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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청동의 피 (11)
노인은 어느 석주 꼭대기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있었는데 야수의 왕 같은 느낌이었다. 그는 벌써 오랫동안 말이 없었다. 아소륵도 한참을 울어서 목이 잔뜩 쉬었다. 자기가 얼마나 울었는지, 노인이 얼마나 오랫동안 미친 듯이 뛰어다녔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지금 두 사람은 모두 조용하고 평화로웠다.
아소륵은 노인이 돌처럼 조용해서 혹시나 죽은 건 아닐까 싶었다.
갑자기 맹렬한 눈빛이 아소륵의 머리 위에 내려앉았다. 노인이 사나운 맹수처럼 고개를 숙이고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네 성은 파소이, 여씨 파소이가(家)군.”
노인이 느릿느릿 말했다. 아소륵은 노인이 말하는 것을 처음 들었다. 그는 오랜 세월 사람과 말하지 않았던 듯 발음도 불분명하고 음정도 살짝 어긋났지만 말투는 매우 위엄 있었다.
노인은 질문하고 있었지만 묻는 말투를 쓰지는 않았다. 대답을 이미 확신하고 있는 듯했다.
“네. 어떻게 아세요?”
아소륵이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멍청한 놈! 이런 무의미한 질문이라니! 다른 가문의 겁쟁이들에게 천하를 제패한 우리 파소이 가문의 혈통이 가당키나 하냐!”
노인이 낮게 으르렁거렸다.
그러더니 노인은 또 금세 웃었는데 그의 웃음에는 유쾌한 기색이라고는 전혀 없고 뼈에 사무치는 슬픔만이 느껴졌다. 그는 완전한 사람으로 돌아와 있었다. 연민이 어린 눈빛은 곧 죽음을 앞둔 늙은 유목민을 닮았다. 노인은 가슴의 상처를 움켜쥐고 비틀거리다가 돌기둥 위에서 그대로 고꾸라졌다.
노인은 비스듬한 암석에 기대 동굴 천장의 벽화를 바라보았다. 정신을 차린 그는 딴사람이 된 것처럼 과묵하고 듬직했다.
“그런 눈으로 오랫동안 날 쳐다봤지. 대체 언제까지 볼 셈이냐?”
노인이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다.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한참 뒤 석순 뒤에서 자그마한 손 하나가 튀어나왔다. 둥글둥글한 낭 몇 개가 굴러와 노인 근처에 멈췄다.
낭을 흘끗 쳐다본 노인의 입가에 쓸쓸한 미소가 한 가닥 걸렸다. 노인은 발을 들어 낭을 걷어찼다.
“안 먹는다. 그리고 나와라. 난 널 해치지 못한다.”
또 한참이 지나서야 아소륵이 천천히 석순 뒤에서 나왔다. 아소륵은 석순에 바짝 붙어 서서 얼굴을 반만 드러냈다. 몹시 경계하는 기색이었다.
노인과 아소륵은 한참 동안 서로 마주 보았다. 아소륵이 먼저 시선을 피했다. 아소륵은 노인이 지금 자신을 해칠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무서웠다. 노인은 정신을 차리고 나서 이상한 행동을 한 가지 했다. 쇠사슬을 몸에 둘둘 감아 스스로를 단단히 옭아맸던 것. 아소륵은 처음에 무슨 꿍꿍이가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노인은 자신을 옭아맨 후 침대 같은 바위를 떠나지 않고 종일 잠자코 누워만 있었다. 그는 이따금 낭 두 개를 먹었지만 점점 수척해지더니 창백한 피부에 혈색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꼭 가죽을 덮어쓴 해골 같았다. 수사자 같은 눈만 두려우리만치 빛났다. 노인이 나직하게 물었다.
“몇 살이냐?”
“열살요.”
“이름이 뭐지?”
“아소륵이에요.”
“장생(長生)? 좋은 이름이구나. …네 아버지는 이름이 뭐냐?”
“곽륵이예요.”
노인이 차갑게 웃었다.
“곽륵이? 아직 살아 있었군.”
아소륵은 잠시 망설이다 물었다.
“할아버지는 우리 아버지한테… 원한이 있나요? 아버지가 할아버지를 여기에 가뒀어요?”
“원한?”
노인은 오랫동안 말이 없었다.
“맞다. 나는 네 아비를 증오한다. 하지만 네 아비도 날 증오하지. 초원에서 3대를 사이좋게 지낼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더냐? 결국엔 다 원수가 되지 않느냐?”
한참을 침묵하던 노인은 고개를 돌려 아소륵을 쳐다보았다.
“무서우냐?”
아소륵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너를 죽이고 싶은 게 아니다. 그저 무언가를, 아무거나 죽이고 싶을 뿐이지.”
노인이 담담하게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오늘부로 너를 죽이려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왜요?”
“넌 파소이 성을 쓰고 네 몸에는 검치표 가문의 청동색 피가 흐르니까.”
노인이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비록 네 녀석은 한타처럼 간이 콩알만 하지만!”
노인의 눈빛에 압도된 아소륵은 숨이 턱 막혔다. 잠시 후, 아소륵은 용기를 내 물었다.
“할아버지. 정말 나가는 길이 없나요?”
“강의 근원을 보았겠지? 지하의 어느 못에서 솟아난 것이다. 넌 그 못에서 솟구치듯 흘러나왔는데 그 길은 막혔다. 그런데 이쪽에.”
노인이 동굴 끄트머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원래 문이 하나 있었지. 유일한 출구였어. 그런데 자물쇠를 없애고 구리 물을 부어 막아버렸단다.”
노인이 아소륵을 쳐다보았다.
“못 나간다. 하지만 너도 언젠가는 여기에 올 운명이다. 청동의 피가 흐르는 마귀는 모두 여기에서 죽어야 하지. 전쟁터에서 죽는 행운이 있지 않은 한. 저기 어둠 속에 가보아라. 해골을 보면 잊지 말고 예를 올려라. 모두 여씨 파소이 가문의 영웅이셨으니까.”
아소륵이 번쩍 눈을 떴다.
여전히 악몽을 꾸었는데 요 며칠 괴이한 노인에 대한 꿈을 꾸기 시작했다. 꿈에서 노인은 청동색 갑옷을 입은 무사였고 가장 높은 산비탈에서 우렁차게 포효했다. 아득하게 펼쳐진 짙은 안개 속에서 노인과 같은 청동색 군대가 소리 없이 아소륵을 향해 다가왔다. 그들의 긴 창이 천지를 뒤덮었는데 그 모습은 흡사 청동색 숲 같았다.
아소륵은 얼른 정신을 차리고 싶은 마음에 얼굴을 비볐다. 어느새 많이 자라난 손톱이 무심결에 얼굴을 그었고 조금 아팠다. 아직 갈수기인지 물소리가 매우 작았다. 적막은 사람의 마음을 불모지인 12월의 초원처럼 황량하게 만들었다.
아소륵은 돌벽을 따라 더듬어 나갔다. 그는 동굴 천장과 이어진 거대한 돌기둥 뒤에 숨어 조용히 노인을 훔쳐보았다. 노인은 여전히 좌상 같은 커다란 바위에 조용히, 아무런 기척 없이 엎드려 있었다.
벌써 몇 번째 노인을 염탐하러 이곳에 오는 것인지 잘 기억나지 않았다. 아소륵은 이해가 잘 안 됐다. 왜 자신은 위험을 무릅쓰고 흉포한 짐승처럼 위험한 노인 가까이 다가가려는 걸까? 아소륵은 사실 노인이 죽는다고 해도 몹시 두려울 것 같았다. 이곳의 적막이 그를 완전히 무너뜨릴 것만 같았다. 가끔 꿈에 놀라 깼을 때 노인의 낮은 숨소리를 들으면 마음이 서서히 차분해지곤 했다. 아소륵은 차츰 깨달았다. 자신은 그저 노인을 무서워할 뿐, 싫어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따금 노인이 이쪽을 바라볼 때 보면 야만스러우면서도 위엄 있는 두 눈에 이상한 기색이 띠는듯하기도 했다. 하지만 아소륵이 자세히 살펴보려고 하면 노인은 냉랭하게 시선을 피했고 두 눈도 다시 희읍스름하고 무섭게 변해 버렸다.
아소륵은 오랫동안 관찰했지만 노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늘은 유난히 조용했다. 전에는 그래도 살짝 몸을 옆으로 틀고는 해서 손목의 쇠사슬이 댕그렁거리기도 했다.
부상을 당한 후로 노인은 내내 바위에 누워 동굴 천장의 벽화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가끔 노인은 작은 목소리로 누군가의 이름을 읊조리거나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길게 숨을 내뱉기도 했다. 명치에 입은 중상도 그에게 별 영향을 미치지 않은 듯 여전히 수렵 표범처럼 날쌨다. 손목을 빼곡히 두른 쇠사슬이 아니었다면 언제든 치명적인 공격을 날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오늘 노인의 자세는 죽은 사람처럼 한 치의 변화도 없었다. 노인이 죽으면 이곳에는 아소륵 혼자만 남게 된다. 빛을 발산하는 물고기나 온몸에 가시가 돋아 있는 괴물 물고기와 함께.
홀로 이 동굴에서 죽음을 기다릴 수십 년을 생각하자 아소륵은 부르르 몸서리가 쳐졌다. 고독에 대한 공포가 마침내 노인에 대한 두려움을 넘어섰다. 아소륵은 청사를 꽉 움켜쥐고 살금살금 노인에게 다가갔다. 심장이 마구 뛰었다. 노인이 언제든 뛰어오를 것만 같았다. 어쩌면 괴물 물고기를 사냥하던 그때처럼 위장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소륵은 조심스럽게 노인의 어깨를 두드려보았다. 그런데 노인의 몸이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아소륵은 힘껏 노인을 뒤집었다. 가슴에 난 상처를 보자 징그러워 머리털이 쭈뼛쭈뼛 곤두섰다. 새하얀 구더기가 상처 깊은 곳에서 꿈틀거렸다. 구더기는 조밀하게 모여 상처의 혈색마저 뒤덮어버렸다.
노인은 손에 날카로운 돌조각을 움켜쥐고 있었다. 전에도 썩은 살을 도려낸 적이 있는지 돌조각에는 핏자국이 나 있었다.
“할아버지… 할아버지…….”
아소륵은 당황해 노인의 어깨를 흔들었다.
노인이 눈을 떴다. 눈꺼풀이 납덩이처럼 무거웠다. 노인은 아소륵을 힐끗 보고는 창백하게 메마른 입술을 달싹였다.
“내가 안 무서우냐?”
아소륵은 노인이 큰 힘을 들여 겨우 이런 질문을 던지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그랬다. 아소륵은 몹시 무서웠다. 하지만 노인이 아닌, 노인이 죽고 홀로 이곳에서 죽어갈 것이 무서웠다.
동굴 안에 얼음이 있다면 아소륵은 온 힘을 다해 얼음 덩어리를 옮겨와 노인의 체온을 낮출 것이었다. 동굴 안에 약초가 있다면 즉시 캐와 노인의 입에 넣어줄 것이었다. 아소륵은 노인이 딱딱한 돌침대를 견디지 않도록 안아주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아소륵은 여전히 무능한 아이였다.
“나도 많이 무섭구나.”
노인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도 너처럼 고독이 무섭단다. 네가 여기에 왔을 때 사실 무척 기뻤지. 마침내 산 사람을 다시 보게 되었으니까. 그것도 귀여운 꼬맹이를 말이다. 네 아비는 몇 살에 너를 낳았느냐?”
“마흔요.”
“마흔…. 24, 아니 26년이 되었구나. 내가 너처럼 이렇게 내내 두려워한 것이. 하지만 달아나지 못한다. 넌 이곳에서 혼자 죽게 될 거야. 그게 네 운명이다. 반달 천신께서 네게 청동의 피를 하사하시어 존엄과 영광을 주고 그의 하인이 되게 하셨다. 그리고 네게 가장 악독한 저주도 내리셨지. 네게 행복은 없다. 슬픔뿐이지. 너는 전쟁터에서 네게 굴복하지 않는 사내를 죽이고 그들의 아내를 차지할 것이다. 그녀들은 비통해하고 절망하지만 네 시중을 들지 않을 수 없지. 너는 그들 자녀의 목도 벨 것이다. 아이들이 자라 제 아비를 위해 복수할 테니까. 하지만 너는 언젠가 이 모든 죄악과 향락을 갚아야 한다는 것을 알기에 매 순간 두려움 속에 살면서 언제 그 빚을 갚게 될지 생각하지…. 나는 전쟁터에서 죽었어야 했다. 진정한 용사의 칼에 머리를 베였어야 해. 그랬다면 내 두려움도 사라졌겠지. 아흠막도도 나를 영웅으로 생각했을 거야. 난 흙바닥 아래에 누울 수 있었을 테고 아흠막도는 양피 장막 안에서 나를 그리워했겠지…….”
노인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졌고 끝내는 길고 미약한 부름밖에 들리지 않았다.
“아흠막도… 아흠막도…….”
아소륵은 문득 깨달았다. 며칠 전부터 노인이 내내 중얼거리던 이름이었다. 노인은 입술 사이에 그 이름을 머금고 있는 듯 무척 살갑게 그 이름을 중얼거렸다.
아소륵은 어렴풋하게나마 귀에 익는 이름이라고 생각했지만 어디에서 들었는지 떠오르지 않았다.
아소륵이 노인의 어깨를 흔들었지만 노인은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노인의 몸은 가느다란 장작 묶음처럼 하늘하늘해서 언제든 풀어져 버릴 것만 같았다. 말라서 딱딱해진 낭 몇 장이 구석에 쌓여 있었다. 노인은 벌써 오랫동안 음식도 먹지 않았던 것이다.
“할아버지… 할아버지…….”
“아흠막도… 아흠막도…….”
마침내 아소륵의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돌연 찾아온 정적에 간담이 서늘해졌다. 끝없는 어둠이 묵직하게 아소륵의 머리를 짓눌렀다. 아소륵은 청사를 꼭 쥐고 칼끝을 노인의 목에 괸 채 말랐지만 위엄 있는 그의 얼굴을 조용히 응시했다. 이 칼을 찌르면 노인은 바로 죽는다. 그의 과거와 광적인 힘도 함께 사라진다. 그러면 아소륵은 외롭지만 안전하게 동굴 안에서 남은 생을 살 수 있고 어쩌면 언젠가 누군가에게 구조될 수도 있다.
하지만 아소륵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자신이 그렇게 못 한다는 것을 진작 알고 있었다. 아소륵은 노인을 돌침대 위에 평평히 뉘고 칼날로 옷섶을 젖혔다. 꿈틀거리는 구더기에 토하고 싶었다. 새로 돋아난 살이 비틀어진 입처럼 새빨갛게 말려 있었다. 아소륵은 숨을 깊게 한 번 들이마시고 칼끝으로 썩어 문드러진 살을 들춰내 천천히 잘라냈다.
아소륵은 도려낸 썩은 살점들을 옆에 놓아두고 연신 상처 부위에 물을 뿌려 상당한 양의 검은 피를 씻어냈다.
상처를 깨끗이 처리하는 작업은 한참이 지나서야 끝났다. 아소륵은 속옷 허리띠로 상처를 동여매고 일어나 바닥을 몇 번 밟았다. 그가 밟은 것은 잘라낸 썩은 살이었다. 물컹한 구더기가 밟혀 끈적끈적한 액체가 됐다. 밟았을 때의 감촉에 아소륵은 머리털이 곤두섰다.
두 손으로 얼굴에 묻은 피를 닦았다. 노인의 상처를 처리할 때 튄 피였다. 노인은 조용히 돌침대에 누워 있었다. 아소륵은 그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수 없었다.
“반달 천신이시여. 할아버지를 데려가지 말아 주세요. 부탁이에요.”
아소륵은 손으로 살며시 노인의 얼굴을 가렸다. 상처도 처리했고 반달 천신께 기도도 했다. 노인의 생명을 되살리기 위해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다.
아소륵은 천천히 물러났다. 뜬금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조용히 그곳에 누워 있는, 창백하고 깡말랐으며 말이 없는 노인을 바라보고 있자니 문득 그가 자기처럼 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 사람 모두가 자신처럼 불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