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주표묘록-56화 (56/3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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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참랑(斩狼): 늑대를 베다 (5)

“대군, 하당 사절 탁발 장군이 장막 밖에서 뵙기를 청합니다.”

“밤이 깊었는데도 왔군.”

대군이 손에 든 서신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들라 해라.”

휘장이 걷혔다. 길 양쪽으로 호표기 무사들이 늘어서 있고 하당에서 사절로 온 호위 무사들은 멀찍한 곳에서 금색 국화가 그려진 커다란 깃발을 든 채 머물러 있었다. 북도성 안의 거의 모든 귀족이 탁발산월을 따라 장막 안으로 들어왔다. 네 명의 칸도 그중에 있었는데 다들 의아한 얼굴이었다.

탁발산월은 두꺼운 갑옷에 붉은 외투를 걸쳤다. 옷깃 둘레에는 하당의 금색 국화 휘장(徽章)이 덧붙여져 있었다. 그는 공손하게 대군 아래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세자의 몸은 괜찮습니까?”

대군이 탁발산월을 쳐다보았다.

“그것을 물으러 온 거요?”

탁발산월은 고개를 저었다.

“의마덕, 고랍이, 납과이굉가. 여씨 파소이 가문의 과거 영웅들을 말하는 것이지요? 여청양 의마덕, 여박한 고랍이, 여과 납과이굉가, 모두 청동의 피를 계승한 영웅들이지요. 마지막의 납과이굉가는 신성한 이름으로 대군의 부친인 흠달한왕 납과이굉가 전하고요.”

대군이 잠시 침묵하다 입을 열었다.

“그렇소. 모두 우리 여씨 선조들이오. 납과이굉가는 내 부친의 이름이지.”

“세상에는 영원히 배울 수 없는 도술이 딱 하나 있습니다. 바로 핏줄을 타고 전해지는, 검치표 가문의 청동의 피 계승자만이 배울 수 있는 ‘대벽지도’입니다. 전설에 반달 천신께서 도끼를 휘둘러 천지를 개벽할 때 갈랐던 최초의 도술이라고도 하지요!”

대군이 깊게 숨을 들이켜고 말했다.

“맞소. 대벽지도는 우리 청양부 영웅들의 가장 신성한 도술이오.”

“처음 그 전설을 들었을 때는 안 믿었습니다. 그러나 세자가 대군 앞에서 중검을 휘둘렀을 때 제게 그 전설은 사실이 되었습니다.”

탁발산월은 돌연 무릎을 꿇고 머리를 땅에 조아렸다.

“여씨 파소이 가문의 제왕의 피와 정신이 세자가 칼을 휘두르는 순간 나타났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하당이 바라는 바입니다. 하당국 백리 공작의 사절 탁발산월, 청양부 세자를 동맹의 손님으로 청하옵니다.”

귀족들은 의아한 기색을 드러냈다. 모두가 암암리에 가장 좋은 방법이라 생각하고 있었지만 탁발산월이 이 이야기를 꺼내기 위해 자신들을 불러 모았으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까닭이었다. 하당이 정말 인질로 세자를 원하는 것이라면 이것으로 두 파는 날을 세우던 격렬한 다툼을 면할 수 있었다.

대군은 모두를 등진 채 돌덩어리처럼 가만히 있었다.

“탁발 장군…. 정말 내 막내아들을 전쟁터에 끌어들여야겠소?”

“청동의 피를 지닌 영웅이 어찌 전쟁에 나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대군께서는 이렇게 용감한 아들이 그의 할아버지인 흠달한왕 전하처럼 초원을 달리는 것을 정녕 바라지 않으십니까?”

“나는 이 어리숙한 아들을 곁에 데리고 있고 싶을 뿐이오. 평생 바보로 산다 한들 무에 대수겠소?”

대군이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그러나 녀석이 그 칼을 휘두르는 순간 알게 됐소. 아소륵은 이미 내 곁의 어린아이가 아니라는 것을. 지켜주고 싶었지만 지켜줄 수가 없겠구려.”

“형님. 하당 사절의 청을 윤허해 주십시오.”

9왕이 제일 먼저 무릎을 꿇었다.

“대군. 하당 사절의 청을 윤허해 주십시오.”

모든 귀족들이 무릎을 꿇었다.

거대한 금장궁 안. 모두가 빽빽하게 무릎을 꿇고 앉았다. 홀로 선 대군이 새카만 머리들을 바라보았다. 금장궁 안은 돌연 몹시도 조용해졌다.

대군은 소리 없이 웃었다. 수년 전 가을이 떠올랐다. 위대한 영웅, 그의 부친인 흠달한왕은 군도를 짚고 언덕에 서서 이름 없는 목가(牧歌)를 불렀다. 그는 누구도 곁에 다가오지 못하게 했다. 장군과 귀족들은 멀리 떨어진 곳에 영채를 세우고 그의 인영을 바라보았다.

수년이 지나고 여숭 곽륵이 파소이는 돌연 제 아버지가 무슨 노래를 불렀는지 분명히 알게 됐다.

‘아버지.’

곽륵이는 속으로 조용히 말했다.

‘아버지의 그 자리는 정말 외로운 자리군요!’

“난 이미 결정했으니 설득할 것 없다. 모두 내 소식을 기다려라.”

대군은 인파를 지나 뒤 한번 돌아보지 않고 금장궁 밖으로 나갔다.

“이… 이런 멍청이 같으니!”

늙은이가 발을 동동 구르며 소리쳤다.

“스승님! 스승님!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안정룡이 황급히 다가가 늙은이의 입을 틀어막으려 했다. 그러나 손이 닿지 않아 그저 초조하게 발만 굴렀다.

“곽륵이는 멍청이라 했다!”

늙은이가 표독스럽게 눈을 부라렸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동륙을 가려면 바다를 넘어야 한다는 걸 모르는 게야? 산과 강은 또 얼마나 많고! 고작 열 살짜리 애가 어떻게 그리 멀리 갈 수 있겠느냐? 남도 아니고 아소륵이다. 그 아이의 몸으로는 하당에 도착하기도 전에 죽을 거야! 어느 아비가 제 손으로 아들을 사지로 보낸다든? 아마 멍청한 대군뿐일 거다! 애당초 멍청한 놈이란 걸 왜 몰라봤을꼬!”

안정룡은 죽상을 지었다.

“대군께서 이미 명령을 내리셨어요. 지금은 빠른 말을 달려 쫓아간다고 해도 되돌리기에 늦었다고요. 귀족들도 찬성하고 나선 결정이에요. 칸들도 소식을 듣자마자 아침 댓바람부터 금장궁에 들어 알현하고 남행 절차를 준비한답니다.”

“맞다! 맞아!”

대합살이 술냄새를 풀풀 풍기며 말했다.

“그래. 멍청한 건 곽륵이 하나가 아니지. 파소이 가문의 다른 멍청이들하고 비교하면 곽륵이는 그래도 뇌는 있는 셈이야!”

그는 성질을 있는 대로 내며 장막 안을 왔다 갔다 했다. 그러다 갑자기 침대 아래를 더듬어 두꺼운 마봉을 꺼내더니 장막 휘장을 걷고 달려 나가려 했다.

“스승님!”

안정룡이 대합살의 뒷섶을 필사적으로 잡아당겼다.

“어디 가시려고요? 스승님은 대합살이에요. 천신의 일을 책임지는 것이 스승님의 일이죠. 인간의 일은 결정하실 수 없어요! 아무리 큰 마봉을 들고 간다고 한들 대군께 목숨 걸고 덤빌 수 있겠어요?”

대합살은 멍하니 제자리에 선 채 오랫동안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마봉이 그의 손에서 떨어져 안정룡의 발을 내리찍었다. 안정룡이 아픈 발을 감싸 쥐고 깡충깡충 뛰는 동안 대합살은 축 처진 몸을 돌려 좌상으로 돌아왔다.

그는 목을 젖히고 술을 한 입 들이켰다. 순간 몇 년은 늙은 듯했다.

“그래. 내 어디를 가겠느냐? 나는 천신의 엿 같은 일에만 관여하지. 인간 세상의 무슨 일에 관여할 수 있겠어?”

멀지 않은 장막에서 목려가 깊게 숨을 들이켰다. 대합살이 취해서 욕을 퍼붓는 소리가 들렸다. 항상 문제를 피해만 다니던 영감이 저리도 분노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세자. 대군께서 오늘 아침 명을 내리셨습니다. 탁발 장군이 청한 대로 세자를 우호 특사로 하당에 보내기로요. 9왕이 직접 호송할 것이고 저는 출행 의장을 준비합니다. 제가 해안까지는 모실 것입니다. 이는 청양부 100년의 일대 경사라고 대군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부디 집안 걱정은 하지 마십시오.”

소년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아버지와 목려 장군 말대로 할게요. 언제 출발하죠?”

“나흘 후입니다.”

“어머니를 뵈러 가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당연히 되지요. 대군께서도 이번에 원행을 나가면 언제 돌아올 수 있을지 모르니 그동안 북도성에서 마음껏 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고개를 숙인 채 잠시 생각하던 아소륵은 제 곁의 말 없는 소녀를 쳐다보았다.

“소마를 데려가도 되나요?”

“대군께서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세자와 함께 갈 수 있는 이는 세자의 심복 둘뿐입니다. 소마는 죄인이라 데려갈 수 없지만 영원히 세자의 노예로 북도성에서 세자가 돌아오기를 기다릴 것입니다.”

“알겠어요.”

아소륵이 나직하게 말했다.

그는 묵묵히 몸을 일으켜 장막 밖으로 걸어 나갔다. 몇 걸음 가다가 돌아와 어린 하녀의 손을 잡아당겼다. 목려는 멀어져가는 두 아이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가볍게 고개를 내저었다.

오후의 햇살은 머리 위에 걸린 예리한 검 같았다.

아소륵은 계곡 끄트머리에 서서 묵묵히 샘 입구를 쳐다보았다. 칠흑 같은 동굴 구멍에서 맑은 물이 콸콸 흘러나왔다.

“할아버지. 저 떠나요. 할아버지를 보러 돌아갈 수 없게 됐어요!”

아소륵은 동굴 입구에 대고 소리쳤다.

그는 다시 시커먼 출구에 가보고 싶었다. 오랜 시간 기어 다니다가 간신히 찾은 것이었다. 그때 그는 햇빛을 볼 수 없었다. 그저 가진 낭과 물을 다 먹었으며 수많은 갈림길을 기어갔다는 사실만 기억했다. 무슨 의지가 그를 밖으로 나올 수 있도록 인도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어쩌면 그 노인의 눈빛, 사자 같은 슬픔이 그를 이끌었는지도 몰랐다. 어쩌면 그 동굴로 가는 길을 다시는 못 찾을 수도 있었다. 아소륵이 노인을 떠나던 순간, 그것이 두 사람에게는 이별이었다.

한 사람의 그림자가 아소륵의 몸 위로 드리워졌다.

“소마. 넌 저쪽에서 기다리면 돼.”

아소륵이 몸을 돌렸다.

뒤에 서 있는 사람은 소마가 아니었다. 그는 말없이 아소륵을 쳐다보았다. 철제 갑옷에 중검을 들었으며 눈썹은 날카로운 칼날 같았다.

“아버지!”

아소륵이 놀라 소리쳤다.

“그자와 작별인사를 하러 온 게냐?”

대군이 가볍게 물었다.

아소륵은 더는 숨길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고개를 끄덕였다.

“왜 아비에게 말하지 않았느냐? 기억나지 않는다고 한 것도 일부러 그를 위해 숨기려던 것이냐?”

“할아버지가 아버지의 적이라고 하셨어요. 제가 할아버지를 만난 걸 아버지가 아시면, 할아버지를 가만두지 않을 거라면서요.”

“그자를 믿느냐?”

아소륵은 잠시 망설이다가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무서워 마라. 넌 그가 옳다고 믿는구나. 내 적이기는 해도 네게는 정말 잘해줬나 보구나. 대벽지도까지 가르쳐주었으니. 어차피 속일 수 없는 일이었다. 이 세상에 그자 외에 누가 네게 대벽지도를 가르쳐줄 수 있겠니?”

대군이 나직하게 말했다.

“너는 물론 그를 믿겠지. 천성적으로 효심이 깊은 아이니까.”

대군이 살며시 아소륵의 머리를 어루만졌다.

“그와 작별인사를 하고 싶으면 그리 멀리서 소리치지 말아라. 이 아비가 소원을 들어주마. 너도 여씨 파소이 가문의 후계자이니 응당 그를 만나보아야겠지. 정식으로 만나 뵈러 가자꾸나.”

그는 미리 준비해둔 홰에 불을 붙였다. 아소륵의 손을 잡고 깊숙한 동굴로 걸어 들어갔다. 동굴 안에는 물 흐르는 소리가 가득했지만 강이 어디에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얼마를 걸었을까. 대군이 마침내 멈춰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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