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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청동의 피 (3)
폭우가 거세게 내렸다. 손가락만큼 굵어진 빗줄기가 채찍처럼 바닥을 마구 때렸다.
올해 봄은 꽤 괜찮았다. 마초와 파지국도 잘 자랐다. 그러나 이런 큰비에 풀뿌리는 흙에 붙어있지 못했다. 초원에는 혼탁한 흙탕물이 튀지 않은 곳이 없었다. 유목민들은 성 밖에서 말 떼를 도로 데려왔으며 많은 장막을 거둬들이고 가장 좋은 장막에 몸을 피했다.
대군은 묵묵히 장막 입구에 서 있었다. 자잘한 빗방울이 얼굴을 때려도 가만히 있었다. 주위로 비안개가 자욱했다. 대군은 빗속에 시선을 던져둔 채 오래도록 말이 없었다.
“대군…….”
대합살이 나직하게 불렀다.
“수색을 보낸 이들은 돌아왔는가?”
“북도성을 다 뒤졌지만 그날 밤 성을 나간 자는 없답니다. 모든 장막을 다 조사했지만 아무 단서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대합살은 그사이 많이 늙은 듯했다.
“주위 50리까지 찾아보았지만 폭우에 모든 흔적이 씻겨 내려갔습니다.”
“시신은 못 찾았잖나. 그렇지?”
대군이 대합살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대합살은 그의 어마어마한 힘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아소륵은 아직 살아 있어. 그렇지? 어딘가에 살아 있을 게야!”
대합살은 무슨 말을 할지 몰라 그저 묵묵히 대군을 바라보았다. 대합살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곽륵이. 저는 오늘에서야 대군이 가장 사랑하는 아들이 누군지 알았습니다.”
대군이 손을 저었다.
“아무 말 말게. 아무 말도 마…….”
동굴 천장의 물 한 방울이 아소륵의 이마에 똑 떨어졌다. 차가움이 뼛속을 파고들었다.
정신이 번쩍 든 아소륵은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얼굴의 물을 털어냈다. 온몸이 축축한 느낌이 들어 주변을 보니 지하의 강 모래톱에 엎어져 있었다.
“나… 안 죽은 건가?”
강물이 그의 몸 옆을 조용히 흘러갔다. 물고기들이 물속에서 빙글빙글 원을 그리며 헤엄치는데 휘황찬란한 빛의 소용돌이 같았다. 형광 불빛 덕분에 아소륵은 이 드넓고 웅장한 곳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시선을 들어 바라보는 순간 아소륵은 두려움을 완전히 잊었다. 도리어 무릎을 꿇고 엎드려 절해야 할 것 같은 충동이 일었다. 세상에 이렇게 광활한 공간이 있으리라고는 생각해 보지 못했다. 너비가 수백 장(丈). 아니, 수천 장쯤 되는 듯했다. 애초에 자신의 눈만으로는 이 거대한 공간을 가늠할 수 없었다. 일어나서 바라보았다. 푸른색 천장 벽은 까마득한 것이 하늘 같았고 그 끄트머리는 어둠에 묻혀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다.
뚝뚝 떨어지는 물소리가 거대한 공간에 단조롭게 메아리쳤다. 지하를 굽이굽이 흐르는 제법 널찍한 강은 바깥세상의 어느 강줄기 같았으며 수천수만 년간 쌓여온 종유석은 이곳의 산맥이었다.
갑자기 물을 휘젓는 소리가 울렸다. 아까 보았던 거대한 빛의 물고기가 강물 속에서 펄덕 뛰어올랐다. 오랫동안 잠수하고 있었던 듯한 물고기가 뛰어오르는 순간 눈부시게 환한 빛이 사방으로 쏘아졌다. 깜짝 놀라 한 걸음 물러나던 아소륵은 뒤로 벌러덩 자빠지면서 궁륭형 천장에 난 문양을 보게 됐다.
오래된 암석화들은 녹과 쪽물의 염료로 그려진 것이었다. 색이 얼룩덜룩해 알아보기가 어려웠다. 훼손된 그림에서 황소 한 마리를 가려내자 자연스럽게 거대한 그림이 눈앞에 펼쳐졌다. 뒤죽박죽으로 보이던 선들은 태곳적 혼돈기의 방대한 수렵도로 짜 맞춰졌다.
무리를 이룬 고상(古象)1)과 들소가 천장 곳곳에 있고, 몸집이 커다란 인간들이 모초와 짐승 가죽으로 하체를 가린 채 떼를 지어 동물들을 쫓았다. 등 뒤의 산비탈에서는 무당이 상징을 그린, 커다란 깃발을 높이 들고 열광적으로 춤추며 그들을 응원했다. 상반신을 드러낸 요염한 자태의 여인들이 춤을 추며 동물 뼈를 둥글게 에워쌌고 그 가운데에는 활활 타오르는 모닥불이 있었다. 절망한 동물들의 몸에는 화살과 창이 꽂혔고 새빨간 피가 길에 뚝뚝 흘렀다. 짙은 녹의 붉은빛에 태곳적부터 흘러내리고 있는 피비린내가 느껴졌다. 더는 버틸 수 없던 거대한 황소 한 마리가 바닥에 가로누웠다. 황소는 고통스러운 듯 몸을 실룩거렸다. 쫓아온 사람들은 돌도끼로 황소의 머리를 내리치려 했다.
사지로 엉금엉금 기듯 뒤로 물러난 아소륵은 종유석 바위에 바짝 기댔다. 청색 천장의 붉은 녹빛이 무서웠다. 선명한 것이 떨어져서 물과 섞이면 정말 새빨간 피로 변할 것 같았다.
사람의 기척은 전혀 없이 물이 똑똑 떨어지는 소리만 울렸다.
한참이 지나고 긴장이 풀리면서 피로감과 절망이 동시에 몰려왔다. 아소륵은 그곳에 누워 한참을 꿈쩍도 하지 않았다.
‘역시… 죽겠지?’
아소륵은 속으로 스스로에게 물었다. 다시는 이곳을 떠날 수 없을 것 같았다. 오래된 암석화, 아무도 없는 드넓은 동굴, 모든 것이 무서운 꿈 같았다. 아소륵은 힘껏 눈을 감았다가 떠보았다. 익숙한 장막과 소마의 맑은 눈을 볼 수 있으리라 상상하면서. 그러나 눈앞은 여전히 어둠이었고 물고기들이 내는 형광빛이 천장을 비출 뿐이었다. 알록달록한 별빛이 반짝이는 듯한 광경이었다.
한기가 몸으로 스며들었다. 잠들면 안 된다는 걸 알지만 점점…… 눈이 감기려 했다.
그때 갑자기 아주 작은 소리가 그를 깨웠다. 미약했지만 무척 또렷한 소리였다. ‘딸랑’ 하는 쟁쟁한 울림이었는데 단조로운 물소리뿐인 이곳에서 매우 선명하게 들렸다. 그러나 아소륵이 다시 귀를 기울였을 때는 물이 똑똑 떨어지는 소리가 약간 변형된 것처럼 들렸다.
어쩌면 물이 우묵하게 패인 돌 고랑에 떨어진 것일 수도 있다. 아소륵은 환청을 의심했다.
막막해져 고개를 돌린 아소륵은 순간 깜짝 놀라 소리를 질렀다. 거꾸로 걸린 사람 얼굴이 보였다. 혼탁한 두 눈이 아소륵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헝클어진 새하얀 머리칼 사이로 그 얼굴은 입을 벌리고 소리 없이 웃었다. 촘촘한 치아 두 줄은 아소륵의 목을 깨물려는 듯했다.
등 뒤로 두 손이 결박된 낙자언이 땅바닥으로 밀려 넘어졌다. 금장궁의 낙타털 양탄자는 두껍고 푹신했다. 목 뒤의 예리한 칼 때문에 낙자언은 양탄자에 얼굴을 바짝 붙인 채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그러나 동륙에서 온 이 청년은 전혀 굴복하는 기색이 없었다. 그는 눈을 굴려 한 바퀴 훑어보았다. 네 명의 왕자와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는 귀족들이 보였다. 왕자들은 심문을 듣기 위해 방금 풀려났다. 여수우는 속으로 안절부절못하며 불안한 눈빛으로 낙자언을 힐끗 보았다. 한데 이 대담한 화족은 입꼬리를 씩 올리며 웃는 게 아닌가.
“네놈들! 낙 선생에게 너무 무례하구나!”
대군의 목소리는 나지막했고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목덜미의 기운이 돌연 가벼워지자 낙자언은 더욱 침착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고개를 들었다. 대군이 양반다리를 하고 표범 가죽을 씌운 좌상에 앉아 있었고 한쪽에는 하얀 옷을 입은 대합살이 서 있었다.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대군은 흰 반흔으로 유명한 눈으로 낙자언을 쳐다보았다.
“일어나서 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좋소.”
대군이 웃으며 말했다.
“칼을 치우고 낙 선생의 결박을 풀어라.”
무사들이 장도를 거두고 낙자언의 손목에 묶인 가죽 밧줄을 잘라냈다. 낙자언은 저렸던 손목을 풀더니 대군에게 절을 했다. 뜻밖에 그는 조금 흥분됐다. 목숨을 내건 문인으로서 그는 위험한 상황에도 가장 귀한 기회는 존재한다는 것을 알았다.
대군이 좌상에서 몸을 살짝 숙여 인사했다.
“내 막내아들이 뜬금없이 실종되었소. 며칠간 찾아보았지만 아직 단서를 못 찾았지. 아버지로서 불안한 마음에 며칠이 지나서야 낙 선생 일이 생각났지 뭐요. 정말이지 너무 큰 실례를 했구려. 동륙 순국의 사절인 낙 선생께서는 내 이 거칠고 가증스러운 아들들을 부디 개의치 말아주길 바라오.”
낙자언이 공수를 올리며 말했다.
“아닙니다. 세자를 찾는 데 힘을 보태지 못해 제가 송구합니다.”
“고맙소. 근데 낙 선생은 순국 사절이면 우리 청양의 귀빈이 아니오. 어째서 금장궁으로 와 내가 성대하게 영접하도록 하지 않고 내 아들의 장막에 가 이런 오해를 산 거요? 정말 이해가 안 되는구려.”
대군의 목소리에는 한기가 묻어났다.
여수우가 앞으로 나섰다.
“부왕. 낙 선생은 공무가 아니라 개인적으로 방문한 것입니다.”
“아닙니다!”
낙자언이 여수우의 말을 끊었다.
“일개 화족이 천 리 길을 마다하지 않고 만족 도성에 왔습니다. 늑대 밥이 되거나 얼어 죽을지도 모르는 고생길도 두려워하지 않고 왔는데 장사로 돈을 번 것도 아니라면 자연히 크나큰 목적을 품은 것이겠지요. 벗을 방문하듯 단순한 일은 아닐 겁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죠. 소신은 순국 태위, 창명후 양추송의 차사로 북에 왔습니다!”
문인 낙자언에게서는 돌연 무사가 강림한 듯한 패기가 흘러나왔다. 당당한 체구의 그는 산처럼 우뚝 섰다. 대군이 미간을 치켰다.
“오? 낙 선생은 순국 사절이니 마땅히 나와 만나야 할 것을, 왕자와 교류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란 말이오?”
낙자언이 앞으로 한 걸음 나아갔다.
“순국이 청양과 동맹을 맺고자 한다면 대군께서는 받아들이시겠습니까?”
“낙 선생. 아직 내 물음에는 답하지 않았소만.”
“청양이 하당과 동맹을 맺을 것이라 들었습니다.”
낙자언은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갔다.
대군은 잠시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청양과 하당의 동맹은 양국의 일이오. 순국이 무슨 상관이지?”
“순국은 북륙과 천척협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있어 왕래하기에도 하당보다 훨씬 편리하지요. 순국의 필지항에서 제도의 천계성까지는 900리밖에 되지 않으며 제도는 완주의 10개 도시보다도 훨씬 번화합니다. 그러니 천척해협의 장삿길이 일단 열리면 그야말로 황금 수로가 아니겠습니까?”
낙자언이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대군께서 이리 가까운 곳을 두고 멀리 하당과 동맹을 맺으려 한다는 소문이 돌더군요. 창명후께서는 혹시라도 저희가 결례를 범해 대군이 노하신 것은 아닌가 하며 제게 북륙에 다녀오라 명하시었습니다. 그래서 1왕자께 중재를 해주십사 청을 드린 것이고요. 제가 다짜고짜 대군을 뵈려 했다면 아마 대군의 얼굴도 보지 못했겠지요. 안 그렇습니까?”
낙자언의 눈빛이 반짝였다. 그는 주위의 반응은 일절 개의치 않고 대군 한 사람만 주시했다.
대군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낙 선생은 좋은 뜻이었단 말이군. 청양이 황량한 땅의 작은 나라이기는 하지만 우리는 신의를 중시하오. 청양은 이미 하당과 진심으로 동맹을 맺을 생각이오. 순국은 한발 늦었소.”
낙자언은 잠시 깊게 생각하더니 다시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솔직하게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완주가 부유하기는 하지만 제철(製鐵) 기술은 우리 순국에 못 미치지요. 저희 풍호기병의 얇은 강철 갑옷 한 벌은 16근밖에 나가지 않습니다. 말 갑옷을 더해도 45근이지요. 극도의 견고함과 관통 저항성은 동륙 제일이니 북륙의 준마에 순국의 철갑옷을 더한다면 그 위력은 더욱 커질 겁니다. 대군께서 순국과의 동맹을 수락하시면 매년 풍호 철갑옷 1천 벌을 공물로 바치겠습니다. 어떠십니까?”
금장궁 안이 순간 조용해졌다. 대군이 웃으며 말을 꺼냈다.
“창명후와 선생의 호의는 마음만 받겠소. 우리 초원인은 결코 배신자가 될 수 없소. 안 그러면 어찌 천신의 비호를 받겠소?”
“대군…….”
낙자언이 무언가 더 말하려 했다.
“여봐라! 놀랐을 낙 선생을 위로할 술상을 마련해라!”
대군의 목소리가 낙자언을 압도했다.
“왕자들은 모두 여기서 손님을 모시도록 해라. 난 할 일이 있으니.”
대군은 낙자언에게 말할 기회도 주지 않고 그대로 일어나 대합살과 함께 금장궁을 나갔다.
낙자언은 대군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꽃다운 나이의 만족 소녀들이 독주와 구운 고기를 받쳐 들고 장막 안으로 들어왔다. 낙자언은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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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매머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