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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청동의 피 (6)
대군은 살짝 당황해 눈을 가늘게 뜨고 상대를 살펴보았다. 양볼 옆은 칼로 깎아낸 것처럼 구레나룻이 가지런했고 갈색에 희끗희끗한 머리카락은 가죽끈으로 묶었다. 무거운 갑옷을 벗자 동륙의 사자처럼 보이지 않고 도리어 나이를 먹은 호표기 무사 같았다.
“대윤 휘하의 하당국 삼군대제사, 당공작 백리공의 흠차 탁발산월이 북륙 대군, 청양의 국주를 뵙습니다.”
무사는 공손하게 한쪽 무릎을 꿇었다. 다리가 진창에 빠지는데도 그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백 보 밖에서 동륙 무사들도 앞다투어 말에서 내려와 말등자를 잡고 한쪽 무릎을 꿇었다. 깃발을 든 부장만 무릎을 꿇지 않았다. 부장이 두 손을 들어 올렸다. 선홍빛 깃발 위, 금실로 수놓은 국화가 눈부시게 빛났다.
대군은 순간 자기가 마주한 사람이 누구인지 깨닫고 얼른 말에서 내려 탁발산월의 팔을 부축했다.
그러나 탁발산월은 일어나지 않았다. 갑옷 틈에서 청회색 상어 가죽 주머니를 꺼내 봉해진 줄을 끄르고 봉랍(封蠟)한 두루마리를 머리 위로 높이 받들었다.
“백리공과 대군의 기대에 부응하고자 탁발산월이 당공작의 친서를 가져왔습니다.”
대군은 고개를 돌려 눈짓을 했다. 청양의 통역관이 빠른 걸음으로 나와 서신을 받아 천천히 펼쳤다. 통역관은 목소리를 가다듬고 서신을 읽어 내려갔다.
“북륙 대군, 청양 국주 좌하(座下)1) :
먼 옛날 하늘과 땅의 구분만 있고 9주와 7해라는 명칭이 없던 시절, 세상의 모든 종족이 혈육처럼 서로 아끼며 풍파를 함께 겪었지요.
오래전 신제는 나라를 세우며 3륙을 나누지도 않고, 화족과 이민족을 구분하지도 않아 온 천하의 만백성이 형제처럼 어우러져 평안하고 화목하게 지내며 영명한 군주를 함께 모셨습니다.
한데 어찌하여 천하가 나뉘고, 어찌하여 형제가 서로 싸우며, 또 어찌하여 이리 인심이 등을 돌리게 되었단 말입니까. 동륙과 북륙은 혈육을 나눈 사이거늘 어쩌다가 원수가 되었는지, 그 생각을 할 때마다 안타까움에 감정이 북받쳐 주먹을 꼭 쥡니다…….”
누구도 입도 뻥긋하지 못했다. 허례허식으로 가득한 문장들은 만족 무사들은 물론 대군도 잘 못 알아들었다. 그러나 낭랑한 통역관의 목소리는 광활한 초원 위로 멀리 퍼져 나가며 군마들의 울부짖음을 압도했다. 단어의 뜻으로 짐작건대, 서신에서는 일촉즉발 싸움을 벌일듯하던 동륙 황실의 위압이 아닌, 동륙과 북륙 사이에서 오래도록 찾아보기 힘들었던 선의가 느껴졌다. 곁눈으로 동륙 사절을 살피던 대군의 시선이 그의 목에 닿았다. 탁발산월은 목에 작은 은패를 걸고 있었는데 어쩐지 눈에 익었다.
“……이로써 양국이 형제가 되어 영원히 화목한 우방으로 지내며 만백성을 교화하고 오래도록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대윤 하당국 공작 백리경홍 친서 봉정(奉呈)2).”
통역관은 낭독을 마치고 두루마리를 대군에게 올렸다. 대군은 두루마리를 머리 위로 높이 들어 올렸다. 짧은 침묵 후 귀족과 무사들은 한데 소리 높여 환호성을 질렀다.
탁발산월이 일어섰다. 화려한 통소매 옷을 입은 노예들이 대오 속에서 둘러 나와 길고 두터우며 부드러운 양탄자를 펼쳐 그의 발아래까지 깔았다. 노예들은 양탄자 양쪽으로 작은 탁자를 놓고 그 위로 얇은 비단을 깐 뒤 양을 구울 화톳불을 놓았다. 진한 술 냄새가 멀리서 흘러왔다. 만족의 독주가 담긴 큰 술 단지 여러 개의 주석 봉인이 연이어 뜯어졌다.
하당의 무사들은 초원의 손님맞이 광경을 처음 보았다. 끝없이 황량하던 땅이 돌연 맛좋은 술과 비단에 둘러싸인 연회 장소로 변했다. 호표기 무사들은 물러갔고 젊은 여자 노예들이 공손하게 그들을 자리로 안내했다. 보는 사람마다 미소를 짓고 있어 하당 무사들의 불안감도 조금씩 사그라졌다. 그들도 조금은 들뜨는 기분을 참기 어려웠다.
“대군의 융숭한 대접에 황송할 따름입니다.”
탁발산월이 허리 숙여 예를 올렸다.
“소소한 접대일 뿐이오. 탁발 장군이 가져온 후한 선물에 어찌 비할 수 있겠소?”
대군이 다시 한번 탁발산월을 부축해 일으켰다.
“백리 공작의 서신은 그 어떤 선물에도 비할 수 없소. 우리 만족은 동륙 상국의 벗과 원한을 잊고 함께 앉아 술을 마실 이날을 오랫동안 기다려왔다오.”
탁발산월과 대군은 주석(主席)에 나란히 앉았다.
“동륙 상국(上國)의 흠차와 형제들을 위하여 건배!”
대군이 은 재질의 커다란 잔을 높이 들었다.
귀족들도 은잔을 함께 들었고 하당 무사들도 따라 들었다. 잔에 담긴 만족의 맛좋은 술은 옅은 청색을 띠었고 취할듯한 배 향기도 났다. 모두가 일제히 잔에 든 술을 비웠다. 하당 무사들은 순간 멍해졌다. 이내 그들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몇몇은 탁자에 엎드려 연신 콜록거렸다.
“하하하하하.”
대군의 웃음소리는 맑고 우렁찼다.
뇌운맹호는 탁발산월 옆에 앉아 있었는데 두 손으로 힘껏 자기 목을 졸랐다. 입부터 위까지 온통 불타는 듯했다. 술이 오장육부를 다 불태우는 것만 같았다. 대군의 웃음소리에 뇌운맹호는 순간 분노가 치밀었으나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탁발산월이 그를 힐끗 쳐다보았다.
“이런 큰 잔의 술을 마시는 것까지 따라 하려는 게냐? 고이심 독주는 너희가 그리 대담하게 마실 수 있는 술이 아니다.”
“동륙 손님들을 위해 술을 내와라.”
대군이 손을 휘두르자 어린 만족 소녀들이 곳곳에서 나와 중간의 양탄자 위로 몰려들었다. 뜨거운 불처럼 명려한 마보 치마를 입고 사슴 가죽으로 만든 작은 말 장화를 신은 소녀들은 새하얗고 긴 천을 걸친 채 춤을 추기 시작했다. 피리와 작은 북소리가 울리고 소녀들이 노래하며 춤췄다. 양쪽 소매의 하얀 천이 하늘을 향해 나부꼈다.
춤과 노래에 하당 무사들의 주의가 분산됐다. 술의 독한 기운도 서서히 옅어졌다. 노예들은 잘 구워진 양고기와 북륙에서는 구하기 힘든 신선한 과일을 올리며 술을 권했다. 하당 무사들은 조금씩 청양의 독주를 마시는 법을 익혔다. 새로 구운 양고기도 노린내가 나지 않고 씹을수록 은근한 단맛이 났다. 뇌운맹호는 이번 출사에서 부장을 맡은 만큼 절대 이런 분위기에 취해서는 안 된다며, 속으로 자신을 환기시켰다. 하지만 차츰 보이고 들리는 것은 다들 기뻐하는 광경뿐이었다. 소녀들의 미소도 햇살처럼 빛났다. 술을 권하는 노예들도 과할 정도로 열심이어서 거절할 도리가 없었다. 취기가 이마 끝까지 오른 그는 소녀들의 옷소매 위로 하얀 천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것만 몽롱하게 보였다. 만족에 대한 마지막 경계심 한 가닥이 취기 속에 흩어지고 그는 저도 모르게 음악에 맞춰 박수를 쳤다.
대군은 거듭 잔을 들고 술을 비웠다. 청양의 귀족들도 대군을 따라 잔을 비웠다. 만족의 주량은 동륙 무사들에 비할 바는 아니었으나 끊임없이 올라오는 독주에 귀족들도 점점 취기가 짙게 올랐고 얼굴도 불그레해졌다.
대군은 주위를 둘러보더니 은잔을 약하지도, 그렇다고 세지도 않게 탁자에 내려놓았다.
탕 소리에 탁발산월이 고개를 돌렸다. 두 사람의 눈빛은 조금의 취기도 없이 유난히도 맑아 연회의 정경 속에서 다소 도드라져 보였다.
“동륙의 벗들과 오랫동안 전쟁을 해온 터라, 이렇게 마음을 열고 즐겁게 술을 마시는 광경을 보니 정말 기쁘구려.”
대군이 방석을 옮겨 탁발산월과 마주 앉았다. 대군은 살짝 허리를 숙여 예를 갖췄다. 공손하고 예의 바른 모습이 동륙 명문세가의 귀족 같았다. 탁발산월은 만족 주군이 이번 일에 많이 신경 썼음을 알고 살짝 감동했다.
“고이심 독주는 예년과 마찬가지로 독하군요.”
탁발산월이 손으로 가슴을 누르며 만족의 예로 답했다.
대군과 탁발산월은 모두 웃기 시작했다. 같이 술을 마시기 시작했는데 대군과 탁발 장군은 더디게 취했다. 주량이 세서가 아니었다. 탁발산월은 한 모금 마시자마자 자신과 대군의 탁자에 놓인 술에는 물이 반이나 섞여 있다는 걸 알았다. 청양의 고이심 독주는 동륙에서도 ‘청양혼’으로 이름 나 있다. 제대로 마시면 무쇠로 만들어진 사내라 하더라도 버티기 힘들었다.
“탁발 장군이 우리 만족 사내라는 이야기는 일찌감치 들었소. 그러니 우리 방식을 이해하겠지. 함께 앉아 술을 마실 수 있다는 것은 벗이 되었다는 의미요. 이런 기회는 백 년에 한 번 올까 말까요. 우리 청양은 하당국과 진심으로 영원한 동맹을 맺기를 바라오. 과거 어떤 원한이 있었던 다 잊으시오. 하늘에 계신 반달 천신께서 우리의 진심에 증인이 되어줄 것이외다!”
대군이 손을 들어 하늘을 가리켰다.
“우리 하당의 진심은 하늘과 땅이 증거가 되어줄 것입니다. 기만하는 바가 있다면 귀신도 용서치 않을 것입니다. 이것은 저희 국주가 대군께 드리는 선물입니다.”
탁발산월이 허리를 굽히며 앞으로 나왔다. 그는 갑옷 틈에서 비단 주머니를 하나 꺼내 은밀하게 올렸다.
대군이 금으로 수놓은 붉은 비단 주머니를 열었다. 반질반질하고 투명한 하늘색 옥도장이 붉은 비단 위에 놓여 있었다. 손을 대니 차디찬 것이 맑은 얼음 같았다. 위쪽에는 똬리를 틀고 앉은 용이 조각돼 있었는데 몸 뒤로 펼쳐진 두 날개는 맥이 선명했으며 벌어진 입에는 흑색 진주 한 알을 물고 있었다. 대군은 손을 옥도장 뒤쪽으로 옮겨갔다. 그런데 세 치 앞의 옥석에는 뜻밖에도 자신의 지문이 또렷하게 남아 있었다. 대군은 태연하게 도장을 뒤집어 인장에 새겨진 글귀를 보고서는 엷은 미소를 지었다.
“백리 국주께서 이토록 진귀한 도장을 보내주셨는데 언제 쓸 수 있을지 모르겠구려.”
탁발산월이 공손하게 절을 한 번 했다.
“동륙에 전란이 빈번해 저희 국주께서 몹시 근심하고 계십니다. 백성의 고난을 보고도 나라가 힘이 미약해 구할 길이 없지요. 저희 국주께선 청양 철기병의 영민함과 용맹함을 우러러보며 진심 어린 동맹의 뜻을 갖게 되셨습니다. 빠르면 5년, 늦어도 10년 내에 대군께서는 반드시 바다를 건너 패권을 잡게 되실 터이니 그때 이 도장이 대군의 군령에 쓰일 수 있다면 저희 국주의 깊은 뜻이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대군은 탁발산월의 두 눈을 직시했다. 대군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옥도장을 만지작거리며 오랫동안 입을 다물고 있었다. 탁발산월은 대군의 시선을 조금도 피하지 않고 똑바로 마주했다. 이내 두 사람은 함께 웃음을 터뜨렸다.
대합살은 멀찍이 떨어져 있었다. 대군과 동륙 사절은 술잔을 기울이며 담소를 나누는 듯했지만 현장에 있는 그 누구도 두 사람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제대로 들을 수 없었다.
“자. 탁발 장군 내 아들들을 소개하겠소.”
대군이 목소리를 높였다.
왕자들은 그 말을 듣고 자리에서 일어나 주석 앞으로 나란히 섰다. 탁발산월도 일어섰다.
“내 큰아들 여수우 비막간이오. 청양부의 군령과 제사를 담당하고 있소. 벌써 스물넷이라오.”
여수우가 가슴에 손을 얹고 예를 올렸다.
“탁발 장군. 안녕하십니까.”
탁발산월은 답례를 한 후 데려온 하당 무사들을 돌아보았다. 뇌운맹호는 이미 취해 탁자에 엎어져 있었다. 다행히 주량이 센 호위병 하나가 남아 있었다. 그는 비틀거리며 말 등에서 짐을 내려 흰색 얇은 비단으로 감싼 꾸러미를 꺼냈다. 탁발산월이 비단을 펼치자 주변의 모두가 일제히 감탄했다. 꾸러미 안에는 옥으로 만든 피리가 들어 있었다. 북륙에서는 옥이 나지 않아 높은 값을 주고 동륙에서 사와야 했다. 하지만 이렇게 흠 하나 없는 옥피리는 그 누구도 본 적이 없었다. 하얀 비단과 어우러진 피리는 색깔이 구분되지 않을 정도였다. 다만 끄트머리에 붉은색 술이 매어져 있었는데 그 붉은색이 매우 화려했다.
“소소한 선물입니다. 1왕자가 음악을 좋아한다는 이야기를 대합살께 들었지요.”
탁발산월이 피리를 올렸다.
대합살은 속으로 몹시 놀랐다. 하당의 태상경 앞에서 지나가듯 한 말까지 하당의 서기관이 기록해 두었을 줄이야. 여수우는 피리를 받아들고 감탄하며 어루만졌다. 선물이 무척 마음에 든 눈치였다.
* * *
1) 편지글에서, 받는 사람을 높여 그의 이름이나 호칭 아래 붙여 쓰는 말.
2) 서신이나 문서 따위를 삼가 받들어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