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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청동의 피 (4)
“대군, 대군!”
대합살이 큰 소리로 부르며 쫓아왔다.
무척 빠르게 걷던 대군이 순간 걸음을 멈추는 바람에 대합살은 하마터면 그의 등에 부딪힐 뻔했다.
“사한은 왕자들을 어찌 처벌하려는지 물으려는 게지? 갑자기 녀석들을 풀어주고 동륙인과 함께 술을 마시게 한 다음 이대로 조용히 덮으려는 건가 싶을 테고.”
“맞습니다!”
대합살은 아연해져 고개를 끄덕였다.
대군이 조용히 탄식했다.
“그대 앞이니 못할 말도 없지. 내 마음이 모질지 못해 차마 죽이지는 못하겠으나 벌은 내릴 걸세. 하지만 아소륵이 불현듯 실종되고 본디 침착하던 욱달한이 갑자기 병사를 이끌고 비막간의 장막을 쳤네. 동맹을 맺을 하당의 사자가 오려는 참인데 순국의 밀사가 때마침 북도에 나타나지를 않나…. 이 모든 일의 배후에 무언가가 있는 것 같네. 갑자기 너무 많은 일이 생겼는데 또 너무나도 공교로워. 자네는 산벽공이라는 자를 믿어도 된다고 생각하나?”
잠시 주저하던 대합살은 살며시 고개를 저었다.
“산벽공의 말이 상당히 일리 있게 들리긴 했지요. 우리가 하당으로 내려갈 때도 제도의 사자들과 역관들이 몰래 마중을 나왔습니다. 하지만 이 일이 그리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습니다. 산벽공이라는 자는 아마도 우리가 예측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겠지요?”
“그렇네. 내 생각도 그래.”
대군이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먹구름이 이미 무척 두껍게 쌓였는데 어떤 비가 내릴지, 언제 내릴지 알 수 없는 기분이야. 일단 우리 내부가 혼란해서는 안 돼. 아들놈들을 벌하지 않고 눈감아주는 한이 있어도 북도성의 안정을 확보해야 해.”
각자 근심을 품은지라 술자리는 금세 파했다. 여하는 차갑게 콧방귀를 끼고는 말 없는 여응양을 따라 떠났다. 여수우는 속으로 낙자언에게 살짝 미안해하며 장막 밖으로 그를 배웅했다.
“정말 위험했소. 오늘 낙 형제의 임기응변 덕에 살았구려.”
술자리에서 내내 말이 없었던 낙자언은 그제야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안타깝게도 이번 제 임무는 망했지만요.”
여수우가 고개를 저었다.
“아버지께서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소. 1천 벌의 풍호 갑옷 같은 귀한 선물도 거절하시다니.”
낙자언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저도 어쩔 도리가 없어 한번 떠본 것입니다. 풍호 갑옷은 한 벌을 제작하려면 철을 선별하는 것부터 제련까지 최소 3년의 품이 들지요. 매년 제도에 바치는 것도 우림군(羽林軍) 장비로 공급하는 5천 벌뿐입니다. 1천 벌을 만들려면 금군의 병기방(兵器坊)에서 전력을 다해 매달려도 시간 내 대지 못할 겁니다.”
“떠본 거라니?”
“하당과의 동맹에 대한 대군의 결심을 떠보았습니다.”
“무슨 말이오?”
“1왕자. 대군께서 왜 하당과 동맹을 맺으려는 겁니까?”
여수우가 잠시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배 때문이오. 우리는 군함 기술을 얻어야만 동륙 바다의 대군이 두렵지 않을 거요. 아버지께서 내놓고 말씀하시진 않았으나 내 생각에는 우리 만족의 조선술(造船術)이 많이 부족하다 보니, 완주의 원양선 공장에서 사문투함을 얻는다면…….”
“사문투함이 빠르고 강하긴 하지만 우리 순국의 철사 누선(樓船)1)도 동륙 바다에서는 드문 배입니다. 사문투함은 말할 것도 없고 우족의 목란장선도 우리 누선을 만나면 쉽게 방심하지 못하죠.”
“맞는 말이오.”
“제가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왜 대군이 가까운 곳을 버리고 먼 곳을 취하려는가 하는 겁니다. 순국의 노염을 살 것도 마다하지 않고 왜 하필이면 멀리 대륙의 남쪽에 있는 하당과 동맹을 맺으려는 건지. 통상이든 무기 구매든, 나아가…….”
낙자언이 목소리를 낮추었다.
“천척협을 넘어 더 큰 국토를 도모할 뜻이 있다면 우리 순국이 하당보다는 더 좋은 동맹이지요. 대군은 어리석은 분이 아니니 이렇게 하는 데는 분명 다른 이유가 있을 겁니다. 아니면 다른 세력이 개입했던가요.”
“다른 세력?”
여수우가 깜짝 놀랐다. 낙자언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창명호의 막부에 있으면서 저는 줄곧 청양과의 교섭을 담당해 왔습니다. 4년간 순국은 청양과 동맹을 맺으려 애썼지만 매번 수포로 되었지요. 은연중에 누군가가 먼저 손을 써 암암리에 우리를 방해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이자는 그림자처럼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저 거기에 있다는 것만 느껴질 뿐, 일말의 흔적도 찾지 못했습니다.”
“다 이해가 되진 않는구려.”
여수우가 생각에 잠겼다.
“머지않아 하당에서 답방하러 올 자는 삼군의 총사령관인 탁발산월이오. 그자의 부친은 우리 북륙의 구남부 사람이지. 그자가 부친을 설득한 것이 아니겠소?”
“탁발산월은 동륙의 4대 명장이지만 그래 봐야 일개 무사일 뿐입니다.”
“그럼 또 누가 있소?”
“하당에는 탁발산월을 제외하고 국주인 백리경홍과 무전도지휘 식연이 있지요. 식연은 탁발산월과 같은 동륙 4대 명장이나 명성은 탁발산월보다 높습니다. 다만 두 사람은 사이가 좋지 않으니 식연이 중간에서 도모한 일이라면 탁발산월을 사절로 보내지 않았을 겁니다. 백리경홍은 귀족 공작이지만 제 눈에 그리 계략이 뛰어난 자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그럼 또 누가 있단 말이오?”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낙자언이 소매에 손을 넣은 채 어둠 속의 금장궁을 마주했다.
“얼굴을 드러내지도 않고 남북의 동맹을 성사시키다니 정말 그럴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천계성 태청궁의 황제 폐하는 아닐는지요?”
낙자언은 이내 쓴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황실에서 왜 제후가 북륙과 결탁하게 두겠습니까?”
두 사람은 금장궁 입구에 선 채 한참을 침묵했다.
“남아 있어 봐야 소용없을 듯하니 저는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낙자언은 떠나기 전 여수우를 흘끔 쳐다보았다.
“1왕자께서는 부디 조심하십시오. 배후의 그자는 생각만 해도 정말 두렵습니다!”
두려움에 뒷걸음질 치던 아소륵은 그만 물에 발이 빠지고 말았다.
커다란 동굴 속에는 괴이한 웃음소리만이 메아리쳤다.
“허허, 허허, 하하하하. 히히히히히…….”
수천 명이 함께 종유석 뒤에서 크게 웃는 것 같았지만 실제로 웃는 사람은 하나였다. 그곳에 매달린 그는 오래된 깊은 숲속의 늙은 원숭이 같았다. 수염과 머리카락은 지금껏 한 번도 안 깎았는지 거꾸로 드리워진 수염과 머리칼 사이로 이끼가 빽빽하게 자랐다. 그는 두 손으로 가느다란 쇠사슬 두 줄을 붙잡고 공중으로 훌쩍 솟으며 몸을 뒤집었다. 무슨 방법을 썼는지 모르지만 그는 매우 조용하게 아소륵 뒤에 착지했다. 들리는 것이라고는 쇠사슬과 종유석이 마찰하는 작은 소리뿐이었다.
이런 곳에서 사람을 만난다면 기뻐야 마땅하겠지만 아소륵의 마음은 온통 두려움으로 가득했다. 얼핏 보아도 그는 사람인지, 야수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거의 헐벗은 채로 허리춤에 썩은 짐승 가죽만 걸쳤고 온몸은 형광빛이 비쳐 투명한 청록색을 띠었다. 상당히 늙어 보였지만 가는 쇠사슬 두 줄에 의지해 거꾸로 매달릴 힘은 절대로 보통 사람이 지닐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드러난 몸은 비정상적으로 말랐지만 튼튼했다. 근육 하나하나가 쇠줄처럼 옹골지게 엮여 있었다.
노인은 실성한 사람처럼 크게 웃었다. 날카로운 웃음소리가 귀를 찔렀는데 마치 바늘이 아소륵의 뇌를 긁어대는 느낌이었다.
아소륵은 고개를 돌리며 강을 넘어 도망칠까 생각했다. 그런데 갑자기 웃음소리가 사라졌다. 다시 고요해진 동굴 안에는 아소륵 혼자만 남은 것처럼 찰박찰박 그가 물 밟는 소리만 들렸다. 아소륵은 귀신을 봤다는 생각에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요괴의 손바닥에 놓인 종이 인형이 된 기분이었다.
아소륵은 두려움을 참으며 조금씩 고개를 돌렸다. 노인은 이미 두 발을 땅에 대고 조용히 아소륵의 등 뒤에 서 있었다. 아소륵을 응시하는 두 눈도 온화하고 생기 있게 변했다. 하얀 수염으로 뒤덮인 입가에는 아직 약간의 웃음기가 남은 듯했다.
한참 뒤 노인이 아소륵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수중에는 황금색 구운 낭이 있었다.
아소륵의 시선이 낭에 고정됐고 배에서는 꼬르륵 소리가 났다.
아소륵은 마지막 낭 조각을 꿀꺽 삼키고 차가운 강물을 떠 입을 헹궜다. 얼마나 오랫동안 굶었는지 낭을 입에 넣자 너무나도 맛있어서 하마터면 혀를 깨물 뻔했다.
처음 낭을 받아들었을 때는 요괴의 마술이 아닐까 의심했다. 돌멩이 하나를 쥐여 준 것일 뿐인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더구나 안에 후추와 마른고기, 회향2)이 든 이런 황금색 바삭바삭한 낭은 금장궁에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한 입을 먹자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이것이 돌인지 아닌지조차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노인은 멀지 않은 곳에 쭈그리고 앉아 낭이 다 떨어질 때까지 하나씩 던져주었다. 그러고는 이제 없다면서 손을 탁탁 털어 보였다.
아소륵은 잔뜩 먹어서 불룩해진 배를 문지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노인은 거대한 원숭이처럼 멀찍이 종유석 바위가에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물끄러미 동굴 천장에 반사된 형광빛을 보다가 이따금 멍하니 웃기도 했다. 노인의 커다란 손은 손가락보다도 오그라든 손톱이 더 길었다. 그마저도 이리저리 물어뜯어서 온전치 않았다.
손에는 가느다란 두 줄의 쇠사슬이 무거운 수갑처럼 연결돼 있고 쇠사슬의 다른 한쪽 끝은 바위에 박혀 있었다. 쇠사슬 길이가 제법 길어서 노인은 20척 거리 안에서 움직일 수 있었지만 더 멀리 가지는 못했다.
아소륵은 거리를 헤아려보고는 노인의 손이 닿지 못할 구석진 곳에 움츠리고 앉아 조심스럽게 노인을 관찰했다. 이를 알아차린 노인이 고개를 돌려 아소륵을 쳐다보았다. 두 사람은 그렇게 침묵한 채로 있었다. 강물에서 촤르륵 소리가 났다. 커다란 물고기가 수면 근처에서 한 바퀴 도는 소리였다.
“할아버지. 다 먹었어요.”
아소륵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노인은 아소륵에게 다가오라며 손짓했다. 아소륵은 망설이며 그의 팔목에 감긴 쇠사슬을 쳐다보았다. 발이 선뜻 움직여지지 않았다.
노인이 입을 벌리고 새하얀 이를 드러내더니 물어뜯는 동작을 해 보였다. 그러고는 아소륵 뒤편의 지하 강을 가리켰다. 갑자기 그가 자기 발을 들어 올렸다. 아소륵은 순간 오싹해졌다. 노인의 왼발 앞쪽 절반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무언가에 물어뜯긴 듯했다.
조용한 강이 돌연 아소륵의 눈에는 위험천만한 곳으로 보였다. 아소륵은 덜덜 떨면서 노인에게 가까이 갔다. 노인은 혼탁한 두 눈에 가상하다는 기색을 내비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소륵이 대담하게 입을 열었다.
“할아버지. 왜 여기에 계세요?”
노인의 눈이 아소륵을 따라 움직였다. 자세히 보니 노인의 검은자보다 흰자가 더 많은 눈은 뜻밖에도 텅 비어 있었고 물고기 눈처럼 생기가 전혀 없었다. 죽은 물고기 같은 눈이 아소륵을 따라 이리저리 움직이니 무섭지 않을 수 없었다.
아소륵은 애써 두려움을 참아내며 물었다.
“할아버지. 저 돌아가고 싶어요…. 어떻게 나가는지 아세요?”
여전히 노인은 아무 대답이 없었다. 아소륵이 지척으로 다가왔지만 노인은 계속 아소륵을 우두커니 쳐다만 보았다.
노인과 대화할 자신감을 잃은 아소륵이 물러나려 하자 노인은 갑자기 고개를 저었다.
“못… 못 나가나요?”
아소륵은 간담이 서늘해졌다.
노인은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연신 고개를 끄덕이는 노인의 눈이 아이처럼 기민하게 굴러갔다. 어디에서 힘을 얻는 것인지 노인은 쭈그린 자세 그대로 몸을 공중에서 훌쩍 뒤집었다. 착지할 때는 두 손을 짚고 물구나무를 서더니 히히하하 미친 듯이 웃으며 원숭이 같은 소리를 냈다.
아소륵은 실성한 노인의 모습에 놀라 꼼짝도 못 하고 멍하니 그가 엎치락뒤치락 난리 치는 모습을 한참이나 쳐다보았다. 갑자기 노인이 차분해지더니 온화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아소륵을 향해 묵묵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두 눈에는 연민의 기색이 어려 있었다.
아소륵은 다리에 힘이 풀려 맥없이 주저앉았다. 노인의 수염과 머리카락, 썩어 문드러진 짐승 가죽을 보자 가슴 가득 절망이 차올랐다.
“할아버지는… 여기서 오래 계셨어요?”
아소륵이 나직하게 물었다.
그러나 노인은 물끄러미 동굴 천장을 쳐다보며 아무런 기척도 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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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상갑판 위에 망루나 다락을 설비한 고대 군선의 명칭.
2) 미나리과 식물로 식품이나 향신료로 사용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