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2장. 세자 (6)
“비켜요, 비켜!”
질주하는 말 위에서 뛰어내린 철안과 철엽이 아소륵을 끌어안은 채 성큼성큼 금장궁을 향해 걸어왔다.
“누군데 감히 금장궁에 난입하려 하느냐!”
시위 무사들이 일제히 칼을 뽑아 들었다. 진두지휘하는 백부장이 큰 소리로 외쳤다. 엄심갑(掩心甲)에 쇠고리를 엮어 만든 완갑(腕甲)이 부딪치며 땡땡 소리가 울렸다.
“세자, 세자입니다. 저희는 세자의 심복이에요.”
철안이 소리 높여 외쳤다. 두 번의 북소리가 이미 끝났고 세 번째 북소리도 거의 막바지에 이르렀다. 둥둥둥둥 영혼을 뒤흔드는 울림이었다.
“세자는 들어가십시오. 심복들은 안 된다!”
철엽이 눈썹을 치키며 물었다.
“왜죠? 전에는 우리도 들어갈 수 있었는데요.”
“칸과 수령들도 밖에서 기다리는 것이 안 보이느냐? 대군께서 모두 밖에서 기다리고 왕자들만 들어오라 명하셨다!”
철안과 철엽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칸 네 명과 여러 가문의 수령 수십 명. 병사를 거느린 장군들도 못 들어가고 장막 밖에 있었다. 그들은 삼삼오오 무리를 이룬 채 의론이 분분했다. 기고는 자주 치지 않았다. 긴급한 일이 있을 때만 쳤다. 이번에도 너무 갑작스럽게 소집된 터라 칸들도 무슨 영문인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세자. 어서 들어가세요! 우린 여기에서 기다릴게요.”
철안이 아소륵을 밀었다.
힘겹게 숨을 고른 아소륵은 자신을 붙잡아 주었던 철엽의 손을 떼어 놓고 흰여우 갖옷도 벗어 던지고 금장궁 안으로 향했다. 시위들은 재빨리 몸을 비켜 길을 내주었고 세자가 지나가자마자 다시 철벽처럼 에워쌌다.
철엽은 세자의 뒷모습을 보았다가 다시 말 없는 제 형을 쳐다보았다.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형. 세자를… 폐위시키려는 건 아니겠지?”
대군이 막내아들을 폐위하고 새로 세자를 세울 것이라는 소문이 돈 것은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철씨 형제가 나이는 어려도 귀가 먹지는 않았으니 불안한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장래 대군의 심복이라면 후대에 이름을 날릴 대장군이 될 수도 있겠지만 폐세자의 심복이라면 뭐가 될 수 있겠는가? 아무도 원치 않는 들개가 될 뿐이었다.
“우리 팔자가 안 좋아서 그래.”
철엽이 입을 실쭉거리며 말했다.
“세자의 심복이라니. 만약 1왕자의…….”
“함부로 입 놀리지 말랬지!”
철안이 붉으락푸르락한 얼굴로 매섭게 동생을 노려보았다.
만족은 주인을 배신하는 것을 가장 금기시했다. 철안은 동생의 대역무도함을 질책할 이유야 많다고 생각하지만 매번 그 생각이 입 밖으로 나오지는 않았다. 철엽이 그리 생각하는 것이 무슨 잘못이겠는가? 어차피 누구나 한 번 사는 인생이다. 철엽은 기마궁술도 뛰어나니 장군이 되어야 마땅할 터. 정말 ‘충성’이라는 이 두 글자 때문에 평생을 나약하고 무능한 세자와 함께해야 한단 말인가?
철안도 몰래 생각한 적 있었다. 다른 왕자를 따랐다면 좋았겠다고. 1왕자나 3왕자는 말할 것도 없고 2왕자와 4왕자의 심복만 되어도 동륙의 감색 비단 도포를 입고 극서의 준마를 몰았을 것이다. 기회가 되면 전쟁터에 나가 적을 죽이고 언제 어디서나 당당하게 목을 쳐들고 다녔으리라.
그러나 그것도 한순간의 생각일 뿐이었다. 철안은 앞날이 불투명한 세자의 곁을 진짜로 떠날 생각을 해본 적은 없었다. 세자는 뭇사람과 다른 느낌을 풍겼다. 철안으로 하여금 마땅히 그를 따라야 한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그런 느낌. 단호의 심복들이 쫓아왔을 때도 끝까지 모두의 앞을 막아선 이는 뜻밖에도 세자였다. 철안이 앞으로 나가려고 해도 세자가 두 팔을 벌린 채 사나운 호랑이처럼 세 사람을 막아섰다.
심복이 주인 대신 맞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훗날 전쟁터에서 주인 대신 활과 칼을 맞아도 원망해서는 안 됐다. 철안조차도 세자의 이런 행동이 어리석은 짓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 순간에는 가슴에 따뜻한 기운이 번지며 무엇도 두렵지가 않았다.
철안은 세자가 어리석다 생각하면서도, 그 어리석음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나는…….”
철엽이 연신 입을 비죽였다.
“그냥 생각만 한 거야, 생각만…….”
“그만 입 다물어. 세자는 아주 좋은 사람이야.”
철안이 동생의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
“세자는 다른 사람과 달라.”
둥! 마지막 북소리가 울렸다. 여음(餘音)은 마치 먼 곳으로 퍼져나가는 천둥소리 같았다.
아소륵이 양피 휘장을 젖혔다. 그는 두 손으로 바닥을 짚으며 양탄자 위에 무릎을 꿇고 숨을 크게 몰아쉬었다. 금장궁 안은 유난히 조용했다. 먼저 도착한 형들은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부친의 부름을 기다리고 있었다.
표범 가죽 좌상 위의 대군은 아소륵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그는 좌상에 쭈그리고 앉아 기다란 탁자에 기대 있었다. 탁자 맞은편의 사람은 검은색 피풍(披風)을 걸쳤는데 쓰개에 얼굴이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탁자 위의 은접시에는 양 구이가, 은그릇에는 양젖이 담겨 있었다. 좌상에 앉아 대군과 마주 보고 음식을 먹는 일은 만족 최고의 포상이었다. 공을 세운 사람의 지위가 극도로 높아 다른 상을 내릴 수 없을 때야 좌상에 앉아 정사에 참여하는 은혜가 내려진다. 왕자들이 기억하기로 이런 영예를 누린 이는 태과이 칸뿐이었다.
“오래 고향을 떠나 있었는데 초원이 그립지는 않던가?”
대군이 웃으며 물었다.
“초원은 별로 안 그리웠습니다. 동륙에는 별의별 것들이 다 있어서 다 보지도 못했지요.”
피풍을 걸친 사람이 양갈비를 크게 잘라 입속에 넣고 우물우물 씹었다.
“한데 영씨 부인의 한타 고기와 황양 갈비는 그립더군요. 대군께서 붙잡지 않으셨다면 저는 벌써 목려의 장막에 갔을 겁니다.”
“대합살!”
왕자들은 그의 목소리를 알아들었다.
그가 머리에 쓰고 있던 쓰개를 벗어젖혔다. 반짝이는 맨머리, 새하얀 수염, 일전에 소리 소문 없이 북도성에서 사라졌던 대합살 여장천이었다.
“일어나라.”
대군이 손을 흔들었다.
“대합살이 좋은 소식을 가져왔다. 아들들에게 먼저 말해 주고 싶어서 칸과 장군들은 밖에서 기다리라 하고 너희를 먼저 부른 것이다. 그러나 좋은 소식을 듣기 전에 먼저 아비의 물음에 답해 봐라. 답을 잘하는 녀석에게는 상을 내리마.”
“네!”
왕자들이 일제히 대답했다.
대군은 고개를 끄덕였다.
“너희도 이제 나이가 적지 않으니 군사(軍事)를 알아야겠지. 우리 만족 최대의 적이 누구냐?”
여수우가 잠시 망설이다가 여복을 쳐다보았다. 여복은 자기도 모르겠다는 듯 양 손바닥을 위로 펼쳐 보였다. 한주에 위치한 만족은 서쪽으로는 과보, 동쪽으로는 우국과 인접해 있었으며 남으로는 천척협 밖 동륙의 대윤이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았다. 누가 강하다 약하다 할 것 없이 사방이 적이라 할 수 있었다.
“과보입니다!”
목소리 하나가 적막을 깨뜨렸다.
“귀목? 좋다. 왜 과보인지 말해봐라.”
“우리 만족은 기마병이 많고 활쏘기에 능합니다. 우족은 비록 활에는 강하나 말을 탈 줄 모르지요. 화족은 무기도 좋고 갑옷도 정교하지만 우리처럼 빨리 달리지 못해서 만족의 3만 기병으로 화족 10만 명을 죽일 수 있습니다. 동륙은 현재 우리를 따라 기마병을 양성하고 있지만 우리 호표기에 어찌 비하겠습니까?”
여하 귀목이 큰소리로 대답했다.
“과보만이 우리 적수가 됩니다. 그들은 말을 타지 않고도 우리 군마처럼 빨리 달릴 수 있고 갑옷을 입지 않고도 우리 화살을 겁내지 않지요. 그래서 저는 과보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소자에게 한 부대의 군사와 말을 내주신다면 군을 이끌고 서쪽의 호답강을 지키며 과보가 우리 초원에 발을 디디지 못하게 하겠습니다!”
대군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과보는 강적이지. 하지만 틀렸다.”
“화족입니다!”
“우족입니다!”
여수우와 여복이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말했지만 서로 다른 대답이었다.
대군은 고개를 끄덕였다.
“비막간은 화족이라 하고 철유는 우족이라 하는구나. 어떤 이유에서지?”
“소자가 생각하기에…….”
여복이 살짝 말을 더듬었다. 그는 어릴 때부터 형님인 여수우를 믿고 따랐다. 그런데 지금 제 형과 답이 다르자 당황해 어쩔 줄 몰랐다. 여수우가 웃으며 말했다.
“네 생각을 말해.”
“소자 생각에 과보가 두렵기는 하지만 그들은 인구가 매우 적고 성장이 더뎌서 한 번 싸움을 벌이면 오랫동안 쉬며 요양해야 합니다. 그러니 우리가 패배한다손 치더라도 몇 년이면 다시 영토를 되찾아올 수 있습니다. 화족은 인구도 많고 무기가 정교하고 우수하지만 뿔뿔이 흩어져 있습니다. 풍염 황제 이후 한 번도 공격다운 공격을 한 적이 없지요. 그러니 우리에게 남은 적은 우족뿐입니다.”
대군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가 있구나. 비막간도 말해 봐라.”
“소자는 화족이라 생각합니다. 우족과 과보도 각각의 장점이 있으나 동륙의 십수 개 제후국을 합치면 수백만 명의 강력한 군대가 됩니다. 우리 만족에게는 명성이 드높은 30만 철기병이 있으나 동륙의 철갑과 긴 창을 상대로는 싸우는 족족 다 죽을 겁니다. 더구나 화족은 인구도 많아서 사람을 모으면 대강 모아도 100만 대군은 거뜬히 일으키지요. 이런 이유가 아니었다면 풍염 황제도 7년 간격으로 두 번이나 우리 북륙을 침략하지는 못했을 겁니다. 그래서 소자는 우리에게 내재한 위협은 역시 동륙이라 생각합니다.”
“훌륭하구나!”
대군이 탁자를 치며 말했다.
“네 생각은 철유와 귀목을 뛰어넘는구나.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동륙의 100만 대군이 아니라 그 뒤에 있는 수천만 명의 사람, 끊이지 않고 사병을 공급할 수 있는 근원이다.”
대군이 잠자코 있는 3왕자에게로 몸을 틀었다.
“욱달한. 네 백부들은 하나같이 네가 내 아들 중에 가장 똑똑하고 지혜로운 장수라 하였는데 어째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게냐?”
“제 답도 큰형님과 같습니다. 저희의 가장 큰 적은 화족입니다.”
“그러하냐?”
대군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지만 대답이 늦었구나. 네 형과 동생이 답할 만한 것은 먼저 다 말해 버렸으니 네 탓을 할 수는 없겠지.”
“아닙니다!”
여응양이 고개를 들었다.
“저도 화족이라 생각하지만 이유는 형님과 다릅니다.”
“그래?”
“네!”
여응양이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형제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구주 각국에서 누구의 땅이 가장 넓고 누가 가장 부유합니까?”
여수우가 미간을 구겼다. 애초에 물을 필요도 없는 질문이었다. 동륙의 대윤이 4개 주, 거의 절반에 가까운 땅을 차지하고 있으니 세상에서 가장 큰 국가였다.
형제들의 대답을 들을 생각도 없었던 여응양은 바로 말을 이어갔다.
“구주의 영토에서 9개 주는 크기가 모두 비슷하지만 빈부 격차는 매우 큽니다. 제가 셈을 해 보았습니다. 우리 한주의 1년 생산량을 동륙의 금수로 환산해 보면 대략 3천만 냥입니다. 하지만 동륙의 4개 주 중에서도 중주에서만 1년 생산량이 적어도 8천만 냥이 나오죠. 그리고 완주의 생산량은 동륙의 다른 3개 주를 더한 것보다도 많습니다. 화족은 가장 비옥한 4개 주를 차지하고 있는데 우리 만족 7개 부락은 척박하고 추운 한주뿐이니 어찌 화족이 우리의 적이 아니겠습니까?”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냐?”
대군이 고개를 저으며 물었다.
“나는 적이 누구냐 물었다. 네가 말하는 것은 자원이 아니냐?”
여응양이 한쪽 무릎을 꿇고 말했다.
“아버지. 우리 만족의 염원이 무엇입니까? 철심왕을 세우는 업적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우리가 천하의 땅과 바다를 누벼야 합니다. 한두 명의 적을 물리치는 일이 대수겠습니까? 모두를 물리쳐야지요! 하지만 한주의 생산량만으로는 사방으로 전쟁을 일으킬 병력을 가질 수 없습니다. 가장 부유한 동륙을 차지해야만 합니다. 동륙의 생산량에 힘입어서만이 반달 천신께서 인도하신 과업을 완성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적은 화족입니다!”
“너무 쉽게 말하는구나.”
대군이 차갑게 소리쳤다.
“풍염의 철려가 초원을 침략했을 때의 이야기는 너희뿐만 아니라 나도 보지는 못하고 듣기만 했다. 접전을 벌인 지 단 7개월 만에 7개 부락의 젊은이들 20만이 죽었지. 대부분의 청장년이 전쟁터에서 죽어서 방목할 사람은 부녀자와 아이들뿐이었고 그 탓에 우리는 십수 년이 지나도 회복하지 못했어. 동륙의 철갑과 쇠뇌는 우리 7부의 담력을 깡그리 죽여 없앴고 그래서 우리는 지금까지도 천척협을 한 발짝도 넘을 엄두를 내지 못하는 것이다. 동륙으로 진격해 점령해야 한다 했는데 뭘 믿고 그런 소리를 하느냐? 너는 네 할아버지인 흠달한왕만큼 용감하냐?”
“할아버지와 같은 무사의 혼은 없지만 제 목숨을 바칠 패기는 있습니다. 우리 만족이 수십 년간 쌓아온 것만으로도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여응양이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갔다.
“풍염 황제와의 철선강 전투에서 우리 만족은 심각한 피해를 입었지요. 동륙이 지금 분열된 것도 그 때문이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겁니다. 그들이 분열되어 있는 한 우리는 개별적으로 무찌를 수 있습니다. 동륙은 현재 하나가 아닙니다. 계속 기다리다가는 절호의 기회를 놓칠 것입니다!”
여응양은 문가로 가 양피 휘장을 젖히고 남쪽을 가리켰다.
“우리 만족이 보아야 할 적은 전체 구주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황제가 되어야 합니다. 서쪽의 과보와 동쪽의 우족을 무찌르는 것이 대수겠습니까? 부유한 동륙을 점령해야만 우리 만족을 영원히 일으킬 근간을 세울 수 있습니다!”
금장궁 안이 유난히 고요했다. 여수우도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하구나! 내 아들다운 말이야. 상을 받아 마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