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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청동의 피 (15)
“의마덕, 고랍이, 납과이굉가, 이것은… 네 조상의 피다.”
“‘내 조상’이라고 해야지!”
어리둥절해진 노인이 큰 소리로 꾸짖었다.
“너는 파소이 가문이 아니냐? 네가 네 조상에게 경의를 표하면 안 되기라도 한 것이야?”
“아뇨, 아니에요! 의마덕, 고랍이, 납과이굉가, 이것은 내 조상의 피다!”
아소륵이 깜짝 놀라며 얼른 고쳤다.
노인의 가슴속에는 본디 극도로 강렬하고 날카로운 살기가 충만했으나 한때 초원을 휩쓸었던 의지도 이 아이 앞에서는 꺾이고 말았다. 아소륵은 만족의 고귀한 옛 이름이 무슨 뜻인지도 몰랐을뿐더러 선대 초원의 왕들처럼 권력과 명성을 갈망하지도 않았다. 그는 이 참혹한 세상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칼을 배우려는 이유도 약자를 보호하기 위해서라는데 약자들은 정말 지켜야 하는 것인가?
영웅은 해골산을 밟고 왕좌에 오르게 돼 있다. 소위 천하를 수호한다는 것은 사관(史官)들의 뻔뻔한 미화일 뿐이다.
“조상의 영혼이 어둠 속에서 나를 보고, 내게 존귀한 피와 살을 전해 주며, 천신의 축복을 전해 주리니.”
“조상의 영혼이 어둠 속에서 나를 보고, 내게 존귀한 피와 살을 전해 주며, 천신의 축복을 전해 주리니.”
“우리는 초원의 왕이 될 운명이고, 세상의 황제가 될 운명이며, 신의 유일한 사자가 될 운명이다.”
“우리는 초원의 왕이 될 운명이고, 세상의 황제가 될 운명이며, 신의 유일한 사자가 될 운명이다.”
노인은 점점 더 빠르게 낭송했다. 천둥소리와 벼락이 연달아 터지는 듯했다. 아소륵은 계속 노인을 따라 했다. 앳된 목소리와 늙은 목소리가 점차 섞여들었다. 천지가 처음 열리고 혼돈의 상태였던 태곳적 맹세 같았다.
이상한 맥이 가슴 아래에서 뛰기 시작했다. 아소륵은 억누르고 싶었지만 억눌러지지 않았다. 노인의 낭송은 모종의 무시무시한 힘을 동반하는 듯 아소륵의 정신을 완전히 지배했다. 한마디 읊을 때마다 그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메아리치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아소륵은 통제하지 못하고 노인을 따라 읊었다.
“청동의 화염이 지옥에서 타오르니 파소이 가문의 명등(命灯)은 꺼지지 않으리.”
노인이 의연하게 일어나 거대한 석도를 끌며 말했다.
“그러나 우리 중에 살 수 있는 사람은 하나뿐이다!”
노인은 완전히 회복되어 야수로 변했다. 눈동자는 충혈되어 새빨갰고 온몸의 근육은 팽팽히 죄어들었으며 뼈가 우드득 불거지는 소리가 났다.
노인은 포효하면서 석도를 끌고 번개처럼 쏘아져 나갔다. 그는 아소륵에게 달려들며 머리를 향해 석도를 내리쳤다. 그저 정방향으로 베는 단순한 기술이었다. 검술이라 말할 수도 없는 기술이었지만 칼 아래에 있는 사람만이 그 힘을 똑똑히 느낄 수 있었다. 신의 위력 같은 거대한, 그야말로 대지를 가를 듯한 힘이었다!
피가 ‘웅’ 머리로 솟구치며 아소륵은 저도 모르게 청사를 들어 올렸다. 노인이 괴물 물고기를 죽일 때 내려치던 칼이 그의 머릿속에 매우 또렷하게 떠올랐다. 아소륵은 완벽하게 그 기술을 복제했다. 앞으로 나아가 몸을 회전하면서 허리를 비틀어 평평하게 칼을 베었다! 활시위처럼 팽팽해진 몸이 순간 폭발하듯이 펼쳐졌다!
가볍고 얇은 청사와 거대한 석도가 허공에서 부딪쳤다. 최고의 강철로 만들어진 청사가 한 수 위였다. 석도 날은 회전하며 와해됐지만 노인의 힘이 여전히 응집돼 있었다. 부서지는 석도 파편이 아소륵 앞을 쓸고 지나갔다. 돌조각이 일으키는 바람에 피부가 긁힐 듯했다.
통제할 수 없이 넘쳐흐르는 거대한 힘은 이미 무기의 한계를 넘어섰다. 노인의 힘이 날카로운 검과 긴 창처럼 하나로 응집됐다. 노인은 충분히 거대하고 묵직한 무기라면 어떤 것으로도 이 기술을 구사할 수 있었다. 이것은 순전히 힘으로만 부리는 기술이며 만족 사내의 가장 난폭한 혈기였다!
두 번째 칼이 곧바로 다가왔다. 석도의 길이는 처음의 절반으로 줄어들었지만 속도는 거의 배로 빨라졌다. 청사와 석도가 허공에서 또 한 차례 맞부딪쳤다. 돌조각이 사방으로 튀었다. 거대한 석도는 휘둘러질 때마다 부서졌다.
이제 노인의 손에는 3척 길이의 석도만 남았다. 칼을 휘두르는 힘에 계속 미끄러져 나가던 그는 한쪽 무릎을 땅에 대며 그 기세를 멈추더니 석도 자루를 내던지고 맨손으로 아소륵을 향해 달려들었다. 더는 칼을 겨루는 것이 아니었다. 이제는 순전히 상대를 죽일 목적의 격투로 변했다. 손에 칼을 쥐었는지 여부는 상관없었다. 칼은 언제든 버릴 수 있었다.
다만 그 칼의 살기가 남아 노인의 움직임마다 분명하게 드러났다. 노인은 적이 반항하거나 숨을 고를 기회를 주지 않았다. 노인의 석도는 아소륵의 청사에 못 미쳤지만 그에게는 두 손이 있었다. 노인의 두 손 역시 칼이고 검이었다. 노인은 아소륵의 목을 움켜쥐고 거칠게 돌벽에 짓눌렀다.
아소륵은 간신히 왼손으로 목을 막아냈지만 아무 소용없었다. 노인의 손은 쇠로 만들었는지 아소륵은 손뼈가 부러질 것 같았고 곧이어 목구멍도 노인에게 붙잡혀 조각날 것만 같았다. 왜 이렇게 됐는지 이해가 안 됐다. 절대 도술을 전수하는 것이라고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아소륵은 노인의 살기를 분명하게 느꼈다.
노인은 정말로 그를 죽이려 하고 있었다!
아소륵은 점점 숨이 막히고 눈앞이 캄캄해졌다. 하지만 고통은 안 느껴졌다. 그저 가슴속에 이상한 고동이 점점 더 또렷해졌다.
“하하! 하하! 하하하하! 덤벼라, 날 죽여! 날 죽이면 나갈 수 있다!”
노인이 미친 듯이 웃었다.
거의 탈진한 아소륵이 갑자기 청사를 들어 올렸다. 그는 손이 가는 대로 칼을 휘둘러 노인의 어깨를 베었다. 새빨간 피가 튀며 두 사람의 얼굴에 흩뿌려졌다.
“좋아! 다시 해봐! 다시 덤벼! 청동 피의 향기를 맡았느냐?”
노인은 움츠러들지 않고 도리어 아소륵을 향해 포효했다.
“날 죽여라! 날 죽이면 넌 성장할 것이다!”
아소륵은 두 번째로 그은 칼이 노인의 어깨뼈를 쓸고 지나갔다. 노인이 소리쳤다.
“틀렸다! 틀렸어! 아직 안 죽었잖아! 어서! 덤벼라! 화족 용사들아! 너희 동료를 도륙한 마귀를 죽이러 와라! 너희 용사가 와서 내 가슴을 가르지 않으면… 내가 너희의 가슴을 가를 것이다!”
노인의 울부짖는 목소리는 점점 더 높아져갔다. 아득히 넓은 전쟁터에 서서 반짝이는 투구와 갑옷을 입은 화족 무사를 마주한 환상에 사로잡힌 듯했다. 노인은 야수처럼 덤비라고 적에게 포효하며 살육의 갈망을 남김없이 드러냈다.
아소륵은 청사를 뒤집어 잡았다. 세 번째 공격은 찌르기였다. 노인의 가슴을 겨냥했다. 아소륵은 팔이 노인만큼 길지는 않았지만 구속에서 벗어난 광포한 용 같은 힘이 아소륵의 몸을 통제해 나갔다. 골격이 격렬하게 변하고 팔이 불가사의하게 길어지며 청사가 차츰 노인의 심장을 찌르고 들어갔다.
피가 솟구쳐 나왔다. 아소륵은 미친 듯이 기뻤다. 그의 눈은 노인처럼 피에 굶주린 살기로 번득였다. 피부 표면으로 혈관이 무시무시하게 불룩불룩 솟아올랐고 몸은 기이한 적홍색을 띠었다. 아소륵은 노인처럼 광포한 무뢰한으로 변했지만 본인은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아소륵의 마음에는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칼을 노인의 심장에 밀어 넣어 선홍색 피와 생명이 한꺼번에 뿜어져 나오는 광경을 보고 싶다는 것. 아소륵은 몸이 피에 흠뻑 젖는 느낌을 갈망했다.
흉악하고 끔찍한 아소륵의 눈빛을 마주한 노인은 눈을 감고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초원의 향기가 코끝에 느껴지는 듯했다. 내리쬐는 금빛 햇살 아래, 짙푸른 풀밭 저 멀리 새하얀 장막이 보였다. 노인은 장막을 향해 질주했다…….
“아흠막도… 드디어 이날이 왔구나. 반달 천신께서 그래도 내게 혼자 늙어가지 말라고 기회를 주셨어. 내 피로 네 자손을 깨울 기회를 주셨다!”
노인은 나직하게 말하며 갑자기 아소륵의 목을 단단히 눌렀던 손을 풀었다.
아소륵은 순간 장애물이 사라지자 그대로 청사를 들고 노인의 품을 향해 달려들었다. 청사가 암석을 뚫고 들어갔고 노인은 그대로 벽에 박혔다.
“아주 잘했다. 이제 그 칼을 비틀어 내 심장을 못 쓰게 만들면 네 몸속에 선조의 혼이 되살아날 것이다.”
노인은 아소륵의 머리를 힘껏 품에 안았다.
“아소륵… 이것이 내가 네게 해줄 수 있는 전부다. 용감해져라. 앞으로 500년간 초원에 네 이름이 널리 불리도록!”
챙그랑. 금속이 땅에 떨어지며 쟁쟁한 소리가 동굴 안에 메아리쳤다. 노인이 눈을 번쩍 떴다. 땅에 떨어진 것은 청색 단도였다. 마지막 순간, 소년은 초원의 무사들처럼 익숙하게 칼자루를 비틀어 심장을 완전히 째고 벌어진 상처로 피가 흐르게 두지 않았다. 목려는 당연히 가르쳐준 것이었지만 소년은 이 기본 원칙을 지키지 않았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칼자루를 천천히 뽑아 발아래 던졌다. 눈 속에 흉악한 빛은 사라지고 호수 같은 투명함과 아이다운 슬픔만이 남았다. 혈관이 제멋대로 날뛰던 비정상적인 상태도 서서히 누그러들었다. 아소륵은 노인을 끌어안았다. 숨소리도 점점 잦아들었다.
놀라 당황한 것은 도리어 노인이었다.
“날 죽여라! 날 죽여야 이 검술의 정수를 이해할 수 있다! 너는 여씨 파소이 가문의 아들이다. 살인은 네 본분이야. 선조의 핏줄을 이어가려면 먼저 나를 죽여야 해!”
노인이 노성(怒聲)을 질러댔다.
“저는…. 저는 이해가 안 돼요. 왜죠? 이게… 세상의 참모습인가요?”
아소륵이 물러나며 검붉은 어혈을 토했다.
마지막 순간, 본인의 정신이 되살아난 아소륵은 무리해서 살육의 충동을 억눌렀고 그 바람에 광포한 혈기가 혈관 속에서 요동쳐 제 몸에 중상을 입게 된 것이었다.
아소륵의 얼굴에 흘러내린 눈물 위로 맑은 형광빛이 비쳤다. 투명하고 고요한 두 눈은 소녀 같아 보였다. 노인은 아소륵과 눈을 마주할 용기가 나지 않아 돌벽에 바짝 기대어 선 채 남루한 옷소매로 얼굴을 가렸다. 두려움인지, 슬픔인지 알 수 없는 감정이었다.
“아흠막도…. 아흠막도…. 당신의 영혼이 아직 있군. 당신이 이 아이를 내게 보낸 거야. 당신이 아직 있구나! 당신이 우는 것을 보았어. 당신이 내 곁에 있는 걸 봤다고. 어디 있는 거야? 어디 있어?”
노인이 갑자기 고함을 지르며 고개를 들고 사방을 둘러보았다. 그는 어미를 찾는 아이처럼 그 어떤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마구 뛰어다녔다.
하지만 쇠사슬이 그를 속박했다. 노인은 쇠사슬을 팽팽하게 잡아당기며 필사적으로 발을 뻗었다. 노인은 깊은 어둠 속을 향해 소리쳤다.
“아흠막도! 가지 마! 한 번만 더 얼굴을 보여줘!”
동굴 안으로 노인의 외침이 한 차례, 또 한 차례 메아리쳤다.
“어디 있어…. 날 떠나지 마…….”
노인은 낙담한 채 무릎을 꿇고 앉아 머리를 바닥에 짓찧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