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주표묘록-26화 (26/360)

26화

2장. 세자 (5)

“연이요, 연! 왕잠자리, 나비, 꼬리가 긴 용 모양 연이에요!”

“갓 쪄서 나온 계화 만두예요. 따끈따끈합니다.”

“군밤입니다! 새로 나온 군밤입니다! 바삭하면서도 부드럽고, 달기도 달아요!”

호객소리가 긴 거리를 가득 채웠다. 천남은 번화한 완주에 있었다. 긴 거리 양쪽으로 처마가 잇닿은 점포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모습이었다. 점주들은 장사를 위해 점포 밖에 각종 범포를 세워두었다. 주점 광고가 높은 누각 위에서 펄럭이고, 멀리 봉황지(池) 위로 작은 배가 노를 저어 지나갔으며, 거리는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이것이야말로 동륙의 번성이자 왕조의 영화였다.

“부딪치잖소! 눈은 장식으로 달고 다니나? 자량가(街)에서 어디 말을 타?”

부잣집 도령 같은 사람이 뒤에서 말이 내뿜는 열기를 느끼고는 돌아서서 욕을 퍼부었다.

순간 그는 입을 다물었다. 뒤에 있던 말은 건장한 흑마로 등에는 금색 국화 문양의 천을 걸쳤으며 기 문양이 수놓아진 까만 외투가 말의 엉덩이를 덮고 있었다. 하당국에서 기 문양과 금색 국화는 일반 백성이 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말 위의 무사는 도령의 말을 못 들었는지 잠자코 먼 곳만 바라보았다. 사람들은 조용히 흩어졌고 흑마는 잔걸음을 떼며 지나갔다. 번화한 정경 속에 이토록 고요한 사람과 말이라니. 세속을 떠난 듯 고고한 모습이었다.

“뇌의함… 뇌의함…….”

누군가 그의 이름을 부르는 듯했다. 하지만 그를 제외하고 이 세상에서 또 누가 이 옛 이름을 기억하겠는가?

열종금의 갈라진 소리가 그를 쫓아 멀리서부터 날아왔다. 귓가에 초원의 바람 소리가 들리고 코끝에 옅은 풀 냄새가 스쳤다. 부친이 직접 깎아준 나무 인형이 떠올랐다. 그 인형을 말총 한 가닥에 묶어서 장막 앞에 걸어두고 그의 키를 재는 데 썼다. 매년 부친은 조금씩 나무 인형을 높이 올려 달고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뇌의함. 또 키가 자랐구나.”

하늘까지 번지던 큰불도 떠올랐다. 끔찍한 이글거림을 아직도 기억하는 것은 그가 화염과 밤빛의 틈바구니에서 도망쳤기 때문이리라. 그가 아는 모든 이름을 외쳐보았지만 어느 누구도 대답이 없었다. 그는 불길이 집어삼킨 장막 앞에 섰다. 말총이 불에 타 끊어지고 툭 둔중한 소리와 함께 나무 인형도 바닥에 떨어졌다. 그리고 모든 것이 끝났다.

더는 뇌의함도, 은양채도 없었다. 그들은 그가 가진 모든 것을 불태워버렸고 이후 세상에는 그 혼자만 남았다.

가죽 갑옷에 가려진 탁발산월의 팔뚝이 팽팽해졌다. 그는 주먹을 쥐었고 팔뚝 위의 푸른 힘줄이 분노한 뱀처럼 불퉁거렸다. 주위는 왁자지껄했다. 그는 이 번화한 세상 밖에 단절돼 있었다. 고함을 내지르고 싶었다. 무언가가 핏줄 속에서 터져 나오려 했다.

“쇠 갈아요! 쇠 갑니다! 쇠칼이든 동 거울이든 은처럼 반짝반짝하게 갈아드립니다!”

청량한 목소리가 그의 귓속을 뚫고 들어왔고 포악해졌던 감정은 썰물처럼 사라졌다. 탁발은 몸을 흠칫 떨며 다리 위에 말을 세웠다.

여기는 봉황지에서 물을 끌어오는 작은 강줄기인 자량강이었다. 구불구불한 강물 위로 자량교가 걸쳐져 있고 다리 양측에는 노점상들이 있었다. 쇠를 간다고 소리치는 청년은 탁발산월의 말 앞에 서 있었다. 쇠 가는 사람치고 생김새가 제법 수려했다. 그는 한 발을 나무 걸상에 얹은 채 엷은 미소를 띠었다. 남회에는 이 골목 저 골목을 다니며 쇠를 갈아주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이들은 거울이나 칼날을 갈아주는데 대부분 빈곤층이었고 얼마 벌지 못했다.

“칼 갈아드릴까요?”

청년이 고개를 들고 탁발을 쳐다보았다.

“저희가 아주 정교하게 잘 갑니다.”

까무잡잡한 얼굴에 즐거운 표정을 짓고 있는 청년은 누렇게 뜬 얼굴의 쇠 가는 사람들과는 많이 달랐다. 탁발은 살짝 망설이다가 안장주머니에서 장도를 꺼내 건넸다.

“칼날을 날카롭게 갈아주시오.”

탁발산월은 칼 가는 데 정통했다. 전장에 나가서도 늘 자기 칼을 거울처럼 반짝반짝 갈아서 핏발 한 가닥도 묻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쇠를 가는 사람들은 삶이 고달팠다. 숫돌 두 개에 의지해 먹고 살아야 하기에 거의 빈털터리에 가까웠고 탁발산월은 힘겹게 사는 그들이 가여워 만날 때마다 일거리를 주곤 했다.

“알겠습니다!”

청년 옆으로 눈꼬리가 올라간 사내 하나가 다가왔다. 사내는 칼을 받아들고 나무 걸상에 걸터앉았다. 옹기 단지를 들고 굵고 시커먼 손으로 숫돌에 맑은 물을 발랐다.

질박한 가죽 칼집에서 장도가 빠져나왔다. 얼음장 같은 기운이 솟구쳐 나오는 듯했다. 날밑 가까운 곳에는 작게 ‘비휴’ 두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칼을 받쳐 든 사내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좋은 칼이군.”

청년이 담담하게 말했다.

“내가 칼날을 가는 방법을 몇 가지 가르쳐주면 어떻겠나?”

“물론입니다. 선생님, 가르쳐주십시오.”

사내가 황급히 일어나 걸상을 내주었다.

“선생?”

탁발이 청년을 훑어보았다. 깨끗하게 빤 도포 아래로 거친 삼베를 꼬아 만든 요대가 보였다.

청년은 장문수회의 수도사였다. 그들만이 이렇게 거친 삼베를 꼬아 만든 요대를 맸다.

장문수회는 하나의 종파로 신을 믿지 않으며 문하생 모두 고행하는 수도사였다. 완주의 물욕이 흘러넘치는 대도시에서는 그들을 잘 볼 수 없었다. 자신의 충동을 억누를 줄 알고 온화하며 선량한 이 수도사들은 황량하고 외진 시골에서나 만날 수 있었다. 그들은 포교를 하지는 않았다. 장문수회의 ‘법술’은 가서 구해야 하는 것으로 보통 사람들은 그들에게 법술을 바라지 않았고 그들 역시 일반인은 법술을 얻을 자질이 없다고 여겼다.

그래도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장문수회의 수도사들도 상당히 진득한 편이었다. 빈곤층 사람들은 그들을 ‘선생님’이라 존칭했다. 이 수도사들은 천하를 두루 돌아다니기 때문인지 상상 이상으로 아는 것이 많았는데 그들은 지식을 필요한 이에게 나눠주는 데 인색하지 않았다. 또한 자신이 다음 끼니를 굶어야 한다고 하더라도 가난한 이들에게 가진 음식을 아낌없이 나눠주었다.

“칼을 갈 때는 물을 충분히 사용해야 하네. 물을 안 쓰고 갈면 흔적이 남게 되지. 그리고 한쪽 면으로 갈아야 해. 양면으로 갈면 칼날이 상할 수 있거든. 광택도 한 방향으로 내야 하네. 안 그러면 칼날이 파손될 수 있어.”

젊은 수도사는 칼을 갈면서 말했다. 알고 보니 아까 그 사내는 이제 막 쇠 가는 일을 시작한 사람이었고 수도사는 그에게 기술을 가르쳐주는 스승이었다.

“참으로 좋은 칼이군요!”

수도사가 고개를 들어 탁발산월을 보며 말했다.

“하지만 이름난 칼까지는 아니고요.”

“안목이 좋구려. 젊었을 때 대장장이에게서 산 무기인데 쓰다 보니 손에 익어서 말이오.”

탁발의 말에 수도사가 웃으며 물었다.

“장군이십니까?”

“그래 보이오?”

“장군의 마의(馬衣)와 외투 모두 진귀한 수공예품입니다. 그리고 눈빛도 자주 전장에 나가 수천수만의 군대를 지휘하는 장군의 눈빛이죠. 일반인과는 다릅니다.”

“그렇소. 눈빛은 절대 사람을 못 속이지.”

수도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근심이 있으신가 봅니다.”

“그래 보이오?”

“몹시 뜻밖의 일이 생겼는데 또 무척 망설여지시지요?”

탁발은 속으로 뜨끔하며 저도 모르게 경계하기 시작했다. 그는 싸늘한 눈으로 수도사를 훑어보았다.

“제 말이 맞았군요?”

수도사가 탁발을 쳐다보며 유쾌하게 웃었다.

“제게 적대감이 생기신 것 같습니다.”

탁발은 그와 시선을 맞추고 청년의 유쾌한 눈빛을 읽어내려 애썼다. 수도사는 탁발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계속 칼을 갈았다. 그의 눈에는 단순한 즐거움과 태평함밖에 보이지 않았다.

탁발은 시선을 거두고 말을 꺼냈다.

“누가 내 의문을 좀 풀어주었으면 하는 일이 있는데 그럴 만한 사람을 찾지 못했소. 혹시 선생이 도와줄 수 있겠소?”

“저희와 같은 방랑자는 군사나 국정에 대해서는 모릅니다. 그래도 말씀해 주신다면 최선을 다해 답해 보겠습니다. 저희에게 칼을 갈아주신 데 대한 감사 인사로 말입니다. 반나절을 외쳤는데 손님 한 분 없었거든요. 제 완주말이 부족한 탓이겠지요.”

“선생도 이런 일을 겪어본 적이 있소?”

탁발이 말을 신중하게 골랐다.

“어떤 일을 위해 오랫동안 노력해 왔고 분신쇄골을 해서라도 이루려 했소. 매일 밤 뒤척이며 잠도 이루지 못하고 고통에 휩싸인 것만 같고 염원을 이루는 그날을 꿈꿀 때나마 잠시 위안을 얻을 수 있었지.”

“장군께서 그토록 잊지 못한 일이… 원한입니까?”

탁발은 대답하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끝내 염원을 이루지 못했소. 점점 마비가 되어갔고 점점 잊었으며 심지어 생각조차 하기 싫어졌지. 조금 편안해진 것 같았소. 더는 옛일에 괴로워할 필요도 없고 편안하게 남은 날들을 지낼 수 있을 것 같았지. 그런데 갑자기 기회가 눈앞에 온 거요. 포기하려 할 때 그 염원을 이룰 기회가 마침내 온 것이오! 수십 년이나 늦게 왔지! 선생이라면 어떻게 하겠소? 그때의 심정으로 돌아갈 것 같소?”

탁발은 묵묵히 자량강 위에서 북쪽을 바라보았다. 가슴속에서 무언가가, 비리고 짙은 피 같은 것이 일렁이는 느낌이었다.

이번에는 수도사가 망설였다. 그는 한참이 지난 후 나직하게 말했다.

“장군. 주먹을 무척 세게 말아 쥐고 계시는군요.”

아연해진 탁발이 고개를 숙이고 자신의 손을 보았다. 손을 펼치자 손바닥에는 깊게 손톱자국이 나 있었다.

“사실 장군도 마음속으로는 답을 알고 계시지요. 안 그렇습니까?”

수도사가 고개를 갸웃한 채 탁발을 쳐다보았다.

“장군께서는 그저 그때의 심경(心境)으로 돌아가기가 두려운 겁니다. 하지만 그 마음은 거기에 있습니다. 장군께서 생각하고 싶지 않을 뿐이죠. 어쩌면 불쾌한 일들을 모두 억누르고 이 기회를 포기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언젠가 그 감정들은 다시 떠오르겠지요. 그때 장군께선 후회하지 않겠습니까? 복수할 기회가 있었는데 포기했다고 말입니다.”

“무슨 소리요?”

“이리 말하면 너무 심오할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수도사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세상사가 대체로 그러하지요. 어떤 사람은 너무 간절히 바라지만 끝내 얻지 못하고, 어떤 이는 포기했는데 얻기도 합니다. 사실 얻고 잃음이 뭐 중요하겠습니까? 결국에는 모두 잃게 될 것을요. 그저 많은 이가 얻고 잃는 과정에서 자신의 마음을 잃어버리는 것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그럼 어찌해야겠소?”

“이미 마음속 목소리를 들으셨겠지요? 이 세상 대다수의 사람은 평범한 인간입니다. 그래서는 안 되는 걸 알면서도, 결국 공허해질 것을 알면서도 참지 못하고 좇게 마련이지요. 그렇게 좇고, 또 좇으며 얻고 또 잃습니다.”

수사는 맑은 물 한 단지를 칼에 뿌렸다. 칼날이 눈부시게 반짝였다.

“그리고 사람은 죽지요.”

젊은 얼굴의 수도사는 엄숙한 표정을 지으며 두 손으로 칼을 받쳐 들고 탁발에게 건넸다.

“말하자면 슬프지만 끝끝내 도망칠 수는 없습니다.”

칼을 받아든 탁발은 말없이 칼날을 튕겨보았다.

“장군의 마음속 그 생각대로 하십시오. 후회는 훗날의 일입니다.”

수도사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장군은 깊이 사로잡혀 계십니다. 속세를 초월하지 못했어요.”

“그렇구려.”

탁발은 작게 말하고는 요대에서 금수 한 냥을 꺼내 공손하게 수도사의 손에 놓고 말을 돌려 떠났다. 별안간 그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게 됐다. 과거의 염증(厭症)과 괴로움은 이제 문제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눈빛이 다시금 의연해졌음을, 새로 갈아낸 칼처럼 전보다 더 예리졌음을 알았다.

“금수를 한 냥이나 주시다니! 정말 손이 크시네요!”

사내가 탐욕스러운 눈으로 돈을 쳐다보았다.

“네 것이다.”

수도사가 금수를 사내에게 건네고는 몸을 틀어 탁발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사내가 물었다.

“선생님, 대체 무슨 말씀을 나누신 겁니까? 저는 한마디, 한마디 말은 알아듣겠는데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을 죽이겠지?”

수도사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선생님?”

사내가 화들짝 놀랐다. 수도사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사실 나도 잘 모르겠구나. 그저 안 좋은 예감이 드네. 저이의 염원이 무엇인지는 모르나 장군 같은 사람이 염원 하나를 이루려면 많은, 아주 많은 사람이 죽어야 하겠지?”

“근데 왜 안 말리셨습니까?”

사내가 의아한 듯 물었다.

“장문의 선생님들은 모두 사람 목숨을 긍휼히 여기시잖습니까?”

“세상 모두의 삶이 쉽지 않다지만 원한이 있는 곳에는 복수하려는 자가 있게 마련인 것을.”

수도사가 작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내가 뭘 어찌할 수 있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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