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2장. 세자 (8)
“나왔다, 나왔어!”
금장궁 휘장이 걷히고 작은 술렁임이 일었다.
“욱달한. 무슨 큰일이라도 난 게냐?”
칸들이 앞다투어 다가와 여응양을 맞이했다.
멀지 않은 곳에서는 목려와 철진, 철익이 여수우를 에워쌌다. 양쪽 파 사람들이 각각 모였고, 평소 그들 사이에서 떨어져 있다가 대세를 따르던 너덧 명의 가주들만이 지금 어디로 붙어야 할지 몰라 불안해하며 멀찍이 서 있었다.
“대합살이 돌아왔습니다.”
여응양이 주저하며 말했다.
“아버지께서 동륙의 제후국과 동맹을 맺으려 합니다.”
모두의 표정이 그대로 얼어붙었다. 유목민이 널리 불러오던 시가(詩歌)에서부터 동륙의 화족과 북륙의 만족은 물과 불처럼 어울리지 못하는 적이었다. 40년 전, 동륙 풍염 황제의 북벌로 만족의 건장한 청년들이 수도 없이 죽었다. 결국 만족은 오만했던 고개를 숙이고 동륙에 공물을 바치며 동륙의 대윤을 종주국이라 칭했다. 그러나 피맺힌 원한을 잊은 적은 없었다. 청년들은 말을 채찍질하고 칼을 눈부시게 갈았다. 동륙과 전쟁을 벌여 당시의 치욕을 씻고 싶지 않은 이가 몇이나 될까.
동맹. 그것은 만족이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단어였다.
“안 될 말이지!”
가주 하나가 먼저 정신을 차리고 우레와 같이 소리쳤다.
“화족은 대대로 내려오는 우리의 원수요! 청양의 선조들, 청동의 핏줄인 우리가 어찌 동륙의 겁쟁이와 벗이 된단 말이오?”
여응양이 고개를 저었다.
“아버지께서는 결심하셨습니다. 그보다 가장 큰 문제는 그게 아닙니다…….”
초조해진 태과이가 발을 구르며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할 말이 있느냐? 우린 네 백부들이다. 북도성에서는 네 머리 위로 하늘이 무너져 내린다고 해도 우리 백부들이 떠받쳐줄 것이야.”
여응양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께서 왕자들 중 하나를 동륙에 인질로 보내려 하십니다. 그게 제가 될까 봐 걱정입니다.”
다들 헉 하고 숨을 들이켰다.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 3왕자를 오랫동안 따르며 심혈을 기울였던 것도 언젠가 대군이 죽고 여응양이 초원을 이어받을 날을 기대해서였다. 그런데 그가 동륙에 보내진다면 그간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게 된다.
“욱달한!”
태과이가 조카 어깨의 옷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똑바로 말해야 한다. 곽륵이가 그리 말한 것이냐, 아니면 네 추측이냐? 그동안 우리는 네게 목숨을 걸었다. 아무 근거도 없이 그런 어리석은 말은 꺼내지도 마라!”
“함부로 추측한 것이 아닙니다.”
여응양이 깊게 숨을 들이키며 말했다.
“아버지의 생각을 들어보니 아무 왕자나 인질로 갈 수 있는 게 아니더군요. 경솔해서도 안 되고 동륙의 지식도 배워야 하는 데다 사람도 응대해야 하고 청양의 위엄을 떨어뜨려서도 안 되지요. 그런 사람은 저 아니면 비막간 형님뿐입니다. 하지만 큰형님은 맏이에 벌써 혼인도 했고 막 둘째 아들도 태어났어요. 저는 혼자에다가 또 동생이니 아버지께서 고려할 법합니다.”
“어떻게 그래?”
격륵이 난리치기 시작했다.
“아들 낳은 게 뭐 대단한 일이라고?”
“대군께서 공무를 논의하게 칸 네 분을 안으로 드시랍니다!”
장막을 나온 금장궁의 시위 하나가 마편을 허공에 휘날리며 큰 소리로 외쳤다.
칸들은 여응양과 더 대화를 나눌 새가 없었다. 몇몇 심복이 인파를 헤치자 태과이를 필두로 모두가 황급히 금장궁 안으로 걸어갔다. 여수우 곁의 사람들 속에서 갑옷을 걸친 9왕이 걸어 나왔다. 그는 뒷걸음질 치면서 나와 여수우에게 예를 올리고 성큼성큼 금장궁으로 향했다.
양측 사람들이 도중에 만났다. 나이 든 칸 셋은 전쟁의 공을 세워 새로운 칸이 된 9왕을 꺼렸다. 태과이는 살짝 걸음을 멈추고 혼탁한 갈황색 눈으로 싸늘하게 그를 훑어보았다. 9왕은 정중하게 예를 올렸다.
“9왕이 큰형님을 존중하는 태도를 보세요. 칸들은 우리를 집에서 기르는 개처럼 본다고요!”
여하가 표독스러운 목소리로 나직이 말했다. 여응양이 작게 소리쳤다.
“아무 말 마라! 돌아가자.”
소마가 등을 올려 들고 장막 안을 살며시 비췄다.
침대 위에는 아소륵이 늘 입고 다니는 흰색 여우 갖옷이 놓여 있었지만 사람은 없었다. 소마는 주위를 둘러보고는 살금살금 침대 뒤로 걸어갔다. 어둡던 침대 뒤편이 환하게 밝혀지자 구석에 숨어 있던 아소륵이 팔을 들어 빛을 막았다.
두 사람은 말없이 시선을 마주했다. 한참 뒤 아소륵은 다시 고개를 숙였다. 그는 두 다리를 꼭 끌어안고 아래턱을 무릎 위에 괸 채 계속 넋을 놓았다. 소마는 그의 옷소매를 잡아당기며 한 손을 뺨 옆에 대고 잠자는 시늉을 했다. 이제 자러 갈 시간이라는 말이었다. 아소륵은 대답하지 않았다. 소마는 그의 손을 놓지 않고 계속 옷소매를 잡아끌었다.
소마는 금박을 입힌 빨간 치마로 갈아입고 머리를 틀어 올렸다. 새하얀 옷깃에 기다란 목이 더 부각돼 보였다. 소마는 이미 이 세상에 없는 그녀의 언니처럼 무척 아름다웠다.
“미안해…….”
아소륵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소마는 자기가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천천히 얼굴을 돌린 아소륵은 소마의 눈을 응시하며 살며시 손을 뻗어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미안해.”
가냘픈 목소리지만 말투는 단호했다.
소마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웃는 얼굴로 아소륵을 위로하고 싶었지만 웃음이 나오지 않아 자기 얼굴을 손가락으로 집고 익살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소마, 미안해!”
눈물이 아소륵의 볼을 타고 또르르 흘러내렸다. 몹시 괴로웠지만 그래도 그는 꿋꿋했다. 거대한 슬픔이 그의 눈에서 흘러넘쳤다.
소마는 물끄러미 아소륵을 쳐다보다가 천천히 두 팔을 벌려 그의 머리를 품에 안았다. 그녀는 얼굴을 옆으로 돌려 아소륵의 머리 위에 갖다 댔다.
“난 쓸모없는 놈이야. 내내 그랬어. 사람들을 지켜주겠다고 약속하지만 늘 지키지 못해.”
아소륵이 나직하게 말했다.
“너 하나도 보호하지 못하잖아.”
소마는 살며시 그의 등을 쓰다듬었다. 마음속에 엷은 슬픔과 은은한 달콤함이 함께 밀려왔다. 자신의 주인은 돌연 처음 진안부에 왔을 때의 여섯 살짜리 아이로 변해 있었다. 아소륵은 초원을 뛰어놀다가 넘어지면 대성통곡했고 그럼 소마는 그의 머리를 품에 안고 바삭한 사탕 과자를 먹여주면서 얼굴에 입을 맞추고 울지 말라며 달랬다. 당시의 바람이 다시 주변에 부드럽게 불어오는 것 같았다. 그때 아버지가 모는 건장한 말 위에서는 언니의 노랫소리가 맑게 울려 퍼졌다.
소마는 고개를 숙여 아소륵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댔다. 아소륵의 몸은 보통 사람보다 살짝 차가웠다. 그런데 지금은 그의 피부에서 경미한 온기가 느껴졌다. 소마는 열기가 소리 없이 사라질세라 더욱 바짝 얼굴을 붙였다.
온통 차가운 이 세상에서 오직 품에 안은 아소륵만이 그녀를 안심시켰다.
한참 뒤 소마가 아소륵의 손바닥에 가볍게 그림을 그렸다. 소마는 글자를 쓸 줄 알았고 전에도 아소륵과 글을 써서 대화를 나눴다. 하지만 청양부에 온 후로는 두 번 다시 아소륵의 손바닥에 어떤 글자도 쓰지 않았었다.
글자를 다 쓴 소마는 등(燈)을 들고 묵묵히 장막 밖으로 걸어 나갔다. 아소륵은 자기의 손바닥을 보면서 주먹을 꼭 쥐었다.
“소마. 우리 어머니 본 적 없지?”
아소륵이 물었다.
소마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청양의 대연지 두 명 모두 일찍 세상을 떠났고 남은 네 명의 측연지 중 아소륵의 어머니만 자식을 낳았으니 따지고 보면 그녀가 금장궁의 여주인이었다. 그러나 소마는 천민이라 금장궁에는 발을 붙일 기회가 없었다.
“나랑 우리 어머니 보러 가자.”
아소륵이 일어섰다.
소마는 순간 놀랐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아소륵이 다가와 가볍게 숨을 내뿜자 불이 꺼졌다. 어둠 속에서 아소륵이 소마의 손을 꼭 잡았다. 그의 손바닥은 살짝 차가웠다.
금장궁.
호마가 화로를 들고 장막 안에서 뒷걸음질 쳐 나왔다. 세찬 바람에 장막 꼭대기의 흰 꼬리가 날리며 펄럭펄럭 소리가 났다. 측연지들은 색깔로 구분했다. 흰색 장막은 삭북부 출신의 연지 누소의 장막이었다. 호마는 어느덧 나이를 많이 먹어 금장궁의 어린 하녀에서 일을 주관하는 여관(女官)으로 직위가 올랐다. 호마가 고개를 돌려 장막 밖의 하녀에게 당부했다.
“밤바람이 세구나. 너무 깊이 잠들지 말고 바람이 새어 들어가지 않게 해. 연지께선 몸도 안 좋으신데 한기라도 들었다가는 혼쭐이 날 줄 알아!”
호마는 매섭게 말했지만 한편으로는 벌벌 떠는 어린 하녀의 모습에 연민도 들었다. 대군의 여인은 하나둘이 아니었고 모두 자식을 낳아 의지하고자 했다. 어린 하녀들도 마찬가지로 대군의 성은을 간절히 바랐다. 성은을 입지 못하면 호마처럼 평생 하녀로 서서히 늙어갔다. 하지만 대군은 여인을 가까이하는 것을 그리 즐기지 않았다. 그의 여인들은 모두 운이 안 좋았다. 총 세 명의 여인이 대군의 아들을 낳았는데 하나같이 결과가 좋지 않았다. 호마가 장막 휘장을 내리며 말했다.
“팔자도 참! 복을 누릴 팔자가 아닌 거야.”
그때 작은 인영 하나가 장막 가장자리에서 슥 나타났다. 화들짝 놀란 호마는 하마터면 목탄 화로를 떨어뜨릴 뻔했으나 그 사람이 호마의 손을 꽉 붙잡았다.
“유모, 유모. 나야. 아소륵.”
익숙한 목소리에 호마가 고개를 숙였다. 아소륵의 얼굴이 보였다.
호마는 사방을 조심스럽게 살핀 후 황급히 그의 머리를 품에 가두고 뒷걸음질 쳐 장막 옆으로 갔다. 아소륵은 바람 부는 곳에서 얼마나 오래 숨어 있었는지 얼굴이 흙투성이였다. 호마가 황급히 소매로 얼굴을 닦아주었다.
“세자. 여기는 또 어떻게 오셨어요?”
“유모.”
아소륵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머니가 보고 싶어서.”
“여기는 대군의 명령 없이 올 수 없는 곳이에요!”
호마가 아소륵을 꾸짖으며 그의 손을 뿌리쳤다.
하지만 아소륵은 가지 않고 고개를 숙인 채 묵묵히 서 있었다.
호마는 한숨을 내쉬고는 엄한 말투로 말했다.
“세자도 이제 다 컸어요. 전갈(傳喝)이 없이는 내궁에 들어오면 안 돼요! 대군께서 깊은 밤에도 아랫사람들을 불러 만나신다고요. 사람이 많아 발각될 수 있어요! 세자야 잡히면 기껏해야 한바탕 꾸지람을 듣고 끝나겠지만 저희 같은 노예들은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워요.”
아소륵은 호마의 손을 붙잡으며 여전히 가려 하지 않았다. 밖에서 시위가 순찰하며 지나가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간담이 서늘해진 호마는 모질게 마음을 먹고 낮은 소리로 호통쳤다.
“안 돼요! 세자도 다 컸어요! 안 가면 사람을 부르겠어요!”
아소륵의 손이 움찔하더니 천천히 호마를 붙잡은 손을 놓았다. 그는 말없이 뒤돌아 고개를 숙이고 떠나갔다. 호마의 손은 여전히 그곳에 내밀어져 있었다. 손끝에 바람이 불었다. 잡아주는 사람이 없으니 몹시도 시렸다. 짠한 감정이 불쑥 밀려왔다.
“알았어요, 알았어!”
호마가 앞으로 나가 아소륵을 끌어안았다.
“아이고. 조상님아. 자꾸 어리광부리면 안 돼요. 정말 큰일 난다고요!”
호마가 아소륵의 얼굴을 받쳐 들고 호수처럼 맑게 반짝이는 두 눈을 쳐다보았다.
“고마워, 유모.”
아소륵이 어둠 속을 향해 손을 흔들며 말했다.
“소마. 너도 나와.”
소마가 살금살금 한쪽 구석에서 나와 아소륵의 곁에 고개를 숙이고 섰다. 양젖처럼 야들야들한 피부와 새카맣고 차분한 커다란 눈을 보고 호마는 남몰래 감탄했다. 소마는 호마의 눈빛을 의식하고는 고개를 더 푹 숙였다.
“세자 장막의 여인이에요?”
호마가 아소륵의 얼굴을 잡고 말했다.
“다 크셨네. 여인을 데리고 어머니를 보러 올 줄도 알고.”
소마의 얼굴이 살짝 붉게 상기됐다. 아소륵은 호마의 품에서 허둥지둥 손을 내저었다.
“얼굴은 왜 붉히세요?”
호마가 살며시 그의 손을 어루만졌다.
“세자가 정말로 어른이 돼서 여인을 찾으면 어머니께서도 진짜 마음을 놓으실 텐데.”
호마가 아소륵을 잡아당겼다.
“조용히 하고 따라오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