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주표묘록-37화 (37/3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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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청동의 피 (2)

“어디서 찾았지?”

“물가입니다.”

호리호리한 사내는 목소리가 떨리지 않도록 최대한 짧게 대답했다. 우두머리가 말하는 것을 처음 듣는 것도 아닌데 매번 바늘로 귀를 찌르는 것처럼 견디기 힘들었다. 일말의 감정도 없는 우두머리의 목소리에는 불길한 느낌이 묻어났다.

“약은 누가 썼지?”

“접니다.”

다른 무사 하나가 다가와 자그마한 백철 합배뚜리1)를 올렸다.

우두머리는 그것을 받아들고 코끝으로 가져가 뚜껑을 열었다. 가느다란 가루가 흩날리며 살짝 매운 내가 났고 순간 코끝이 감각을 잃은 듯했다. 초원에서 가장 우수한 마약이었다. 전쟁터에서 무사들은 그것을 몸에 발라 마취한 다음 단도로 직접 상처 가장자리의 썩은 살을 도려냈다. 아이가 이런 마약에 중독된다면 최소 3일은 깨어나지 못해야 정상이었다.

“마약에 중독되고도 깨어나다니. 정말 기적이군. 가렬적, 그 강은 어디로 이어지지?”

호리호리한 무사 가렬적이 고개를 저었다.

“아무도 모릅니다. 끝을 알 수도 없고요.”

무사들은 이미 전력을 다해 지하 하천을 탐색했지만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했다. 사방으로 연결된 하천은 갈라진 물줄기가 셀 수 없이 많았고 그보다 더 많은 물줄기가 지하의 깊은 샘으로 이어졌다. 바닥이 보이지 않는 샘은 면적이 크지는 않았다. 그러나 짙은 녹색 빛을 그윽하게 띠는 것이 깊이를 가늠할 수 없었고 물에 손을 대보니 살을 에듯 차가웠다.

유목민들은 동굴 속 샘을 경외하며 ‘귀천(鬼泉)’이라 불렀는데 전설에 따르면 그곳이 죽은 자들의 나라라고 했다. 죽은 이의 영혼이 그 물소리를 따라 무의식중에 앞으로 나아가다가 마침내 샘구멍으로 빠지게 된다는 것이다. 샘구멍은 까마득하게 깊었다.

물소리는 전날 그들이 도착했을 때보다 빨라졌다. 물이 흘러가며 동굴에 은근한 울림이 일었다. 우두머리는 그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가렬적은 손을 뻗어 똑똑 떨어지는 물을 받았다. 물은 맑지 않았고 약간의 진흙이 섞여 있었다. 가렬적이 우두머리에게 말했다.

“밖에 비가 많이 내립니다. 빗물이 스며들어 이곳의 강물도 금세 불어날 겁니다. 동굴도 강물에 휩쓸려 무너질지 모릅니다.”

가렬적은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그의 부친 말로는 20년 전에도 이렇게 큰비가 내린 적이 있다고 했다. 삭북부에서 북도성을 공격했을 때인데 비린내가 짙게 나는 피가 지하 반 척의 땅을 검붉게 물들였다. 밤에 시작된 비는 밤낮으로 쉬지 않고 내렸다. 마치 천신이 하늘의 호수를 뒤집어엎은 것 같았다. 이어 동굴의 물이 불어났다.

물은 평소처럼 맑지 않았고 옅은 비린내가 났으며 붉은빛을 띠었다. 하천의 맹어(盲魚)2)가 죽어 배를 뒤집은 채 수면 위로 떠올랐다. 눈꺼풀이 없는 물고기의 눈은 무시무시했다. 만족은 이런 맹어를 ‘현명(玄明)’이라고 불렀다. 신의 물고기로 눈이 없이 태어났지만 천지의 오묘함을 꿰뚫어 보았다. 북도성에는 동굴에서 잡아 온 현명을 모아두고 기르는 저수지가 있었고 그들의 투명한 뼈는 점을 치는 데 사용했다.

청양인들은 반달천신이 인간에게 죄를 묻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당시 대군은 사자를 시켜 황금 접시에 죽은 현명을 받쳐 들고 가서 삭북부와 화해하려 했다. 이런 상서롭지 못한 신탁(神託)이 두려웠던 것인지 삭북부 누씨는 마침내 자신의 깃발을 청양에 바쳤고 폭우는 그제야 멈췄다.

“너희 만족은 이를 불길한 일이라 여긴다지?”

“네.”

“아니. 이건 좋은 일이다. 아주 좋은 일.”

“좋은 일이라고요?”

“큰비가 내리면 모든 흔적이 지워질 테니까. 동굴 안에 살아 있는 사람까지 포함해서 말이지. 청양의 세자가 이대로 죽었는데 누구도 어떻게 죽었는지 모른다면 아주 좋지 않겠느냐?”

“하지만 주인님께서는 세자를 죽이지 말라고 하셨는데요. 주인님 뜻은…….”

가렬적은 조금 초조해졌다. 우두머리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너희 주인이 뭐라 생각하든 지금 세자는 마약에 중독되어 달아났고 도중에 물에 빠졌다. 곧 물에 동굴이 휩쓸려 무너질 테니 어찌해도 살아날 수 없지. 무슨 방법이 있겠느냐? 더구나 너희 주인은 마음이 너무 약해. 우리는 세자를 납치했다. 이제 와 살려둬봤자 아무 소용이 없어. 우리가 정말 그를 내놓고 빌면 대군이 용서해줄 것 같으냐? 여기 있는 모두가 이미 죽을죄를 지었다. 세자를 죽이든 살리든 결과는 똑같아.”

그는 무사들을 하나하나 쳐다보았다. 주위는 다시 물살이 우렁차게 울리는 소리로 가득 찼다.

“지금부터 주위를 살펴 모든 흔적을 지워라. 그런 다음 각자 장막으로 돌아가. 어떤 정보도 새어 나가서는 안 된다.”

무사들은 어찌해야 할지 몰라 멀뚱히 서로를 쳐다보았다.

우두머리가 빙긋 웃었다.

“이해가 안 되느냐? 돌아서서 내가 하는 걸 봐라.”

가렬적이 돌아섰다. 바로 그 순간 끔찍한 소리가 들렸다. 벌들이 윙윙 날개 치는 소리 같았지만 바늘이 귀를 찌르는 것처럼 천배는 더 날카로웠다. 눈앞에 새빨간 무엇이 솟구쳤다. 피였다.

가렬적은 자신의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뜬금없이 안개 같은 피가 동료의 목덜미에서 뿜어져 나와 그가 들고 있던 횃불에 튀며 지지직 소리가 났다. 동료는 돌아서며 바닥에 쓰러졌는데 죽는 순간까지도 믿기지 않는 듯한 눈빛이었다.

“적이다!”

가렬적은 만족 무사 중에서도 보기 드문 명수였다. 적이란 생각이 뇌리를 스치자마자 그는 몸을 낮추고 칼을 뽑았다.

모두가 약속이나 한 듯 횃불을 내던졌다. 동굴 안은 칠흑같이 어두워졌다. 무사들은 빠른 속도로 모여 서로 등을 맞댄 채 칼끝을 밖으로 두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헛수고였다. 윙윙대는 소리가 곳곳에서 울려 애초에 적의 위치를 파악할 수 없었다. 허리 양쪽으로 따뜻하고 축축한 느낌이 전해졌다. 가렬적은 곁의 동료 두 명이 봉변을 당했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그렇게 세 사람이 죽었다. 이제 우두머리를 포함해 셋만 남았다. 가렬적은 우두머리의 위치를 가늠할 수 없었다. 일반 무사와 비교하면 그들은 횃불 없이도 어둠 속에서 사람을 죽일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희미한 달빛이나 별빛에 의지해서였다. 지금 이곳은 빛 한 줄기 없는 암흑이었다.

무시무시한 윙윙거림이 가렬적의 정면에서 들려왔다! 소리의 궤적을 도무지 파악할 수 없었다. 가렬적은 자기 시체 냄새라도 맡은 듯 포효하며 냅다 칼을 휘둘렀다. 그가 크게 소리를 지른 이유는 등 뒤의 동료에게 알려주려는 의도였다. 가적렬의 칼과 적의 무기가 맞부딪쳤다. 자신이 죽든 살든 일단은 등 뒤의 동료가 몸을 돌려 칼을 휘두를 기회가 생겼다. 윙윙거림이 목덜미에 닿는 순간, 가렬적은 넋을 잃고 말았다. 그것은 마치 그림자 같았다. 베어진 칼날에 한 덩어리의 신기루처럼 변해버렸다. 가렬적은 눈을 감았다. 더욱 진해진 시신 냄새가 철저하게 그를 뒤덮었다.

철퍼덕 소리가 나고 사위는 다시금 고요해졌다. 이어 끄으윽 낮은 신음이 들렸다. 가렬적은 뒷덜미에서 따뜻하고 눅눅한 느낌이 들었다. 액체가 주르륵 아래로 흘렀다. 가렬적은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그는 눈앞의 칼에 베이지 않았다. 칼에 맞은 것은 뒤편의 동료였다. 그러나 그 칼에 동반된 끔찍한 느낌이 그의 목뼈를 끊어버린 것 같아서 온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칼을 여전히 손에 쥐고 있었지만 들어 올릴 힘이 나지 않았다. 다섯 살부터 칼을 연마한 그의 자존심은 지금 이 순간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찰나의 적막이었지만 영원처럼 느껴졌다. 어둠 속에서 불똥이 번쩍하더니 불꽃이 피어올라 횃불 한 대에 붙었다. 가렬적은 시신 네 구의 한가운데 서 있었다. 간이 콩알만 해진 그는 자기 앞에 조용히 서 있는 우두머리를 쳐다보았다. 괴이한 호선 모양의 가늘고 부드러운 칼이 자신의 목 옆을 스쳐 지나가 뒤에 있던 동료의 목을 그대로 찔렀던 것이다. 등 뒤의 동료가 그의 경고를 듣고 돌아서서 군도를 높이 들었으나 미처 내리치기도 전에 죽어버렸으리라.

“저들을 정리해서 강에 던져버려라. 물에 쓸려 내려가겠지?”

우두머리가 우묵하게 들어간 눈으로 가렬적을 빤히 쳐다보았다.

“왜죠…. 이유가 뭡니까?”

우두머리가 말라비틀어진 손가락 두 개를 가렬적의 얼굴 옆으로 가져갔다. 그러고는 천천히 검은 복면을 끌어당겨 그의 얼굴을 가렸다.

“그날 밤 저들은 얼굴이 노출됐거든.”

우두머리의 목소리에는 아무런 감정도 실려 있지 않았다.

“나와 함께하려면 항상 얼굴을 가려야 하는데 너희 만족은 내내 그걸 이해하지 못하더군. 너희 주인은 너희가 최고의 자객이 되기를 바란다. 그런데 최고의 자객이 뭔지 너희들은 모른다. 자객은 무사가 아니야. 능숙하게 사람을 죽일 필요는 없어. 그저 적당한 때 단칼에 목표한 가슴을 찌를 수 있으면 되지. 이 길을 선택한 순간부터 너희는 빛을 볼 수 없다.”

우두머리가 마치 여인의 피부를 만지듯 칼에 묻은 피를 닦았다.

“천라산당 역사상 ‘두더지와 족제비’를 별칭으로 쓴 자객은 하나가 아니었다. 우리가 이 동물들과 닮았기 때문이지. 어둠 속에서만 살 수 있고 빛을 보면 죽음뿐이다. 내 스승께서도 나를 가르치던 첫날에 이런 얘기들을 해주셨다. 그분은 평생 세 번의 성공을 거뒀고 네 번째에 죽음을 맞았다. 세 번째 작전에서 정보를 알아내기 위해 제나라 태위부 소속 ‘영사’ 앞에서 딱 한 번 얼굴을 드러냈기 때문이지. 그때 내 스승은 의원 차림을 했다. 그런데 딱 한 번에 그는 얼굴이 기억되고 말았지.”

우두머리가 피에 물든 흰 비단을 던지며 말을 이었다.

“그럼 이만하자. 이들의 시체는 강물에 던져 버려라.”

“네… 네!”

가렬적은 자기 목소리가 사람의 목소리 같지 않게 느껴졌다.

“주인에게는 뭐라 말해야 할지 알고 있겠지? 세자는 이미 죽었고 이 소식을 아는 사람은 모두 입막음을 했다. 나는 말하지 않을 것이다. 천라의 살수(殺手)는 고용한 이에 대한 정보는 흘리지 않으니까. 소식이 새어 나간다면 그건 너뿐이다. 그럼 어떻게 될지도 알겠지.”

우두머리는 가렬적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가렬적은 흐물흐물 주저앉았다. 그는 불현듯 시체 냄새가 어디에서 났던 것인지 깨달았다. 우두머리가 그의 어깨를 두드렸을 때 그 냄새는 정말 끔찍하리만치 진했다.

“허허, 허허허허.”

물살의 울림 속에서 우두머리가 거세게 흘러가는 지하 강물을 보며 두 팔을 벌리고 웃었다. 음흉하고도 오만한 웃음소리였다.

“불길한 징조라…. 북도의 혼란은 이미 시작됐다. 어떤 결과가 나올지 궁금해 죽겠군!”

* * *

1) 덮개가 딸린 작은 바탱이. 배 부분이 불룩하고 높이가 낮으며 아가리가 좁다.

2) 학명 Astyanax fasciatus mexicanus. 블라인드 케이브 카라신이라 불리는 물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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