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주표묘록-55화 (55/3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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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참랑(斩狼): 늑대를 베다 (4)

피가 아소륵의 얼굴에 튀었다. 아소륵은 늑대 이빨이 부친의 팔을 악다문 것을 똑똑히 보았다. 순식간에 대군의 팔에 뼈가 드러났다. 대군은 극렬한 고통을 참으며 검을 버리고 가슴 앞의 단도를 뽑았다. 그리고 늑대의 목을 찍어 반으로 갈랐다.

교활한 늑대 한 마리가 말 아래로 매섭게 달려들며 말의 복부로 앞발을 들이밀었다. 직접 보지 않았다면 절대로 상상할 수 없을 상황이었다. 흉악한 늑대는 단번에 준마의 심장을 끄집어냈고 그 심장은 여전히 미미하게나마 뛰고 있었다.

대군이 아소륵을 안고 함께 말 등에서 떨어졌다.

중검을 물고 있던 늑대가 무기를 버리고 방향을 틀어 대군의 종아리를 물려고 했다. 땅에 앉아 있던 대군은 늑대가 그의 근육을 물어뜯기 전에 놈의 한쪽 목을 단칼에 베어 버렸다.

아소륵이 데굴데굴 굴러나갔다. 어마어마한 공포가 아소륵을 사로잡았다. 도처에서 늑대의 비린내가 났다. 늑대 무리 앞에 노출된 아소륵은 침을 흘리는 늑대 입을 마주하고 있었다.

“횃불! 횃불!”

여수우가 갑자기 떠오른 듯 큰 소리로 외쳤다.

“나머지 횃불을 전부 던져라! 불로 아버지께 길을 내드려라!”

여수우는 당황한 나머지 대군과 아버지도 바꿔 불렀다. 아버지는 그가 어릴 때나 쓰던 호칭이었다.

횃불 수백 개가 늑대 무리 속으로 떨어졌다. 늑대들이 불에 타기 시작하면서 누케한 냄새가 났다. 야생 짐승은 천성적으로 불을 무서워했다. 늑대들은 훌쩍 솟구쳐 오르며 재빨리 피했다. 대군과 호표기 사이에 한 줄기 통로가 생겨났다.

여수우가 말에서 뛰어내려 칼로 자기 말의 엉덩이를 내리쳤다.

말이 놀라 뛰어올랐다. 늑대 떼가 두려워 이미 미친 듯이 날뛰고 있던 말은 고통까지 더해지자 그 무엇도 아랑곳하지 않고 대군을 향해 달려갔다. 초원의 수컷 말은 늑대 떼에게도 무시무시한 적이었다. 그들의 쇠발굽으로는 늑대의 머리뼈도 부술 수 있었다.

“아버지! 말에 타십시오! 말을 붙잡으세요!”

여수우가 크게 외쳤다.

대군은 말을 길들이는 데 달인이었다. 그가 여수우에게 하사한 설망도 직접 길들인 수컷 야생마였다. 팔다리를 다쳤을지라도 대군이라면 충분히 말 등에 올라탈 수 있었다. 그러나 세자는…. 이런 상황에서 한 사람을 지켜야 한다면, 당연히 대군이었다!

말은 대군의 곁을 빠르게 지나갔다. 대군은 휙 고개를 돌려 땅에서 바들바들 떨고 있는 아소륵을 쳐다보았다.

대군은 아들들이 멀리서 외치는 소리를 전혀 못들은 듯 아소륵을 향해 천천히 두 팔을 벌렸다.

“아소륵…. 무서워 마라. 무서워 마. 아비에게 오려무나.”

아소륵은 하얀 반흔이 있는 사내의 눈을, 칼처럼 날카롭고 냉혹하기 그지없는 두 눈을 바라보았다. 난생처음으로 아소륵은 제 아버지의 눈에 담긴 수많은 말이 느껴졌다. 그러나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한 지금 이 순간에는 그 어떤 말도 필요 없었다. 아버지의 등 뒤로 늑대 떼가 비켜나며 길이 났다.

아소륵은 아등바등 달려가 제 아버지를 끌어안았다.

“아소륵… 무서워 말고 아비를 따라와라.”

대군이 천천히 일어났다. 다리와 팔에서는 피가 흘러내렸다.

어깨에서 극심한 고통이 전해졌다. 휙 고개를 돌리자 흰색 늑대 형체가 보였다. 진짜 늑대왕이었다. 망아지만 한 크기에 온몸의 근육이 단단히 덩어리져 있었다. 흰색 가시 같은 놈의 이빨이 견갑(肩甲)을 찌르고 들어가 대군의 어깨를 관통했다.

늑대왕은 거대하고 용맹스러웠지만 공격을 감행할 때는 의외로 쥐죽은 듯 기척이 없었다. 새빨갛게 충혈된 눈에서는 인간 같은 ‘눈빛’이 보였다. 잔혹한 웃음기로 가득한 눈이었다. 놈은 대군을 서둘러 죽이지 않고 사냥감이 피를 흘리며 부들부들 떠는 모습을 유쾌하게 지켜보았다.

흰색 말갈기가 바람 속에 미친 듯이 흩날렸다. 불가사의한 늑대왕은 눈 속에서 걸어 나온 정령처럼 고귀하고 건장했으며 탐욕스럽고 잔혹했다. 흡사 신이 인간 세상에 남겨둔 유족 같았다.

대군이 발버둥 치며 아까와 같은 방법으로 늑대를 죽이려 했다. 그러나 아들을 안고 있는 데다 어깨에는 칼을 휘두를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이대로 죽는 것인가… 여씨 파소이가…….’

대군이 속으로 나직하게 탄식했다. 대군은 알았다. 이런 거대한 늑대가 고개를 들어 힘을 주기만 하면 어깨가 그대로 떨어져 나갈 것이었다.

“아소륵. 아비가 널 많이 사랑한다.”

마음속에는 막내아들에게 해 주고 싶은 말이 무척 많았다. 가족에게 해 주고 싶은 말은 더욱 많았다. 그러나 그의 임종 유언은 이토록 짧았다.

“아버지. 저도 사랑해요.”

괴이하게 갈라져 왜곡된 목소리가 대군의 귓가에 울렸다. 짧은 몇 마디 속에는 엄청난 난폭함과 잔인함이 숨겨져 있었다.

대군은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것은 아들이 가슴으로 하는 말이었지만 아들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쿠르릉 울리는 거대한 소리는 고대 신이 동종(銅鐘) 안에서 포효하는 것 같았다.

그 순간 모든 승패와 생사가 역전됐다. 허약하고 겁 많은 소년이 아버지의 품에서 손을 내밀었다. 아소륵은 새끼 사자가 목표물을 덮치듯 주먹을 날려 늑대 머리를 강타했다. 대군은 품속의 아들이 쇠처럼 단단해지는 것을 느꼈다.

아소륵의 난폭한 힘이 늑대왕의 몸을 관통했다. 전신의 뼈에서 쟁쟁한 소리가 울렸다. 말처럼 거대한 늑대는 비틀비틀 뒤로 쓰러지면서 물고 있던 대군의 어깨를 놓았다.

대군은 의아한 얼굴로 막내아들을 지켜보았다. 아소륵은 대군의 앞으로 가 진안부의 소녀를 지키려던 그때처럼 천천히 두 팔을 벌렸다.

“아소륵! 아소륵! 비켜라, 비켜! 무슨 생각이냐!”

대군이 울부짖었다.

하얀 늑대가 천천히 일어났다. 녹색 눈은 사악한 보석처럼 왕성한 빛이 넘쳐흘렀다. 어린 소년의 목숨을 내던진 일격이 어찌 늑대를 다치게 하겠는가. 놈은 그저 아이가 공격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을 뿐이었다.

“아버지. 아버지와 어머니를 무척 사랑해요. 저는 영원히 두 분과 함께하고 싶어요.”

아소륵의 목소리는 아까처럼 기괴하고도 위엄 있었다. 난폭함과 잔인함을 숨긴 채 그는 성큼 앞으로 나아갔다.

“아버지. 제가 지켜드릴게요. 저는 더 이상 나약하지 않아요. 나약한 사람은 쓸모없어요!”

아소륵은 대군이 떨어뜨린 중검을 주웠다. 자신의 키만 한 검을 손에 쥐자 몹시 우둔하고 우스꽝스러워 보였다. 아소륵이 머리 위로 검을 높이 들어 올리자 온 하늘을 받쳐 든 것 같았다.

하얀 늑대왕은 겁먹은 듯 가까이 다가오지 못했다. 다른 늑대들도 그저 주위를 어슬렁거릴 뿐이었다.

“내 말을 따라 해라. 의마덕, 고랍이, 납과이굉가, 이것은 내 조상의 피다!”

어둠 속의 목소리가 다시 아소륵의 귓가에 메아리쳤다.

아소륵은 무시무시한 박동이 느껴졌다. 끝없는 어둠 속에 빠져드는 느낌이 다시 찾아왔다. 무서운 힘이 화염처럼 온몸에 흘렀고 불규칙적인 맥박에 전신이 갈라지는 듯했다. 눈앞이 캄캄해지기 시작했고 어둠은 점점 더 짙어졌다. 손에 쥔 검이 가벼워졌다. 늑대의 지린내가 느껴지지 않았고 가슴속에서는 따뜻한 피를 갈망했다. 가없는 어둠이 내려앉으며 다시 그 깜깜한 밤으로 돌아왔다. 차디찬 달이 아소륵의 머리 위를 비췄다. 비린내 짙은 뜨거운 액체가 아소륵의 얼굴에 튀었다. 쇳빛 칼날 위로 새빨간 흔적이 흐르고 무수한 창끝이 새하얀 가슴을 뚫고 나왔다.

여전히 그 미소였다. 마지막 한 가닥 온기를 머금은 입술이 아소륵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가륜첩 유모가 전란 속에서 죽던 밤. 아소륵은 그 젊고 아름다운 여인을 지키지 못했다. 두려움에 쥐처럼 움츠린 채 여인이 자신의 정절과 목숨을 희생하며 그를 지키도록 내버려 두었다. 더는 싫었다. 더는 이런 일이 발생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더는 싫었다! 더 이상은!

나약한 사람은 쓸모없다!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려면… 적을… 갈가리 찢어 죽여야 한다!

불빛이 그의 새하얀 소매 위를 비추며 귀매(鬼魅)처럼 마구 일렁거렸다.

“의마덕, 고랍이, 납과이굉가, 이것은 내 조상의 피다!”

어두운 밤과 늑대의 울부짖음 속에서 터져 나오는 아소륵의 목소리를 모두가 들었다. 사자의 목소리였다. 그것은 온 늑대 무리를 뒤흔들었다.

“의마덕, 고랍이, 납과이굉가!”

소년이 포효했다.

“이것은 내 조상의… 피다!”

아소륵이 온몸을 크게 떨었다. 전신에 신이 내린 듯한 포악한 힘이 들어갔고 칼을 쥔 손은 쇠처럼 단단해졌다. 그와 거의 동시에 아소륵과 늑대왕이 각각 돌격했다. 늑대는 빠른 말처럼 달려들었고 소년은 사자처럼 돌진했다.

“백랑단!”

여수우가 그 하얀 늑대를 가리키며 불현듯 깜짝 놀라 소리쳤다.

그러나 아무도 그의 외침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불빛 속에서 아소륵이 회전하며 중검을 휘둘렀다. 4척 길이의 칼날이 거대하고 완벽한 원을 그렸다. 누구도 그려낼 수 없는 완벽한 원이었다. 천지가 처음 만들어지던 순간의 원호가 바로 그곳에 있는 듯했다. 수많은 선조가 베어 죽였던 것과 같이 완벽하게 천지를 개벽하는 그 일격이었다!

대벽지도!

질주하던 흰 늑대가 돌연 반으로 갈라졌다. 가슴부터 시작해 그대로 두 동강이 났다. 한 무더기의 피가 솟구치며 허공에 피보라가 튀었다. 누구도 이런 광경을 본 적이 없었다. 늑대왕 몸의 모든 피가 한꺼번에 솟구쳐 나왔다. 그것은 만황의 시대에나 있었던,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장려한 광경이었다.

“아소륵!”

대군이 놀라 소리쳤다.

하얀 늑대왕 뒤로 모든 늑대가 높이 솟구쳐오르며 아소륵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러나 이미 모든 힘을 다 소진해 무기를 휘두를 수 없었던 아소륵은 힘없이 바닥에 쓰러졌다.

그때 검은 말이 늑대 무리 속에서 나타났다. 강과 바다처럼 시퍼런 칼빛이 흉악한 이리의 몸을 지나갔다. 검은 말이 미친 듯이 울부짖으며 재갈을 빼고는 한입에 늑대 목덜미를 물어 바닥에 내던졌다. 다른 늑대 하나는 말 등의 사내에게 허공에서 덜미를 붙잡혔다. 사내는 아가리를 쩍 벌리고 자신의 손목을 물려고 하는 늑대를 차갑게 바라보았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힘주어 늑대의 목뼈를 부숴버렸다. 누구도 주의를 기울이지 못하고 있을 때 탁발산월은 벌써 검은 말을 이끌고 가장 뚫고 나가기 좋은 돌파구를 찾아냈다.

멀리서 함성이 들려왔다. 수천, 수만 개의 횃불이 불바다를 이루며 모두의 눈을 환하게 비췄다. 9왕의 대군이 마침내 도착했다.

탁발산월은 고개를 숙여 소년의 텅 빈 눈빛을 보았다. 순간 망설였던 그는 조심스럽게 소년의 어깨를 건드려 보았고 아무런 반응이 없자 그제야 조심스럽게 소년을 말 등으로 안아 올렸다.

“이런 비범한 도술(刀術)을 보게 되는 날이 올 줄이야. 검치표 가문의 청동색 피가 아직 존재했군.”

탁발산월이 다시금 난동을 부리려는 늑대 무리 앞에서 태연하게 군마를 몰았다.

“이 비천한 몸이 만족의 미래 군왕을 지켜내겠습니다! 저하, 오늘 운이 좋으십니다!”

탁발산월은 비휴도를 높이 들어 올렸다. 아직 굳지 않은 늑대 피가 흘러내려 그의 얼굴에 뚝 떨어졌다. 탁발산월은 신성한 말투로 낮게 읊조렸다.

“의마덕, 고랍이, 납과이굉가…. 그것은 모든 신이 속세에 남겨둔… 피다!”

* * *

[역사]

청양 소무공이 소년 시절 아버지를 구하고 늑대를 죽인 이야기는 <청양기년(靑陽紀年)> 백서에 이렇게 쓰여 있다.

“상년, 10월 11일. 모진 바람에 고라니가 아고산 자락에서 죽다.

대군과 다섯 왕자는 동륙 하당국 사절인 탁발산월 장군과 서쪽으로 사냥을 나가 늑대를 만났다. 호위병들이 죽거나 다쳐 남은 인원이 적었다. 늑대 무리가 말을 집어삼켰고 대군은 죽음의 위기에 처했다. 다섯째 왕자 여귀진 아소륵이 선조의 위엄을 떨치며 검을 뽑아 늑대를 베었다. 그것의 목을 끊고 머리를 잘라 부친을 위기에서 구해냈다. 나머지 아들은 모두 물러나 가까이 가지 못하였다.

모든 호위가 크게 소리치며 무릎 꿇고 절을 해 너른 들판이 놀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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