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주표묘록-28화 (28/360)

28화

2장. 세자 (7)

대군이 벽에서 까맣고 묵직한 각궁을 떼어내 여응양에게 던졌다.

“욱달한의 패기에 상을 내리는 것이다!”

대군이 아들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눈앞의 것만 보는 사람은 영웅이 아니다. 마음에 천하를 품어야 천하를 차지할 수 있다. 손왕도 군사를 일으키기 전에는 한낱 말을 방목하던 노예에 지나지 않았는데 어떻게 7개 부락을 통일할 수 있었겠느냐? 7부를 통일하겠다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초원을 지킬 생각만 하면 영웅이 될 수 없다!”

“네!”

왕자들이 일제히 대답했다.

“아버지. 제 생각에는…….”

맨 뒤에 있던 아소륵이 작은 목소리로 말을 꺼냈지만 형들의 우렁찬 대답에 묻혀 버렸다.

대군이 대합살을 향해 몸을 돌렸다.

“대합살. 동륙에서 보고 들은 것을 직접 왕자들에게 말해 주게.”

대합살은 담뱃대에 담뱃잎을 가득 밀어 넣고 깊게 한 모금 빨았다. 맨머리를 긁적이며 좌상에서 내려온 그는 손을 휘둘러 장막 한쪽의 휘장을 젖혔다.

그 아래로 거대한 지도가 나타났다. 담황색 비단에 제작된 지도에는 갈색으로 산맥이, 남색으로 강물이 그려져 있었다. 가느다란 녹색 선은 제후국의 국경을, 지도 위의 흩어진 붉은 점은 중요 관문과 도시를 나타냈다.

“동륙의 지도다.”

대합살이 동륙 영토를 가리키며 말했다.

“동륙의 4개 주는 중주, 완주, 란주, 월주지. 대윤을 개국한 황제 백윤은 나라를 세우면서 토지를 대장군과 측근들에게 나누어주며 제후로 봉했다. 당시는 6공국, 6후국의 12제후국 제도였고 황제는 천계성 주위의 영토만 통치했는데 그 면적이 큰 제후국만도 못했어.

이후 700년간 제후들의 전쟁으로 두 국가가 합쳐지기도 하고 어느 한 국가가 분열되기도 했지. 그렇게 지금 총 16개 제후국이 되었어. 그중 중요한 제후국이 다섯 곳 있는데 중주 북쪽의 순국, 란주 북쪽의 진북국, 그리고 천남3국으로 불리는 완주의 하당국, 월주의 리국, 완주와 월주 사이에 있는 초위국이다. 내가 사절로 다녀온 곳은 완주의 하당국이지.”

대합살이 지도 남쪽의 한 성지를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가 하당의 도성인 남회다. 하당국의 백리경홍이라는 공작이 우리와 동맹을 맺고 싶어 해.”

“어떻게 신의도 없는 화족과 동맹을 맺습니까?”

여하가 놀라 소리쳤다.

“그들은 초원의 늑대보다도 기개가 없다고요!”

대군이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너희도 그렇게 생각하느냐?”

여수우가 대답했다.

“소자도 부적절하다 생각됩니다. 화족과 동맹이라니. 더구나 하당은 멀리 남쪽에 있는데 무슨 꿍꿍이인지 어찌 알겠습니까?”

“동맹에 관한 일은 여러 칸과 상의해 보심이 좋을 것 같습니다.”

여응양이 말을 보탰다.

“소자는…….”

여복이 입을 열자 대군은 손을 흔들어 그의 말을 끊었다.

“너도 분명 좋은 생각이 아니라 하겠지.”

“그렇습니다.”

“이 소식이 알려지면 지금보다도 더 큰 소동이 일 것이라 너희를 먼저 보자고 했다.”

대군이 단호하게 말을 이었다.

“하당과의 동맹은 바꿀 수 없다! 내 아들이라면 내 뒤를 따라라!”

“소자! 아버지를 따를 것입니다!”

여응양이 무릎을 꿇었다.

“소자! 아버지를 따르겠습니다!”

나머지 세 왕자도 정신을 차리고 한데 무릎을 꿇었다. 아소륵만이 조용히 맨 뒤에서 무릎을 꿇었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너희가 그리 말해 주니 기쁘구나.”

대군은 말은 그렇게 했지만 기뻐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그는 아들들을 일으켜 세우지 않았다. 싸늘한 시선이 왕자들의 머리 위를 훑었다. 살짝 고개를 들었다가 부친의 눈빛에 놀란 여복은 간담이 서늘해져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동륙의 법도에 두 국가가 동맹을 맺으면 왕자나 귀족 자제를 보내 인질로 삼는다고 한다. 너희는 담력도 있고 지혜도 있지. 자, 누가 하당에 인질로 가겠느냐?”

왕자들은 경악한 얼굴로 부친을 쳐다보았다.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왕자들은 그저 허풍이나 떠는 이들은 아니었다. 여수우도 진안부와의 전쟁에서 비처럼 쏟아지는 화살을 무릅쓰고 적진으로 돌격해본 적 있었다. 하지만 멀리 하당에 가는 것은 불안한 일이었다. 천 리 밖으로 나가면 더는 존귀한 왕자가 아니라 의지할 곳 없는 인질일 뿐이었다. 수렁에 빠진 새처럼 남에게 휘둘릴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북도성을 떠나면 새 대군이 등극하기 전에는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었다.

“왜 다들 말이 없지?”

대군은 좌상에서 걸어 내려오며 고개만 숙인 채 말이 없는 아들들을 하나씩 쳐다보았다.

“동륙에 인질로 가야 한다는 말을 들으니 배짱이 사라진 게냐?”

금장궁 안은 삽시간에 고요해졌다. 여복은 엎드린 채 무릎 앞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아버지의 무거운 장화가 자신의 앞을 소리 없이 지나갈 때는 칼처럼 날카로운 아버지의 눈빛이 자신의 등줄기를 긋는 것 같아서 온몸이 오싹해졌다.

“인질이라고는 하지만 동륙의 군진(軍陣)에 관한 지식을 배우고 직접 군대도 이끌게 해 주겠다고 하당의 백리 국주가 약속했다. 너희가 생각만 있다면 동륙의 풍토를 배우고 그쪽의 귀족들과 친분도 쌓을 수 있다. 나아가 군대를 통솔하면서 동륙 병력의 진짜 상황을 알아볼 수도 있겠지. 우리에게 다시없을 기회가 아니겠느냐?”

왕자들은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철유. 얼마 전 1왕자와 3왕자처럼 군을 통솔하는 법을 배우고 싶다고 하지 않았느냐? 한데 동륙에는 가기 싫은 것이야?”

여복이 전전긍긍하며 고개를 들었다.

“소자… 소자는…….”

그는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아버지의 시선에 점점 낭떠러지로 몰리는 기분이 들었다.

대군은 처음부터 여복의 대답을 들을 생각조차 없었다. 그는 아들들을 차례로 훑었다.

“비막간은 맏형이고 욱달한은 청양의 지장(智將)이지. 너희는 어떠하냐? 귀목, 그래 귀목. 너는 일곱 살 때 늑대를 죽였다. 내 아들 중 가장 용감하지. 한데 지금은 고개를 숙인 것을 보니 설마 한입에 너를 먹어 치우려던 커다란 늑대보다 동륙에 가는 일이 더 무서운 것이냐?”

귀하는 제 형들처럼 감정을 꾹 눌러 참지 않고 세차게 머리를 땅에 조아리며 외쳤다.

“아버지! 소자는 안 가렵니다!”

“허!”

대군은 깜짝 놀라 헛웃음이 나왔다.

“소자는 여씨 후손이자 청양의 왕자로서 절대 조상님 얼굴에 먹칠하지 않을 것입니다. 제가 전쟁터에 나가 목숨이 아까워 반보라도 물러난다면 아버지께서 단칼에 저를 베셔도 아무 말 않겠습니다. 그러나 인질은…….”

여하가 이를 사리물며 말했다.

“인질은 하고 싶지 않습니다!”

“웃기는군!”

대군이 냉소를 던졌다.

“하당국의 사자가 며칠 내로 우리 청양에서 인질로 지낼 백리 가문의 왕족 자제를 한 명 데려올 것이다. 너희는 입으론 죽음이 두렵지 않다면서 하당에 가겠다는 놈은 없구나. 이게 우리 청양의 사내란 말이냐? 화족이 나약하다고 비웃었지. 지금 보니 너희는 동륙의 청년보다도 못하구나! 아니, 여인보다도 못해! 손왕이 아감달을 인질로 보냈을 때 그녀는 백마를 타고 가면서 단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다. 너희도 우리 파소이 가문의 사내가 아니더냐!”

대군의 이야기는 만족의 유명한 장편 시 <손왕전>에 나오는 내용이었다. 손왕 아감제는 500여 년 전, 초원에 처음으로 고리격 대회를 연 인물이다.

노예 출신의 비천한 무사인 그는 처음엔 병사도 적고 세력이 약했다. 그는 의부에게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여인인 아감달을 인질로 보내 3천 기마병을 빌렸다. 아감달은 백마를 타고 가는 내내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다.

아감제는 3천 기마병을 일으켜 초원을 소탕하고 돌아와서야 아감달이 의부 장막의 여인으로 거둬졌다는 사실을 알았다. 아감제는 아감달에게 달려가 그 이유를 물었지만 그녀는 산꼭대기에서 뛰어내려 자결해 버렸다. 문득 모든 사실을 깨달은 아감제는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고 끝내 의부를 죽이고 만족의 첫 번째 대군이 되었다.

옛날 북륙 초원의 역사는 고증할 방법이 없고 소위 <손왕전>도 이야기를 담은 장편 시에 불과하지만 아감달의 이야기는 슬프고도 애잔해 널리 노래로 불려왔으며 아무도 그 진실 여부를 의심하지 않았다. 초원인은 아감달을 ‘빛의 어머니’라 칭하며 그녀의 정절과 용기를 찬양했다.

여하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그는 머리를 세차게 내저었다.

“그것은 겁쟁이와 여인의 얘기가 아닙니까!”

“겁쟁이와 여인이라…….”

대군의 꾹 다문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여하는 아버지가 화났다는 걸 알고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여복이 이를 악물고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아버지. 평소에 왕야와 가주들 앞에서 가장 똑똑한 척하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또한 누가 동륙의 정세를 두고 왈가왈부하기를 좋아하지요? 방금 전에도 호기로운 말을 늘어놓더니 왜 지금은 아무 말이 없답니까?”

여복이 뒤에 선 여응양을 흘끗 쳐다보았다.

대군이 고개를 끄덕였다.

“욱달한. 네 형이 묻는데 왜 말이 없느냐?”

여응양은 차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둘째 형님이 큰형님을 보호하고 싶다면 직접 나서십시오. 소자는 갈 엄두가 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가고 싶지 않습니다. 저는 지금 하는 일도 있지요. 사내가 공을 세워야 할 곳은 전쟁터입니다. 동륙에 가 인질이 되는 일은 제가 하고 싶은 일이 아닙니다.”

“이 아비가 보낸다면?”

대군이 그를 주시했다.

“셋째 형님은 갈 수 없어요!”

조급해진 여하가 끼어들었다.

“아버지께서 북도성 사람들에게 물어보시면 알 겁니다. 큰형님이 하는 일이 많은지, 셋째 형님이 하는 일이 더 많은지 말입니다. 큰형님은 마구를 하지 않으면 사냥이나 하죠. 다른 부락의 사절들이 오면 열에 아홉은 셋째 형님이 응대합니다. 매일 끝나지도 않는 이야기를 들어주느라 자정 전에 자러 간 적이 손에 꼽습니다! 9장(帳) 군대의 명부를 셋째 형님과 제가 두 달이나 걸려서 정리하느라고 눈에 핏발이 다 섰습니다. 그동안 저 두 형님은 어디 있었죠? 화뢰원에서 야생마나 키웠어요!”

여하는 여수우 형제를 힐끗 쳐다보고는 말을 이었다.

“누가 갈 수 있겠느냐고 물으셨지요. 소자는 저 둘이 다 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철유 형님은 군대를 이끌고 싶다고 떠들어대지요. 근데 할 수 있습니까? 동륙에 가서 배워오면 안 될 이유라도 있습니까? 비막간 형님이 하던 일은 셋째 형님에게 인계하면 되잖습니까. 어차피 평소에는 북도성에 있어도 코빼기도 안 보이는걸요! 아버지, 말씀해 보십시오. 능력도 없고 쓸모도 없는 사람은 고된 일을 안 해도 되고, 이렇게 고생하는 저와 셋째 형님이 이런 재수 없는 일까지 당해야 하는 겁니까?”

여응양이 작게 소리쳤다.

“귀목. 조용히 해. 우리가 해온 일들은 아버지도 다 아신다. 네가 말할 필요 없단 말이다!”

“터무니없군! 누가 능력이 없어?”

여복이 참지 못하고 나섰다.

“흥!”

여하가 차갑게 비웃었다.

“형님 칼솜씨는 어떻죠? 글공부는 또 어떻습니까? 사람들도 형님이 어떤지 다 압니다!”

여하가 성큼성큼 좌상 옆으로 다가가 탁자 위의 양젖이 가득 담긴 은 단지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슥 허리춤의 장도를 뽑았다. 그는 주위를 한 번 훑더니 은 단지를 내던졌다. 단지가 허공에 머무는 순간, 장검이 빠르게 휘둘러졌다. 어지러이 부서지는 쇠빛이 뒤엉키며 단지 위를 스치고 지나갔다. 여하의 칼 힘에 가로막혀 단지가 공중에 잠시 멈췄다. 장도가 칼집에 들어가는 소리와 함께 손으로 두드려 만든 은 단지가 산산이 조각났고 공중에서는 물보라가 된 양젖이 은 조각들을 휘감은 채 아래로 떨어졌다.

“철유 형님. 웃기지도 않는 소리 마십시오. 능력을 말하고 싶다면 누구 칼이 더 날카로운지부터 따져봅시다!”

흥분을 참지 못한 여복이 일어나 허리 칼을 잡았다.

“네 칼도 날카롭지만 내 칼도 날카로워. 고작 단지 하나 베었을 뿐이잖아. 용기 있으면 내 보검도 잘라보시지?”

여하는 그를 쳐다도 보지 않고 말했다.

“제 칼이 너무 날카로워 실수할까 봐 걱정이군요. 형님 목은 이 단지보다 단단해 보이지 않거든요!”

“너!”

여하의 코끝을 가리키는 여복의 손가락 끝이 부들부들 떨렸다.

“삭북의 피가 흐르는 개 같은 자식아. 네 신분을 잊지 마! 아버지 앞에서 더는 네놈과 승강이하지 않겠지만 그렇다고 내가 네놈을 못 죽일 거라 생각하지는 마라!”

“날 죽여요?”

여하가 더욱 사납게 화를 냈다. 그는 상의를 잡아 뜯어 가슴팍을 드러내고 세게 쳤다.

“배짱 있으면 무슨 피가 나올지 찔러봐요! 우리 다 아버지 자식입니다. 나는 청양인이라고요!”

사납게 서로를 노려보던 형제들은 순간 대치 국면에 빠졌다.

뼈마디가 부러지는 소리가 적막을 깨뜨렸다. 모두가 깜짝 놀랐다. 대군의 꽉 틀어진 주먹에서 나는 소리였다. 손톱이 살을 깊이 파고들어 손바닥을 뚫고 나올 것 같았다. 왕자들은 아버지가 분노한 모습을 본 적이 있었다. 그때 얼마나 무시무시했는지 알기에, 4형제는 서로 간의 적의를 신경 쓸 새도 없이 칼을 내던지고 함께 무릎을 꿇었다.

“이… 이놈들!”

대군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모두 썩 꺼져라!”

왕자들이 물러갔다. 아소륵은 맨 뒤에서 걸어갔다.

대군이 그를 불렀다.

“아소륵. 네가 아직 어리긴 하다만 아비는 네 생각도 궁금하구나.”

아소륵은 잠시 침묵하더니 돌아서서 머리를 조아렸다.

“아버지. 또 전쟁을 하려는 건가요?”

대군이 순간 어찌 대답해야 할지 몰라 멍해진 사이 아소륵은 일어나 장막 밖으로 나갔다.

대합살이 웃으며 말했다.

“너무 조급해 마십시오. 저렇게 나올 줄 알고 있었잖습니까.”

“왕자들의 반응이 원망스러운 것은 아니네. 사함, 왕자들에게서 보지 못했는가?”

대군이 나직하게 말했다.

“만족 최대의 적은 바로 우리 자신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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