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주표묘록-34화 (34/360)

34화

2장. 세자 (13)

맞은편 진형(陣形)에 틈이 생기더니 여수우가 칼을 들고 나왔다. 그가 설망의 등에 뛰어오르자, 몇몇 민첩하고 용맹한 가노들이 가죽 방패를 손에 들고 그의 좌우를 에워쌌으며 나머지는 완전 무장을 하고 횃불을 높이 들어 올린 채 불안해 날뛰는 군마를 단속했다.

“욱달한. 그 고운 주둥이로 이 형을 모함하려는 게냐?”

여수우가 멀리 용아기 아래의 여응양을 가리켰다.

칼끝이 마주한 것처럼 양쪽 진영은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여수우 휘하의 심복과 가노들은 300~400명뿐이었다. 여응양이 데려온 것은 그가 직접 훈련시킨 경기병(輕騎兵)1) 부대, ‘용아경제’였다. 본래 100여 명의 경기병쯤은 여수우에게 큰 위협이 아니어서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처럼 특수한 상황에서 잘 훈련된 경기병이 기회를 틈타 움직인다면 가노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터였다.

“형님은 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여응양의 목소리는 감정의 기복 없이 싸늘했다.

“아소륵이 실종되었고 북도성의 모두에게 혐의가 있습니다. 제 장막은 9왕이 이미 병사를 데리고 수색했습니다. 저는 북도성의 안위를 책임져야 하는 왕자로서 형님 장막을 살피러 온 것뿐입니다. 한데 기병들이 막는 것을 보니 알려지면 안 될 일이라도 있나 봅니다?”

“욱달한. 나를 욕보이고 싶으냐? 수색해도 좋다! 9왕이 와도 좋고 목해양이 와도 좋다. 하지만 너희 형제는 안 된다!”

“형님이 벌인 일이 아니라면 수색하지 못하게 막을 이유가 있습니까? 못 찾으면 기껏해야 제가 아버지 앞에서 사죄나 드리겠지요. 형님께서 제 장막을 수색하고 싶으시다면 저는 마음껏 찾아보시라 문을 열어드릴 겁니다. 혹시 뭐 옮길 것이라도 있어서 이렇게 막으시는지요?

“수색은 두렵지 않다. 그러나 삭북 핏줄의 비열한 잡종이 수색하는 것은 안 된다!”

여수우가 격노했다.

“천한 노예도 내 장막을 수색할 수 있지만 욱달한 너는 이번 생에 내 구역에 발 들일 생각일랑 접어라!”

“형님이 그리 저를 무시하셨으니.”

나직하게 말하던 여응양이 갑자기 말안장 위의 날카로운 양날 검을 집어 들었다.

“형님 체면 따위 아랑곳하지 않는 아우라 탓하지 마십시오!”

그가 갑자기 검을 들어 올리며 크게 소리쳤다.

“돌격! 모두 잡아라! 반항하는 자는 죽여라!”

여하는 순간 아연해졌다. 살기등등하게 왔지만 여수우의 장막을 수색하려던 것뿐이었기에 진짜 충돌이 일어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돌격’이라는 명령에 용아경제 기병들도 넋이 나갔다.

“돌격!”

여응양은 낯빛 하나 변하지 않은 채 검을 높이 쳐들었다. 그가 먼저 돌격해 갔다. 여하는 이를 악물고 가슴속 망설임을 억눌렀다. 그리고 급히 허리의 칼을 뽑아 들고 큰 소리로 외쳤다.

“돌격!”

경기병들도 일제히 칼을 뽑아 들었다. 준마가 길게 울부짖으며 봇물 터지듯 달려 나갔다.

“우린… 어떡합니까?”

여복의 안색이 변했다.

여수우가 얼굴을 살짝 일그러뜨리더니 군도를 뽑아 들었다.

“잡종 새끼! 애초에 우릴 죽일 작정이었지? 기회를 잡으니 참지 못하는군. 풀밭의 뱀이라고 내가 우습게 봤구나!”

여수우는 군도를 높이 들고 소리쳤다.

“쳐라! 짓밟히면서 가만히 있을 순 없지!”

무사들은 용맹한 혈기가 끓어올랐다. 뜬금없이 공격당한 치욕에 가노들도 격하게 분노했다. 이미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랐고 군도를 쥔 손도 절절 끓었다.

“죽여라!”

모두가 칼을 들고 우렁차게 외쳤다.

장막 안에 몸을 숨기고 있던 낙자언은 휘장을 살짝 젖혀 보았다. 멀리서 두 무리의 횃불이 휘둘러졌다. 수백 점의 불빛이 밤하늘 아래 유난히 눈부셨다. 돌격을 외치는 목소리가 세차게 밀려왔다. 쌩하고 우전이 날아가는 날카로운 소리, 구슬픈 신음, 군마의 울부짖음도 들렸다. 두 무리의 횃불이 한데 모여들었다. 황량하던 검은 대지 위로 온몸이 번쩍이는 거대한 짐승이 덩실덩실 춤추는 것 같았다. 참혹한 전투의 현장이지만 멀리서 보기에는 남달리 아름다웠다.

“난세(亂世)로구나!”

휘장을 내리고 나직하게 탄식을 뱉은 그는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술 단지를 입으로 가져갔다.

장도가 매섭게 한 사람의 얼굴을 향해 베어져 나갔다. 칼을 뽑자 선홍색 피가 그대로 뿜어져 나오며 여하의 몸에 튀었다. 말등자에서 발을 뺀 그는 시체를 걷어차 말 등에서 떨어뜨렸다.

여하가 포효했다. 그는 얼굴에 피 칠갑을 하고서 군도를 든 채 사방을 돌아보며 다음 적을 찾았다. 눈앞에서 수백 명이 난투를 벌였다. 시야가 닿는 곳마다 칼을 휘두르는 가노와 경기병들이 아니면 군마가 콧김을 내뿜으며 뒤엉켜 있었다. 건조하고 추운 밤, 이상하게 후덥지근해지는 광경이었다. 그 사이로 짙은 피비린내가 섞여 있었다.

뒤쪽에서 말발굽 소리가 빠른 속도로 다가왔다. 여하는 칼을 왼손으로 돌려 잡고 몸을 뒤집으며 비스듬하게 찔렀다. 여하의 스승은 목려였다. 그는 전쟁터에서 얻은 괴이한 살해 방법들을 축적한 검술을 구사했다. 목려는 여수우를 지지하지만 검술에 관한 한 여하에게 숨기는 것은 없었다. 지금 여하가 구사하는 ‘배극(背棘)’도 목려가 전장에서 한 번도 패해본 적 없는 기술이었다.

여하는 손에 갑작스럽게 느껴진 진동에 흠칫 놀랐다. 놀랍게도 그의 칼이 가로막혔다. 금속이 부딪치며 긁히는 소리가 귀를 찔렀다. 상대의 칼이 자신의 칼날을 타고 역행하고 있었다.

“죽어버려!”

여하가 진노했다.

그는 힘으로 상대를 제쳤다. 장도가 세게 진동하며 상대의 칼 힘을 떨쳐냈다. 군마는 채 몸을 돌리지 못했지만 여하는 허리를 틀며 말 등에서 꿋꿋하게 몸을 뒤집었고 회전하는 허릿심으로 칼을 휘둘렀다. 목려의 검술 중에서 가장 용맹무쌍한 ‘전랑봉(轉狼鋒)’이었다. 칼을 쓰는 사람이 목을 빙 돌리며 이 기술을 쓸 때는 군마의 추진력을 빌리지 않고도 칼에 무시무시한 힘을 실을 수 있었다.

장도가 스산한 소리를 내며 스쳐 지나갔다. 각도와 속도가 상대의 예상을 완전히 빗나갔다. 상대는 황급히 칼로 막을 뿐이었다. 두 칼이 맞부딪쳤다. 일반 금속이 부딪치는 거대한 울림과 달리 낮은 ‘슥’ 소리만 들렸다. 상대의 칼이 두 동강이 났다.

한쪽으로 번쩍 스치는 불빛에 여하는 자신을 습격한 자가 여수우라는 사실을 알았다. 살육의 쾌감이 가슴속에서 솟구쳤다. 여하는 칼을 거두지 않고 다시 힘을 주었다. 장도가 휙 소리를 내며 여수우의 목덜미를 향해 떨어졌다.

빠른 말 하나가 측면에서 달려왔다. 반찰렬이 흑철 장도를 아래에서 위로 비스듬하게 휘두르며 여하의 칼을 받았다. 칼을 옆으로 틀어 상대의 칼날을 타고 미끄러져 내려간 여하는 평평하게 칼을 그었다. 위기일발의 순간, 여수우는 얼른 말 등으로 몸을 숙였고 그의 머리카락만 몇 가닥 끊어졌다. 칼날이 일으킨 바람 소리는 흡사 귀신의 곡소리 같았다. 그의 다리 아래 설망이 갑자기 버둥거리더니 앞발을 높이 들어 올렸다가 비스듬하게 쓰러졌다. 어지러운 불빛 속에서 말 목의 핏줄이 여하의 단칼에 끊어졌고 피가 솟구쳐 오르며 여수우의 머리와 얼굴에 튀었다. 여하는 미친 듯이 웃었다.

“형님의 그 잘난 말, 내가 죽였는데 이제 뭐로 나와 겨룰 겁니까?”

“잡종 새끼! 내 오늘 너희들을 절대 용서치 않겠다!”

여수우의 두 눈에 핏빛이 서렸다. 그가 난폭하게 으르렁거렸다.

“목숨이나 부지하고 말하시지!”

극서의 명마가 내뿜는 피에 여수우의 가슴이 뜨겁게 끓었다. 아버지가 하사하신 명마가 여하의 손에 죽었다. 가슴에 수문이 터진 듯 더는 거리낄 것이 없었다. 그는 말고삐를 놓고 앞으로 한 걸음 나갔다.

“1왕자!”

반찰렬은 여하의 이상한 표정을 알아차렸다.

‘낭봉도’가 낮은 소리를 내며 다시 한번 내리꽂혔다. 여하는 온 힘을 다 쏟았다. 반찰렬이 장도로 가로막았다. 칼날이 부딪치며 어마어마한 힘이 솟아 나왔다. 장도가 떨리며 손아귀를 벗어났다. 우전이 쌩 날아오는 소리가 여하의 뒤에서 울렸다. 그는 어깨에 극심한 통증이 느껴졌다. 화살이 기골을 뚫고 들어갔다.

여복이 수십 보 밖에서 화살을 쏘며 큰 소리로 외쳤다.

“형님. 빨리 피하세요!”

미치광이와도 같은 칼의 기세에 여수우는 온몸이 뻣뻣하게 굳어 꿈쩍도 할 수 없었다. 여하의 표정은 점점 더 흉악해졌다. 그는 화살을 뽑지도 않고 이를 악물었다. 마귀 같은 웃음소리가 그의 목구멍에서 흘러나왔다. 칼을 거둬들인 여하는 다시 한번 힘을 모아 내리쳤다. 반찰렬은 물불을 가리지 않고 달려들어 팔로 칼날을 가로막았다.

여응양은 검을 가노의 명치에서 뽑아낸 뒤 고개를 들었다. 전방의 불길 속, 여하의 칼 빛이 떨어져 내렸고 반찰렬의 팔은 가로로 날아갔다. 공중에서 피를 흩뿌리며 날아간 팔은 어지러운 말들 사이로 떨어져 짓밟혔다. 여수우의 가노들이 달려들어 두 사람을 데리고 후퇴했다. 여하는 어깨에 화살을 꽂은 채 흉포하게 칼을 휘두르며 경기병들을 이끌고 쫓아갔다.

여응양은 짙은 피비린내를 들이마셨다. 어두컴컴한 눈은 밤과 같은 빛을 띠었다. 사람들이 피투성이가 되어 격투를 벌이는 전쟁터에서 그는 힘을 축적하는 표범처럼 고요했다.

“3왕자!”

경기병 하나가 온 얼굴에 피를 뒤집어쓴 채 달려왔다.

“더는 죽이면 안 됩니다. 이러다가 왕자들께서 다쳐 대군께서 죄를 물으면 처벌을 피할 수 없습니다.”

여응양은 고개를 돌려 싸늘하게 그를 쳐다보았다.

경기병은 일말의 감정도 없는 여응양의 눈빛에 얼어붙었다. 여응양은 검을 높이 들어 올렸다. 피가 묻어 있는 은빛 검의 표면이 선득하게 빛났다.

“공격해라! 반항하는 자 모두 죽여라!”

여응양이 자신의 호위 무사들에게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파소이 가문에 태어나 돌이킬 수 있겠는가?’

여응양은 속으로 혼잣말을 했다.

* * *

1) 민첩하게 활동할 수 있도록 가볍게 무장한 기병으로 정찰, 소전투, 습격, 연락 등에 특화된 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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