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주표묘록-49화 (49/3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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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청동의 피 (14)

아소륵은 입을 다물었다.

“이야기 아직 안 끝났다. 여청양은 교활하지만 매우 폭력적이기도 했다. 대군의 자리에 오른 후 모든 부락을 토벌하며 청양부의 초목장을 넓혀갔지. 그는 정복한 부락의 사내들을 한데 모아두고 쇠 수레바퀴로 밀어 버렸다. 칼로 머리를 베면 칼날이 마모되는 데다가 한 번에 몇만 명을 죽이려면 쇠 수레바퀴로 뭉개서 죽이는 게 가장 쉬웠거든. 시체 위에 한 자 두께로 흙을 깔고 풀 씨앗을 뿌렸다. 몇 년 후 그곳은 매우 무성한 초목장이 되었지. 아래에 있는 사람의 뼈와 살이 양분이 되었거든. 그는 호색한에 잔인하고 포악했다. 한 집안의 어미와 어린 딸이 함께 그를 시중들도록 강요했고 가장은 한쪽에 묶어두고 이를 지켜보게 했다. 일을 마치면 여인들의 목을 베었다. 그리고 그들의 머리뼈 안에 촛불을 넣고 불을 붙여서 자기 장막 주위에 등처럼 걸어두었지. 그는 애당초 미친놈이었다. 갖은 잔인하고 포악한 방법을 생각해냈어. 순간의 쾌락을 느낄 수만 있다면 수천, 수만 명을 아낌없이 죽였지. 금세 초원인은 물론 여청양의 형제들도 그를 반대하고 나섰다. 그는 형제들의 아내와 딸도 가만두지 않았거든. 하지만 반달 천신이 그를 구하고 청동의 피까지 주셨다!”

“청동의 피요?”

노인의 입에서 그 말이 나온 것은 이번이 두 번째였다.

청동 가문과 검치표 가문은 모두 파소이 가문이 자랑스럽게 칭하는 이름이었다. 아소륵은 ‘검치표’란 이름이 전설 속에서 표범이 이빨 두 개를 여청양에게 무기로 주었다는 데서 유래됐다는 것만 알 뿐 ‘청동’이라는 두 글자의 유래는 몰랐다.

“어리석은 자손아!”

노인이 길게 탄식했다.

“청동의 피는 파소이 가문을 말하는 게 아니다. 그것은 가장 강한 무사만이 가질 수 있는 혈통이다. 청동의 피를 가진 자는 전쟁터에서도 지치지 않고 무기를 휘두를 수 있으며 고통도 모른다. 아군과 적도 구분하지 못하며 그저 살인밖에 모르지. 그들은 끊임없이 살인한다. 혼자서 1개 군대를 죽일 수도 있지. 여청양의 몸에 바로 그 청동의 피가 흘렀다. 그는 이 혈통을 자기 아들들에게 전해 주려고 여자 형제들의 남편을 모두 죽이고 친누나, 친누이와 근친상간을 했지. 아우의 딸들도 납치해 아내로 삼았다. 여청양에게는 아들이 많았는데 그중 청동의 피를 물려받은 이는 아홉 명이었다. 그는 이 악마 같은 아들을 이용해 모든 적을 죽여 버리고 초원을 차지했지. 하지만 그는 처참하게 죽었다. 결국 완전히 미쳐서 칼로 자기 살을 한 점, 한 점 잘라냈어.”

기나긴 정적이 흘렀다. 아소륵은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노인은 그곳에 선 채 고개를 젖히고 동굴 천장을 바라보았다. 종유석에서 물이 한 방울씩 똑똑 떨어졌다.

“그 후엔 어떻게 됐나요?”

아소륵이 물었다.

“나중 이야기는 내가 말할 필요 없지. 돌아가서 네 아비나 대합살에게 물어봐라.”

노인이 아소륵의 손을 잡아당기며 말을 이었다.

“이제 네가 돌아갈 때가 됐다.”

노인은 다짜고짜 음식물이 전달되는 구멍 입구로 아소륵을 잡아끌었다. 동판을 당겨 열자 안쪽으로 쇠 난간이 보였다. 시커먼 구멍에서는 으스스한 한기가 새어 나왔다.

“바람이 느껴지느냐?”

노인의 물음에 아소륵은 고개를 저었다.

노인은 아소륵의 손을 잡아당기더니 그의 검지를 한번 슥 빨고는 구멍 안으로 집어넣었다. 아소륵은 놀라 멍해졌다. 그런데 구멍 반대편에서 쏴 하고 불어오는 찬바람이 느껴졌다.

“바람이 불기 때문에 손가락이 차게 느껴지는 것이다. 동굴 입구에서 불어오는 바람이지. 이 구멍을 오랫동안 관찰했는데 늘 바람이 불어왔어. 약한 바람이긴 하지만 단 한 번도 끊어진 적이 없었다.”

“그럼 분명히 밖으로 통하겠네요!”

아소륵은 그 사실을 깨닫고 신이 나서 펄쩍 뛸 뻔했다.

“그래. 40년 전 내가 이곳에 갇히기 전에 우족 여섯 명이 동운산자락의 구덩이에 나타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우족도 우리 만족의 적이지. 다행히 둘 사이에는 동운산이 있다. 우족의 영지는 동운산 동쪽이라 우리와는 크게 충돌할 일이 없었어. 보통 우족은 동운산 서쪽으로 감히 넘어오지 못하는데 왜 갑자기 여섯 명이나 우리 만족 땅에 나타났을까? 호표기는 그들을 잡아와 척후병이라고 자백하게 몰아붙였다. 하지만 우족은 침범할 뜻이 없었다고 말했지. 동운산 동쪽의 사냥꾼인데 무리를 지은 쟁 몇 마리를 만나는 바람에 산속 동굴로 숨어들었다는 거야. 근데 쟁이 쫓아 들어오는 바람에 동굴 안으로 달아날 수밖에 없었고 그러다가 길을 잃었다는 거지. 다행히 그들은 사냥한 짐승 고기도 있고 지하 동굴에서는 고기가 상하지도 않아서 그 고기와 지하 강물로 연명했단다. 한참을 걸어 다시 햇빛을 보았을 때는 어느새 동운산 서쪽이었다더구나. 우리는 언제 출발했는지 물었고 그때야 그들이 동굴 안을 반년이나 걸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지.”

“지하 동굴이 신산을 관통하는군요!”

아소륵은 매우 놀랐다.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난 아주 긴 시간을 들여 이 동굴의 내력을 조사했고 마침내 동굴을 뚫은 것이 모두가 다 아는 두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누구일 것 같으냐?”

아소륵은 고개를 저었다.

“손왕과 고풍진이다. 원래는 자연적으로 생긴 동굴이고 사방으로 뚫려 있지만 일부는 연결되어 있지 않았다. 이름을 남기지 못한 상고시대의 어느 부족이 이곳에 살았는데 그들이 동굴 하나를 파 궁전처럼 웅장하게 만든 것이지. 지금 이 동굴도 그런 것이다. 옛날 사람들은 종유석 기둥을 남겨두고 벽을 평평하게 깎아서 그 위에 벽화를 그렸다. 이 동굴 높이를 봤을 때 그들은 놀랄 만큼 키가 큰 종족이었을 거야. 손왕과 고풍진은 동굴의 옛 지도를 구했고 민부들을 시켜 밤낮으로 동굴을 파 마침내 다 뚫게 되었다. 고풍진은 그 동굴을 ‘애색박두랍공문’이라 불렀어. 지옥으로 통하는 문이란 뜻이지. 손왕은 쥐구멍이라 불렀다. 두 사람은 이 통로로 만족의 군마와 무사들을 청주로 보내려 했다. 생각해 봐라. 수천수만 명의 철기병이 동운산과 숲이라는 장벽을 넘어 갑자기 우족 황제가 있는 청도 밖에 나타나면 얼마나 놀라고 당황하겠느냐? 저들이 방어할 새도 없이 청주는 우리 초원인의 땅이 되는 거야!”

“하지만 고풍진 존격이태 칸은… 대합살처럼 점성가잖아요?”

노인이 비웃었다.

“어리석은 녀석! 며칠간 내가 해준 이야기를 허투루 들었구나. 이 세상의 역사는 금빛으로 쓰인 게 아니야. 피로 쓰였지! 위대한 점성가라고 야심이 없으리란 법은 없다. 존격이태 칸, 고풍진 소덕랍형은 우족 내에서 돌연변이였다. 난세의 선동가이자 별 하늘 아래 우뚝 선 마귀였지! 그 같은 자만이 악마나 다름없는 손왕과 벗이 될 수 있는 게다! 그들은 결국 7년을 들여 굴을 완성했다. 그것은 초원에서 가장 큰 공사였다. 굴을 뚫는 것 외에도 무수한 바람길을 만들어 신선한 공기가 지상에서 유입되도록 했다. 동판 뒤의 저 구멍도 그중 하나일 거야.”

“그럼 우리가 기어서 나갈 수 있나요?”

“나는 안 되지만 넌 시도해볼 수 있겠지. 키가 작아서 나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잘 생각해라. 내게는 손왕이 남긴 지도도 없고 저 바람길이 좁은지 넓은지도 모른다. 자연적으로 형성된 것이다 보니 시작과 끝이 하나로 이어지지 않고 수만 개의 갈림길로 엮인 거미줄 같을지도 몰라. 길을 잘못 찾아서 중간에 낄 수도 있어. 그렇게 죽어도 아무도 모르겠지.”

아소륵은 전전긍긍하며 쇠 난간을 만지작거렸다. 그는 머리를 내밀어보았다. 한기와 어둠이 덮쳐왔다. 아소륵은 놀라 몸을 움츠리다가 노인의 몸에 부딪쳤다.

단번에 그를 안아 일으킨 노인은 냉소를 지으며 아소륵의 볼을 꼬집었다.

“무서우냐? 그럼 관둬라. 여기 남아서 내 놀이 동무나 하든가.”

“무서워요.”

아소륵이 말했다.

“할아버지를 여기 혼자 버려두고 싶지도 않아요.”

“오, 그래? 겁쟁이는 언제나 이유를 찾는 법이지. 이유는 말 안 해도 된다.”

“하지만 그래도 나가야겠어요. 사실 많이 무섭지만 여기에서 나가지 않으면 진짜 독수리도, 진정한 대장부도 될 수 없겠죠. 우리 어머니도 아들이 없어질 테고요. 어머니에게는 내가 여기에 살아 있든, 굴 안에서 끼어 죽든 차이가 없겠지만 어머니가 외로움 속에서 날 기다리게 하고 싶지는 않아요.”

아소륵이 고개를 숙였다.

“할아버지와 함께 있어 드릴 수 없어요. 죄송해요.”

노인은 조금 의아해하며 말했다.

“잘 생각해라. 네 장례조차 치르지 못할 수도 있어. 여씨 파소이 가문의 막내아들은 영원히 이 세상에서 사라져 터널 깊은 곳의 백골이 될 수도 있단 말이다.”

“어머니는 나중에 근사한 장례나 치르라고 저를 낳으신 게 아니에요.”

아소륵이 고개를 들어 노인을 쳐다보았다. 호수처럼 맑은 눈동자에서 유리와도 같은 환한 빛이 내비쳤다.

노인은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참 재미있구나. 이렇게 겁 많은 아이가 때론 융통성 없는 목려처럼 완고하다니. 네가 운 좋게 굴 입구에서 붙잡히지 않는다면 그 누구에게도 나를 만났다는 이야기는 하지 말아라. 그게 내 두 번째 조건이다.”

노인이 아소륵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날 위해서가 아니라 너를 위해서다. 네 아버지는 그 누구도 날 만나거나, 나에 관해 알아보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아소륵이 고개를 끄덕였다.

노인이 일어나 길게 숨을 내뱉었다. 그는 뒷걸음질로 얼마간 물러나더니 공손하게 두 무릎을 바닥에 꿇었다.

“이미 두 가지를 약속했으니 내 세 번째 조건도 들어주기 어렵지는 않을 게다. 내 너에게 도술(刀術) 한 가지를 가르쳐주려고 한다. 칼 쓰는 법을 배우는 걸 좋아한다 했지. 맞느냐?”

아소륵이 힘주어 고개를 끄덕였다.

“너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지만 사실 하고 싶었던 말은 하나다. 이 세상은 본래 피비린내 나는 잔혹한 곳이고 영웅들은 모두 사람을 죽이는 마귀다. 하지만 어쩌겠느냐? 네가 칼을 쥐고 마귀가 되어야 적을 죽이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킬 수 있는 것을. 손왕은 마귀였지만 그가 없었다면 고리격 대회도 없고 오늘날 초원의 평화도 없었다. 여청양도 마귀였지만 그가 없었다면 여씨 파소이 가문도 번창하지 못했지. 너는 겁 많고 나약한 바보지만 네 어미를 지키고 소마며 철안, 철엽을 지키고 싶어 하지. 파소이 가문의 존엄에 먹칠을 할 정도는 아니니 이 칼을 배울 자격이 있다. 타인을 지키고 싶다면 어떡해야 할까? 네가 마귀가 되는 수밖에 없다. 네가 사랑하는 사람이 죽임을 당하거나 능욕을 당하거나 쫓겨가 비천한 노비가 되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노인이 목소리를 낮추고 말을 이었다.

“난 그저 훗날 네가 나를 원망하지 않길 바랄 뿐이다. 이것은 우리가 반드시 치러야 하는 대가란다.”

아소륵은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지만 그래도 꿇어앉아 공손하게 머리를 조아렸다.

“사람을 죽여본 적 있느냐?”

아소륵이 고개를 저었다.

“짐작은 했다. 너 같은 아이가 청동의 피를 지녔다니 하늘의 농간이로군.”

노인은 땅에서 암석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날 괴물 물고기를 잡을 때 사용한 것과 형태가 비슷했다. 고대부터 전해 내려오는 칼처럼 소박하고 예스러우며 묵직했다.

석도(石刀)를 마주하니 아소륵은 저도 모르게 경외감이 일었다. 지난 며칠 동안 노인은 내내 이 석도를 갈았다. 그가 칼을 갈 때면 돌과 다를 바 없이 과묵했지만 어쩐지 제왕 같은 위엄이 풍겼다.

“가슴 앞에 그 예쁜 장난감을 뽑아 봐라.”

노인이 위엄 있게 명령했다.

노인처럼 무릎을 꿇고 앉은 아소륵은 청사를 뽑아 가슴 앞에 가로놓았다. 그는 노인이 자신에게 칼 쓰는 기술 한 가지를 전수해 주려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세상에 어떤 도술이 무릎을 꿇고 앉아 전수받는단 말인가? 만족의 사내는 거의 모든 칼을 말 위에서 배웠다.

노인의 손가락이 가볍게 석도 위를 미끄러져 내려갔다. 투박한 칼날에 피부가 베이고 선혈이 칼 몸통으로 천천히 흘러내렸다. 노인은 자기 피로 칼에 어떤 상징을 그렸다.

“세상에서 가장 강한 이 도술은 천지가 생겨날 때부터 있었다. 하지만 배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 사람의 마음속에서 일깨워야만 하는 것이거든. 그것은 살아있으며 지극히 강하고 폭발적이며 극도로 악하다. 그러나 그것을 일깨울 수 있는 사내만이 초원의 전설이 될 수 있으며 칼자루를 손에 쥐고 천하를 수호할 수 있다. 도술의 이름은 대벽(大辟)이다. 오래전 동륙 문인이 이 칼을 보고 ‘천하를 크게 일구고 혼돈을 가르리.’라고 했다. 그 후로 그런 이름이 생겼지.”

노인은 고개를 숙이고 칼에 그려진 상징물을 보며 말했다.

“내 말을 따라 해라.”

“네.”

“의마덕, 고랍이, 납과이굉가, 이것은 내 조상의 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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