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주표묘록-42화 (42/3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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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청동의 피 (7)

“여기는 둘째 아들 여복 철유요. 벌써 스물하나가 되었지. 제 형과 함께 일하고 있소.”

탁발산월이 이번에 올린 것은 수수한 색상의 비단이었다. 만족은 방직에 능하지 않아 비단도 가치가 상당한 선물이었다. 다만 1왕자에게 선물한 옥피리에 비하면 평범해 보였다.

탁발산월이 비단을 살며시 펼치며 말했다.

“이 미인청은 동륙에서 가장 값비싼 수단(繡緞)1)입니다. 이러한 청색 염료는 꽃잎에서 얻는 것인데 수십 묘(畝)에 달하는 꽃으로도 이 한 폭을 염색하기에 부족하다지요. 직조공은 삼중우(三重羽)라 불립니다. 비단 두께는 얇지만 안쪽이 삼중우의 결로 짜여서 직공 하나가 일 년에 짤 수 있는 길이가 겨우 몇 척에 불과합니다. 현재 완주에서는 이런 비단을 살 수 없고 궁에도 하나 남은 것인데 국주께서 약소하나마 선물하겠다고 하셨습니다.”

탁발산월이 가볍게 털자 얇은 비단이 청색 연기처럼 하늘하늘 펼쳐졌다. 바람에 따라 흔들릴 때는 깃털 무늬 하나하나가 종잡을 수 없이 흩날렸다. 여복은 넋이 나갔다. 그는 행여나 비단이 바닥에 쓸릴까봐 황급히 몸을 숙여 비단을 받쳐 들었다. 탁발산월은 살며시 웃으며 여복의 손에 미인청을 건넸다.

“이쪽은 내 셋째 아들 여응양 욱달한이오. 올해 스물이고 내 아들 중에 가장 똑똑한 녀석이지. 부락 내 방목과 문서를 관리한다오.”

“익히 들었습니다.”

탁발산월이 호위병에게서 선물을 건네받아 펼치자 은색 부드러운 갑주 한 벌이 나타났다. 극도로 가볍고 얇은 갑옷과 투구였다. 표면은 진주처럼 광택이 흘렀고 바람이 불자 가벼운 옷처럼 떨렸다.

“세상에서 낙족만이 이런 갑옷을 만들 기술을 갖고 있지요. 재료는 낙족 외부로는 내돌리지 않는 산호금입니다. 갑옷 고리 하나가 좁쌀만 해서 갑주 한 벌을 꿰는 데만 5년이 걸립니다. 이런 갑옷을 뚫기는 힘들지요.”

탁발산월이 휙 돌아서더니 호위병의 손에 들린 예리한 칼을 뽑았다. 모두가 놀라 한 걸음 물러섰다. 탁발산월은 갑옷을 자기 팔에 걸치고 힘껏 칼로 베었다. 왕자들은 대경실색했다. 탁발산월이 칼을 쓰자 슥 날카로운 소리가 났다. 순 무쇠로 만든 단단한 갑옷이라도 베임을 피할 수 없을 듯한 어마어마한 힘이었다. 그러나 칼은 갑옷에 내려앉자 기름칠한 강철을 내리친 것처럼 살짝 미끄러져 나갔고 갑옷 표면에는 아무런 흔적도 남지 않았다.

“이 갑옷이 3왕자께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군요.”

여응양은 감탄하며 받아들었다. 표면의 촉감은 진주처럼 반들반들해 손으로 쥐기 어려울 정도였다.

“이 녀석은 내 아들 중에서 가장 용감한 여하 귀목이오. 나이는 열여섯밖에 되지 않았으나 검술은 형들보다도 뛰어나다오. 우리 청양부의 새끼 표범이지.”

탁발산월은 손에 들고 있던 그 칼을 가로놓더니 앞으로 한 걸음 나가 여하에게 칼을 바쳤다. 그는 열여섯 살짜리 소년에게도 형들에게 한 것처럼 똑같이 예를 갖췄다.

“청양부의 가장 용맹한 왕자라는 소문은 저희 국주께서도 들으셨지요. 오늘 4왕자의 칼을 보자마자 저는 그것이 소문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제 칼요?”

여하가 의아해하며 허리춤에 찬 칼자루를 만졌다.

“이렇게 위용이 넘치는 칼은 분명 낭봉도겠지요? 목려 장군의 가장 강한 검술을 배울 수 있다면 분명 사자와 호랑이 같은 용사일 겁니다.”

탁발산월이 고개 숙여 칼을 바쳤다.

“이 칼이 4왕자의 위풍당당함에 보탬이 되기를 바랍니다.”

여하가 앞으로 한 걸음 나아가 칼을 받아들려고 두 손을 내밀었다.

“4왕자! 조심하십시오!”

탁발산월이 소리쳤다.

그러나 여하의 손은 이미 칼 몸에 닿았고 탁발산월이 소리치던 그때 손가락이 칼날을 스쳤다. 수많은 명검을 감별해본 적 있는 여하인지라, 칼날을 만져보기만 해도 칼의 품질을 알 수 있었다. 이 칼은 칼날에 손이 닿는 순간 모기에 손가락을 물린 것 같았다. 여하는 황급히 손을 움츠렸다. 칼날에는 새빨간 피 한 방울이 묻어나 있었다. 그가 멍해져 있는 사이, 핏방울은 칼 몸을 타고 서서히 미끄러져 갔고 칼에는 일말의 흔적도 남지 않았다.

“무척 잘 드는 칼이구려!”

대군이 찬탄했다.

“‘사자아’라 합니다. 비록 이름난 칼은 아니지만 저희 국주께서 줄곧 아끼던 물건입니다. 제 평생 이를 능가하는 칼은 본 적이 없죠.”

탁발산월이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칼과 함께 건넸다.

여하가 칼을 받아들었다. 손수건은 어느새 둘로 조각나 땅에 떨어졌다. 그는 경탄하며 칼날을 응시했다. 여응양은 저도 모르게 들고 있던 갑주를 보았다. 저렇게 예리한 칼로도 낙족의 산호금 갑옷을 베지 못했던 것이다. 대군이 엷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탁발 장군이 아주 세심하게 준비를 해왔구려. 네 가지 선물이 참으로 적절하기 그지없소.”

탁발산월이 호위병에게서 마지막 물건을 건네받던 참이었다. 역시나 흰색 비단 꾸러미였는데 그것을 받아들던 탁발산월은 대군의 말에 흠칫 놀랐다. 마치 아들 소개가 다 끝난 것처럼 들렸기 때문이었다.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주위를 둘러보고 입을 열었다.

“세자 저하께서는 여기에 안 계십니까? 저희 국주께서 세자를 위해 약소한 선물을 준비하셨는데요.”

갑자기 사위가 고요해졌다. 대합살은 고개를 돌렸고 대군도 멍하니 시선을 들어 먼 곳을 바라보았다. 잠시 후 대군이 시선을 거두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백리 국주의 성의는 감사하나 안타깝게도 아소륵은 이 선물을 보지 못할듯싶소. 벌써 죽었다오. 백리 국주께서 아소륵에게 주려던 것이 무엇이오?”

탁발산월은 잠시 침묵했다가 흰색 비단을 펼쳤다. 손가락 네 개 너비에 책장(冊張) 길이의 단순한 백옥 판이었다. 판에는 이해하기 어려운 글자들이 새겨졌고 글자에는 주사가 채워져 있었다.

“세자께서 건강이 좋지 않다고 들었는데 어린 나이에 돌아가셨을 줄은 몰랐습니다. 이것은 하당의 장생부(長生符)인데 세자가 사용하는 예기(禮器)입니다. 세자로 세워지는 분은 비술의 대가(大家)가 옥으로 만든 장생부를 사용하여 국가의 길운이 세자를 보우하고 자리를 보전케 하지요. 저희 백리욱 세자 저하가 어릴 때 사용하던 장생부입니다. 국주께서 욱 세자도 어릴 때 몸이 약했으나 이 예기를 지닌 후로 귀신이 감히 범접하지 못해 차츰 몸이 좋아지더니 이제는 보통 사람처럼 건강해졌다면서…….”

대군은 옥판을 받아들고 살며시 어루만지다가 소매에 넣었다.

“국주의 성의에 감사하오. 애석하게도 아소륵은 박복한 아이구려.”

어둠 속에서 빛 물고기들이 헤엄치며 물보라를 일으키는 소리가 귀를 찌를 듯 우렁차게 울려 퍼졌다. 아소륵은 종유석 뒤에 몸을 둥글게 웅크리고서는 목을 옆으로 빼고 몰래 훔쳐보았다. 노인은 맨발 하나를 차디찬 강물에 넣은 채 쥐 죽은 듯이 강 둔치에 누워 있었다. 아소륵은 노인이 뭘 하려는 생각인지 알 수 없었다. 방금 전 노인이 날카로운 자갈에 발가락을 베여 새빨간 피가 강물을 따라 서서히 번져나갔다.

햇빛이 없는 곳이라 아소륵은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알지 못했다. 그동안 아소륵은 마음이 텅 비어버렸다. 생각할 힘조차 없어진 것 같았다. 매일 일정한 시간에 구운 낭이 든 철제 상자가 까맣고 좁은 통로로 떨어졌다. 지하에는 강이 있으니 물은 넘쳤다. 아소륵은 이런 식으로 자기가 얼마나 살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노인처럼 오랜 세월이 흘러도 안 죽고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 어둠 속에서 아소륵은 자다 깨다 했다. 가끔 종유석 뒤로 오르락내리락하는 노인의 낮은 숨소리가 느껴졌다. 이따금 노인이 원숭이처럼 하릴없이 돌아다녀 그림자가 어지럽게 흔들렸다.

빛 물고기들이 강물 아래로 가라앉았는지 동굴 안은 점점 어두워졌다. 노인은 여전히 그곳에 조용히 드러누워 있었다. 죽은 건 아닐까 싶기도 했다. 아소륵은 품에서 청사를 뽑아 칼날을 손목에 댔다. 칼날에 차가운 기운이 있었는지 소리 없이 한기가 몸으로 스며들었고 아소륵은 몸을 흠칫 떨었다. 아주 작은 힘이면 날카로운 칼날이 손목의 맥을 잘라낼 것이고 뜨거운 피가 칼날의 한기와 충돌할 것이다. 아무 생각도 할 필요가 없었다. 이런 곳에서는 지혈해줄 사람도 없었다. 오랜 세월이 지나 사람들이 지하 감옥을 열었을 때 키가 크지 않은 해골 한 구를 발견할 것이다. 그러나 누구도 그 해골이 세자였던 아소륵이라는 사실은 모르리라.

한참의 침묵 끝에 아소륵은 칼을 치우고 멍하니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칼자루 위로 검푸른 비단이 동여매 있었는데 소녀의 피부처럼 보드라웠다. 비단 띠가 교차되는 부분에는 잡기 편한 석씨매듭이 지어져 있었는데 소마가 아소륵을 위해 묶어준 것이었다. 소마는 제 아비의 낡은 칼을 어루만지며 밤새 칼자루를 동여맨 뒤 다음 날 아침 아소륵의 가슴 앞에 걸어주었다.

아소륵은 칼자루를 얼굴에 댔다.

“소마…….”

잠시 후 아소륵은 또다시 중얼거렸다.

“엄마…. 살아서 엄마를 다시 보고 싶어요.”

촤르륵. 물소리가 전해졌다. 아소륵은 얼른 고개를 돌렸다. 큰 물고기가 물보라를 일으킨 것 같았다. 하지만 제왕 격이던 커다란 빛 물고기는 항상 물 아래에 깊이 가라앉아 있었다. 형광빛이 유달리 어두웠다. 커다란 빛 물고기는 말할 것도 없고 여러 빛깔의 작은 물고기들도 모두 물속 깊이 가라앉았다. 조용한 수면 위로 잔잔한 물결이 서서히 퍼져 나갔다. 아소륵은 어쩐지 불안해져 이상하리만치 고요한 수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하지만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았다.

낮게 한숨을 내뱉은 아소륵은 청사를 허리춤에 도로 끼우고 자리를 떠나려 했다. 그런데 잠잠해졌던 물결이 다시 소리 없이 일렁였다. 한 마리 뱀이 고요하게 물 아래에서 움직이는 것처럼 아주 조용하게. 가느다란 파문이 천천히 원을 그렸다가 이내 다시 사라졌다.

노인이 눈을 떴다. 그는 멍하니 그곳에 누워 있었지만 눈에는 표범 같은 빛이 번득 스치고 지나갔다. 그것은 야수의 흉포함만이 아닌, 억누르기 힘든 굶주림이기도 했다.

물결이 다시 떠올랐다. 그것은 소리 없이 속도를 높였다. 흡사 악기 줄이 팽팽하게 당겨지는 것처럼 그것은 노인을 목표로 점점 더 빠르게 전진해 왔다. 물보라가 겹겹이 넘실댔다. 아소륵의 심장이 바짝 죄어왔다. 아주 끔찍한 것이라고 직감이 말해주고 있었다.

물보라가 갑자기 부서져 흩어졌다. 그와 동시에 노인이 등을 튕기며 뛰어올랐다. 공기 중으로 비단이 찢어지는 듯한 괴성이 울리고 거대하고 새카만 그림자가 물보라 속에서 솟구쳐 올라 노인을 덮쳤지만 실패했다!

“물고기다!”

아소륵은 그만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그것이 물고기인지 아닌지 확신할 수 없었다.

* * *

1) 수놓은 것같이 짠 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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