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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참랑(斩狼): 늑대를 베다 (1)
잔인한 겨울이 찾아왔다. 화로가 타들어 가는 금장궁 안. 탁발산월과 대군은 마주 앉아 술을 마셨다. 탁발산월이 술잔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세자는 괜찮습니까?”
“괜찮소. 동륙 의원 말로는 심장이 나을 기미가 안 보이는 데다 이제는 이혼(離魂) 증상까지 생겨 지난 몇 달의 일을 하나도 기억하지 못한다 하오.”
“사람이 크게 놀라면 그럴 수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짐작건대 반년간 많은 일이 있었겠지요?”
“억지로 떠올리게 하지 않을 생각이오. 대체 누가 북도성 안에서 이런 천인공노할 짓을 벌였는지 차차 알게 되겠지. 아소륵이 북도에 돌아왔는데도 탁발 장군은 여전히 동륙에 돌아가지도 않으면서 아소륵을 선택하지도, 다른 왕자를 선택하지도 않았지. 여전히 결정을 못 한 것이오?”
“북도성의 모든 사람이 세자는 그저 잠시 자리를 지키는 것일 뿐이라더군요. 미래 청양부를 이어받을 사람은 뛰어난 형들일 거라고요. 칸들 측에서도 세자를 바꾸자는 목소리가 끊이지 않고요. 대군께서는 세자를 아끼지만 영명한 군주이시니 아들을 사랑하는 것과 국가를 사랑하는 일은 별개임을 잘 아실 겁니다. 반드시 세자를 미래의 대군으로 고집할 필요는 없겠지요. 그리하셔도 괜찮습니다. 탁발이 원하는 것은 장래 청양부를 물려받을 영웅이니까요. 대군께서 세자를 누구로 바꾸든, 탁발은 그분을 인질로 원합니다.”
대군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장군이 솔직하게 말해 주니 나도 허심탄회하게 말하겠소. 내 아소륵을 무척 사랑하지만 그 아이는 겁이 많고 나약하지. 우리 청양부를 이어받을 사람은 반드시 파소이 가문의 역대 선조들처럼 영웅이어야 하는데 아소륵은 그에 부합하지 않으니 세자를 다시 세우는 일은 불가피하오. 다만 누구를 세울지 아직 정하지 못했소. 마침 한겨울이라 짐승 떼가 북도성을 지나갈 것이니 겨울 사냥을 하기에 좋을 때요. 내 아들들을 데리고 화뢰원에 사냥을 나갑시다. 그럼 장군이 만족의 미래 독수리를 알아볼 수도 있겠지.”
“그리 하면 제일 좋겠군요. 날짜는 정하셨습니까?”
“바로 내일이오!”
초원은 푸르무레했다. 첫눈이 아직 내리지 않아 겨울바람도 살짝 차가울 뿐 살을 에는 정도는 아니었다. 끝없이 이어진 초원은 하늘가까지 펼쳐진 융단 양탄자 같았고 모두는 즐거운 기분으로 말을 달렸다.
겨울은 사냥감이 가장 살진 계절이었다. 손발이 얼 정도로 추워지기 전에 함께 말을 타고 조궁(雕弓)을 들고 사냥을 나가는 것은 만족의 오랜 풍습이었다.
대군은 전방의 표운기를 바라보았다. 진(陣) 앞에서 환호성이 들려왔다.
건장한 말 하나가 길게 울부짖으며 달려와 원을 그리며 빙 돌았다. 여하의 군마였다. 말 등에는 머리에 화살을 맞은 사슴 한 마리를 짊어지고 있었는데 한 방에 즉사한 모양이었다.
여하는 백보 거리에서 말을 타며 화살을 쏘아서 단번에 맞혔다. 그것은 절대 운이 아니었다. 탄탄한 궁마술 실력이 없이는 절대 해낼 수 없는 일이었기에 무사들은 절로 소리 높여 환호했다. 그저 여하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제아무리 초원의 뛰어난 사냥꾼도 갖추기 힘든 궁술인데 하물며 왕자가 그러하니 오죽하겠는가.
“내 아들들의 궁마 실력이 쓸만하지 않소?”
대군이 웃으며 묻자 탁발산월도 웃으며 답했다.
“매우 뛰어나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저 중에 탁발 장군이 말한 영웅은 찾을 수 있겠소?”
“왕자들 모두 훌륭합니다. 그러나 영웅이란 천 명 중 하나 나올까 말까 한 것이지요. 500년간 초원에 진정한 영웅은 손왕과 대군의 아버지이신 흠달한왕 전하뿐이셨습니다. 손자들의 무용(武勇)이 뛰어나긴 하나 할아버지보다는 못하지 않은지요?”
“흠달한왕.”
대군은 그 이름을 되뇔 뿐 말을 보태지는 않았다.
“오늘밤은 사륜보에서 쉬었다 갑시다. 아직 10리는 더 가야 하니.”
여응양이 말을 몰아 부친에게 다가왔다.
“9왕의 군대가 뒤따르고 있습니다. 사냥감이 놀라지 않도록 50리 떨어져서 오고 있지요. 주위에 군대의 움직임은 없고 저희가 데려온 수백 명의 기병 모두 호표기 정예병이니 아버지께서는 마음 놓고 사냥하셔도 됩니다.”
대군이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대군!”
군마 하나가 멀리서 말을 급히 세웠다. 무사는 몸을 뒤집어 말에서 내리더니 종종걸음으로 달려와 새하얀 모피를 바쳤다.
“이게 뭔가?”
“길한 징조입니다. 앞에 사냥을 나간 소부대가 흰 늑대를 한 마리 잡았습니다!”
“흰 늑대?”
대군이 흥미롭게 모피를 집어 들었다. 그런데 탁발산월의 안색이 돌변하더니 모피를 빼앗아 들고 물었다.
“이 늑대 가죽은 어디에서 사냥해 얻은 것이냐?”
무사는 탁발산월의 성난 시선을 마주한 채 대답하지 않았다. 흰 늑대는 흰 표범에 버금갈 정도로 초원에서는 드문 생명이었고 가장 존중받는 지위에 있는 사람만 흰 늑대 가죽으로 치장할 수 있었다. 이 늑대 가죽은 대군께 바치려 서둘러 벗겨낸 것인데 어찌 감히 자발적으로 동륙에 돌아선 역적이 대군의 손에서 이를 앗아갈 수 있단 말인가?
탁발산월은 말 위에서 몸을 살짝 숙이고는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
“무례를 범하려던 것은 아닙니다. 저는 화뢰원의 은양채에서 태어나 부근의 짐승들에 익숙합니다. 가을의 화뢰원에는 흰 늑대가 없습니다. 호답강 서쪽, 과보의 해가 지는 산에나 있지요. 흰 늑대 떼가 먹이를 찾아 서쪽에서 호답강을 넘어 초원 깊이 들어왔다는 것으로밖에는 설명이 안 됩니다. 서쪽의 황양 떼가 많이 얼어 죽어 먹이를 찾지 못할 때는 모든 이리 떼가 이동할 수도 있습니다. 궁마가 부족한 지금 여기에서 늑대 떼를 만난다면 몹시 곤란해질 겁니다.”
무사는 살짝 당황했다.
“사륜보에서 잡았습니다.”
탁발산월이 손을 내저으며 말을 이었다.
“당황할 것 없습니다. 9왕의 1만 철기병이 뒤따르고 있는데 정말 늑대 떼가 무서워 그러겠습니까? 다만 대군의 안전을 생각해 돌아가 9왕과 합류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여응양이 지도의 어느 방향을 가리키며 물었다.
“사륜보에 안 가고요?”
탁발산월이 고개를 저었다.
“은양채를 허문 이후로 사륜보 서쪽은 짐승들의 땅이 되었고 사륜보도 그저 군대가 잠시 주둔하는 정도의 마을이 되었습니다. 늑대가 그곳에 출몰했다면 이대로 가는 것은 위험하게 마련이지요.”
여수우가 소리높여 외쳤다.
“말머리를 돌려라! 돌아간다! 돌아가!”
호표기는 말머리를 돌렸다. 그때 갑자기 하늘이 흐려지더니 쌩, 하고 차가운 바람이 불어왔다. 사람들은 동쪽 하늘을 돌아보았다. 먹구름이 시커멓게 밀려오고 있었다.
구름층은 매우 빠르게 밀려왔고 하늘 절반이 먹구름으로 뒤덮였다. 기병들은 군마를 빠르게 달렸지만 먹구름은 더욱 빠르게 쫓아왔다. 공기 중에는 축축한 물 냄새가 섞여 있었다. 여응양이 미간을 찌푸렸다.
“언제 비가 내릴지 모르겠군요.”
“속히 행군하라! 서둘러 야영할 장소를 찾아!”
대군이 명령했다.
탁발산월이 말고삐를 잡아당기며 가볍게 코를 킁킁거렸다.
“운이 안 좋네요…. 늦었습니다. 늑대 떼입니다.”
그의 말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갑자기 동쪽에서 세찬 바람이 불어왔다. 모두가 바람 속에 스민 옅은 비린내를 맡았다. 사람들의 낯빛이 변했다.
“제 예상이 맞았습니다. 우리 쪽 척후병이 늑대 떼의 척후를 잡았군요.”
탁발산월이 말을 몰아 높은 비탈로 돌진하며 말했다.
“이제 대군(大軍)이 몰려왔습니다.”
먼 초원에 잿빛 구름이 나타났다. 구름은 짙은 비린내를 머금은 세찬 바람과 함께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호표기 병사들 모두 안색이 살짝 변했다.
예상대로 늑대 떼였다. 그것도 수만 마리의 늑대 떼였다. 호표기는 초원에서 나고 자랐으며 사냥을 체력 단련하는 놀이라 여기는 사내들이지만 이렇게 많은 수의 늑대가 한데 모인 것은 처음 보았다. 녹색 눈이 곧 드리워질 어둠의 장막 아래에서 일제히 반짝였다. 환하게 빛나는 눈에 그들은 온몸이 오싹해졌다.
흰 늑대. 순종 흰 늑대였다. 이런 동물은 초원에서 ‘신’과 ‘악마’의 이름을 동시에 지닌 생명이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이렇게 큰 무리가 동시에 나타나다니! 그야말로 기적과도 같은 일이라 절로 엎드려 절하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보고합니다!”
전방의 척후병이 말을 내몰아 돌아왔다.
“앞에 큰 늑대 무리가 나타났습니다.”
“아버지. 괜히 분위기 흩트리지 마시지요. 활과 화살이 있는데 그깟 늑대 몇 마리가 뭐 무서워서요?”
여하가 말안장의 죽은 사슴을 툭툭 치며 말했다.
“아들들이 여기서 아버지를 안전하게 지키겠습니다.”
“저것은 늑대입니다. 그저 달아날 줄밖에 모르는 새끼 사슴이 아닙니다.”
탁발산월이 여하의 손에서 활을 받아들고 활시위를 잡았다. 그는 돌연 화살을 얹고 활을 당겼고 3척 길이의 날카로운 화살이 홀연히 활시위를 떠났다.
백 보 밖의 흰 늑대 한 마리가 땅에서 발을 떼며 뒤로 몇 걸음 솟구쳐 올랐다. 늑대가 착지하자 늑대의 이마 한가운데 박혀 들어간 긴 화살이 또렷하게 보였다. 늑대는 무시무시한 화살의 힘에 밀려난 것이었다. 여하는 놀라 입이 떡 벌어졌다. 사람들은 속으로 탁발산월을 조금 무시했다. 이 만족은 고향을 떠난 지 오래된 데다 평소 화족처럼 논리정연하게 말하며 점잖고 우아하게 행동했던 까닭에 초원에서 활을 쏘며 말을 타고 자유롭게 내달리던 삶을 진즉 잊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맨몸으로 나온 특사는 일단 활을 잡자 초원의 혼백이 몸에 들어가기라도 한 것처럼 활을 당기고 화살이 활시위를 떠나는 모든 과정이 조금의 거리낌도 없이 시원시원했다. 여하의 눈으로는 화살 그림자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늑대 떼가 죽은 늑대의 시체 주위를 에워싸며 걸음을 멈췄다. 전방의 적이 쉽게 굴복하지 않으리라는 걸 알아차린 듯했다.
늑대 하나가 길게 울부짖자 주위의 늑대들이 죽은 늑대를 에워싸고 시체를 물어뜯기 시작했다. 아소륵은 심하게 몸서리를 쳤다. 사냥이 처음은 아니었지만 늑대가 동족상잔을 하는 모습은 처음 보았다. 죽은 늑대의 배가 물어뜯겼다. 아직 따뜻한 분홍색 창자가 흘러나왔고 이마에 검은 점이 있는 늑대가 그것을 질질 끌고 갔다.
대군은 고개를 돌려 조랑말 위에 앉아 있는 아소륵을 쳐다보았다. 그는 아소륵을 안아 자기 말 위에 앉혔다. 그리고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괜찮다. 산짐승일 뿐이다. 아비가 있잖느냐.”
아소륵이 실종되었다가 돌아온 후로 그에 대한 대군의 사랑은 형들을 훨씬 넘어섰다. 주는 것도 전보다 몇 배는 더 많아졌고 호표기 무사를 배치해 그가 외출할 때마다 수행토록 했다. 단 하나, 칼은 배우지 못하게 했다.
이름난 무사를 시켜 검술을 전수받게 하는 것도 초원에서는 대군의 은총인 셈이었다. 그러나 대군은 세자에게 더 많은 것을 제공하면서도 칼은 못 배우게 막았다. 어떤 은총은 더해주면서도 다른 면에서는 낮추니 사람들은 혼란스러웠다.
시체를 다 물어뜯은 늑대들이 천천히 물러났다. 그러나 울음소리는 여전히 주위를 메아리쳤고 늑대의 비릿한 오줌 냄새도 점점 더 진해졌다.
200명 호표기가 살짝 우묵하게 들어간 저지대를 원형으로 빙 둘러싸며 수비했다. 방어하기에 좋은 지형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지금으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멀리 내다보니 주변 풀 비탈에 끊임없이 늑대 형상이 번득였다. 사방에 얼마나 많은 야생 늑대가 어슬렁거리는지 알 수 없었다. 호표기 무사들은 화살을 활시위에 건 채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이제 어찌해야겠느냐?”
대군이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