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2장. 세자 (14)
군도 아래 쓰러진 이가 한둘이 아니었다. 여복은 얼굴의 핏자국을 닦았다. 활을 쥔 손이 미미하게 떨렸다. 수적으로는 그들이 우위에 있었지만 흉포함과 민첩함에서는 경기병이 우세했다. 여복 쪽은 완전히 무너졌다. 뒤편은 여수우의 장막으로 퇴로가 넓지 않았다. 살인에 눈이 시뻘게진 여하가 바짝 쫓아왔다. 후퇴하기에도 늦어버렸다.
“너!”
여복이 옆의 가노를 잡아당기며 말했다.
“가라! 9왕께 빨리 호표기를 이끌고 오시라고 서찰을 보내! 빨리 오지 않으면 1왕자를 못 보게 될지도 모른다고 해라!”
가노가 대답하고 막 말을 몰아 후퇴하려는 찰나, 여복이 그를 붙잡았다.
“잠깐!”
여복이 사람들의 머리 너머로 서쪽을 쳐다보았다.
가노가 여복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그제야 어둠 속에서 어렴풋하게 무언가 들썩이는 것이 보였다. 귀 기울여 자세히 들어본 가노가 기뻐하며 말했다.
“9왕께서 벌써 소식을 듣고 달려오신 걸까요?”
어둠 속에서 큰 부대의 기병이 질주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순간 선두의 횃불 몇 개가 눈에 들어왔고 이어 검은 갑옷의 기마병이 어둠을 뚫고 나왔다. 북도성의 기마병은 대풍 장막의 목해양 한 부대, 9왕의 호표기 한 부대뿐이었는데, 대풍 장막은 청회색 갑옷을 입었고 호표기의 정예병만 검은 무쇠 갑옷을 입었다. 여복이 크게 기뻐하며 외쳤다.
“정말 호표기구나! 살았다! 살았어!”
가까워져오는 호표기와 함께 바람이 덮쳐왔다. 흡사 칼날이 얼굴을 긋는 듯했다. 검은 갑옷을 입은 기마병은 수천 명에 달했다. 역시 청양부 최고의 무시무시한 병사답게 그들은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다. 귀에는 온통 말발굽이 지면을 두드려 나는 거대한 울림뿐이었다. 여응양은 심장이 철렁했다. 그는 군마를 돌려 소부대를 이끌고 맞이하러 나갔다. 여하는 여전히 기병 대부분을 이끌고 강공을 펼쳤다. 여복이 고함을 질렀다.
“화살을 쏴라! 화살을 쏴! 9왕에게 우리가 여기 있다고 알려라!”
세 대의 화살이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맞은편의 기병들도 이를 본 듯, 더욱 기세가 맹렬하게 밀려왔다. 선봉대가 한데 모여 돌격 진형을 구축했다.
“정말 9왕이냐?”
진 앞에서 물러나온 여수우가 급히 숨을 몰아쉬며 물었다.
“그럼 또 누가 있겠어요?”
여복이 전방을 가리켰다. 멀리 여응양이 데려온 작은 기병부대는 멈춰 서서 말할 새도 없었다. 호표기 부대는 그대로 경기병들을 집어삼킨 채 밀고 내려왔다. 여수우가 소리쳤다.
“우리가 반격할 차례다! 아직 죽음이 두렵지 않은 이들이 남아 있느냐? 그럼 나를 따라라! 모조리 잡아들여라, 한 놈도 놓쳐서는 안 된다!”
사기가 끓어오른 가노들이 포효하며 돌격했다. 양쪽 진영에서 수십 명의 작은 부대가 뚫고 나오더니 수적 우세를 이용해 적을 반달 모양으로 포위했다. 눈 깜짝할 새, 가까이 다가온 지원병은 종횡무진 돌진하며 여하가 인솔하는 경기병 부대를 뚫고 들어갔다. 여수우도 작은 무리의 가노를 이끌고 정면으로 돌진해나갔다. 호표기는 일반 무사와는 절대 비교할 수 없었다. 여수우는 이 강병의 실력을 직접 목격했다. 중기병(重騎兵)들은 애초에 횃불 따위에 의지하지 않고 어둠 속에서 빠른 속도로 스치며 민첩하고 힘 있게 칼자루로 경기병의 투구를 가격하거나 칼등으로 말 다리를 쳤다. 그 잠깐 사이, 용맹하던 경기병들은 무참히 패했다.
무사 한 명이 여수우 가까이 달려왔다. 까맣고 묵직한 갑옷 차림에 얼굴에는 쇠고리를 엮어 만든 철가면 막을 덮어쓰고 있었는데 우두머리 같았다. 여수우가 칼을 거두고 물었다.
“잘했다! 이름이 무어냐?”
여수우는 아무런 대답도 들을 수 없었다. 검은 갑옷의 무사는 말을 세울 의사가 추호도 없어 보였다. 그가 손아귀의 묵직한 검을 들어 올렸다. 여수우의 심복 하나는 미처 피하지 못하고 상대의 검 측면에 투구를 맞았다. 투구가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갔고 심복은 입에서 새빨간 피를 토하며 말 등에서 고꾸라졌다. 여복이 소리쳤다.
“미쳤느냐! 1왕자시다!”
상대는 듣지도 않고 군마를 몰아 여수우를 향해 돌진해 왔다. 그의 등 뒤로, 경기병을 섬멸한 더 많은 수의 중기병이 이제는 여수우의 가노들에게로 방향을 틀었다. 삽시간에 여수우 쪽에서도 끔찍한 중압감을 마주하게 되었다.
여수우는 더 생각할 겨를 없이 직접 중기병 우두머리를 베려 칼을 휘둘렀다. 여수우의 검술도 강했지만 상대도 손색이 없었다. 매 일격 극도로 사납고 포악한 힘이 실렸다. 그는 칼날이 아닌 칼 몸의 힘으로 내리쳤고 여수우는 하마터면 칼을 놓칠 뻔했다.
그와 거의 동시에 마지막 남은 경기병들과 사투를 벌이던 여하도 눈앞에 나타난 민첩하고 용맹한 무사 때문에 겁에 질려 얼어붙었다. 그는 주위 모두를 물리고 홀로 여하의 앞을 막아섰다. 체구가 건장하지는 않았지만 온몸에서 표범 같은 민첩함이 풍기는 무사였다. 그는 횃불도 들지 않고 여하의 진로를 막았다.
“9왕인가?”
여하는 이미 생사 따위 개의치 않았다. 그는 얼굴에 묻은 피를 세게 닦아내며 소리쳤다.
“죽어라!”
여하가 포효하며 말을 타고 달려가 칼을 휘둘렀다.
상대도 동시에 말을 몰아 돌진해왔다. 두 말이 교차하는 순간, 여하가 고함을 내지르면서 말의 추진력을 받아 몸 절반을 비틀더니 인정사정없이 ‘전랑봉’을 시전했다. 어둠 속에서 ‘탁’ 소리가 났다. 여하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그저 손이 가벼워졌고 목이 살짝 시리다는 느낌만 들었다. 상대는 이미 스쳐 지나가 조용히 여하의 뒤에 서 있었다. 여하는 부들부들 떨면서 칼을 들었다. 낭봉도는 반 토막이 났고 여하는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상대는 여하의 뒤에 말을 세우고 장도를 비스듬히 여하의 목덜미에 걸쳤다.
“목… 목려 장군!”
여하가 말안장에서 굴러 내려와 땅에 무릎을 꿇었다.
초원에서 여하의 낭봉도를 부러뜨릴 수 있는 사람은 하나뿐이었다. 여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방금 낭봉도와 낭봉도가 맞부딪친 것이었고 둘 다 온 힘을 다해 칼을 휘둘렀다. 힘이 더 약하고 검술이 더 부족한 여하의 칼이 부러지게 돼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은 그의 스승뿐이었다.
목려는 조용히 군마 위에 앉아 있었다. 허리춤의 낭봉도는 말 옆에서 한 줄기 서늘한 빛을 띠었다.
전장의 소리들이 점점 사그라졌다. 방금 여하가 전투를 펼쳤던 전장도 삽시간에 고요해졌다. 불안해진 여수우는 그곳을 벗어나고 싶었다. 두려움 속에 여수우는 급히 칼을 비끼며 칼날을 들어 올렸다. 상대의 검을 어깨로 받아내면서 단칼에 상대를 비스듬히 찌르려 했다. 음흉한 검법이 성공하려는 찰나 옆에서 누군가가 맹렬하게 달려와 어깨로 여수우를 밀치며 함께 말 아래로 떨어졌다. 여수우가 버둥거리며 일어났다. 달려든 사람은 뜻밖에도 아우인 여복이었다. 여수우가 호통쳤다.
“너도 날 배신하는 것이냐!”
여복이 부들부들 떨며 상대 기병을 가리켰다.
“그게 아니라…. 저 사람은…….”
주위의 철기병들이 횃불을 높이 들고 그자의 곁을 빼곡히 에워쌌다. 상대 장수는 검을 말안장에 가로놓고 천천히 가는 쇠고리를 엮어 만든 철가면을 걷었다. 그의 눈은 얼음장처럼 차가웠고 눈동자의 흰 반흔에는 사람을 지레 겁먹게 하는 포악함과 으스스함이 서려 있었다. 그자의 얼굴을 본 순간 사위는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 모두 얼어붙은 듯했다.
“아… 아버지!”
여수우가 손에 든 장도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뒤에서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기마병 둘이 대군의 곁을 에워싸더니 말 등에서 각각 한 사람씩 내던졌다. 9왕이 내던진 이는 여응양이었고 목려가 내던진 이는 여하였다. 왕자들 모두 그곳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타닥타닥, 횃불이 계속 타올랐다.
“모조리 죽여버리고 싶구나!”
대군이 이를 악물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대군의 목소리에서는 가슴이 미어지는 듯한 증오가 느껴졌다. 목려는 살짝 말을 몰아 앞으로 한 걸음 나아갔다. 혹시 대군이 욱하는 마음에 왕자들을 베어 죽일까 봐 염려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군은 더 말을 꺼내지 않고 그저 조각상처럼 하늘만 바라보았다. 대군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하지만 내가 너희를 죽일 수 있겠느냐? 너희 아우가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는데 너희까지 죽였다가는 난 아들이 다 없어질 테지…. 끌고 가라!”
대군이 손을 휙 흔들었다.
“아버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여응양이 호표기에 붙들린 채 큰 소리로 외쳤다.
“무슨 말을 하려고? 무슨 할 말이 더 남았느냐?”
“저희는 큰형님을 그냥 의심한 게 아닙니다. 형님이 동륙의 밀사를 장막에 숨겨 두었다는 정보를 척후병에게 보고받았습니다! 아소륵이 갑자기 사라진 것이 외부인의 소행일 수도 있잖습니까? 아버지께서 큰형님의 장막을 수색해 보시면 알게 될 겁니다!”
대군이 고개를 숙여 여응양을 쳐다보았다.
“그래? 그래서 네가 깊은 밤 병사를 이끌고 형의 장막을 쳤다?”
“네!”
대군이 잠시 침묵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비막간의 장막을 샅샅이 뒤져보지. 정말 누군가가 있다면 내 비막간에게 죄를 물을 것이다. 그러나 의심할만한 자가 없다면 네놈을 북도성에서 쫓아낼 것이니 영원히 돌아올 생각 말아라! 욱달한, 그럴 배짱이 있느냐?”
“기꺼이 벌 받겠습니다!”
여응양이 소리쳤고 여복은 얼굴이 창백해졌다.
대군이 손을 흔들었다.
“목려. 이곳의 모든 장막과 그 주변의 땅을 샅샅이 뒤져라!”
호표기가 마을 대문을 뚫고 여수우의 장막으로 돌진했다. 수많은 횃불이 초원을 비췄다. 불빛이 어지럽게 흩어지며 인영이 쉴 새 없이 이리저리 오갔다. 여인들은 엉엉 울며 재빨리 피했고 그러다가 누군가는 화로를 밟아 뒤집히기도 했다.
멀리서 바라보던 여수우는 9왕의 대군(大軍)과 진안부를 습격했을 때가 떠올랐다. 그때도 이렇게 여자와 어린애들이 있는 장막에 들이닥쳐 사람을 죽였다. 세상이 삽시간에 뒤죽박죽 어지러워졌다. 발칵 뒤집힌 세상은 흡사 지옥 같았다.
여수우 옆의 여응양도 뒤를 돌아보았다. 그의 입꼬리에는 한 줄기 냉소가 걸려 있었다.
대군이 나직하게 말했다.
“욱달한이 정말 자신 있는 모양이로군?”
“제가 배치한 척후병이 틀릴 리 없습니다!”
대군은 갑자기 웃기 시작했다. 모두가 어안이 벙벙해져 그를 쳐다보았다.
“욱달한. 내 아들아. 너는 참 똑똑하구나. 매우 똑똑해. 하지만 너는 이 아비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전혀 모르는구나. 네 형이 화족을 숨겨 두었으면 어떻고 아니면 어떻겠느냐? 정녕 지금 이 순간에도 너는 기어이 네 친형제를 해코지해야겠더냐?”
여응양은 순간 넋을 잃었다. 머릿속이 하얘진 그는 어수선한 인영 속에서 바위처럼 멀리 내다보고 있는 부친을 쳐다보았다. 희끗희끗한 머리카락이 철갑 투구 틈으로 흘러나와 어지러운 바람 속에 나부꼈다. 남다른 적막함과 황량함이 풍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