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주표묘록-25화 (25/360)

25화

2장. 세자 (4)

여복이 심복들을 통솔해 여수우의 말 뒤를 따랐다. 그는 여수우가 무슨 근심이라도 있는 사람처럼 유난히 느리게 움직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막 다가가 물으려는데 여수우가 말고삐를 잡으며 아소륵 앞에 섰다. 여수우는 먼 곳을 아득하게 바라보며 아무런 감정 없이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소륵. 참 오랜만에 보는구나. 아픈 건 다 나았니?”

“다 나았어요.”

“그럼 다행이구나. 부족한 게 있거든 언제든 내 장막에 달라고 얘기해라.”

여수우가 아소륵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이곳이 네 집이다. 아버지가 바쁘셔서 널 돌보지 못해도 이 형이 있다.”

아소륵이 살짝 고개를 틀며 그의 손을 피했다.

“감사합니다, 형님.”

아소륵은 그 말을 하면서 고개를 돌려 먼 곳을 바라보았다. 아소륵 역시 여수우에게 눈길 한 번을 주지 않았다.

여복은 형님을 힐끔 쳐다보았다. 그런데 여수우는 화난 기색이 아니었다. 그저 할 말을 찾지 못한 듯해 보였다. 바람이 불어 여수우의 외투가 펄럭였다. 여수우가 갑자기 고개를 돌렸다. 아소륵 뒤에 바싹 달라붙어 벌벌 떨고 있는 여자아이가 눈에 들어왔다. 소마는 두 손을 둘러 가슴을 감싼 채 고개를 숙이고 발아래만 쳐다보았다. 불어오는 바람에 머리칼이 흩날리며 머리칼 끄트머리의 금방울이 딸랑딸랑 울렸다.

이상한 침묵이 잠시간 이어졌다. 여수우는 자기의 외투를 벗어 소마의 몸에 던져 주었다.

“참으로 닮았구나.”

그는 나직하게 말을 하고는 말을 몰아 떠났다.

“쓸모없는 자식.”

말을 타고 아소륵 앞을 지나며 여하가 작게 한마디 뱉었다.

여응양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막말이냐.”

여하가 목을 꼿꼿이 세우고 대꾸했다.

“아무리 그래도 우리 집안 아들인데 감히 칸의 아들이 괴롭히려고 하다니요. 쓸모없는 놈이 아니고 뭐겠습니까?”

여응양이 고개를 저었다.

“칸의 일에는 함부로 말 얹지 마라.”

“흥! 나는 칸이고 뭐고 신경 안 써요. 정말 이해가 안 됩니다. 형님은 칸들과 가깝게 지내지만 그 노인네들한테 뭐 좋은 게 있나요? 내가 비막간의 말을 다른 건 다 무시해도, 이 말 하나는 옳습니다. 칸들이 언제 우릴 지지해준 적 있습니까? 언제 우리 형제의 체면을 세워준 적 있냔 말입니다. 잡놈의 새끼가 감히 방자하게 굴다니. 비막간이 안 나섰으면 내가 그 자식 얼굴을 후려쳤을 겁니다!”

여응양은 약하지도, 세지도 않게 아우의 이마를 툭 쳤다. 여하는 입을 비죽이며 마침내 입을 다물었다.

여응양이 시선을 떨궈 아소륵을 쳐다보며 작게 말했다.

“별일 없으면 밖에 나와 놀지 마라. 몸도 안 좋은데 장막 안에 있어. 아버지 걱정하신다.”

여응양과 여하도 심복들을 데리고 떠나갔다.

광활한 경기장에는 아소륵과 그의 심복들만 남았다. 철안은 자신의 외투를 벗어 주인의 어깨에 걸쳤다. 몰아쳐 오는 바람에 아소륵은 살짝 몸을 떨었다. 그는 한참 동안 꿈쩍도 하지 않고 몸을 떨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검은색 기마 초병(哨兵)이 여수우의 말 앞으로 질주해 왔다. 말에 타고 있던 심복이 구르듯 말에서 내려왔다.

“1왕자!”

“무슨 일이냐?”

여수우가 성가시다는 듯 외쳤다.

“중요한 일입니다.”

심복이 가까이 다가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동륙에서 사람이 왔는데 급히 1왕자를 뵙겠다고 합니다. 벌써 장막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여수우의 안색이 순간 변하더니 고개를 돌려 형제들을 힐끗 보았다. 그런데 귓가에 웅장한 북소리가 들려왔다. 심복들도 안색이 돌변했다.

“기고(夔鼓), 기고! 금장의 기고다!”

심복들이 외쳤다.

성안에서 전해지는 북소리는 점점 더 웅장해졌다. 사람의 가슴을 두드리듯 쿵쿵 귀를 울리며 불안감을 조성했다.

금장궁 앞의 ‘현장(玄帳)’에는 한쪽 면이 검푸른 색인 커다란 북이 있었다. 북 표면은 악어가죽처럼 거칠었고 만져보면 쇠처럼 단단했다. 대군의 부친인 흠달한왕이 남쪽을 순행하며 사냥하던 길에 잡은 거대한 짐승 ‘기(夔)’의 가죽으로 만든 것이라 전해졌다. 대군이 장군과 대신들을 급히 소집할 때마다 금장궁 시위들은 이 북을 쳤다. 금장궁의 시위 하나가 말을 타고 질주해 오더니 마편을 높이 들어 올리며 소리쳤다.

“서두르십시오! 대군께서 왕야와 왕자, 장군, 각 가문의 수령들 모두 금장궁으로 오라십니다! 벌써 북을 한 차례 쳤습니다!”

동륙, 하당국 남회성.

하얀 손가락 두 개가 검은 돌을 집은 채 바둑판 위를 조용히 맴돌았다. 한참 만에야 탁 소리가 나며 바둑돌이 내려앉았다.

맞은편의 사람이 판세를 훑어보더니 살며시 고개를 끄덕이고는 담담하게 바둑판을 밀었다.

“신이 졌습니다.”

“탁발 경. 아직 반이나 남았는데 한 수 모험을 둘 생각은 없는가? 사불상도 사투를 벌이면 호랑이도 무서워한다고 들었네만.”

“바둑은 심리전으로 마음을 다스리는 기술이며 바둑을 두는 솜씨는 중요치 않다 들었습니다. 이미 저는 바둑판에서 궁지에 몰렸으니 필사적으로 둔다 한들 국주께서 실수할 때를 노려야 하지요. 탁발은 무사로서 사대부의 의중은 헤아릴 수 없으나 그런 일은 하고 싶지 않습니다.”

“허허허허.”

국주가 크게 웃으며 점잖게 물었다.

“사대부의 생각을 헤아리지 못한다니? 탁발 경은 북륙에서 태어났으나 남하한 지 십수 년으로 이미 품행이 삼공구경(三公九卿)의 풍모를 갖췄거늘.”

신하는 옷매무새를 정돈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오른손으로 검은색 외투를 젖히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

“국주께 큰 은혜를 입은 소신은 그저 국주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

대국을 하던 두 사람의 옷차림은 완전히 달랐다. 오십을 넘긴 국주는 구류(九旒)가 늘어진 검은색 두건을 썼으며 청색 긴 옷을 입고 넓은 띠를 둘렀다. 겉에는 비단으로 된 중간 길이의 두루마기를 둘렀으며 허리춤의 청색 띠에는 산현옥 하나가 영롱하게 장식돼 있었다. 반면 신하는 가닥가닥 땋은 머리를 소 힘줄로 뒤통수에 한데 묶었고 몸에는 번지르르한 낡은 가죽 갑옷을 걸쳤다. 만족의 유목민 같은 차림새였지만 유일하게 새카만 외투 위로 어렴풋이 드러나는 기(夔) 문양만은 동륙 장인의 솜씨였다.

국주는 옷소매를 바로 하고 조용히 몸을 일으키더니 혼자 천천히 걸었다. 탁발은 감히 국주를 등한히 할 수 없어 뒤를 따랐다.

넓은 일곱 칸의 궁전은 서늘하리만치 고요했다. 높이 들어 올려진 처마가 대부분의 햇빛을 차단해 실내는 온통 어두웠다. 때문에 국주의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다. 탁발은 살짝 고개를 숙였다. 거울처럼 반지르르한 대리석 바닥 위로 자신의 모습이 되비쳤다. 머리가 희끗희끗하고 갖은 고초가 새겨진 얼굴이었다.

‘벌써 늙었나.’

탁발은 속으로 자문했다.

그는 북륙의 바람을 떠올렸다. 동륙의 온화한 바람과 달리 그곳의 바람은 시원한 칼날 같고 만족의 목구멍을 따갑게 찌르는 독주 같았다. 유목민은 말 떼를 몰아 세찬 바람 속을 달리다 보니 유난히 빨리 늙었다. 그의 아버지가 지금 탁발의 나이였다면 완전히 노인처럼 보일 터였다. 매번 아버지의 거친 손을 어루만질 때면 그는 사암을 만지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부친은 여전히 활을 들고 말을 탔다. 말안장에 걸린 소가죽 술 부대에는 맹렬한 불처럼 목구멍이 타들어 가는 독주가 담겨 있었다. 술에 취하면 그의 아버지는 아들을 데리고 근처의 가장 높은 풀 비탈에 올라 조상 대대로 전해 오는 열종금(烈鬃琴)을 켰다. 갈라진 금 소리가 바람에 왜곡되면서 조상들의 혼이 함께 노래를 부르는 듯했다.

‘아버지…….’

탁발의 마음속에 그 호칭이 메아리쳤다. 끝없는 어둠 속에서 목소리 하나가 조용히 말하는 듯했다.

“탁발 경?”

국주가 걸음을 멈추고 갑자기 고개를 돌렸다.

“오늘 그대를 갑자기 들라 한 것은 옷을 하사하기 위해서만은 아니네. 경도 짐작은 했겠지?”

“네!”

탁발이 살짝 몸을 숙이며 대답했다.

“내감이 급히 부르기에 군국(軍國)의 대사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맞네. 큰일이지.”

두 사람은 어느새 창가에 다다랐다. 국주가 새하얀 손을 내밀어 창틀을 두드리며 북쪽 하늘가를 바라보았다.

“탁발 경이 처음 하당에 왔을 때 기병대를 세우고 싶다고 했었지. 북륙의 튼튼한 말을 들여와 기마궁술을 가르치겠다고 했지만 내가 허락하지 않았어.”

국주가 담담하게 말을 이어갔다.

“지금 리국의 뇌기, 순국의 풍호도 모두 북륙의 말을 타고 진북의 출운기도 말타기와 활쏘기에 적수가 없네. 이들은 동륙의 3대 기병으로 불리지만 우리 하당의 기병은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았지. 그대는 내가 때를 놓쳤다고 생각하는가?”

“그럴 리가요. 국주께서는 장막 안에서 산가지로 점을 쳐 천 리 밖의 승패를 결정지으시지요. 이는 일개 기병대가 뒤집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국주가 웃었다.

“틀리면 틀린 것이지. 인정 못 할 것도 없네. 그러나 우리도 곧 기병대가 생길 것이야.”

“기병대요?”

“최소 5만의 기병대일세. 만족의 최고 준마를 타고 며칠 밤낮을 쉬지 않고 달릴 수 있으며 기마궁술에 정통하지. 탁발 경은 어떠한가?”

탁발 경의 얼굴에 감동의 빛이 어렸다.

“5만 명요?”

5만의 만족 기병이면 동륙을 휩쓸어 버릴 수 있는 힘이었다.

“오늘 아침 북륙 청양부의 사자를 자진전(紫辰殿)에서 만났네. 그가 만족 대군의 선물을 가지고 왔어. 우리 양국은 서로 인질을 교환하고 피를 나눈 동맹이 되기로 했네. 청양부의 아홉 부대와 북륙 최강의 기병이 이제 우리 하당의 벗이 되었다네!”

“청양과 동맹을 맺으셨습니까?”

탁발 경은 몹시 놀랐다.

“경이 의아해할 만도 해. 동륙과 북륙은 대대로 철천지원수니까. 북륙의 문이 동륙을 향해 활짝 열리지 않은 것은 풍염 황제부터 따지면 50년, 장미 황제부터는 700년이나 되지. 이 소식이 천계에 전해지면 조정 분위기가 어떨지 정말 궁금하군.”

국주가 쌀쌀하게 비웃었다.

“그러나 나는 제도의 무위도식하는 고관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네. 의심을 하든, 탄핵을 하든, 시샘을 하든, 누구도 이번 남북 동맹을 깨지는 못할 것이야! 모든 것이 다 준비됐어. 마지막으로 동륙과 북륙의 문만 완전히 열리면 된다네! 백리 가문의 길이 남을 업적이 시작될 때가 되었어. 탁발 경은 기쁘지 않은가?”

탁발은 외투를 뒤로 휙 털며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탁발산월이 경하드리옵니다. 소신은 국주를 위해…….”

국주가 손을 저으며 그를 제지했다.

“본공을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고 생사의 위험을 무릅쓰겠다고? 나는 그럴 생각이 없네. 탁발 장군을 등에 업고 만세에 길이 남을 업적을 이룰 것인데 어찌 그대에게 목숨을 걸어야 하는 위험한 짓을 시키겠는가? 그저 그대가 나의 의장(儀仗)을 받들고 북으로 가 고리격 대군과 동맹을 맺길 바랄 뿐이네. 이는 남북 동맹에서 가장 중요한 업적일세!”

탁발산월은 넋이 나간 듯 아무 대답이 없었다.

국주가 미간을 찌푸렸다.

“왜 그러는가, 설마 원치 않는 겐가?”

탁발산월은 꿈에서 깨어난 듯 몸을 흠칫 떨고는 황급히 무릎을 꿇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소신 국주를 위해 목숨을 바칠 것입니다. 죽음이 명백한 길이라도 절대 마다치 않을 것입니다.”

“일어나게, 일어나.”

국주가 다시금 미소를 지으며 탁발산월의 어깨를 두드렸다.

“탁발 경. 별말을 다 하는군. 하당의 관리가 된 10년간 밤낮으로 정무에 힘써온 그대인데 본공이 어찌 경의 마음을 모르겠는가. 탁발 경과 식 장군은 나의 오른팔과 왼팔로 누구 하나도 없어서는 안 되네. 부디 과거의 앙금은 털고 한마음으로 협력해 주길 바라네. 최근 몇몇 소인배가 조정에서 쓸데없이 입을 놀리지만 그 점은 우려하지 말게. 비록 그대가 북륙 출신에 초원에서 자랐지만 본공은 그대를 오랑캐처럼 대우하지 않았네. 탁발 경의 도량과 인품은 동륙의 명문 세가들도 비할 바가 안 되지…….”

국주가 옷소매를 털며 당당하고 차분하게 말했다. 그러나 탁발산월이 내내 일어나지 않고 무릎을 꿇고 있으며 드드득 작은 소리가 울릴 정도로 그의 손톱이 대리석 틈을 파고들었다는 사실은 알아채지 못했다.

“모든 준비는 다 해 두었네. 더 필요한 게 있으면 홍려시(鴻臚寺)에 말하게. 나는 남회에서 매일 북쪽을 바라보며 탁발 경이 좋은 소식을 가져오기를 기다리겠네!”

국주가 탁발산월을 부축할 생각이 들었을 때는 이미 그가 꽤 오랫동안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있은 후였다.

“국주.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으나 해도 될지 잘 모르겠습니다.”

“말하게. 우리 사이에 못할 말이 무어겠는가?”

“오랭캐와의 사적 동맹은 나라를 배반하는 중죄라는 것이 전대 왕조의 철칙입니다. 우리 하당이 제후국 수뇌부라고는 하나 제도의 소인배들이 이 기회를 틈타 작당을 벌일 수 있으니 경계하셔야 합니다.”

국주가 허허 웃음을 터뜨렸다.

“탁발 경은 아직 동륙에 대한 이해가 한층 부족하군. 오랭캐와 야합을 할라치면 순국이며 진북 어디든 우리 하당보다 지리적으로 우세하지 않은 곳이 있겠는가? 더구나 제후들의 움직임을 제도에서 정말 모를 수 있다고 생각하나? 이번 일도 천계성에서 누군가가 지켜보고 있네. 다만 황실에서는 우리를 막지 않을 것이야. 이는 내가 보장하지.”

멀리 높은 누각에서 그윽한 운판(雲板)1) 소리가 들려왔다. 태양이 서쪽으로 드리웠고. 한 시진만 지나면 저녁이었다. 향을 피운 화로를 받쳐 들고 근정전 앞을 지나던 시녀들은 탁발산월이 무릎을 꿇고 국주에게 예를 올리는 모습을 보았다. 국주는 앞으로 나아가 그를 부축해 일으키며 손을 굳게 움켜잡았다. 희망에 가득 찬 모습이었다.

* * *

1) 양쪽 끝이 구름 모양인 판자 형태로 옛날 관청·세도가·사원 등에서 시간을 알리던 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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