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주표묘록-60화 (60/3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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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 창 (2)

희야가 천천히 창을 품에 안았다.

아까 전 마지막 찌르기가 못내 만족스럽지 않았다. 손목을 찌르는 통증 탓에 전력을 다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희야는 천성적으로 또래 아이들보다 힘이 셌지만 24근1)이나 나가는 호아창은 성인에게도 버거운 무게였다. 희야는 이따금 생각했다. 대체 어떤 사람이 이렇게 화염 한 덩이를 손아귀에서 부리는 것 같은 무시무시한 창을 사용했을까.

천천히 호흡을 골랐다. 희야의 눈빛이 순간 반짝했다. 그는 새카만 눈동자를 뒤편의 소나무 숲으로 돌렸다. 야수처럼 예민한 희야는 직감적으로 무언가가 그를 압박해온다는 느낌이 들자 불안해졌다. 희야는 기를 회복하는 속도가 보통 사람보다 훨씬 빨랐다. 잠깐 호흡을 가다듬자 두 팔에 다시 힘이 생겼다.

네 손가락이 창대를 쓸고 지나가며 호아창이 두 팔 사이에 자리했다. 희야의 몸은 팽팽하게 당겨진 강궁(强弓) 같고 그 활에 섬뜩하고 커다란 화살이 걸려 있는 듯했다.

희야는 움직이지 않고 나직하게 말했다.

“나무 뒤에 누구지?”

희야는 호아창으로 소나무 숲의 어느 지점을 가리켰다.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말로 형용하기 힘든 압력에 희야의 가슴이 더 빠르게 뛰었다. 희야는 진짜로 무슨 인영 따위를 본 것은 아니었다. 다만 바늘이 등을 찌르는 듯한 강렬한 느낌이 들었다. 누군가가 눈빛으로 그를 꿰뚫어보는 것 같았다.

뜻밖에도 웃음소리가 자그맣게 전해졌다.

“창의 속도를 더 빠르게 하고 싶다면 찌를 때 힘이 더 맹렬해야 한다. 폭발력만으로는 소용없어. 관건은 팔의 위치를 조정해 팔뚝과 창대가 일직선이 되게 하는 것이다. 기를 내뱉는 순간 모든 힘을 내보내라. 팔이 다 뻗어졌을 때 창끝이 적의 심장에 닿아야 한다. 이르면 힘을 다 내뿜을 수 없고 늦으면 네 몸이 창의 위력에 방해가 될 것이다.”

한 노인이 숲에서 느릿느릿 걸어 나왔다. 그는 희야의 손에 쥐어진 위험한 무기는 전혀 개의치 않는 모습이었다.

누군가가 엿보는 듯하던 불안감은 삽시간에 사라졌다. 노인은 우호적인 미소를 지었다.

희야는 창을 거두고 의아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노인은 다른 사람과는 달랐다. 등의 갈기가 무릎까지 늘어진 민첩한 백마를 끌고 흰색에 가벼운 재질로 된 외투를 몸에 걸쳤다. 머리칼도 온통 새하얬다. 빙설 속에서 걸어 나온 순백의 형상처럼 노인은 보는 이가 스스로의 행색이 부끄러워질 정도로 눈부셨다. 그는 한 손에 흰옷을 입은 소녀의 손을 붙잡고 있었다. 가볍고 부드러운 눈송이 같은 소녀는 눈이 보석처럼 투명하고 깨끗했다.

“희가 성을 쓰느냐?”

노인이 살며시 웃으며 물었다.

“희야라고 합니다. …제 이름은 어떻게 아세요?”

“나는 널 모른다.”

노인의 눈빛이 호아창에 모아졌다.

“하지만 그 맹호소아창은 내 평생 잊을 수 없지.”

희야는 의아한 눈으로 자신의 창을 쳐다보았다. 그는 자기 창의 내력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

“좀 봐도 되겠느냐?”

노인이 가볍게 물었다.

거절할 수 없는 노인의 목소리와 표정에 희야는 미끄러지듯 손에서 창을 빼 건넸다. 노인은 노쇠한 손으로 살며시 창을 어루만졌다. 창날의 등부터 창대의 칼자국에 이르기까지 창을 살피는 노인의 표정은 상당히 진지하고 경건했으며 약간 슬퍼 보이기도 했다.

끝으로 노인은 창날 아래의 작은 상징 문양을 만졌다.

“무슨 뜻인지 아느냐?”

희야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 인장은 ‘마목이두사과리아(麻木爾杜斯戈里亞)’. 하락의 문자다. 300년 전 화산 하락족의 고대 글자지. ‘맹호의 이빨이 비겁한 자들의 영혼을 찢어발기리라’라는 뜻이다.”

노인의 목소리는 경외감으로 가득했다.

“다시 보니 벗을 만난 듯하구나. 여전히 창의 숨결이 들리고 그것의 의지가 느껴져.”

노인은 창날을 뺨에 가져다댔다. 그의 목소리는 나지막한 노랫소리 같았다.

“우리 모두 죽지 않았구나!”

노인이 희야에게 창을 돌려주며 말했다.

“고맙다.”

노인의 몸 뒤편으로 기다란 형태의 꾸러미가 보였다. 새하얀 비단으로 감싸진 그것은 길이가 8척이 넘었다. 노인도 이미 7척을 넘는 놀라운 키인데 그보다도 더 길었다. 희야는 노인의 꾸러미를 응시했다.

“그것도 창입니까?”

희야가 노인의 등 뒤 꾸러미를 가리키며 물었다.

노인은 살짝 놀란 듯 물었다.

“어떻게 알았지?”

“제가 어르신의 키였다면 그것이 창으로써 가장 적절한 길이니까요. 그리고 어르신께서 하신 말씀이 매우 맞는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럼 분명 창을 쓰는 무사일 테니 창을 지니는 게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보려무나.”

노인이 곁에 있는 소녀를 잡아당기며 말했다.

“하당에도 이렇게 똑똑한 소년 무사가 있구나.”

자신을 무사라 부르자 희야는 몹시 놀랐다. 소녀의 미소에 희야는 더욱 놀랐다. 소녀가 웃을 때 보석 같은 두 눈이 눈부시게 반짝거렸는데 놀랍게도 희야가 전에 본 적 없던 심오한 장밋빛의 붉은색이었다.

“아가. 네 부친을 만나야겠다.”

노인은 오른손에 낀 쇠 반지를 빼 희야에게 건넸다.

“네 부친에게 이것을 보여줘라.”

희야는 처음 보는 반지였다. 그는 어쩔 줄 몰라 하며 반지를 손바닥에 움켜쥐었다. 얼음처럼 차가웠다. 하지만 희야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어느 날 그것이 불타게 되리라고는.

희겸정의 손바닥에 놓인 반지에서는 연푸른 쇳빛이 스며 나왔다. 매우 소박한 반지였지만 벌겋게 타는 숯처럼 희겸정의 손바닥은 델 듯 뜨거웠다. 엄지에 끼우기 딱 알맞은 둘레에 약간의 틈이 있었다. 손가락의 배 부분이 닿는 안쪽은 거울처럼 광이 났고 윗면에는 별을 물고 있는 매의 머리가 있었다. 희겸정은 손가락으로 반지 안쪽의 미세한 명문(銘文)을 만졌다.

“북극성의 신이자 호한(浩瀚)의 주인이 범람하는 바다를 한없이 노닐지어다.”

이번 생에 이 반지를 다시 보게 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거의 백 년 만에 ‘푸른 바다의 매’ 반지가 희씨 가문을 찾아올 줄이야. 불길한 아들이 불길한 손님을 데려왔지만 희겸정은 분노할 기력조차 없었다. 뼛속을 파고드는 한기가 그를 휘감았다.

결국 이 날을 피할 수는 없었던 것인가.

희겸정은 애써 정신을 가다듬고 희야에게 말했다.

“나가서 손님을 바깥 대청으로 모셔라.”

희야가 떠나고 희겸정은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다가 뒤채로 들어갔다. 대대로 전해 오는 철갑 상자는 여전히 벽 속에 단단히 밀봉된 채 덮개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상자를 열자 노인의 것과 똑같은 쇠 반지 하나가 그 안에 조용히 뉘어져 있었다. 어릴 때부터 희겸정은 이 반지를 두려워했다. 그는 이 반지가 살아있다고, 생명이 있고 사고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반지는 그저 깊이 잠들었을 뿐 반드시 깨어날 것이었다.

희겸정은 살며시 반지 안쪽의 명문을 어루만졌다.

“북극성의 신이자 창청(蒼青)의 주인이 가없는 하늘을 자유로이 비상(飛翔)하리라.”

두 개의 반지가 한곳에 놓인 것이 실로 얼마 만인지 알 수 없었다. 푸른 군주의 매와 푸른 바다의 매가 만나다니 도대체 이 무슨 불길한 예시란 말인가?

“철갑은 영원하리.”

희겸정이 대청으로 한 걸음 내디디며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이 구호를 뱉었다. 소리 내어 말해본 것은 태어나서 이번이 처음이었는데 자기 목소리가 아닌 것 같았다.

“영원하리!”

노인은 조용히 희겸정을 바라보며 나직하게 말했다.

“희야는 나가 봐라.”

노인은 소녀의 머리도 쓰다듬으며 말했다.

“우연. 너도 나가서 잠시 놀고 있어라.”

희야는 의아한 얼굴로 제 아버지 손가락에서 반짝이는 쇠 반지를 보았다. 아까 자신이 아버지에게 전한 반지는 아버지 손에 들린 쟁반 위에 놓여 있었다. 노인은 매와 같은 눈으로 희겸정의 엄지에 끼워진 반지를 상당히 집요하게 응시했다.

“우리 나가서 놀자.”

꾀꼬리의 지저귐처럼 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희야는 고개를 돌려 매우 아름다운 진홍색 눈을 마주했다. 우연은 희야를 잡아당기려 손을 뻗었으나 희야는 깜짝 놀라며 피했다. 흠칫한 우연은 맞은편의 불안해하는 검은 눈동자의 소년을 보았다. 소년은 안절부절못하는 작은 짐승처럼 시선을 돌리고 있었다.

한참이 지나고 희야는 손바닥을 자기 가슴에 슥슥 닦고서는 손을 내밀어 우연의 손을 잡았다.

두 사람은 악수를 했다. 이렇게 첫 번째 인물과 두 번째 인물이 만났다. 패업(霸業)이든, 숙명이든 모두 이로써 시작되었다.

오랜 세월이 흐른 뒤 우연은 두 사람이 처음 만났을 때 희야의 군색했던 모습을 농담처럼 말하곤 했다. 하지만 희야는 웃지 않고 이렇게 대꾸했다.

“어릴 때 난 내 손이 다른 사람보다 더러운 줄 알았어.”

“왜?”

“내 손을 잡으려고 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거든. 너 빼고.”

대청의 문이 꽉 잠겼다. 아이들은 불안했지만 그저 멀뚱히 밖에서 기다렸다.

“청주에서 왔어?”

희야는 뜰 안의 가산(假山)2) 위에 앉아서 우연과 이야기를 나눴다. 유례없는 일이었다. 희야가 누군가에게 먼저 말을 거는 경우는 드물었다. 그러나 청주는 너무나도 신비한 땅이었고 희야는 그곳을 몹시 동경했다. 청주는 오래된 푸른 숲으로, 숲속 깊은 곳에는 우족의 고대 신전이 있었다. 아침 태양 아래에서 소녀가 등의 날개를 흔들면 깃털처럼 구름 위로 날아올랐다. 열두 살짜리 소년에게 청주는 평생 아무리 애를 써도 갈 수 없을 만큼 먼 곳이었다.

“응.”

우연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거기 사람들은 정말 날 수 있어?”

“그럼. 안타깝게도 1년에 딱 한 번 자유롭게 날 수 있어. 만약 그날 비가 오기라도 하면 흠뻑 젖어서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돼.”

우연은 조금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물에 빠진 생쥐라는 말은 동륙을 지나면서 배운 말이었다.

“사람은 무겁잖아. 날면… 안 힘든가?”

우연은 희야를 쳐다보았지만 곧바로 대답하지는 않고 능글맞게 웃기 시작했다.

“넌 날지도 못하면서 그건 왜 물어?”

“아니…….”

희야는 잠시 머뭇했다가 말을 이었다.

“하늘 높이 날면 얼마나 좋을까 싶어서!”

“사실 처음 날면 정말 좋아. 하지만 점점 그냥 그래져. 어딜 봐도 숲이거든. 아무리 더 높이 난다고 해도 더 멀리, 더 멀리에 있는 숲밖에 안 보이지.”

“어디 어디 가봤어?”

“한주랑 중주를 지나 계속 남쪽으로 내려오면서 여러 곳에 가봤지. 넌 어디 가봤어?”

희야는 잠시 침묵했다가 입을 열었다.

“우리 집은 전에 중주에 살았는데 나중에 남회로 이사 왔어.”

희야는 화제를 돌리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다른 곳은 안 가봤어. 하지만 나중에 구주 대륙 곳곳을 다 갈 거야. 과부와 하락족이 사는 곳에도 갈 거야. 배가 있으면 바다에 나가 인어와 용도 찾을 거야.”

“용은 아주, 아주 먼 바다에 있다고 들었어. 하락족의 영지는 유난히 덥고 과부를 찾으려면 큰 산을 엄청 많이 넘어야 한다더라. 북쪽의 얼음과 눈은 1만 년이 지나도 안 녹는대.”

우연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너 거짓말하는 거 아니지?”

“아니야!”

희야의 얼굴이 발개졌다.

“난 더위는 안 무서워. 산 넘는 것도 별거 아니야. 용이 아주 멀고 먼 바다에 있다면 우족에게 가장 큰 배를 만들어 달라고 부탁해서 그걸 타고 바다로 나갈 거야.”

그 이야기까지 하고 나자 희야는 얼굴이 정말로 빨개졌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희야는 자기가 붉은 눈동자를 가진 소녀의 관심을 끌려고 이런 말들을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희야는 목을 꼿꼿이 세우고 얼굴을 굳히며 두려운 기색을 조금도 드러내지 않으려 했다.

희야의 진지함에 감동한 우연은 마음속에 믿음이 생겼다. 이 신기한 소년이라면 정말로 아주 먼 곳까지 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그런 믿음. 우연은 약간 괴로워졌다.

“나도 갈 수 있으면 좋겠다. 하지만 할아버지가 절대 안 보내줄 거야. 한주의 초원에는 곳곳에 말 떼가 있고 그 끝이 한눈에 다 안 보인대. 그곳 사람들은 모두 말을 탈 줄 알고 말 등에서 구르기도 할 수 있다더라. 말고삐를 놓고도 떨어질까 봐 두려워하지 않고 수십 명이 말을 타고 늑대를 잡는대. 나 너무너무 거기에 가서 말을 타고 싶어. 하지만 할아버지가 못 가게 해. 그러니 끝이 안 보이는 넓은 바다에 용 보러 가는 건 꿈도 못 꿔.”

한주의 풍경 역시 희야는 생각해본 적 없었다. 그는 몹시 끌렸지만 티를 내지는 않았다. 그저 발아래 바위를 툭툭 찰 뿐이었다.

“그럼 나중에 내가 바다에 나가면 용의 모습을 그려 와서 보여줄게.”

“좋지!”

우연이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너 그림은 그릴 줄 알아?”

희야는 순간 멍해졌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숙인 채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우연은 희야의 표정을 알아채지 못했다. 그녀의 시선은 대청 밖으로 나온 희겸정과 노인에게로 쏠렸다.

“저기 봐!”

이상한 분위기를 감지한 우연은 황급히 곁에 있는 희야를 잡아당겼다.

희겸정의 허리춤에는 장검이 한 자루 있었다. 3척 남짓한 길이에 너비는 거의 1척 반, 칼등은 유달리 두꺼웠다. 그리고 노인이 원래 등에 지고 있던 창은 이미 비단이 끌러져 있었다.

희야는 안색이 살짝 변했다. 자신의 아버지가 가진 검은 전장에서 쓰는 검으로 평범한 패검(佩劍)과는 달랐다. 두껍고 무거우며 검의 날이 예리하지는 않지만 질기고 실해서 충분히 상대의 갑옷과 무기를 가를 수 있으면서도 쉽사리 뒤집히지 않았다. 우아하고 완곡한 것을 숭상하는 하당국 검사(剑师)들은 이런 놀라운 위력을 가진 검을 주조하는 일이 매우 드물었다. 뜻밖에도 희겸정은 전장에서 사용하는 이런 중검을 시험해 보려는 모양이었다. 노인의 창은 희야의 호아창과 똑같은 형태였다. 다만 온통 은백색에 석양 속에서도 그 빛살이 매우 장렬했다.

“희창야, 희야. 손님들 데리고 비켜라.”

희겸정이 천천히 검을 뽑았다.

희창야는 벌써부터 바깥의 인기척을 듣고 신기해하며 구경하고 있었다. 제 아비의 검술을 매우 신뢰하는 터라 별다른 걱정은 하지 않았다. 그는 고개를 돌려 희야 곁의 아리따운 소녀를 훔쳐보았다.

글공부를 한 희창야는 희야와 달리 귀족으로서 준수해야 할 예의범절을 알았다. 함부로 낯선 소녀를 쳐다보는 것은 당연히 실례였다. 그러나 쳐다보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껏 세상에 이렇게 옥처럼 맑고 깨끗한 소녀가 있다고는 상상도 해본 적이 없었다. 피부는 분을 바른 듯 영롱했지만 실제로 분을 발라도 저 소녀처럼 부드럽고 자연스러운 연홍빛이 나지는 않았다. 소녀의 눈썹은 그린 것처럼 또렷했다. 단정치 못하게 쓰개 밖으로 삐져나온 가느다란 금빛 머리칼 한 가닥이 뺨 옆으로 짓궂게 말려 올라가 파르르 떨렸다.

창야의 마음도 소녀의 가는 머리카락을 따라 오르락내리락했다. 그는 곁눈질하면서 입술을 깨물었다.

희창야의 반짝이는 눈빛을 알아챈 우연은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웃어 주었다. 찰나의 환한 얼굴에 겨우 열 살 된 창야는 그만 부끄러워졌다. 그는 엉큼한 속셈이라도 들킬세라 황급히 고개를 돌리며 관심 없는 척했다.

우연은 조금 화가 났다. 창야의 행동에 언짢아진 것. 잠시 후 다시 소녀를 쳐다보고 싶어 근질근질해진 창야가 흘끔 곁눈질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우연이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우연은 성질이 난 작은 들고양이처럼 멀리서 창야를 노려보고는 몸을 움츠리며 희야 곁으로 피했다.

희야의 호리호리한 몸에 창야의 시선이 완전히 가로막혔다. 창야는 손가락을 말아 쥐었다. 속에서 부아가 치밀었다.

* * *

1) 1근은 0.6kg, 약 14kg.

2) 인위적으로 산악을 본떠 만든 조경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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