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2장. 세자 (12)
낙자언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합살이 남으로 내려가고 북으로 올라오려면 천척협을 건너야 하지요. 천척협은 순국이 관리하는 바다인데 척후의 이목을 어찌 피할 수 있겠습니까? 1년 전, 대합살이 바다 건너 남쪽으로 갈 때 벌써 후작께서는 소식을 접하셨지만 무슨 일인지 몰라 조용히 보내주었지요. 이번에 대합살의 하인들이 왈가왈부하는 것을 척후병이 듣고서야 큰일이 났음을 알았습니다.”
여수우가 놀라 작은 허리칼로 바닥을 내리쳤다.
“천척협의 해안 방비가 그리 삼엄하단 말이오?”
낙자언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천척협 바다에는 개인 배가 한 척도 없습니다. 어민이라 해도 군적에 들어가 있지요. 부자(父子) 대대로 이어지며 세금을 내지 않고 나라를 위해 일을 합니다. 행첩(行牒) 없이 몰래 바다를 건너려 하면 그날 밤에 바로 부근의 군 관아에 소식이 전해지지요. 40년 전 풍염 황제께서 하달한 <칠해세병제(七海稅兵制>입니다. 생각이 헤아릴 수 없이 깊었던 풍염 황제께서는 수십 년 후까지 내다보신 게지요. 참으로 영웅입니다.”
여수우는 안색이 어두웠다.
“풍염 황제…….”
그가 낮게 탄식했다.
“초원 밖에도 영웅이 수도 없군.”
문인이 갑자기 크게 웃었다.
“자. 얘기만 하지 말고 먹죠. 제가 직접 끓인 양 내장탕인데 1왕자 입에 맞으십니까?”
여수우가 웃으며 대답했다.
“매워서 눈물이 날 지경이오. 어디 그대가 순국의 밀사란 말이오? 순전히 동륙의 고추 장사치구먼.”
반찰렬은 어리둥절했다가 뒤따라 웃음을 터뜨렸다. 여수우가 반찰렬에게 말했다.
“빠른 말을 타고 가서 철유를 불러와라. 같이 술도 한잔하고 낙 형제도 만나 보라고 해. 맨날 여자만 끼고 있지 말고.”
“네!
반찰렬이 몸을 일으켰다. 그런데 갑자기 그가 흠칫 놀라며 허리칼을 잡았다.
“누구냐?”
반찰렬이 낮게 외쳤다.
심복들 중 검술도 가장 뛰어나고 눈과 귀도 가장 밝은 반찰렬은 일말의 기척도 놓치는 법이 없었다. 장막 밖에서 무거운 장화를 신은 사람이 분주하게 달려오는 기척이 어렴풋하게 들렸다. 1왕자 장막은 수비가 삼엄해 아무나 이리 불손하게 뛰어다닐 수 없었다.
장막 휘장이 돌연 걷혔다. 반찰렬이 뛰어나가려는 순간 귓가에 우레와 같은 고함이 울렸다.
“형님! 큰일났습니다! 아소륵이 없어졌어요!”
“없어져?”
여수우가 벌떡 일어났다. 독주가 가슴에 쏟아졌다.
들어온 사람은 여복이었다. 원래대로라면 장막 안에서 새로 온 동륙의 무희에게 잠자리를 하자며 엉겨 붙어 있어야 했다. 그런데 지금 그는 미친 듯이 달려온 것인지 얼굴이 땀범벅이었다.
“목해양이 소식을 전해 왔습니다. 아소륵이 밤중에 심복도 안 데리고 몰래 밖에 나갔다가 누군가에게 잡혀갔답니다.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른대요. 벙어리 하녀만 데리고 갔었는데, 그 아이가 도망쳐 나와 소식을 전했답니다. 아버지께서 놀라셔서 목해양의 사람들과 9왕의 호표기를 시켜 주위를 수색하라 하셨지만 아직 소식이 없답니다. 이 소식을 듣자마자 말을 타고 형님께 달려왔는데 오는 길에 보니 온통 기마병들이었어요.”
“누군지 간도 크군.”
여수우가 놀라 멍해졌다.
북도성이 비록 동륙의 주요 도시들처럼 번화하지는 않지만 십만 명이 살고 있으며 밤에는 기마병이 순찰도 돈다. 그런데 성안에서 세자가 납치되다니 전대미문의 크나큰 치욕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역대 청양의 세자들은 100명의 적을 상대할 수 있을 건장한 무사들이었다. 아무리 혼자 있었다고 하더라도 납치하기는 쉽지 않았다. 물론 아소륵은 유일한 예외이지만.
문인이 일어섰다.
“2왕자. 몇 명이 세자를 납치했답니까?”
“십몇 명이라는 것 같소.”
“일반인이 아니군요.”
문인이 생각에 잠겼다.
“북도성은 경비가 삼엄합니다. 겨우 십몇 명이 움직였다면 보통 비적이 아니란 소리죠.”
“사람들을 모두 깨워라. 함께 찾으러 가자!”
여수우가 옷을 걸치고 칼을 허리에 찼다.
“1왕자. 잠시만요.”
낙자언이 손을 내저으며 물었다.
“2왕자. 왕야들과 다른 왕자들은 별다른 움직임이 있습니까?”
“없소. 아버지께서 다른 사람에게 알리셨소. 지금 목해양과 9왕이 명을 받고 장막 하나하나를 뒤지고 있소. 우선 왕야들 장막을 뒤지고 가주들 장막을 뒤진다 하오. 언제 이곳도 수색하러 올지 모르지. 소식을 접한 가주들이 감히 움직일 수나 있겠소? 다들 장막 안에서 꼼짝 않고 기다리고 있다오.”
“대군께서도 저처럼 내부의 적을 의심하시는군요.”
“어떤 놈인지 간이 배 밖으로 나왔군. 모반이라도 하려는 건가?”
여수우가 표독스럽게 말했다.
“아무래도 나가 봐야겠다.”
“가지 마십시오!”
낙자언이 씁쓸하게 웃었다.
“잊으셨습니까? 1왕자가 바로 가장 큰 내부의 적입니다.”
“무슨 말을 그리 하오?”
문인의 손에는 하얀 동륙의 부채가 들려 있었다. 그는 부채로 손바닥을 두드리며 천천히 장막 안을 거닐었다.
“사라진 세자를 못 찾으면 새로이 세자를 세워야 하지요. 현 시국에 1왕자는 손색없는 세자 후보입니다. 북도성의 정무를 장악하고 있으니 새로이 세자가 되면 동륙에 인질로 갈 필요도 없어지겠지요. 세자가 죽으면 가장 득을 보는 것이 1왕자이십니다. 지금 혐의를 무릅쓰고 나가는 것은 빌미를 주는 꼴이 되지 않겠습니까?”
여수우는 일순 멍해졌지만 곧 큰 소리로 호통쳤다.
“내가 겁날 게 뭐 있소! 오늘 금장궁에서 나오자마자 9왕의 장막으로 가 공무를 논의했고 한 발짝도 그곳을 떠난 적이 없소. 내가 손을 쓰려고 해도 그럴 시간이 있어야 할 거 아니오. 누구든 악독한 말로 나를 모략하려거든 내 보검에 먼저 물어야 할 거요!”
장막 밖에서 어지러운 발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에는 하나가 아니었다. 분주한 발걸음에 간담이 서늘해졌다. 반찰렬이 휘장을 걷었다. 밖에는 여수우의 가노들이 무릎을 꿇고 있었다.
“주인님, 큰일났습니다! 누가 군사를 데리고 마을을 완전히 에워쌌습니다!”
“목해양의 사람들이냐? 아니면 9왕?”
“둘 다 아닙니다. 3왕자와 4왕자의 사람들입니다!”
“욱달한!”
여수우는 어리둥절했다.
“다들 아버지의 수색을 기다리고 있을 터인데 어찌 움직인 게지?”
낙자언이 갑자기 발을 구르며 말했다.
“늦었군요. 우리가 한발 늦었습니다!”
“늦었다니?”
여수우가 눈을 크게 뜨고 낙자언을 쳐다보았다.
“우리가 소식을 너무 늦게 알았습니다. 3왕자는 1왕자께 누명을 씌우려는 겁니다. 세자가 죽어서 가장 이로운 사람은 1왕자이니 누군들 의심하지 않겠습니까?”
여수우는 불현듯 무언가 생각났는지 아우의 멱살을 틀어쥐며 매서운 눈빛으로 몰아붙였다.
“네놈이냐?”
여복은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제가 그러려고 했다면 형님께 말씀을 드렸겠지요. 저는…….”
낙자언이 앞으로 나아가 여수우를 밀어냈다.
“2왕자는 절대 아닙니다!”
그가 철유의 옷 아랫자락을 걷어 올리자 맨 다리가 드러났다.
“2왕자는 정말 이불 속에 있다가 바로 일어나 소식을 전하러 온 것입니다. 보시다시피 바지도 입을 시간이 없어 긴 도포만 걸치고 온 것이지요. 만반의 준비가 된 사람 같진 않아요.”
여복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아까 장막에서 여인과 농탕치다가 소식을 듣고 부랴부랴 도포만 걸친 채 달려온 것이었다.
“다른 건 나중 문제다.”
여수우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어찌 됐든 욱달한이 장막을 수색하게 둔다면 앞으로 우리 형제는 북도성에서 고개도 못 들고 다닌다. 무력을 쓰더라도 우리 파소이 가문의 존엄을 지켜야 해!”
여하가 고개를 돌려 제 형을 흘끔 쳐다보았다.
횃불에 비친 여응양의 날카로운 얼굴에 명암이 교차했다. 높고 오똑한 콧날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여응양의 한쪽 눈은 어둠에 가려졌고 다른 한쪽은 아무런 감정 없이 음산했다.
100보 거리를 두고 양측이 대치했다. 군마들이 불안해 날뛰려 하자 병사들이 애써 자신의 말을 단속했다. 수백 개의 횃불이 밤하늘을 환하게 밝혔다. 붉은색 용아기(龍牙旗) 아래 여응양이 말을 타고 서 있었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쏟아졌다. 여하는 칼을 잡고 제 형의 뒤에 바싹 붙어 있었다. 직접 전장에 나간 적이 없었던 여하는 긴장해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관자놀이에는 푸른 힘줄이 튀어나와 불끈거렸다.
“형님. 아버지께서… 아시는 날에는…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겁니다.”
여하가 자기 말의 말고삐를 힘껏 잡아당기며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여기까지 온 마당에 맥없이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으냐?”
“하지만… 저는 아무래도 이게…….”
여하가 고개를 숙였다.
명료한 짝 소리와 함께 손바닥 하나가 여하의 얼굴에 내려앉았다. 얼굴을 감싸 쥐고 성질을 내려던 여하는 제 형과 눈이 마주쳤다.
“못난 놈!”
여응양이 여하의 옷깃을 틀어쥐었다.
“내가 뭐라 가르쳐 주었더냐? 다 까먹었어? 아무래도 뭐? 누가 물어 죽여도 도망칠 줄 모르는 멍청한 늙다리 영양 같으니!”
여하는 가슴이 선득해졌다. 찬 공기를 많이 마신 까닭인지, 아니면 여응양의 두 눈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네 말이 맞다. 나도 진즉 알고 있었어. 칸들이 우리 형제를 위해 부친과 다툴까? 아니! 우리는 그저 말안장일 뿐이다. 타다가 망가지면 바꿀 수 있는 것! 우리가 동륙에 가면 북도성에서는 아무도 우리를 기억하지 않을 것이다. 동륙에서 죽을 날을 기다리게 되겠지!”
여응양이 그를 내던졌다.
“오늘 칸들의 얼굴을 못 보았느냐? 그들은 말안장을 갈 준비를 하고 있다! 타인에게 의지하느니 나 자신을 믿는 게 낫겠지. 그들은 우리를 청양부 밖의 사람으로 생각한다. 우리 위신을 되찾으려면 믿을 건 우리 자신뿐이다! 이 북도성에서 많은 사람이 우리 형제를 우스갯거리로 삼으려 하지만 우리 형제는 그리되지 않을 거다. 이 세상 누구도 나 욱달한을 우스갯거리로 삼지 못해! 반드시 날 비웃던 인간들을 하나씩 내 말 아래 고개 숙이게 할 테다!”
“네!”
여하가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
“너는 내 아우다.”
여응양이 여하의 옷깃을 정리해 주고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북도성 전체에서 내가 믿을 사람은 너 하나다! 믿어도 되겠지?”
“형님. 저는…….”
“아무 말 마라. 다 안다.”
여응양이 고개를 돌렸다. 그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갑고 바위처럼 딱딱했다.
“이따가 넌 내가 말하는 대로 하면 된다. 우리는 친형제다. 한 어머니의 젖을 먹고 자란 우리다. 어머니를 위해 분발해야 해.”
“네!”
여하가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 가슴속에 불덩이가 생겨난 듯했다.
어릴 적부터 지금까지 여하의 마음속에서 여응양은 그 누구도 대체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어머니가 삭북부인이라는 이유로 두 사람은 혈통으로 차별을 받았다. 어릴 적에는 세력이 약해 칼을 제대로 연마하지 못해도 벌을 받았고 공연히 화를 내도 벌을 받았으며 제때 밥을 안 먹어도 벌을 받았다. 위로는 각 가문의 가주들부터 아래로는 금장궁의 지위가 있는 여자 노예까지 모두가 여하에게 싸늘한 눈초리를 던졌다.
그런데 하필 가장 어린 그가 가장 다혈질이었다. 참을 수 없을 때는 성질을 부리며 물건을 때려 부쉈고 주위 사람들에게 고래고래 악을 썼다. 그러면 금장궁의 시위 무사가 달려와 그를 붙잡아가서 먹을 것도 주지 않고 태양 아래 무릎을 꿇려 벌을 세웠다. 여하는 입술을 깨물며 절대로 굴복하지 않았다. 위가 칼로 쑤시는 것처럼 아파도, 입술이 말라 터져도 말이다.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왜 똑같은 아버지의 아들인데 누구는 귀한 핏줄이고 누구는 천한 핏줄이며 누구는 양고기 탕을 마시며 남을 꾸짖고, 누구는 굶어가면서 남에게 질책을 당해야 하는가. 당시의 극도로 고통스러웠던 마음을 그는 지금까지도 똑똑히 기억했다.
그때 여응양이 다가와 그의 곁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여응양은 착한 왕자였다. 까탈스럽지도, 화를 내지도, 남의 성질을 건드리지도 않았다. 그런 여응양이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묵묵히 그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결국 여하도 그와 함께 무릎을 꿇었다.
금장궁 사람들은 냉담한 시선으로 둘을 쳐다보았다. 그렇게 날이 저물어 어두워졌고 잠자코 무릎을 꿇은 채 앞만 바라보던 여응양의 머리 위로 별이 떠올랐다.
여응양은 그제야 소매에서 다 식어 빠진 낭(馕)을 꺼내 여하에게 건넸다. 여하는 냉큼 낭을 채가 허겁지겁 베어 물었다. 불현듯 눈에서 눈물이 후두득 떨어졌다. 여응양은 말없이 앞만 바라보며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여하가 거칠게 눈물을 닦으며 여응양에게 물었다.
“형은 왜 나한테 잘해줘요?”
“지금은 우리가 이렇게 무릎을 꿇고 있지만 언젠가는 일어날 거다.”
여응양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나는 네 형이잖니.”
그날 밤부터 여하는 줄곧 믿어왔다. 이 형은 어렸을 때 말한 것처럼 언젠가 자신을 데리고 우뚝 일어설 것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