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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청동의 피 (9)
여수우는 미소를 머금은 채 고개를 돌렸다.
짧은 침묵 후 검은 말 위의 탁발산월이 먼저 비휴도를 뽑아 들고 칼집을 두드리며 큰 소리로 갈채를 보냈다. 심복들과 하당 무사들도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는 일제히 무기를 뽑아 들고 만족 특유의 방식으로 영웅을 환호했다.
여수우는 활을 높이 들고 무리로 돌아왔다. 득의양양한 표정이었다.
“야생 동물이 민첩하기는 하나 인간의 지혜는 갖지 못했지요. 탁발장군에 대한 존경의 뜻으로 여기서 놈을 구워 머리를 바치겠습니다.”
탁발산월은 가슴에 손을 얹고 답례했다.
“고라니에게 지혜가 없어서는 아닐 겁니다. 고라니가 아무리 똑똑해도 표범의 발톱과 이빨을 피할 수는 없는 법이죠. 참새가 아무리 노력해도 독수리만큼 높이 날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요.”
외팔인 반찰렬이 살짝 고개를 돌려 여수우의 심복들과 눈짓을 주고받았다.
구운 고기의 향긋한 냄새가 코끝에 폴폴 풍겼다. 하당 병사들과 만족 무사들은 말안장에 편히 앉아 파란 하늘을 지붕 삼고 푸른 풀을 자리 삼았다. 모닥불 위로 고라니가 노릇하게 구워졌다. 누군가는 옆에서 구리 주전자를 가져다가 보리차를 데웠다.
여수우는 맑은 물에 손을 씻고 공손하게 은으로 만든 칼을 잡았다. 그리고 단칼에 고라니의 목을 베어 은 대야에 담아 탁발산월 앞에 바쳤다.
“1왕자께서는 예의가 과하십니다. 이 머리를 어찌 제가 누리겠습니까?”
탁발산월이 사양했다.
처음 잡은 사냥감의 머리와 심장은 부락 내 가장 영웅적인 대장부나 지위가 가장 높은 노인에게 바치는 것이 만족 풍습이었다.
여수우는 살며시 웃으며 목을 가다듬고 목청껏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만족 노래라 동륙 병사들은 못 알아들었다. 그러나 한쪽에 있던 뇌운맹호는 여수우가 웃는 얼굴로 소맷자락을 흔들며 노래하는 모습에, 그리고 구름을 뚫을 듯한 우렁찬 목소리에 그것이 멀리서 온 손님을 환영하는 예악임을 깨달았다.
만족 무사들은 일제히 일어났다. 탁발산월도 노랫소리를 따라 일어나 공손하게 경청했다.
노래를 마친 여수우가 가죽 도포 자락을 털며 말했다.
“탁발 장군께서는 멀리 동륙에서 오셨잖습니까. 제 아버지도 예를 갖춰 대하는 분이고 우리 만족 대장부이기도 하니 당연히 고라니의 머리는 장군께 바쳐야지요. 우리 만족이 평화롭고 강성해지려면 탁발 장군의 도움을 기대해야 하는 것을요.”
탁발산월은 가슴에 손을 얹고 예를 행한 후 은 대야를 건네받았다. 그리고 고라니 머리의 볼에서 살을 한 점 잘라내 입에 물고 대야를 높이 들어 올렸다.
“고라니 머리는 만족 무사들과 나누겠다. 이것은 1왕자의 후의로다!”
환호하는 무사들 속에서 반찰렬이 일어나 은 대야를 받았다.
여수우와 탁발산월은 묵묵히 모닥불을 응시했다. 잠시 후 여수우가 마른 나뭇가지 하나를 불더미에 던졌고 불똥이 번쩍 튀었다. 여수우가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탁발 장군께서 북도성에 온 지 보름이 지났지요. 그간 가주들과 칸들이 정성껏 대접을 하느라 오늘에서야 저 같은 후배가 장군을 모시게 되었습니다. 탁발 장군과 흉금을 터놓고 얘기할 기회가 없어 내내 많이 불안했지 뭡니까.”
탁발산월이 손을 내저었다.
“너무 겸손한 말씀입니다. 제게는 당치도 않은 대접입니다.”
“우리 만족은 예로부터 세력이 있는 귀족이 아닌 영웅에게 경의를 표해 왔습니다. 탁발 장군이 바로 제 가슴속 영웅이십니다. 장군께서 보기에 만족의 미래는 어떻습니까?”
뇌운맹호가 경계하며 탁발산월의 반응을 몰래 살폈다.
“만족의 미래라.”
탁발산월이 남쪽을 가리키며 대답했다.
“동륙의 부유한 토지에 방목하고 동륙의 곡식을 먹으며 건수강에서 말에게 물을 먹이고 뇌안산 아래에서 활시위를 당기겠지요. 하지만.”
탁발산월이 말머리를 돌렸다.
“화족도 동운산 아래에서 차를 마시고 대군의 금장궁에서 시를 읊고 노래를 부르며 초원을 개간해 목화와 밀을 심겠지요. 본디 천하의 모든 부족에게는 이렇게 많은 전란과 대학살이 있어서는 안 됐습니다. 저희 국주께서 서신에서 말한 바에 저도 진심으로 동의합니다. 언젠가는 천하가 한 가족처럼 화목해지겠지요. 만족과 동륙 화족이 원래 하나임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동쪽의 우족이든 해가 지는 서쪽의 과부든, 남쪽의 낙족이든 언젠가는 모두 흉금을 터놓고 함께 술을 마실 수 있지 않겠습니까?”
뇌운맹호는 속으로 살며시 웃었다. 그는 탁발산월이 그저 단순한 초원의 무사가 아니라는 사실을 진즉 알고 있었다. 탁발산월의 말은 공허하고도 아득했다. 절대로 쉽게 말꼬리를 붙잡힐 만한 여지를 줄 리 없었다.
여수우도 탁발산월에게서 쉽게 이야기를 끌어낼 수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터라 함께 웃을 뿐이었다.
여수우가 잠시 생각하더니 몸을 낮춰 탁발산월에게 다가갔다.
“장군. 수하들을 물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탁발산월이 고개를 끄덕이자 뇌운맹호가 조용히 일어나 물러갔다.
여수우가 가까이 다가가 앉았다.
“탁발 장군께서는 포부가 원대하시군요. 제게 장군과 힘을 합해 전쟁을 치를 계획이 있습니다.”
“어떤 계획이지요?”
“동륙 하당은 나라도 부유하고 인구도 많으며 완주의 번화한 지방을 점거했다고 들었습니다. 우리 만족이 마상궁술에 강한 것은 장군께서도 벌써 알고 계시겠지요.”
여수우가 손가락으로 초원 위에 간단한 그림을 그렸다.
“뇌안산은 동륙의 동운산으로 동륙 땅을 동서로 나누지요. 동쪽에는 횡포한 리국과 진북 등이 있습니다. 그들은 서쪽을 공격하려 하지만 절대 쉽지 않죠. 하당이 마침 요충지이니 군사를 일으켜 상양관 요새만 지켜낸다면 우리 만족 기병이 천계성으로 곧장 돌격해 황제와 동맹을 맺으면 됩니다. 만족과 화족은 한 가족이 될 테고 황실에 충성하는 제후들은 뇌안산에 가로막혀 있겠지요. 동륙을 휩쓸어버릴 좋은 계획이 아니겠습니까?”
탁발산월은 잠시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좋은 계획이기는 합니다만 천계성의 황제를 만나려면 반드시 순국의 철기병과 제도의 우림군을 뚫어야 하며, 멸운관이라는 천혜의 장애물도 넘어야 합니다. 만족 기마병이 잘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지요.”
“그건 탁발 장군이 만족의 정예 부대를 못 봐서 하는 말씀입니다!”
여수우가 벌떡 일어나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호각을 등에 진 만족 무사 넷이 인파 속에서 걸어 나왔다. 그들은 반 무릎을 꿇고 앉아 일제히 동쪽을 향해 호각을 불었다.
전쟁터에서나 날 법한 특유의 깊고 웅장한 소리에 뇌운맹호는 저도 모르게 허리춤의 칼자루를 잡고 멀리 내다보았다. 은은한 안개 속 동운산과 드넓은 목초지가 펼쳐진 곳이었다. 아직 정오가 되기 전이라 산 정상의 태양은 옅은 금빛을 띠었다.
모두가 숙연함을 유지했다. 고개를 돌려 바라보는 여수우의 모습에는 천군만마를 내려다보는 듯한 위용이 풍겼다. 하당 무사들은 놀라 의아해하며 서로의 눈만 멀뚱히 쳐다보았다.
은은한 진동이 전해졌다. 동운산이 무너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먼저 깃발이 나타나더니 뒤이어 먼지가 일며 말들이 힘찬 기세로 우르르 몰려왔다. 새카만 흑마가 휘몰아쳐 왔다. 하당은 국력이 강하지 않은 까닭에 하당 무사들은 이런 방대한 규모의 만족 기병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건장하고 위풍당당한 만족과 준마들이 대군(大軍)으로 집결하자 군단이라기보다 초원 위의 맹수 무리 같다고 하는 편이 더 나을 듯했다.
기병들은 여수우와 탁발산월의 대오를 에워싸며 달려왔다. 그들이 달릴수록 하늘을 가릴 듯한 은폐막처럼 먼지가 높게 일었다. 그 속에 있던 뇌운맹호는 자신의 두 발로 대지를 딛고 있는 게 아니라 파도가 출렁이는 작은 배에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짙은 말 지린내에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다른 하당 무사들도 뇌운맹호처럼 당황해했다. 유일하게 탁발산월만이 찬탄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여수우가 갑자기 손을 흔들었다.
기마병이 군마의 고삐를 잡아채며 급히 멈춰 섰다. 잘 훈련된 군마는 한 치의 혼란도 없었다. 선두에 선 백부장들의 머리 위로 붉은색 긴 술이 드리워져 있었다. 그들은 손에 든 깃발을 바닥에 꽂고 철통처럼 포위했다.
여수우가 성큼 나아가 기마병 하나에게 소리쳤다.
“네 칼을 뽑아다오!”
기마병이 즉시 말안장에서 장도를 뽑았다. 여수우가 받아들고 손을 휙 뒤집자 칼날의 푸른빛이 폭발하듯 뿜어져 나왔다. 극도로 예리한 순 강철검이었다. 여수우가 곧바로 그 기마병의 가슴을 향해 힘차게 칼을 휘둘렀다.
펑! 금속이 요란하게 울렸다. 기마병은 재빨리 말을 몰아 한 걸음 물러나더니 안정적으로 섰다. 칼은 흑철 갑옷의 가슴 부분을 스치며 흰 자국만 옅게 남겼다.
여수우는 말없이 칼을 다시 휘둘렀다. 이번에는 칼날이 기마병의 투구 위를 스쳤다. 붉은 술이 바람을 타고 가볍게 흩날렸다. 사위가 고요해졌다.
여수우는 칼을 기마병에게 돌려주고 뒤돌아 탁발산월과 하당 무사들을 향해 두 팔을 벌려 보였다.
“이들이 바로 제가 훈련시킨 철기병입니다! 우리 칼은 탁발 장군께서 가져온 칼만큼 좋지도 않고, 갑옷도 낙족의 철갑만큼 견고하지 않지요. 그러나 우리 청양에는 이런 군도 1만 자루와 철갑주 1만 벌이 있으며 이런 갑옷을 입고 이런 칼을 휘두르며 전쟁에 나갈 사내 1만 명이 있습니다!”
탁발산월은 탄식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40년이 지난 지금 만족의 철기병이 이 정도일 줄은 몰랐군요. 동륙 제후들은 우리 초원인을 평생 꿰뚫어 보지 못할 겁니다.”
여수우가 돌아와 공손하게 가슴에 손을 얹고 예를 올렸다.
“제 조부의 철부도에 비할 바는 못 되지만 제가 성인이 된 후 하루도 거르지 않고 훈련시킨 기마병입니다. 제 아버지께서도 아직 정확히는 모르실 우리 부대를 외람되게도 탁발 장군께 보인 이유는 저라는 청년이 장군은 물론 귀국 국주와 함께 전쟁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믿음을 드리고 싶어서입니다.”
탁발산월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제가 오기 전에 잘못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초원에 젊은 영웅이 또 생겨났군요. 1왕자께서 괜찮으시다면 내일 제 장막에 와서 자세히 이야기 나누시겠습니까?”
여수우의 입꼬리에 한 줄기 미소가 걸렸다.
“제가 젊기는 하지만 초원의 독수리라 자처합니다. 그런 제가 장군과 나누고 싶은 이야기는 인질로 가는 일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밤이 되자 거대한 금장궁 안에서는 소녀들이 흰색 옷소매를 흔들며 빙글빙글 돌았다. 온통 시끌벅적한 광경이었다.
탁발산월은 술잔을 들고 하나하나 칸들과 귀족 가주들에게 술을 권했다. 보름간 거의 매일 대군은 금장궁에서 연회를 열어 동륙의 귀한 사절을 대접했다. 탁발산월이 술을 권하며 여수우의 탁자 앞을 지날 때 두 사람은 시선을 마주하고 가볍게 웃었다.
탁발산월이 자리로 돌아와 앉자 철익이 다가와 대군 옆에 앉을 것을 권했다. 대군은 담담한 표정으로 훈향 속에 앉아 있다가 탁발산월이 다가오자 살짝 웃으며 자기 옆자리의 방석을 가리켰다.
“오늘 비막간이 장군에게 본인이 훈련시킨 철기병을 보여주지 않았소?”
탁발산월이 자리에 앉자 대군이 무심하게 물었다. 탁발산월은 기탄없이 대답했다.
“그랬습니다. 보기 드물게 강한 군대더군요. 갖춘 무기며 갑옷도 전부 동륙 제품인 듯했습니다. 거기에 만족 준마가 더해지니, 동륙에 명성을 떨치는 순국 풍호기병에도 필적할 만하겠더군요. 대군께서도 진즉 알고 계셨겠지요?”
“그렇소. 모두 비막간이 가죽을 주고 순국과 교환한 것들이라오. 내게 말하지 않기에 나도 관여하지는 않았소. 어쨌든 우리 청양의 강병을 키워내는 일이니까. 비막간은 내 아들이니 나는 녀석을 믿소. 비막간이 군대를 장군에게 보여준 의도를 장군도 이해할 듯싶소만?”
“1왕자는 강한 군대를 인솔하고 있으니 자신이 북륙에 남아 하당을 돕는 것이 인질로 남회에 가는 것보다 더 낫다는 뜻이었겠지요. 기왕 맺을 동맹, 우리 하당에서도 강한 동맹국을 갖고 싶고요.”
대군이 웃으며 독주를 한 모금 마셨다.
“내 장군에게 원하는 인질을 고르라 했는데 아직 못 골랐소?”
탁발산월은 술을 마시고 고개를 살짝 저었다.
“내일 3왕자가 성 남쪽에 가서 말 떼를 보여주겠다고 했습니다. 3왕자의 성격과 총명함도 1왕자가 인솔하는 기마병에 뒤지지 않겠지요?”
“탁발 장군은 우리 만족의 사내대장부잖소. 인질 하나를 고르는데 이리 오래 머뭇거릴 게 뭐 있소? 모두 내가 총애하는 아들이고 별 차이가 없어 보이오만.”
“그러나 저희 눈에는 대군의 모든 왕자가 다릅니다.”
대군이 미간을 구기며 은잔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무슨 소리요?”
“저희 생각은 1왕자와 다릅니다. 우리 하당에서 원하는 것은 청양부의 가장 지혜롭고 용감한 왕자이지요. 저희는 단순한 인질을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동륙의 군진(軍陣)과 무술을 가르쳐 초원의 영웅으로 길러내 대군께 돌려드리고자 합니다. 우리 국주와 대군께서는 이미 장년을 넘어서셨습니다. 새로운 대국은 당연히 젊은이들이 결정해야 하지요!”
탁발산월이 말을 이었다.
“원래는 대군께 남회에 머물 인질로 세자를 청하려고 마음을 정하고 왔습니다. 안타깝게도 세자가 벌써 세상을 떠났지만요.”
대군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장군이 실제로 아소륵을 보았더라도 실망했을 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