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주표묘록-53화 (53/3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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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참랑(斩狼): 늑대를 베다 (2)

왕자들은 서로 눈짓만 교환할 뿐 아무 말이 없었다. 어떻게 보면 강한 화살도 갖고 있고 뒤에는 대군(大軍)이 따르고 있으니 늑대 떼 때문에 곤경에 빠질 리는 없었다. 그러나 혼란한 틈에 자칫 방심해 아버지가 다치게 된다면 큰 잘못을 저지르게 된다. 누구에게도 완벽한 계획은 없었다.

“좋은 기회이기도 합니다.”

탁발산월이 웃으며 말했다.

“훗날 왕자들께서 전쟁터에 나간다면 예상치 못한 적을 만나게 될 터. 이번에 만난 늑대 떼도 우리에겐 적인 셈입니다. 이왕 사냥을 나왔는데 하찮은 사냥감만 잡아간다면 비웃음을 사지 않겠습니까? 강한 활과 화살로 흉악한 늑대를 물리치면 어떨는지요?”

여응양이 호표기 병사 하나를 이끌고 돌아왔다.

“아버지. 이 병사는 사냥꾼인데 전에 늑대를 잡아봤답니다.”

호표기 하나가 말에서 내렸다. 낯빛이 다소 좋지 않았다.

“대군. 어서 방법을 강구해 9왕께 신호를 보내십시오.”

대군이 미간을 구겼다.

“짐승 몇 마리에 정말 군대가 나서야 한단 말이냐?”

“대군께 아룁니다. 늑대는 일단 무리를 지으면 성가셔집니다. 외로운 늑대는 사냥하기 쉬워도 늑대 떼는 상대하기 어렵습니다. 무리 지은 늑대는 가장 잔인해서 사자나 호랑이도 늑대 떼를 보면 도망칩니다. 보통 야생의 짐승은 상대하기 힘든 적을 만나면 알아서 흩어지지요. 하지만 늑대 무리는 더욱 모질고 맹렬하게 공격합니다. 한 마리도 남지 않고 모조리 죽는다고 해도요. 스무 살에 사냥꾼 10여 명과 화뢰원 서북쪽에 갔었습니다. 백록 몇 마리 잡으려고 말을 풀어놓고 며칠 동안 초원을 걸었지만 사슴은 한 마리도 없었지요. 당시 나이든 사냥꾼이 늑대 떼가 근처를 지나갔는지 짐승들이 모두 도망갔다면서 더는 머무를 수 없겠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황급히 돌아갔습니다. 말이 세 마리나 죽었을 만큼 필사적으로 달려 다행히 근처 마을에 도착할 수 있었죠. 나중에 들으니…….”

호표기 병사가 찬 공기를 한 차례 들이마셨다. 지난 일임에도 여전히 두렵고 불안한 듯했다.

“란마부의 어느 왕야 수하에 있는 무사 500명이 그때 그 근처를 지났는데 돌아오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여수우가 크게 놀라며 물었다.

“활을 든 500명의 사내가? 모두 잡아먹힌 것이냐?”

“그해 봄이 되고 나이든 사냥꾼이 늑대 떼가 북방의 수원(水原)에 갔을 거라고 말하고서야 용기를 내 초원에 나가 보았습니다. 나중에 그 무사들의 영채를 발견했는데 수백 구의 해골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근처에는 화살에 맞아 죽은 늑대가 족히 수천 마리는 되었지요.”

대군의 안색이 살짝 변했다. 그는 잠시 침묵하더니 고개를 돌려 탁발산월을 보았다. 탁발산월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늑대 떼의 끔찍함은 저도 들어보았습니다. 저자의 얘기와 비슷합니다. 늑대 떼는 많게는 수만 마리가 떼 지어 출몰하기도 합니다. 풍염 황제의 북벌 당시, 천 명의 경기병이 미음산을 돌아 청양부 후방을 급습해 크게 이기고 돌아왔지요. 그 일은 대군께서도 아실 겁니다.”

“대윤 명장 이릉심 얘기요?”

“맞습니다. 당시 대윤 이 장군의 명성은 소근심보다 아래였지요. 그때가 이릉심의 마지막 전투였습니다. 그는 대윤의 설숭강 영채로 돌아오지 못했죠. 초원에 들리는 소문으로는 오는 도중 북두탐랑에 죽임을 당했다고 하지만 사실 늑대 떼에 포위돼 죽었을 가능성이 더 큽니다. 북두탐랑은 하늘의 무신이지요. 그런 천상의 무신이 직접 내려와 이릉심을 죽였다는 건 아둔한 백성이 잘못 전한 말일 겁니다.”

“아버지! 제가 가서 죽이겠습니다. 군사를 이끌고 가서 흉악한 늑대들을 모조리 죽여버리겠어요!”

여하의 말에 여응양이 제지하고 나섰다.

“숙부의 대군은 최소 50리 밖에 있다. 늑대 떼는 적에 비할 게 아니야. 네가 뚫고 나간다고 하더라도 저 짐승들이 널 계속 쫓으면 어쩔 테냐? 탁발 장군의 말대로 늑대가 이리로 달려와 중간에 마주치면 그땐 어쩌려고?”

“싹 다 죽여버릴 거요! 내 칼에 죽은 늑대가 100마리는 못 돼도 50마리는 됩니다. 아무것도 아니라고요!”

여하의 말은 허풍이 아니었다. 그는 여덟 살에 첫 늑대를 사냥했다. 올해로 열여섯인 그가 사냥한 늑대는 분명 50마리도 넘었다.

“그럼 200마리는? 300마리는 어쩔 건데?”

“대군.”

사냥꾼이었던 호표기가 말을 꺼냈다.

“늑대 떼는 해가 지길 기다리고 있습니다!”

“해가 지기를?”

“늑대는 밤에도 사물을 볼 수 있습니다. 사냥감이 안 보일 때가 그들에게는 사냥하기에 최적의 시기지요. 그래서 밤이 될수록 사나워집니다. 그리고 노인 말로는 밤이 되면 낭흑자(狼黑子)가 나타난다고…….”

“헛소리!”

여수우가 크게 호통쳤다.

‘낭흑자’는 만족 사냥꾼에 전해지는 늑대신으로 나이 많은 늑대가 변한 정령이며 사람의 형상을 하고 늑대 떼를 지휘해 사방에서 먹이를 잡아먹었다. 그는 인간을 살해하는 걸 즐겼다. 낭흑자가 있는 늑대 무리는 사냥꾼과 지략을 겨루기도 했다. 하지만 유목민들 사이에 전해지는 야신(野神)일 뿐 무당들은 믿을 만한 가치가 없다고 여겼다. 이럴 때 낭흑자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군심을 어지럽히는 일이었다. 이 병사가 늑대 떼를 마주한 경험이 없었다면 즉시 참수형에 처해도 무방했다.

여응양이 엄숙한 얼굴로 말했다.

“낭흑자는 신경 쓸 필요 없습니다. 하지만 늑대 떼가 날이 어두워지기를 기다린다는 것은 거짓말 같지 않습니다. 사람의 눈은 밤에 보이지 않아 화살을 쏴도 정확성이 떨어지니 산짐승들이 사나워지지요. 소자 밤길이 염려되어 나올 때 모두에게 불을 피울 홰를 챙기라 하였습니다. 늑대는 불을 무서워하겠지만 한 사람에 홰가 두 개뿐이라 하룻밤을 버티기 힘들 것입니다.”

여응양의 말에 주변 사람들은 흠칫 몸을 떨었다. 여응양은 왕자 중에서 가장 세심해 다른 사람이 미처 신경 쓰지 못하는 부분을 생각해냈다. 호표기가 늑대 떼를 제압할 수 있다고 자신하는 이유는 마상궁술에 뛰어나기 때문이었다. 200개의 활로 화살비를 퍼부으면 늑대를 핍박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일단 밤이 되면 기마병들은 목표를 상실하게 되고 늑대 떼는 도리어 거리낌 없이 공격할 터였다.

“대군께서는 걱정 마십시오.”

탁발산월이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해가 지려면 반 시진 남았습니다. 그 전에 어쩌면 기회가 있을 겁니다.”

그는 말을 하면서 무표정한 얼굴로 먼 곳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여러분 보십시오. 또 왔습니다.”

모두가 탁발산월이 가리키는 전방을 쳐다보았다. 늑대 떼가 또 주춤주춤 다가왔다. 이미 날은 저물어가고 있었다. 늑대 떼는 몸을 낮추고 종종걸음으로 달려왔다. 한 무더기 회백색 속에서 셀 수 없이 많은 새파란 눈이 번뜩였다.

“대열을 맞추고 명령에 따르라!”

여수우가 장검을 뽑아들고 호표기 진 앞으로 달려갔다.

왕자들도 각자 움직였다. 여복과 여하는 일제히 조궁을 꺼내 화살을 걸며 호표기 대열에 들어갔다. 여응양은 무표정하게 검을 뽑아들고 호표기 뒤에 말을 세웠다. 진을 감독하는 것이 그가 맡은 임무였다.

“대군. 왕자들이 모두 매처럼 용맹하고 표범처럼 민첩한 용사들이군요. 그러나 진정한 사내는 불길 속에서 알아볼 수 있는 법이지요.”

탁발산월이 목소리를 낮췄다.

대군은 허허 웃었지만 대답하지 않았다. 탁발산월의 시선이 아소륵에게로 향했다. 소년은 대군의 말안장 앞에 앉아 불안한 듯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대군이 손을 소년의 가슴 앞에 놓고 그를 단단히 끌어안았다.

늑대 떼는 어느새 호표기가 사용하는 반곡궁의 사정거리에 들어왔다. 늑대들의 속도는 점점 빨라졌고 질주 속에 갈기가 휘날렸다. 두 눈에서는 녹색빛이 폭발할 듯 번득였다. 그들의 눈에 대군과 사냥을 나온 무리는 이미 신선한 제물이었다. 여수우가 검을 휘두를 때마다 수백 개의 우전이 쏘아졌고 앞쪽 늑대들이 연달아 쓰러졌다. 이번에는 늑대들도 죽은 늑대 시체에 정신을 팔지 않았다. 그들은 인간과 똑같았다. 일단 전투에 돌입한 상태에서는 사소한 일에 한눈팔지 않고 앞만 보며 돌진했다. 대군은 시선을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기마병의 화살통에 우전이 벌써 절반이나 소모되었다. 대군은 아소륵의 머리를 눌러 엎드리게 하고 직접 만궁(彎弓)을 꺼내 앞으로 나아가려 했다.

“대군. 다리를 저는 검은 늑대가 보이십니까?”

탁발산월이 불쑥 물었다.

그러나 고개를 든 대군의 시야에는 한 무더기 회백색밖에 보이지 않았다. 흰 늑대는 일반 회색 늑대보다 훨씬 사나웠다. 그래서 흰 늑대 속에서는 다른 색 늑대를 보기가 어려웠다. 그뿐만 아니라 실력이 처지는 늑대는 먼 길을 이동할 때 전부 먹잇감이 되었다.

“저기, 비탈 위에요.”

탁발산월이 높은 곳을 가리켰다.

대군이 고개를 들자 높은 풀 비탈 위가 보였다. 그곳에는 언제 나타났는지 색깔이 남다른 검은 늑대 한 마리가 서 있었다. 그 늑대는 공격하지 않고 근처를 어슬렁거렸다. 그러나 모골이 송연해지는 녹색 눈은 시종일관 이쪽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목둘레로 준마의 갈기 같은 긴 털이 흩날렸다.

높은 곳에서 굽어보며 천군만마를 지휘하는 장군 같은 모습이었다.

“늑대왕.”

탁발산월이 말했다.

“아마 저것이 늑대 무리의 왕일 겁니다. 검은 늑대가 흰 늑대 무리를 이끌 수 있다니 얼마나 흉악한 놈인지 알 수 있겠지요. 대군, 저것의 몸에 난 상처를 보십시오. 늑대왕은 대부분 다리를 절거나 눈이 하나 없습니다. 수많은 전투를 겪었기에 살아남기가 쉽지 않지요. 늑대왕이 직접 진영을 지휘하기에 늑대 무리는 용기를 냅니다. 함께 행군하며 전쟁하는 것과 다를 바 없어요.”

“적을 잡으려면 우두머리부터 잡아야 한다?”

대군이 나직하게 물었다.

“그렇습니다. 우두머리부터 잡아야지요.”

탁발산월이 단호하게 말했다.

“가까이 오지 않는데 어떻게 유인할 수 있겠소?”

대군이 생각에 잠겼다.

늑대왕은 매우 신중해 계속 500보 밖에 머물렀다. 호표기의 반곡궁 사정거리는 놀라울 정도지만 저 정도 거리에는 정확성이 떨어졌다. 늑대는 사냥꾼과 대적한 경험이 있는 듯 화살의 사정거리 밖에 숨어 있었다.

“장궁(長弓)과 장전(長箭)이 없어서 아쉽군요. 아니면 시도해볼 만한데. 놈이 다가오려 하지 않는다면.”

탁발산월이 갑자기 용이 포효하듯 소리를 질렀다.

“제가 앞장서는 수밖에요! 앞으로 나가 화살을 쏴라!”

청양의 무사들의 귀에는 뒤편에서 전해 오는 우레와 같은 외침만 들렸다.

“비켜라!”

기마병들의 진열이 흐트러지고 검은색 마의를 걸친 8척 준마가 그 사이를 번개처럼 뚫고 나왔다. 탁발산월의 말이었다. 호표기들은 몹시 놀랐다. 늑대 떼는 계속 다가오는데 탁발산월이 앞을 막고 있어 활을 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탁발산월은 홀로 말을 타고 달려 나갔다. 제 발로 죽으러 들어가는 짓이나 마찬가지였고 화살을 가로막고 나아가니 모든 동료까지 죽이는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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