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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청동의 피 (16)
한참이 흐른 뒤 노인이 천천히 일어났다. 멍한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아소륵의 칼에 가슴이 찔렸지만 마지막 순간 아소륵이 억지로 칼날의 방향을 틀어서 심장을 피해갔기에 이 정도는 노인 같은 괴물에게 대수롭지 않은 상처였다.
“‘무명(無明)’의 상태에서 벗어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어떻게 한 거냐?”
노인은 아소륵을 쳐다보지 않고 묵묵히 먼 곳을 바라보았다. 아소륵은 머리를 감싸 쥐고 대답했다.
“기억 안 나요. 할아버지가 제 이름을 부르신 건 기억나요. 한 번도 제 이름을 부르신 적이 없었잖아요. 그 순간 갑자기 상대가 할아버지라는 생각이 떠올랐어요…. 제가 왜 할아버지를 죽여요? 저한테 잘해 주시는 거, 다 아는데.”
“정말 나약한 아이로구나. 너처럼 나약한 아이는 영원히 ‘대벽지도’의 정수를 깨우치지 못할 게다.”
노인이 차갑게 말을 이었다.
“그것은 신의 도술이다. 신의 마음에는 연민이 없다. 이 기술을 배우려면 먼저 인간성을 없애야 한다. 내가 네 광기를 일부러 자극한 것은 네가 나를 죽여야만 하기 때문이다. 내 선혈로 네 어리석음을 씻어내야 비로소 무명의 힘을 빌려 신의 경지에 오르고 영웅의 운명을 완성할 수 있지. 하지만 너는 거부했다. 너는 ‘대벽’의 형태만 배웠을 뿐, 진수는 놓쳤다.”
노인은 허리춤을 더듬어 하얀 것을 꺼내 아소륵에게 던졌다.
“꺼져라! 겁 많고 바보 같은 놈. 낭과 물을 가지고 가라. 이것은 큰물고기의 부레다. 어유(魚油)를 발라두었으니 물을 담아도 안 샐 것이다. 썩 꺼져라. 넌 영웅으로 태어나지 않았다. 내가 사람을 잘못 봤구나.”
아소륵이 몸을 일으켰다. 어느덧 마지막 작별의 순간이 다가왔음을 깨달았다.
노인은 동굴 안으로 아소륵을 밀어 넣고 동판을 닫았다.
아소륵은 완전한 어둠에 휩싸였다. 칠흑 같은 악몽 속에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무섭지는 않았다. 그저 슬플 뿐이었다. 노인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노인의 냄새도 맡을 수 없었다. 하지만 아소륵은 느낄 수 있었다. 노인이 자리를 뜨지 않고 동판 너머에서 이쪽 소리를 듣고 있다는 것을.
차가운 동판을 사이에 두고 있지만 두 사람은 서로의 체온을 느낄 수 있었다. 한때 함께했던 두 사람이 멀지 않은 곳에서 말없이 이별을 기다리고 있었다.
잠자코 오랫동안 앉아 있던 아소륵이 손을 뻗어 동판을 어루만지다가 가볍게 두드렸다. 한참 후 맞은편에서 미약한 두드림이 들려왔다. 아소륵의 부름에 대한 노인의 대답이었다. 아직 멀리 가지 않았다는 대답.
아소륵은 동판에 살며시 얼굴을 갖다 대고 말했다.
“감사해요. 할아버지.”
대답이 없었다. 천지가 처음 개벽할 때와 같은 적막만이 흘렀다. 아소륵은 몸을 돌려 어두운 통로의 깊숙한 곳으로 가늠할 수 없는 미래를 향해 기어 올라갔다.
제단 위로 이글이글 맹렬한 불이 붙고 모우의 어깨뼈와 단향목이 타들어갔다. 향기로운 연기가 살랑살랑 하늘 위로 피어올랐다. 바람 한 점 없는 날씨에 연기는 높은 곳까지 올라가서야 사방으로 퍼졌다.
붉은색과 녹색이 합쳐진 옷을 걸친 무당들은 구리로 된 칼을 높이 들고 불더미를 돌며 덩실덩실 춤을 췄다. 그들은 반달 천신께서 망자의 영혼을 하늘로 인도해 주시기를 간절히 기원했다.
오늘은 5왕자 아소륵의 장례일이었다. 대군의 마음이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것처럼 평온하지 않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5왕자가 실종된 지 벌써 반년이 지났지만 대군은 내내 아소륵의 죽음을 공표하지 않았다. 귀족들은 새로운 세자 후보에 관심이 쏠렸음에도 대군 쪽은 꿈쩍도 않고 조용했다. 이따금 유목민이 초원에서 홀로 떠도는 아이를 보았는데 5왕자와 매우 닮았더라는 이야기를 하면 대군은 즉시 사람을 보내 조사하게 했다. 그러나 추적의 끝은 언제나 허무맹랑한 소문이었다.
그래서 모두가 알게 됐다. 대군이 5왕자가 돌아오기를, 그가 가장 사랑하는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린다는 것을. 대군이 가장 총애하는 아들이 어째서 변변찮은 5왕자인지에 대해 의견이 분분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부친의 사랑과 대군의 사랑은 다른 법. 부모는 자식이 재능이 출중하고 기개가 대범해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활을 잘 쏘고 말을 잘 타서 사랑하는 것도 아니다.
자식이기에 사랑하는 것일 뿐 그 어떤 이유도 필요 없었다.
그러다 마침내 란마부의 무당이 상서로운 하얀 모우를 갖고 먼 길을 와서 대군에게 5왕자를 위해 추모 의식을 지내자고 제안했다. 그럼 반달 천신께서 은혜를 베풀어 길 잃은 아이의 영혼을 하늘로 인도해 주실 것이라고 말이다. 그제야 대군은 허락했다.
무당들은 소뼈와 향목을 불살라 하얀 여우 가죽으로 만든 낡은 바람막이 외투를 세자의 시신으로 삼아 불더미에 태웠다. 푸른 연기가 하늘 위로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마음이 놓인 귀족들은 멀찍이 삼삼오오 모여서 작은 목소리로 이러쿵저러쿵 떠들었다. 세자가 완전히 사라졌으니 그 빈자리에는 어떤 왕자가 앉게 될지에 대해서 말이다.
동륙 사절단도 장례에 초대됐다. 뇌운맹호는 갑옷 겉에 하얀 베옷을 껴입었다. 탁발산월의 등 뒤에 선 그가 목소리를 낮추고 물었다.
“장군. 저희의 중대한 임무도 이제 결정해야 하지 않을까요?”
“흠.”
탁발산월이 살짝 고개를 돌렸다.
“그런 얘기를 할 때가 아니다.”
탁발산월은 느린 걸음으로 나아가 대군의 등 뒤에 섰다.
대군은 돌아보지 않았다. 그는 유난히도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청양을 다스리며 평생 수많은 사람을 죽였기에 생사에 익숙하다고 생각해 왔소. 그런데 녀석이 죽었다는 말이 차마 나오지가 않아서 그렇게 며칠, 또 며칠을 미루기만 했지. 탁발장군에게 면목이 없구려. 그대가 새로운 세자를 인질로 데려가려고 이런 황폐한 곳에서 오래 머물렀다는 거 잘 아오.”
탁발산월은 잠시 생각하더니 앞으로 한 걸음 나아가 대군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섰다.
“아무리 많은 사람을 죽여도 그것이 자기 가족이 아니라면 생사가 무엇인지 반드시 안다고 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장군도 그런 한탄을 하시오?”
대군이 고개를 돌렸다.
대군의 시선에 움찔한 탁발산월은 번득 정신을 차렸다. 경솔한 발언이었음을 깨달았던 것.
“옛일을 생각하면 괜스레 감회(憾悔)가 들곤 하지요.”
대군이 불더미 앞의 소녀를 가리켰다.
“요즘 나는 자주 자책한다오. 내가 북륙에서 영웅이라 자처한 수십 년 동안 아내와 자식들에게는 진심으로 잘한 적이 없더군. 저 소녀가 보이오? 아소륵의 어린 노예요. 지난 반년간 아소륵이 납치된 초원에 서서 밤낮으로 길 끄트머리만 바라보았다더군. 저 아이는 아소륵이 돌아오기를 기다렸소. 내가 저 아이를 보면 부끄러운 마음이 든다오. 진정으로 아소륵을 신경 쓴 사람은 아비인 내가 아니었더라고. 아소륵에게 진즉 했어야 하는 말이 있었는데, 가슴속에 담아두기만 하고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지. 녀석이 나약한 아들이기는 하나 천신께서는 내가 진심으로 그 아이를 사랑한다는 걸 아실 거요.”
탁발산월이 하얀색 치마를 입은 소녀를 바라보았다. 소녀의 흰색 치맛자락과 땋은 머리 사이로 흰색 머리끈이 세찬 바람에 나부꼈다. 소녀는 바람 속 한 떨기 창백한 잎사귀 같았다.
그는 다시 몸을 틀어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비단 수레를 보았다. 여자 노예가 발을 반쯤 젖히고 타오르는 불더미를 가리켰다. 화려한 비단 위에 단정히 앉은 만족 귀부인이 멍한 눈빛으로 뜨거운 불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소리 없이 웃으며 천으로 만든 인형을 안고 있었는데 가끔 고개를 숙이고 인형의 머리카락에 입을 맞췄다.
“연지! 연지, 저건 세자의 불이에요…….”
나이가 든 여인이 살며시 부인의 머리카락을 어루만지며 슬퍼할 상황임을 일깨워주었지만 부인은 멍하니 미소만 지었다.
“비막간, 욱달한. 이리 와라.”
대군이 두 아들을 향해 손짓했다.
“아버지.”
왕자들이 나란히 무릎을 꿇고 대군 앞에 앉았다.
“너희 동생이 정말로 죽었다. 이제 그 아이는 반달 천신의 품에서 기뻐하겠지. 큰아들과 셋째 아들, 너희는 내 아들 중에서 가장 똑똑하며 다음 세자가 될 수 있는 재목이다. 슬프냐?”
여수우와 여응양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답하기 힘든 것 안다. 그렇겠지. 무슨 말을 하겠어? 동생의 죽음이 너희에게는 세자가 되어 금장궁을 물려받을 기회인 것을. 너희가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아비인 나도 모르겠구나.”
대군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을 이었다.
“제왕의 집안에 태어나니 웃고 우는 일도 마음대로 할 수가 없군.”
여수우가 고개를 들었다. 그는 입술을 뗐으나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침묵했다.
“오늘 밤. 각 가문의 가주들에게 금장궁으로 오라고 일러라. 할 말이 있으니.”
대군이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물러들 가라.”
“네!”
왕자들이 함께 물러났다.
“탁발 장군은 내가 무엇을 선포할지 아시오?”
대군이 나직하게 물었다.
탁발산월이 고개를 끄덕였다.
“누구를 새로운 세자로 세울지 벌써 결정하셨습니까?”
대군이 고개를 끄덕였다.
“탁발 장군도 이제 남(南)으로 돌아갈 일정을 잡아도 되오.”
“알겠습니다!”
멀리서 탕탕 소리가 전해졌다. 무당이 머리 위에서 불에 그을린 소 어깨뼈를 두드리는 소리였다. 소리는 고요하고 요원해지더니 마침내 텅 빈 허공으로 아득히 사라졌다.
군중 밖에서 살짝 떠들썩한 소리가 들려왔다.
대군이 고개를 돌리자 철익이 인파를 헤치고 들어왔다. 그는 빠른 걸음으로 대군 앞에 와 무릎을 꿇었다.
“대군. 저기…….”
철익의 얼굴에 곤란한 기색이 어렸다.
“삭북부의 유목민 한 무리가 달려와 대군을 뵈어야 한다고 소란을 피우고 있습니다. 방목 중에 북도성 가의 계곡을 지나다가 세자를… 찾았답니다!”
“나쁜 새끼들!”
격륵 칸이 인파 속에서 걸어 나왔다.
“지난 몇 달간 이런 일이 한두 번이었습니까? 매번 천것들의 거짓말이 아닌 적 있었냐 말입니다. 상금을 좀 받아보려는 것뿐이에요. 오늘은 세자가 승천하는 중요한 때인데 어찌 저런 천민들이 소동을 일으키도록 들여보낼 수 있습니까? 모두 쫓아버리시지요!”
나이가 가장 많은 무당이 종종걸음으로 다가왔다.
“대군. 저희 모두 먼 하늘에서 천신의 응답을 들었습니다. 세자의 영혼은 이미 인도되어 하늘로 올라갔고 지금 반달 천신의 운성에서 복을 누리고 계십니다.”
탁발산월은 대군이 주저하고 있음을 알아챘다.
“대군. 우매한 목민의 말을 매번 믿어야 합니까?”
격륵이 미간을 구기며 말을 이었다.
“우리는 당당한 파소이 가문입니다. 이 아이를 다시 내려주신다 하더라도, 천신께서 내려주실 일이지 어찌 비천한 유목민이겠습니까? 하물며 지난 몇 달 동안 우리는 보고하러 온 수많은 유목민을 믿었지만 대부분 천민의 자식을 세자로 사칭했었지요. 정녕 제전에서까지 대군은 그자들을 불러들여 소란을 일으키게 두실 겁니까?”
철익이 조금 머뭇거리며 입을 뗐다.
“대군. 확실히 상금을 바라고 온 것처럼 보이긴 합니다.”
대군의 입술이 달싹였으나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무당도 희끗한 눈썹을 치키며 대군을 쳐다볼 뿐 말이 없었다.
탁발산월이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전에 한 장문 선생이 이런 말을 하더군요. 인생을 살며 어떻게 후회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고요. 처음에는 웃기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생각해 보니 맞는 말이지 뭡니까. 인력은 언제나 한계가 있어 많은 일을 해낼 수 없으니 반드시 후회하게 되지요. 우리가 살면서 일찍 일어나고 늦게 자는 것도 다 더 많은 일을 하기 위해서가 아닙니까. 죽기 전에 너무 후회하지 않으려고요.”
대군은 아연했다.
“탁발 장군의 말이 잘 이해가 되지 않는군.”
“유목민들을 만나보시지요. 거짓이라 하더라도 나중에 후회는 없을 겁니다.”
대군이 깜짝 놀랐다. 그는 순간 크게 깨달은 듯 소리쳤다.
“그자들을 들여라!”
유목민들이 들어왔다. 그들은 무두질하지 않아 거친 가죽을 걸치고 있었으며 갈포(葛布)1)로 지은 옷의 소매가 허리춤에 묶여 있었다. 초원에서 가장 빈곤하고 가장 비천한 유랑민들이 확실했다. 커다란 수레를 한 대 몰고 들어온 이들은 수레 앞으로 나란히 줄지어 무릎을 꿇었다.
“장막을 걷어라!”
철익이 명령했다.
“잠깐!”
대군이 철익을 제지했다.
그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입을 열었다.
“먼저 이들에게 황금 한 냥을 내려라.”
철익은 의아한 얼굴로 주인을 쳐다보았지만 그래도 허리춤에서 황금을 꺼내 한 냥씩 주었다.
수레 앞에 선 대군이 고개를 돌려 유목민들을 보았다.
“고맙구나.”
대군이 소리 없이 웃으며 말했다.
“이번 일이 지나고 나면 그 아이에게 미안한 마음이 덜하겠지.”
대군이 장막을 휙 걷었다.
밝은 햇살이 더러운 수레 안을 비췄다. 마초 위에는 창백한 소년이 잠들어 있었다. 굶어서 피골이 상접했고 기운이 없어 일어서지도 못했다. 하지만 눈은 여전히 맑고 투명했다. 무언가가 깊이 숨겨진 호수처럼 천지만물을 비출 수 있는 눈이었다.
대군은 잠자코 소년을 살펴보았다. 자기 아들을 알아본 듯하기도 했고 그의 생김새를 다 잊어버린 것 같기도 했다. 유목민들은 불안해하며 말없는 대군을 쳐다보았다. 그들은 거짓으로 희소식을 꾸며 보고했다고 목이 잘리는 것은 아닌가 싶어 불안했다.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고 소년의 얼굴 위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무당은 결국 성질을 누르지 못하고 다가가 보았다.
“세자… 세자는 이미 죽었어…. 이것은 귀신이야, 귀신…. 귀신이 나타났다! 귀신이다, 귀신이야!”
무당은 질겁하며 소리치더니 절박하게 소 어깨뼈를 두드렸다. 그는 입으로 경문을 읊으며 소년의 정수리에 대고 뼈를 두드렸다.
“무엄하다!”
우레와 같은 포효가 드넓은 초원 위에 메아리쳤다. 대군은 소뼈를 빼앗아 무당의 머리에 내리쳤다. 몹시도 흉포한 일격이었다. 무당은 눈이 뒤집어지며 힘없이 수레 앞에 쓰러졌다. 대군은 무당의 등을 밟고 수레에 올라가 아이를 품에 꼭 끌어안았다.
“아버지.”
아소륵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아비 여기 있다!”
대군이 소리쳤다.
육자유가 살며시 휘장을 걷고 장막 밖으로 나왔다. 대군은 곧장 다가가 그의 손을 움켜쥐고 물었다.
“어떤가? 육 의원, 내 아들은 어떤가?”
“큰 이상은 없습니다.”
육자유가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대군. 잠시 따로 말씀을 나누시지요”
“모두 물러가라!”
대군이 호위 무사들을 물리고 육자유를 따라 장막 사이의 바람을 피하는 곳으로 갔다.
육자유가 손을 비비며 우물쭈물 말을 더듬었다.
“육 의원. 기탄없이 말해보게. 이미 한 번을 잃었던 아이네. 반달 천신께서 내게 상으로 저 아이를 돌려보내 주셨으니 무슨 일이 있든…….”
대군이 목소리를 낮췄다.
“다 받아들이겠네!”
“세자의 몸만 놓고 말한다면 정말 별 문제없습니다. 저번에 칼 연습을 하면서 갑자기 발병해 쓰러졌을 때도 체력이 약해서가 아니라 세자의 혈기가 지나치게 왕성했기 때문입니다. 무시무시할 정도로 왕성한 나머지 혈관이 터진 것이지요. 산벽공 선생이 어떤 방법으로 세자를 살려냈는지는 모르나, 후에 제가 세자를 살펴보았을 때는 화기(火氣)가 솟구치는 흔적은 없어졌습니다. 그자들의 신비한 술법은 의술로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육자유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을 이었다.
“산벽공은 세자 몸의 혈기를 진짜로 없애지는 않았습니다. 그저 특별한 방법으로 혈기를 눌러두었을 뿐입니다.”
“눌러두었다고?”
“세자의 심장은 오른쪽으로 치우쳐져 있고, 왼쪽 가슴 가운데에는 종양이 하나 있습니다. 가슴을 열어 확인할 자신은 없으나 고서에 따르면 십중팔구 혈영(血嬰)입니다.”
“혈영?”
“피가 고이는 주머니인데, 산벽공이 특수한 방법을 사용해 혈기를 그 안에 모아둔 것입니다. 하지만 혈기는 여전히 존재하며 어떤 해열 약제를 쓰더라도 완전히 없앨 수는 없습니다.”
대군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그래서 어떤 영향이 있겠소?”
“당장은 단언하기 힘듭니다. 하지만 실종되었다가 돌아온 후 세자는 건강이 악화되지 않고 도리어 튼튼해졌습니다. 산벽공이 눌러두었던 혈기도 혈영 안에서 천천히 빠져나오고 있습니다. 혈기는 따스한 양의 기운인지라 지나치게 격렬해지면 몸이 상하게 됩니다. 하지만 혈기의 양분을 얻어 금세 회복될 것입니다. 그런데 세자께서 지난 몇 달간의 일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듯합니다.”
대군이 흠칫 놀랐다.
“기억을 못 해?”
“큰 충격을 받아 그렇겠지요. 어디 갔었는지 물었더니 그러더군요. 깨어나 보니 계곡 옆에 누워 있더랍니다. 의서에도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놀라고 당황하면 생기는 이혼증(離魂症)이지요. 세자의 몸을 살펴보니 무척 쇠약하고 뼈가 보일 정도로 마른 데다 온몸이 상처투성이였습니다. 큰 고생을 한 것처럼 보이지만 어디에 갔는지는 전혀 티가 나지 않았습니다.”
육자유가 약 자루를 짊어지며 말을 이었다.
“의원으로서 보건대 지금은 지나치게 추궁해선 안 됩니다. 아직 마음이 안정되지 않았는데 대군께서 계속 캐물으시면 불에 기름을 붓는 격입니다. 우리 동륙에서는 잃어버린 아이를 찾으면 출생주 한 상을 다시 차리지요. 그 밖에 더 물을 게 뭐 있겠습니까?”
육자유는 눈높이만큼 두 손을 맞잡아 들고 허리 숙여 인사를 올린 뒤 홀연히 떠나갔다.
대군은 장막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아소륵은 침상에 누워 있었고 어린 하녀가 조용히 침상 가에 앉아 아소륵의 손을 꼭 쥐고 있었다.
아소륵은 제 아버지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입술을 움직였다. 대군이 살며시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무 말 마라. 살아서 돌아왔으니, 그거면 됐다. 소마는 네 주인을 잘 돌봐라.”
대군은 소마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코를 벌름거렸다.
“몸에서 제법 여인의 향내가 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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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칡 섬유로 짠 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