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주표묘록-45화 (45/3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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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청동의 피 (10)

그윽한 피리 소리가 어둠 속에서 조용히 들려왔다. 아소륵은 초원에서 망아지를 타고 있었다.

깜깜한 밤하늘에 걸린 별들이 눈부시게 빛났다. 언제든 섬광을 번쩍이는 폭우로 변해 쏟아져 내릴 듯했다. 풀들이 바람에 한들한들 흔들렸고 피리 소리는 거리를 가늠할 수 없을 만큼 작아졌다.

아소륵은 망아지를 몰아 산비탈로 향했다. 이곳에서 아소륵은 혼자가 아니었다. 도처에 사람들이 널려 있었는데 전부 시체였다. 망아지는 풀밭에 서로 포개져 있는 시체 사이를 조용히 지나갔다. 아소륵은 몹시 무서웠지만 소리를 낼 엄두가 나지 않았다. 행여라도 죽은 사람들을 깨울까 봐 두려웠다.

아소륵은 등 뒤에서 말 없는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를 휙 돌려보았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달빛 아래 하얀 그림자가 훌쩍 뛰어오르며 사라졌는데 새하얀 여우 같았다. 망아지의 그림자가 너울거리듯 아름다운 달빛이 비친 지면을 스쳐 지나갔다. 뒤를 돌아보자 발굽 자국마다 피가 묻어 있었다.

다시 산비탈 하나를 넘자 자욱한 안개가 보였고 말이 없는 작은 수레가 안개 속에 멈춰 있었다. 바람에 작은 수레의 발이 날렸다. 진홍색 발에 금실로 수놓아진 문양이 차가운 빛에 반사됐다.

“아무도 없어요?”

아소륵이 조용히 수레 벽 부분을 두드리며 물었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자 아소륵은 조심스레 발을 젖혀 보았다.

반짝이는 구슬이 꿰어진 새빨간 비단 밧줄이 수레 정 중앙에 매달려 있었다. 녹색 치마를 입은 소녀가 품에 사람들을 안고 고개를 숙인 채 반듯하게 앉아 있었는데 손에는 자색 싸개가 입혀진 대나무 피리를 들고 있었다. 바람에 소녀의 긴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소녀의 눈물이 피리 위로 떨어졌다. 한 방울, 한 방울. 붉은색 눈물이었다. 아소륵이 손을 내밀며 말했다.

“소마…. 소마, 내가 데리러 왔어. 나랑 가자.”

아소륵은 소녀의 눈물을 닦아주려 했다. 소녀가 그의 손짓에 따라 고개를 들었다.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그것은 소마가 아닌 유모 가륜첩의 얼굴이었다. 그녀의 두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눈물은 붉은색 점액이었다. 가륜첩은 아소륵을 뚫어져라 쳐다보았고 맨살이 드러난 그녀의 상반신은 달빛 아래서 환하게 빛났다.

아소륵은 달아나려 했지만 달아날 수 없었다. 그는 돌연 나무틀에 묶인 자신을 발견했다. 두 손이 단단히 묶여 있었다. 가륜첩의 몸이 쓰러졌다. 나무토막이 아소륵의 몸에 떨어지듯 차디찬 가슴이 아소륵의 얼굴에 툭 들러붙었다.

가륜첩의 몸이 바르르 떨렸다. 셀 수 없이 많은 기다란 창이 가륜첩의 등을 찔렀다. 가륜첩은 창에 찔린 채 공중으로 높이 들어 올려졌다. 활짝 펼쳐진 몸은 흡사 고대의 신성한 상징물 같았다.

아소륵은 고개를 들었다. 허공에 올려진 가륜첩은 뭐라 설명하기 어려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가슴의 피가 아소륵의 얼굴로 뚝뚝 떨어졌다. 공중에 뜬 초승달은 무기와도 같은 금빛을 띠었다.

아소륵은 벌떡 일어났다. 흐르는 물소리가 주위에 메아리쳤다. 식은땀에 속옷이 흠뻑 젖었다.

꿈이었다.

처음 꾸는 꿈이 아니었다. 아소륵은 자기가 곧 죽게 될 터라 반달 천신이 알려주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소륵은 귀를 옆으로 대고 유심히 들어 보았다. 한데 노인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노인은 잠이 필요치 않은 사람처럼 보였다. 매일 사지를 땅에 대고 야수처럼 주변을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노인은 아소륵에게 상당한 흥미를 보였고 매일 바위 뒤에 숨어서 몰래 훔쳐보곤 했다. 그러나 아소륵이 한 걸음 내디딜라치면 달아나버렸다. 그 외 시간에 노인은 지하의 강가를 지키고서는 사냥하기만 기다렸다. 노인의 사냥감은 때론 몸통이 커다란 빛 물고기였고 때로는 끔찍한 괴물이기도 했다. 먹잇감을 잡으면 항상 날로 먹었다. 그러나 나중에는 이상한 물고기를 잡아도 크기가 그렇게 크지 않았다.

요사이 강물이 점점 얕아졌다. 밖의 폭우가 그치고 지하 강도 갈수기에 접어든 모양이었다. 큰 물고기를 못 잡자 노인은 다소 초조해 보였다. 아소륵은 늘 노인의 손목에 매인 쇠사슬이 댕그렁댕그렁 울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는데 그가 강가에서 분주하게 뛰어다니는 소리였다.

아소륵은 이마를 슥 훔쳤다. 땀은 많이 나지 않았지만 끈적한 액체가 몇 방울 묻어 있었다. 분명 종유석에서 떨어진 물은 아니었다. 종유석에서 떨어진 물은 무척 깨끗했으니까.

아소륵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 형형하게 빛나는 두 눈이 아소륵의 머리 위에 있었다. 몹시도 가까운 거리였다. 온몸의 솜털이 바짝 곤두선 아소륵은 무심결에 뒤로 피했다.

노인이었다. 그는 아소륵 옆의 커다란 바위를 차지하고서 마치 도마뱀처럼 종유석에 붙어 목을 쭉 빼고 아소륵을 훔쳐보았다. 노인은 입을 벌리고 있었는데 입안 가득 빽빽하게 난 하얀 이는 하나같이 비수처럼 날카로웠다. 아소륵은 꿈에서 뚝뚝 떨어졌던 피가 노인의 침이었다는 걸 알아채고 얼굴을 거듭 닦았다. 노인은 매우 흥분한 듯 보였고 목구멍에서는 헉헉 소리가 났다.

“저… 저리 가요!”

아소륵은 노인의 상태가 이상하단 걸 깨달았지만 더는 물러날 곳이 없었다. 등 뒤는 거대한 석순(石筍)1)이었다.

“헉헉… 헉헉…….”

노인은 아소륵의 말에 전혀 반응하지 않았다. 노인은 거침없는 희열에 깊이 빠져 열 손가락을 구부리고 있었다. 말라서 갈라진 손톱은 표범의 날카로운 발톱 같았다. 노인은 암석 표면을 붙잡고 있었는데 끼이익 소름 끼치는 날카로운 소리가 났다.

노인은 조금씩 움직였다가 머뭇거리다가 했지만 결코 아소륵의 목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아소륵은 불현듯 깨달았다. 저런 눈빛을 본 적 있었다. 노인이 강가에 누워 괴물 물고기를 유인하던 그때 그 눈빛이었다. 굶주리고 교활한 눈빛. 머리부터 발끝까지 노인은 완전한 야수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노인이 맹렬하게 아소륵을 덮쳤다. 그가 손톱을 마구 휘두르자 휙휙 날카로운 소리가 났다. 절대 사람이 할 수 있는 짓이 아니었다. 노인은 번개 같았다. 번쩍이는 빛을 보고 귀를 막아 봐야 이미 늦은 것처럼 노인이 그러했다. 검은 그림자가 아소륵의 시야를 다 차지해 버렸다. 지금 아소륵이 할 수 있는 일은 단 하나. 눈을 꼭 감는 것뿐이었다.

예상했던 통증은 전해지지 않았다. 딩 하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질풍이 돌연 멎었다. 아소륵은 흐어억 하는 나직한 울부짖음을 들었다. 물의 열기가 그대로 아소륵의 얼굴에 뿜어졌다. 어릴 적 형들이 키우던 큰 개가 놀자며 아소륵을 넘어뜨리던 그때 같았다.

아소륵은 용기를 내 살짝 실눈을 떠보았다. 노인이 희끗희끗한 머리를 난폭하게 흔들었다. 몸은 최대한 앞으로 기울어져 있고 두 팔의 쇠사슬이 완전히 팽팽하게 당겨져 고리 부분에서 챙챙 소리가 났다. 노인은 살짝 경련하는 뾰족한 손톱을 반복적으로 오므렸다 폈다 했지만 아소륵의 목에는 닿지 않았다.

어쨌든 노인도 진짜 야수는 아니었기에 임기응변을 알았다. 어떻게 해도 먹잇감의 목을 잡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자 아소륵의 숨통을 끊는 계획은 포기하고 가슴을 쭉 펴고 머리를 내밀어 예리한 이로 아소륵의 혈관을 물어뜯으려 했다.

치아가 맞물리며 나는 으드득 소리는 마치 형체가 없는 바늘이 아소륵의 머리를 찌르고 들어오는 듯했다. 죽음이 이토록 가깝게 느껴진 적은 난생처음이었다. 무시무시한 치아는 날카로운 칼 같았다. 아소륵은 심지어 이가 목의 표피를 긁을 때의 고통이 느껴지는 듯했다.

공포의 물결이 아소륵의 정신을 휩쓸었다. 눈앞이 깜깜해졌다. 머릿속 깊은 곳에서 다른 야수 한 마리가 포효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아소륵은 무의식적으로 어깨를 이용해 노인의 가슴을 들이받았다.

두 사람이 단단히 뒤엉킨 채로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뜻밖에도 아소륵이 먼저 상대의 목을 졸랐다. 아소륵은 자신에게 속하지 않은 모종의 다른 힘에 통제되고 있었다. 새하얀 피부 아래로 혈관이 산 채로 불에 타들어 가는 뱀처럼 격렬하게 뛰었다. 괴이한 혈색이 아소륵의 얼굴 전체로 퍼졌다. 아소륵의 두 눈이 형형하게 빛났다. 지난번 발병했을 때와 몹시 유사한 상태였다. 하지만 아소륵은 자신의 변화를 알아채지 못했다. 그저 온 힘을 다해 노인의 목을 비틀어버릴 생각뿐이었다. 심지어 백발이 성성한 머리까지 뜯어낼 작정이었다.

노인은 아소륵의 손목을 단단히 움켜쥐고 양쪽으로 떼어냈다. 노인은 고통을 당한다고 해서 두려움을 느끼지는 않았다. 타오르는 횃불처럼 밝게 빛나는 그의 두 눈은 온통 흥분으로 가득했다. 마침내 노인의 힘이 우위를 점했고 아소륵의 두 손이 천천히 벌려졌다. 노인은 휙 몸을 뒤집어 아소륵을 바닥에 깔았다. 약간 냄새 나는 축축한 침이 아소륵의 얼굴에 뚝 떨어졌다. 노인은 자홍색 혀로 자신의 이를 하나하나 핥았다. 뱀처럼 민첩했다. 아소륵은 그것이 사냥감의 숨통을 끊기 전 준비 동작이라는 것을 알았다. 힘껏 머리를 흔들며 피해 보려고 했지만 속수무책이었다.

노인이 헝클어진 머리칼을 흔들며 포효했다. 사자가 영양의 숨통을 끊기 전에 내는 득의양양한 울부짖음이었다. 노인의 포효가 거대한 동굴 안을 메아리쳤다. 백 마리, 천 마리 사자가 그에게 호응하는 듯했다.

노인이 고개를 숙이고 아소륵을 물어 뜯으려고 다가왔다.

갑자기 아소륵은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노인의 포효도, 두 팔의 고통도 안 느껴졌다. 마치 영혼이 몸에서 빠져나가 절대적인 어둠 한가운데 서 있는 듯했다. 눈앞에는 빛 한 줄기뿐이었다.

가슴 앞에 차가운 무언가가 있었다. 용격진황이 선물해준 청사였다. 격투 중에 동륙에서 만들어진 명검이 칼집 밖으로 미끄러져 나왔다. 우아하고 아름다운 청색 칼날은 모든 것을 자를 수 있었다.

찢어질 듯한 고통이 가슴에 느껴졌다. 몸 안의 난폭한 야수가 육체의 속박에서 필사적으로 벗어나려 하는 듯했다. 달뜬 숨결이 혈관 안에서 광포하고 세차게 흘렀다. 눈앞의 빛이 차츰… 어두워졌다. 일단 그 빛이 사라지면 아소륵은 완전히 어둠 속에서 길을 잃고 말 것이었다.

“소마…….”

아소륵은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어머니…….”

그러나 아무도 대답이 없었다.

이런 공포는 처음이었다. 죽음은 두렵지 않았지만 자기를 잃게 될까 봐 무서웠다. 영원한 어둠에 갇히게 될까 봐 도망치고 싶었지만 도망칠 수 없었다. 마지막 한 줄기 광명이 사라져갔다. 끝없는 어둠과 답답한 열기가 하늘에서 내려와 아소륵을 뒤덮었다.

사자 같은 울부짖음이 돌연 두 개로 변했다. 두 마리 사자의 포효가 뒤엉키고 소용돌이쳤다. 소리가 닿는 곳의 모든 것이 터져나갈 듯했다.

아소륵은 돌기둥에 머리를 세게 부딪쳤다. 얼굴은 끈적끈적하고 비릿한 액체로 범벅이 됐다. 손으로 슥 닦아보았더니 온통 피였다. 언제 부러졌는지 손목에서 극렬한 통증이 전해졌다. 노인이 아소륵의 손목을 부러뜨린 게 아니었다. 아소륵이 노인을 들어 석주에 내리치면서 힘을 과도하게 사용해 스스로 손목을 부러뜨린 것이었다.

아소륵은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어 보았지만 그 순간의 변고가 이해되지 않았다. 그 지점에만 가면 돌연 기억이 끊겨 버렸다. 초조한 열감과 어둠이 불현듯 찾아왔다. 아소륵이 노인에게 달려들었고… 노인을 들어 올려 석주에 세게 내던진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성인을 들어 올릴 힘이 어디에서 났을까? 또 어떻게 가벼운 칼을 휘두르듯이 노인의 몸을 칼처럼 잡고 석주를 표적으로 삼아 목려 장군이 가르쳐준 검술을 발휘할 수 있었을까?

노인은 반 무릎을 꿇고 멀지 않은 곳에 앉아 있었다. 가슴의 핏자국이 서서히 커져 갔다. 아소륵은 다시 자기 손을 보았다. 쥐고 있던 청사 칼날 위로 끈끈한 피가 흘러내렸다. 아소륵은 어렴풋이 떠올랐다. 노인을 석주에 내동댕이친 후 다시 힘껏 노인의 품으로 돌진했고 귀신처럼 칼을 뽑아 그의 명치를 찔렀다.

난생처음으로 살인을 했다. 어떻게 이런 짓을 할 수 있었을까? 일련의 살인 행위가 물 흐르듯 막힘없이 이뤄졌다.

아소륵은 청사를 내던지고 바들바들 떨며 얼굴을 감싼 채 큰 소리로 엉엉 울기 시작했다.

노인은 조용히 그곳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실성한 듯하던 기색은 돌연 사라지고 목석처럼 멍해졌다. 노인은 자신의 손을 보았다. 손톱은 피투성이였다. 아까 아소륵의 손이 바로 이 끔찍한 손아귀에서 벗어나 가슴 앞의 날카로운 칼을 뽑았더랬다.

뜻밖에도 아소륵은 노인의 손에서 벗어났다. 괴물 물고기도 벗어나지 못했던 그 손아귀에서 말이다.

노인은 손가락으로 가슴 앞을 더듬더듬 만졌다. 핏자국을 본 노인은 믿기지 않는 듯했다. 노인의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그는 달려가 아소륵의 손을 붙잡았다. 힘을 주지는 않고 그저 아주 천천히 소가죽으로 만든 손목 보호대를 풀었다. 희미한 빛 속에서 흰색 표범 꼬리는 유난히도 선명했다. 그것은 파소이 가문의 오래된 상징이자 아소륵이 청양의 세자라는 표식이었다.

노인은 휘청거리며 일어나 한 걸음, 한 걸음 물러났다. 그는 미친 듯이 고개를 내저었다. 몸을 홱 돌린 그는 잠긴 목소리로 울부짖으며 사지로 바위 사이를 뛰어오르고 내달렸다. 노인은 고개를 들고 소리를 질렀다. 달빛 아래 새끼를 잃고 울부짖는 늑대처럼 광(狂)적이고도 비통한 목소리였다.

노인은 분명 소리를 내지르고 있었지만 아소륵은 어쩐지 노인이 통곡하는 것처럼 들렸다. 그의 울음소리에는 원한과 슬픔이 뒤섞여 있었다.

* * *

1) 석회질 물질이 동굴 바닥에 쌓여 원주형으로 위로 자란 돌출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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