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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참랑(斩狼): 늑대를 베다 (7)
“대군. 저도 죽을 날이 머지않아 이곳을 얼마 지키지 못할 듯합니다.”
문을 지키던 노인이 대군의 뒤에 무릎을 꿇었다.
대군은 잠시 침묵하다가 말을 꺼냈다.
“그간 고생 많았다. 사람을 바꿀 때가 되었군. 준비하고 있다가 새로운 사람이 오면 여기를 떠나라. 1천 유목민을 내려줄 테니 데리고 남쪽 초목장으로 가서 방목하며 살고 평생 돌아오지 말아라.”
“여기를 떠나고 싶지 않습니다. 청하옵건데 제가 죽은 뒤 이곳에서 불태워 주십시오. 제 아들은 모두 전쟁터에서 죽었고 제 여인도 죽었습니다. 하사해 주시는 상은 제게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그와 함께 십수 년간 전쟁터를 누볐으면서 죽어서까지 함께하고 싶은 것이냐?”
대군은 돌아보지도 않고 말했다.
“허락하마.”
대군은 아소륵의 손을 잡고 동굴 밖 빛이 있는 곳으로 나아갔다. 차츰 멀어지는 어둠 속에서 아소륵은 보았다. 동굴을 지키는 노인은 내내 공손하게 머리를 바닥에 조아리고 있었다.
부자(父子)는 마침내 동굴 밖의 햇살을 흠뻑 맞았다. 아소륵은 가슴속 깊은 곳에서 솟아나는 피로를 느꼈다.
“네 형제들 중에 할아버지를 본 사람은 네가 유일하다. 할아버지도 널 보아서 흐뭇하셨을 게야. 이 비밀을 지켜야 한다. 그리고 대벽지도는 영원히 기억에서 지워버려라. 애초에 못 들은 거로 쳐.”
대군이 조용하게 말했다.
“대벽지도는 현일의 망령이다. 그것은 사람의 영혼을 빨아들여 미치광이로 변하게 하지. 우리 여씨 파소이 가문의 혈맥에 기생하는 마귀가 이번 대에서는 너를 선택했구나. 아소륵, 늑대 떼 앞에서 너는 이 아비를 구했지…….”
아소륵이 고개를 들어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대군의 입꼬리가 강하고 날카로운 선을 그리며 올라가 있었다.
“나는 마귀의 손아귀에서 내 아들을 구해낼 것이다!”
대군이 말했다.
새끼 양이 공중에 높이 들어 올려졌다. 새끼 양은 발버둥 치며 구슬피 울었다. 뜨거운 양의 피가 흘러내려 소년의 머리에 뚝뚝 떨어졌다. 소년의 하얀 옷이 붉게 물들었고 소년의 머리를 누르는 손 또한 붉게 물들었다.
“나의 아들 여귀진 아소륵 파소이, 반달 천신께서 자애롭게도 너를 우리 여씨 파소이 가문에 태어나게 해주셨다. 천신께서는 네게 눈을 내려주시어 매처럼 멀리 보게 하고, 두 다리를 주시어 표범처럼 민첩하게 달릴 수 있게 하셨으며, 두 손을 주시어 신산을 들어 올릴 수 있게 하고 축복을 내리시어 더는 두려움에 떨지 않게 하셨다. 이제 너는 넘지 못할 산이 없고 뚫지 못할 눈보라가 없으며, 무찌르지 못할 적이 없다. 아득히 먼 곳으로 가더라도 신의 축복이 너와 함께할 것이다.”
대군이 아들의 정수리에서 양의 피로 범벅이 된 손을 떼었다.
“오늘 이후 아소륵이라는 이름은 쓰지 마라. 동륙 제후의 손님으로 동륙의 예절과 지식을 배우고 동륙 이름인 여귀진을 써라.”
“네. 아버지.”
대군은 고개를 돌려 뒤편에 줄지어 선 귀족들을 보았다. 9왕이 진안부에서 개선하고 돌아오던 그날처럼 모든 귀족이 화려하게 차려입고 긴 칼을 허리에 찬 채 하얀색 표운기를 들고 있었다. 단지 이번에는 세자 아소륵의 남행을 배웅한다는 점이 달랐다.
“태양이 천정점(天頂點)에 오르면 그때 출발이다. 가기 전에 네 어미와 다시 작별인사를 나누겠느냐?”
아소륵이 고개를 돌리자 작은 비단 어가가 보였다. 그의 어머니는 천 인형을 안고 멍한 눈빛으로 소리 없이 웃고 있었다.
“아뇨. 어머니가 저를 못 알아보시는 게 어쩌면 더 좋을지도 모르겠네요…….”
아소륵이 고개를 내저었다.
“천 인형이 어머니와 계속 함께하면 되겠죠. 저는 좋은 아들이 아니에요. 하루도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리지 못했어요…. 아버지, 마지막으로 한 가지 여쭙고 싶은 게 있어요.”
“말해라.”
“아흠막도가 제 할머니인가요?”
“그래. 네 할머니시다. 그분은 멀리 동륙에서 오셨다. 진짜 공주셨지. 만족 이름이 아흠막도. 뜻은 금색 태양이고 정말 태양처럼 아름다우셨다. 누구든 어머니의 미소를 보면 평생 잊지 못했지.”
“아버지. 할아버지를… 원망하세요?”
“그래. 원망한다. 내 삶의 중요한 사람들을 모두 빼앗아가셨거든.”
대군이 먼 곳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아마 그렇지 않았다면 나는 대군이 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대군이 되고 덩그러니 혼자 남았으니 뭐가 즐겁겠느냐?”
대군이 아소륵 앞에 반 무릎을 꿇고서 살포시 아들의 손을 잡았다.
“아소륵. 너도 다 컸으니 스스로 길을 선택할 수 있다. 이 아비는 네가 진안부에서 돌아온 날 금장궁에서 했던 말을 줄곧 기억하고 있었다. 나는 네가 착한 아이라는 것을 안다. 넌 다 네 책임이라고 생각하지. 네 사촌 형인 백로합처럼 말이야. 하지만 네가 했던 말처럼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이의 삶이 쉽지 않다. 모든 걸 네가 짊어지려 하지 마라. 너도 힘들지 않으냐. 이 아비와 어미는 우리 아들이 초원에서 말을 방목하며 가난하게 살아도 좋으니 즐겁게 살아가는 것을 보고 싶을 뿐이다.”
“아버지는 제가 진안부에서 어떻게 살아서 돌아왔는지 내내 안 물어보셨죠.”
“말해 주겠느냐?”
아소륵이 고개를 들어 아버지의 얼굴을 보았다. 말없이 먼 곳을 바라보는 대군의 모습은 흡사 모래바람에 깎여나간 석상(石像) 같았다.
“달빛이 비추던 밤이었어요. 저는 가륜첩 유모와 함께 있었는데 유모는 흰색 표범 꼬리를 제 손목에 묶어주면서 이게 있으면 아무도 저를 해치지 못할 거라고 했죠. 하지만 최전선이 무너지고 다들 후퇴해 내려왔어요. 진안부 숙부들은 장막을 하나하나 뒤지며 표범 꼬리를 달고 있는 저를 찾았어요. 숙부들이 달려 들어와 날 죽이려 했고 유모가 말렸지만 그 숙부는 실성한 것 같았고 유모가 결국 등 뒤에서 숙부를 찔러 죽였죠…….
우리는 장막에서 뛰쳐나왔는데 영채가 전부 불타고 있었어요. 벌써 들이닥친 9왕의 대군이 도처에서 사람들을 죽였죠. 수많은 사람이 바닥에 누워 있었는데 제가 흔들어 봤지만 그들은 다시 일어나지 못했어요. 유모는 저를 가난한 사람의 옷으로 갈아입히고 끈으로 제 소맷부리를 단단히 동여맸어요. 그녀는 저를 말에 태우고선 도망치는 사람들과 함께 가라고 했어요. 그리고 진안부 사람들 앞에서는 절대 표범 꼬리를 드러내선 안 된다고 했죠.
저는 붙잡혔어요. 청양의 세자라고 말했지만 아무도 제 말을 듣지 않았죠. 저는 다른 아이들과 함께 마굿간에 갇혔어요. 밤에 병사 몇 명이 가륜첩 유모를 끌고 왔어요. 저는 사람들 속에 숨어 있었죠. 아는 척하고 싶었지만 용기가 안 났어요. 도무지 무슨 일인지 이해할 수 없었죠. 그자들은 유모의 옷을 벗기고 한 명씩 위에 올라타 유모를 짓눌렀어요. 저는 여전히 겁이 나 소리를 낼 수 없었죠. 아버지, 저는 용감하지 못한 아들이에요. 정말로요.”
아소륵은 살짝 몸을 떨었고 안색은 창백했다. 순식간에 그는 쇠약해졌다.
“유모는 저를 보고 고개를 저으며 소리 내지 말라고 했어요. 하지만 우린 그자들에게 들키고 말았죠. 그들은… 알몸의 유모를 밀쳐 제 몸을 짓눌렀어요…. 제가 청양의 세자라고 유모가 말했지만 그들은 웃기만 하고 믿지 않았어요. 그들은 창을 가져왔어요. 유모는 다급하게 제 소매의 끈을 풀려고 했지만 풀어지지 않았죠. 그리고 갑자기 수많은 창끝이 유모의 가슴 앞을 뚫고 나왔어요. 그때 소매를 묶은 끈이 풀어지면서 하얀색 표범 꼬리가 드러났죠…….
유모의 피가 제 얼굴로 흘렀고 유모는 제 얼굴에 입을 맞추고는 죽었어요. 저는 꼭 꿈을 꾼 것 같았어요. 아무리 생각해도 그 사실이 믿기지가 않았죠. 그 후로 저는 밤에 잠들 수 없었어요. 잠이 들면 그 일이, 가륜첩 유모의 피가 제 얼굴에 흐르고 창끝이 유모의 가슴을 뚫고 나오는 것을 보고서도 유모를 구하지 못했던 그 일이 떠오를까 봐서요…. 소자는 여씨 파소이 가문의 사람이고 대군의 아들이니 살 수 있겠지만 제가 좋아하는 그 사람들도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아소륵의 목소리가 잠겼다.
“네가 북륙의 대군이라면, 너는 내가 그 사람들을 죽이지 못하게 하겠지. 맞느냐?”
“네.”
“넌 아비를 믿지 않고 너만이 그 사람들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했구나. 그래서 필사적으로 칼을 연마하고 용감한 무사가 되고 싶었던 게야. 네가 칼을 들어야 안전하다는 기분이 드니까.”
“맞아요. 아버지는 청양의 대군이시죠. 진안부를 멸하신 것이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하셨죠. 하지만 소자는 제가 좋아하는 사람이 죽지 않고 무사히 저와 함께 살아갔으면 좋겠어요. 정말 누군가가 죽어야 한다면 차라리 제가 죽는 게 나아요. 죽으면… 그런 일을 다시는 안 봐도 되고 더는 무섭지 않을 테니까요.”
아소륵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버지. 소자는 몹시 두렵습니다. 정말 무서워요…. 하지만 저는 사람을 죽이는 법을 배울 거예요. 다시는 제가 사랑하는 사람이 죽는 걸 보고 싶지 않아요. 누구든 그들을 해치면… 소자가 그자들을 죽여버릴 거예요!”
“정말 어리석은 아이구나.”
대군이 나직하게 말하며 아소륵의 머리를 품에 꼭 끌어안았다.
“하지만 이렇게 어리석은 아이야말로 나, 곽륵이의 아들이지! 동륙에 가려무나! 아들아, 아비와 어미는 널 생각할 거다. 네가 돌아오는 날, 네 모친을 데리고 호표기 부대와 함께 천척협 해변에 가서 너를 태운 큰 배가 바람을 타고 물살을 가르며 돌아오는 것을 지켜보마. 그때 이 아비가 너를 새로운 대군으로 금장궁에 앉힐 것이고 초원의 모두가 널 장생왕이라 부를 것이다!”
윤조 희제 7년 11월. 폭설이 내려 산이 막히기 전, 청양부 세자, 20년 후 초원을 휩쓸 소무공 여귀진 아소륵 파소이가 인질로 머나먼 동륙에 보내졌다.
아소륵은 망아지를 타고 동운산 산자락을 따라 천천히 남쪽으로 갔다. 청양의 표운기와 하당의 금국화 깃발이 너른 바다의 파도처럼 그의 머리 위에서 나부꼈다.
그렇게 아소륵은 떠나갔다. 뒤 한 번 돌아보지 않고서.
* * *
[역사]
후세의 역사가들은 이 남행을 말할 때 항상 의혹과 찬탄의 어조로 이야기한다.
그들은 우리에서 내보내진 온순한 양 한 마리가 어떻게 포효하는 수사자로 변해 노호하며 동륙 땅으로 달려갔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가 영웅이든 구세주든, 난세의 전쟁에 불을 지핀 사람 중 하나가 청양의 소무공 여귀진이라는 사실은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그의 이상과 포부는 끝내 세상을 불태우는 맹렬한 불길로 변했다. 붉은 군마를 타고 천하를 구하러 간 그는 도리어 자신의 말발굽 아래 짓밟힌 약자들의 주검을 발견하게 된다.
바로 그때 머나먼 동륙 땅에서는 먹처럼 새카만 눈을 가진 이가 울부짖으며 하늘을 빙빙 도는 매를 바라보면서, 불투명해 짐작하기 어려운 숙명 속에서 그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곧 영웅들이 만나게 된다. 무신의 검푸른 손이 어둠 속에서 그들을 향해 방향을 틀었다. 오래도록 침묵하고 있던 난세의 수레바퀴가 다시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것은 눈부신 불꽃을 피우며 재난과 눈물, 불과 물을 함께 구주 대지로 내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