰개를 쓰고 있었는데 가끔 벗어서 내던져버리고 싶은 걸 참았다니까. 말을 타고 머리칼을 흐트러트리며 달리고 싶은데 할아버지가 못하게 해. 정말 미워 죽겠어.”

“나도 봤잖아.”

희야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정말 예뻐.”

우연이 멈칫했다.

“사람들이 다 너처럼 단순하고 둔하면 좋으련만.”

희야는 우연의 말에도 화를 내지 않았다.

“돌아가. 밤이 깊었어. 밖은 위험하다고.”

“위험할 게 뭐 있어? 청주의 숲을 여행하면 우리 우족 마을이 자주 나와. 달빛이 가장 좋은 밤이면 우리 모두 흰색 얇은 비단 같은 치마를 입고 달빛 아래에서 손을 잡고 걸어. 불도 피우지 않아. 달빛이 치마 위를 비추면 투명하기도 하고 왕잠자리의 날개 같기도 해. 전해 오는 말로는 소녀가 그렇게 걷고 있으면 달의 신이 가장 나긋하고 아름다운 소녀에게 광채를 비추고, 소녀는 그럼 모두의 시선 속에 하늘로 날아가 신의 궁전으로 간대. 아쉽게도 난 그 모습을 보진 못했지만. 그래도…….”

우연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정말 너무 아름다웠어. 다들 정말 아름다워.”

희야는 우연이 집어 든 흰색 치맛자락을 보았다. 우연은 지붕마루 끝에 서 있었다. 우연의 금색 긴 머리칼 위로 하얀 비단 머리 장식이 산들바람에 흩날렸다. 사람 자체가 환상처럼 느껴졌다. 희야는 불현듯 우연이 맨발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반쯤 투명한 발이 가볍게 청회색 기왓장 위를 밟았다. 사뿐사뿐 까치발을 딛는 모양새가 언제든 날아갈 것 같았다.

희야는 말없이 일어섰다. 우연이 고개를 갸웃한 채 희야를 바라보았다. 아주, 아주 오래.

이를 알아챈 희야는 난감해하면서 자기 목을 붙잡고 말했다.

“돌아가. 여기는 청주가 아니라 남회야. 밤에는 도적이 있어. 칼을 들고 거리에서 재물을 약탈하지. 여러 지역에 흉작이 들어서 그곳 사람들이 완주로 옮겨 왔대. 하지만 여전히 굶주리다 보니 도둑질을 할 수밖에 없고.”

“이봐, 목석. 왜 이렇게 풀이 죽어 있어? 너희 아버지가 너한테 엄청 무섭게 굴던데 우리 가고 나서 또 혼났어?”

희야가 고개를 저었다.

“사실 자주 혼내지는 않아. 아버지는 날 신경 쓰지도 않지. 네 아버지는 너 신경 써?”

“본 적 없어. 돌아가셨거든. 근데 너 여기 앉아 있으면 안 추워?”

“안 추워. 난 추위를 별로 안 타. 아까는 창 연습을 하려고 했는데 하기 싫어졌어. 잠도 자기 싫고.”

“그럼 이야기나 하고 놀자. 용에 대한 얘기 듣고 싶어. 나 몰래 나온 거라서 할아버지가 깊이 잠들어야 돌아갈 수 있거든. 안 그러면 야단날 거야.”

“나도… 잘은 몰라.”

희야는 더듬더듬 말했다.

“괜찮아. 틀려도 상관없으니까 걱정 마. 네가 바다에 나가게 되었을 때 용을 그려 와서 보여주면 알게 되겠지.”

“용을 그리는 건 못해…….”

희야가 고개를 숙인 채 말을 이었다.

“난 말로만 할 수 있어.”

“뭐야? 약속했잖아? 시치미 떼기야? 너희 동륙 사람들은 다 이래?”

희야가 벌떡 일어섰다. 희야는 고집스럽게 고개를 돌리며 우연을 외면했다.

“그림으로도 보여줄 수 없어. 난 애초에 그림을 그릴 줄 모르거든. 아무도 안 가르쳐줬어. 난 글자도 모르는걸!”

우연은 잠시 멍해 있다가 입을 열었다.

“글자를 몰라? 너희 아빠가 안 가르쳐줬어? 너희 집에 책 되게 많던데…….”

“몰라!”

고개를 홱 돌린 희야가 우연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말했다.

“나는 모른다고! 아무도 안 가르쳐줬어! 난 멍청해. 배워도 소용없어. 너 왜 이렇게 귀찮게 굴어? 난 여기 혼자 있고 싶어! 너랑 할아버지가 가고서 나 아버지한테 맞았어. 잘못한 것도 없는데!”

살짝 무서워진 우연은 달아나고 싶었다. 그런데 시선을 들어 희야의 눈을 보니 진짜로 화가 난 것 같지 않았다. 희야는 반짝이는 새카만 두 눈을 힘껏 부릅뜨고 있을 뿐이었다.

“그럼 네 이름은 쓸 줄 알아?”

희야가 고개를 저었다.

우연은 잠시 망설이다가 다가가 희야의 손을 잡아당겼다. 그리고 손가락 하나로 희야의 손바닥을 살포시 눌렀다.

“그럼 내가 가르쳐줄게. 너희 동륙 글자는 우리 우족의 신사문처럼 어렵지 않거든.”

우연의 손바닥 온기를 느낀 희야가 손을 흠칫 떨었다. 희야는 갑자기 손을 훅 빼내고는 몸을 돌려 달아났다. 희야는 깊은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하늘은 온통 반짝이는 별들로 가득했다. 희야는 이어진 담벼락을 따라 죽어라고 달렸다. 어느새 뜰의 지붕도 지났다. 희야는 새처럼 빠르게 달아났다. 금발에 붉은 눈동자를 가진 소녀가 쫓아올까 봐 두려운 사람처럼.

마침내 희야는 봉황지 한쪽의 맑은 물가에 멈춰 섰다. 그곳에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가 두 손을 입가에 모으고 호수 맞은편 기슭에 대고 온 힘을 다해 소리쳤다. 그가 뭐라고 외치는지 아무도 알아듣지 못했다. 희야 스스로도 자기가 뭐라고 외치는지 몰랐다. 달빛 아래 종루(鐘樓)의 거대한 그림자가 희야의 몸에 드리워졌다. 문묘(文廟)1)의 종소리가 울리고 끝내 희야의 함성도 묻혀 버렸다.

한참을 서 있던 희야가 고개를 돌렸다. 종루의 지붕마루 위에 투명하게 반짝이는 맨발이 보였다. 우연이 그곳에 서 있었다. 소녀는 쭈뼛거리며 희야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치마끈이 바람에 가볍게 나부꼈다.

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를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정말 나한테 글 가르쳐줄 거야?”

희야가 제 코를 세게 비비며 고개를 들고 물었다.

“나, 배우고 싶어.”

* * *

1) 공자(孔子)를 모신 사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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