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주표묘록-61화 (61/3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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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 창 (3)

희겸정은 지극히 공손하면서도 물 한 방울 샐 틈 없는 방어 자세를 취했다. 맞은편에 있는 노인은 긴 창을 곧게 하늘로 향한 채 털털하게 웃으며 가만히 서 있었다. 노인의 몸에 걸쳐진 품이 넓은 흰옷이 바람에 부풀어 올랐다.

낙엽이 돌바닥을 쓸고 지나가며 스스슥 소리가 났다.

노인이 웃었다. 긴 창은 불어오는 바람에 비스듬히 기울어진 듯했지만 쓰러지지는 않았다. 살짝 한쪽으로 비켜난 창에 변화가 일었다. 독룡세와는 다른 흉포함이었다. 장렬한 은빛이 바람 속에서 가볍게 휘둘러졌으나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희겸정은 두려웠다. 그는 노인이 조직에서 어떤 지위에 있는지 정확히 몰랐다. 그가 진짜 ‘푸른 바다의 매’ 반지의 소유자인지도 의심스러웠다. 그러나 전혀 가늠할 수 없는 공격 앞에서 희겸정의 마지막 의혹은 사라졌다.

희겸정은 진중하게 중검을 세웠다. 공격할 힘이 없어 가만히 정지한 채로 노인의 변화에 대항했다.

노인은 희겸정을 보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줄곧 정처 없이 지면을 떠돌았다. 창은 흐르는 물처럼 움직이며 대치 상태를 무너뜨렸다. 단순한 일격이 완만하게 밀려가 검을 쥔 희겸정의 손을 곧게 찔렀다.

희야가 갑자기 가산 위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눈을 휘둥그레 떴다. 약한 공격이었지만 희야는 저도 모르게 전율했다. 노인은 부드럽게 엄지와 네 손가락을 가지런히 놓은 상태로 창대를 그러쥐었고 창날은 쉴 새 없이 가볍게 떨렸다. 희겸정은 움직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옷 아래로 노인의 몸이 쇠처럼 단단해지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노인이 선보인 창술은 피할 방도가 없는 죽음과도 같았다.

창날에서 희겸정의 손까지 남은 거리는 3척. 노인의 공세가 거의 다 소진되자 희겸정은 검을 움직였다. 산을 깎고 바위를 깨부수는 듯한 기세였다. 그는 고함을 지르며 앞으로 나아가 긴 창의 가운데를 그대로 내리쳤다. 창술의 고수는 창끝에 엄청난 힘을 응집시킨다. 그런 창날을 내리치는 것은 뱀의 머리를 치는 것과 같아서 일단 실수하면 그대로 되물리게 된다. 또한 창 꼬리 부분은 안정적이고 힘이 있으며 검의 길이로는 닿을 수 없었다. 희겸정이 내리친 위치는 바로 긴 창에서 가장 약한 지점이었다.

뱀을 잡는 것처럼 뱀의 7촌 부분을 잡아야 한다.

“잘한다!”

창야가 팔을 흔들며 크게 소리쳤다.

이렇게 짧은 거리에서의 긴 창과 짧은 검의 대결. 검이 우세를 점했다. 노인은 피할 수 없었고 검은 정확하게 창대를 내리찍었다. 그런데 순간 희겸정은 손이 가벼워졌다. 그는 자신의 힘이 완전히 부질없어졌음을 알아챘다.

이마 가득 식은땀이 맺혔다. 희겸정은 그제야 상대의 창에 힘이 하나도 실리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창은 그저 물살을 가르듯 한 차례 가볍게 진동했을 뿐이었다.

창날의 은색 빛살이 돌연 약동하기 시작했다. 은색 나비 한 마리가 날개를 펼친 듯했다. 긴 창은 공격해 오는 검의 힘을 빌려 소리 없이 회전했고 양측은 서로를 가볍게 스치고 지나갔다. 희겸정은 균형을 잃었다. 노인은 왼손을 떼고 한 손으로만 창을 쥐었다. 노인이 검지를 살짝 돌리자 긴 창은 불가사의한 각도로 희겸정의 오른손 팔뚝 위에서 뒤집히더니 비스듬하게 베었다.

“아버지, 조심하세요!”

희창야가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희겸정은 이미 피할 수도, 막을 수도 없었다. 묵직한 검은 그를 보호해 주지도 못할뿐더러 도리어 짐만 되었다. 희겸정은 검을 버리고 부상을 입은 채 필사적으로 후퇴했다. 그러나 소용없었다. 노인의 창날은 그의 팔뚝을 휘감은 뱀처럼 바짝 밀고 들어왔고 독의 심(芯)은 이미 희겸정의 피부에 묻었다.

사나운 범이 울부짖는 소리가 뜰 안에 울려 퍼졌다. 흡사 오래된 산속 깊은 곳에서 몰아쳐오는 듯했다.

“이봐, 희야! 뭐 하는 거야?”

소녀의 목소리는 삽시간에 호랑이의 포효에 집어삼켜졌다.

희야는 노인의 뒤에 있었다. 갑작스러운 돌진에 낙엽이 마구 흩날렸다. 어깨를 고정하고 팔뚝과 창대를 일직선상에 놓았다. 바로 노인이 말했던 ‘찬자(攢刺)’, 완벽한 모아 찌르기였다.

희야는 앞으로 세 걸음을 나아가며 창을 내밀었다. 온몸의 힘이 흐르는 물처럼 창신에 쏟아져 들어갔다. 세 번째 걸음의 마지막, 돌진하는 기세에 창을 내미는 힘이 더해지며 절정에 이르렀다. 팔이 완전히 펼쳐지는 순간, 호아창은 뒤에서 정확히 노인의 심장에 적중할 것이었다!

“멈춰!”

희겸정이 당황하며 소리쳤다. 차라리 팔을 잃으면 잃었지 노인이 자신의 집에서 죽는 것은 바라지 않았다. 오래된 풍문을 수도 없이 들었다. 무시무시한 그 조직은 함부로 건드려서는 안 되었으며 반역자는 무자비한 징벌을 받았다. 하물며 푸른 바다의 매를 죽이면 어떻겠는가.

노인의 웃음소리가 호랑이의 포효를 몰아냈다.

노인은 절대 불가능한 상황에서 훌쩍 날아오르더니 공중에서 여유롭게 몸을 돌렸다. 창야는 뛰어오른 노인이 공중에서 멈춘 듯한 착각이 들었다. 이어 노인이 은색 긴 창을 내리찍었다. 현장에 있는 사람들은 노인의 손에 들린 것이 창인지 아니면 다른 것인지 알아볼 수 없었다. 그저 은빛이 사방에 흩뿌려지고 나비처럼 오르락내리락 날아다니고 귀매처럼 변화할 뿐이었다. 호아의 창날 위로 탕탕탕탕 부딪치는 충격음이 짧고 빠르게 울렸다. 걷잡을 수 없는 기세로 날아오던 희야의 공격은 방향을 잃고 말았다.

흰색 옷자락이 희야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호아창을 휘감았던 은빛도 사라졌다. 희야는 깜짝 놀랐다. 그제야 호아창이 자기 아버지의 가슴을 겨누고 있음을 알아챘다. 그러나 멈출 수가 없었다. 누군가가 희야의 양쪽 어깨를 미는 것만 같았다. 독룡세는 본래 가장 맹렬한 창술이었다.

희겸정은 저도 모르게 손을 휘둘러 막으려 했다. 그런데 손에 아무것도 없었다! 아까 노인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 그는 자신의 검을 버렸다.

“할아버지!”

우연이 당황해 크게 소리쳤다.

은빛이 갑자기 사라지고 창날이 조용히 희야의 뒤통수를 가리켰다. 노인은 희야의 머리 위를 뛰어넘어 무사히 희야의 등 뒤에 착지했다. 희겸정은 우두커니 그곳에 서 있었다. 한참이 지나고 식은땀 한 방울이 볼을 타고 또르르 흘러내리는 것이 똑똑히 느껴졌다. 살을 에듯 몹시 차가웠다. 희야의 창이 곧게 자신의 미간을 향하고 있었다. 살벌하고 맹렬한 독룡세가 한 치 앞으로 다가왔다. 노인은 호아창을 피하면서 공격의 기세를 희겸정 앞으로 끌어당긴 것이다.

마지막 순간, 희야는 그가 말했던 대로 정말 창을 멈추었다. 그러나 희겸정은 여전히 가슴에 싸늘한 통증이 느껴졌다. 흡사 무언가에 찔린 듯했다. 그것은 창끝의 날카로운 바람이었을까? 아니면 아들이 창을 내지를 때의 냉혹하고 매서운 눈빛이었을까.

“방금 전 내가 창을 몇 번이나 냈는지 보았느냐?”

노인이 웃으며 물었다.

희야는 고개를 저었다.

“132번이다.”

희야는 헉 하고 숨을 뱉으며 지친 듯 바닥에 주저앉았다.

노인은 창을 거두고 고개를 끄덕였다.

“똑똑한 아이구나. 하지만 방금 그것은 최고의 찬자가 아니었다.”

희야는 고개를 돌렸다.

“최고의 찬자는.”

노인은 하늘가의 붉은 노을을 보며 무언가를 회상하는 듯했다.

“멈출 수 없다. 그것은 하늘에서 내린 창술로 무신의 손끝에서 나오는 것이다.”

“어르신…….”

희겸정이 머뭇거렸다.

노인이 손을 내두르며 그의 말을 끊었다. 그는 앞으로 나아가 희야의 팔을 가볍게 툭툭 쳤다.

“팔에 힘이 있구나. 하지만 내가 어떻게 창을 그리 빨리 쓸 수 있었는지 모르겠지? 내가 왜 너에게 찬자의 방법을 알려주어 놓고 나는 이런 변화무쌍한 창술을 썼는지도 이해가 안 될 테지? 넌 어떤 창술이 가장 좋은 것인지도 모를 거야, 그렇지?”

희야가 고개를 끄덕였다.

“똑똑한 아이구나. 내 상으로 너에게 기회를 한 번 주마.”

노인은 자신의 은색 창을 희야에게 건넸다.

“내 창을 잡아봐라.”

희야는 노인을 한 번 쳐다보고는 손을 내밀어 창을 잡았다. 희야의 낯빛이 돌변했다. 그러나 노인은 어느새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창을 거둬갔다.

“이해가 되느냐?”

희야가 고개를 끄덕였다.

“넌 똑똑한 아이다. 네 무기도 아주 좋은 것이지.”

노인은 호아창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 창이 네 마음을 해치지 않게 해라. 호아창은 불같이 사나운 창이다. 아주 오래전에도 그랬어.”

노인은 고개를 돌려 희겸정을 보며 말을 이었다.

“희씨 가문에 마침내 호아창을 이어받을 사람이 나타났군. 그래서인지 과거가 떠올랐네.”

노인은 우연의 손을 잡고 문밖으로 걸어갔다.

“희 선생. 그 반지는 녹여버리게. 그것의 사명은 혈연을 타고 흐르는 것이 아닐세. 그것을 위해 싸우고자 하는 사람만이 무신의 진정한 추종자가 될 수 있네. 그대도 알겠지만 많은 사람이 그것을 위해 일생의 대가를 치렀어. 그대가 원치 않는다면 강요하지는 않겠네.”

희겸정은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내가 여기에 온 것을 남들에게는 알리지 말게.”

노인은 고개를 돌려 의미심장한 얼굴로 희겸정을 쳐다보았다.

“비록 그대가 더는 우리의 일원은 아니지만 반지의 계승자로서 조직의 규칙은 알고 있겠지!”

“네!”

희겸정은 고개를 숙였다.

정원의 대문이 쿵 하고 닫혔다. 한참을 그곳에서 멍하니 서 있던 희야가 후다닥 뒤쫓아 가려 했다.

희겸정이 희야의 팔을 덥석 붙잡았다.

“망할 놈의 자식. 어디를 가려고?”

희야는 제 아버지의 말을 못 들은 것처럼 몸부림치며 팔을 뿌리치려 했다. 희겸정이 버럭 성을 내려는데 갑자기 등 뒤에서 비명이 들려왔다. 휙 돌아보니 별당에서 꽃을 심고 있어야 할 부인이었다. 기척을 듣고 달려 나온 그녀는 돌바닥에 밟혀 죽은 청록색 앵무를 보고 대성통곡하고 있었다.

“갓 사온 건데, 갓 사온 건데!”

희겸정은 갑자기 그 앵무새가 떠올랐다. 희야와 창야가 대련했을 때 광풍 같은 찌르기에 멍청한 앵무새는 피할 겨를도 없이 그대로 희야의 발에 밟혀 죽었다. 어쩐지 눈에 익는다 싶었더니 꽃을 가꾸고 새를 기르는 걸 좋아하는 부인이 밖에서 사온 지 얼마 안 된 것이었다.

“어머니, 어머니.”

창야가 제 엄마의 손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희야가 밟아 죽였어요.”

순간 멈칫한 희겸정은 갑자기 희야의 팔을 붙잡았던 손을 놓더니 호되게 희야의 뺨을 때렸다.

“쫓아가고 싶으면 가라. 단, 돌아올 생각은 마! 너 같은 아들은 필요 없다. 죽어도 그만이야.”

고개를 든 희야는 붉어진 얼굴을 어루만지며 세 사람이 본채 처마 아래로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희야는 도망가지도 않고 우두커니 서 있었다. 햇빛이 거둬지고 뜰 안에는 서서히 어둠이 내려앉았다.

노인은 우연의 손을 붙잡고 문밖에 서 있었다. 그는 침묵한 채 맞은편 길가의 인파를 바라보았다.

우연이 고개를 들고 노인에게 물었다.

“할아버지. 원래 저 사람을 죽이려고 했었죠?”

“그래. 아들의 손을 빌려 그를 죽이려 했다.”

노인이 우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아가. 묻지 말아라. 너는 이런 더럽고 추악한 일을 몰라야 해.”

우연이 할아버지의 손을 잡아당겼다.

“할아버지. 저 사람을 살려주세요. 저 사람이 죽으면 희야는 아빠가 없어지잖아요.”

우연은 고개를 숙이며 말을 이었다.

“아빠가 없으면 나처럼…….”

“하지만 저자는 우리 일을 너무 많이 알고 있어. 살려두면 제후들에게 밀고할 테니 위험부담이 너무 크구나. …희양의 손자도 나약하고 평범하겠지.”

노인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네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구나. 아이가 무슨 죄겠느냐. 아이들에겐 아비가 있어야지.”

노인은 우연을 안아 말 등에 태웠다.

“모든 위험은 우리가 지자꾸나. 천구의 뜻을 받들 사람이 더는 없는데 나라고 죽은들 어떠하겠느냐? 마지막 남은 천구 무사도 마땅히 선배들처럼 죽어야겠지. 제후들의 자객을 기다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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