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주표묘록-23화 (23/360)

23화

2장. 세자 (2)

피리 소리가 멈춘 지 한참 만에야 아소륵은 정신을 차렸다. 소마는 피리를 아소륵 앞에 건네주고는 다시 고개를 숙이고 바느질을 했다. 아소륵은 방금 전 소마의 운지법을 생각하며 취구를 입가에 가져다 댔다. 그는 순간 멍해졌다. 코끝에 따스한 향기가 옅게 감돌았다. 아소륵은 취구 가까이 코를 가져다 대고 냄새를 맡았다. 그 향기는 피리 구멍에서 흩어져 나왔는데 사향(麝香)처럼 강하면서도 가볍게 나부끼며 코끝을 살며시 스치고 지나갔다.

“소마. 향 발랐어?”

소마는 의아한 눈으로 그를 흘끗 보고는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네 체향(體香)인가 보다.”

아소륵이 말하면서 피리를 소마 앞으로 건넸다.

소마는 냄새를 맡아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아소륵은 살짝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럽게 소마의 목 주변으로 다가가 냄새를 맡았다. 정신이 번쩍 든 소마는 당황하며 그를 단번에 밀쳐냈다. 두 사람은 수풀 속을 굴렀다. 자잘한 노란 꽃들이 나비가 날개를 퍼덕이듯 하늘하늘 날아올랐다가 사뿐히 떨어져 내렸다. 아소륵이 숨을 헐떡였다. 소마는 그의 아래 깔려 반항하지도 못했다. 녹색 치마 위로 흩어져 내린 꽃잎은 마치 수놓아진 금색 꽃무늬 같았지만 그보다 더 선명하고 투명했다. 소마의 머리칼이 어지럽게 흐트러졌다. 살결이 흰 목은 분홍빛을 띠었고 이어 푸른 숨결이 엷게 묻어났다. 소마는 고개를 돌려 제 주인에게서 시선을 피했다. 봉긋한 가슴이 살짝 들썩거렸다.

아소륵은 맑고 투명한 눈빛을 소마의 얼굴 위로 떨구었다. 소마는 자기 얼굴이 새빨개졌다고 생각했다. 수천 가닥의 가느다란 핏줄이 피부 아래에서 팔딱팔딱 춤추는 것만 같았다.

“소마. 네 몸에서 좋은 냄새가 나. 어머니랑 같은 향기야.”

일어나 앉은 아소륵은 살짝 정신이 나간 듯 멍해져 있었다.

재빨리 치마를 정돈한 소마는 변함없이 고개를 숙이고 바느질을 했다.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소마.”

아소륵이 무릎을 끌어안고 소마를 쳐다보며 말했다.

“소마는 예쁘고 손재주도 좋고 피리 연주도 잘하잖아. 몸에서는 향기도 나고. 나중에 어떤 운 좋은 사내가 널 데려가려나.”

아소륵은 가벼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내가 그때까지 살아서 볼 수 있을지 모르겠네.”

소마는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아소륵은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기쁨도, 슬픔도 없는 차분한 눈빛이었다.

소마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음을 알아차린 아소륵은 고개를 돌려 그녀에게 웃어 보였다.

“육 의원이 항상 그래. 열심히 요양하면 10년도 문제없을 거라고. 아마도 내가 10년은 더 살 수 있다는 뜻이겠지? 사실 두렵지는 않아. 그냥 태어나서 아무 쓸모도 없이 살다가 소리 없이 죽는 게 달갑지 않을 뿐이지.”

소마의 손이 살짝 떨렸다. 핏방울이 손에 든 비단에 스며들었다.

“너, 손…….”

아소륵이 소마의 손을 움켜쥐었다.

비단을 통과한 바늘이 소마의 손끝을 찔렀다. 커다란 핏방울은 새빨간 것이 꼭 잘 읽은 팥 같았다. 아소륵은 바늘에 찔린 소마의 손을 붙잡고서 싸맬 것이 없는지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입을 벌려 소마의 손가락을 머금으려던 아소륵은 불현듯 정신을 차렸다. 잠시 멍해졌던 그는 멋쩍게 웃으며 손가락을 소마의 입속에 넣어주었다.

소마도 그를 따라 소리 없이 웃었다. 아소륵이 쳐다보자 소마는 다시 고개를 푹 숙였다.

“아이고. 세상에. 대단하신 세자와 진안부의 천한 계집이 여기서 몰래 정을 통하고 있었다니! 역시 표범의 피가 흐르는 여씨 가문의 후손이었네?”

아소륵은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십수 명이 풀비탈 아래에서 뛰어 올라와 어느새 두 사람을 둥글게 에워싸고 있었다. 두꺼운 비단옷을 걸친 무사들이었다. 앞장선 이는 반짝이는 맨머리에 굵게 한 가닥으로 땋은 변발을 정수리에서부터 늘어뜨리고 있었다. 금실로 칭칭 감은 변발의 뿌리 부분에는 비둘기 알만 한 크기의 보석이 꽂혀 있었는데 햇빛 아래에서 번쩍번쩍 빛이 났다.

“단호?”

아소륵은 그를 알아보았다. 태과이 칸의 막내아들 단호였다. 청양부의 칸 넷 중에서 태과이 칸은 대군의 가장 나이 많은 형으로, 보유한 토지도 가장 넓고 노예도 가장 많았다. 서쪽의 화뢰원에서부터 동쪽의 동운산까지 초원 곳곳에 그의 목축민들이 살았다. 열다섯 살인 단호는 태과이가 가장 총애하는 아들이었다. 한 마리 송아지처럼 건장한 체구에 살집이 덕지덕지 붙은 얼굴은 제 아비를 닮은 구석이 있었다.

단호는 손에 홀쳐 감은 말채찍을 유유히 돌리며 곁눈질로 아소륵의 두 눈을 힐끗 보더니 갑자기 앞으로 성큼 나아가 그를 바닥에 밀쳐 넘어뜨렸다. 소마가 아소륵을 부축하러 가려고 했지만 단호의 심복 무사들이 무릎 뒤를 발로 차는 바람에 그대로 넘어져 아소륵의 등에 부딪혔다.

아소륵은 일어나려고 발버둥 쳤다. 그러나 단호가 또 그의 어깨를 밀쳐서 재차 풀밭에 넘어지고 말았다.

단호는 의기양양하게 웃었고 그의 심복들도 따라 웃었다. 그들은 아소륵과 소마를 에워싸고 천천히 원을 그리며 돌았다. 변발 위의 보석에 햇빛이 굴절되면서 눈부시게 반짝였다. 아소륵은 저도 모르게 팔을 들어 눈을 가렸다. 단호는 빙글빙글 돌다가 갑자기 쭈그리고 앉아 소마의 아래턱을 쥐었다. 소마는 재빨리 피하며 아소륵의 팔을 꼭 붙잡았다. 단호가 또 소마의 귀를 쥐었다. 이번에는 소마도 피하지 않고 단호의 손가락을 호되게 깨물었다.

“아얏!”

단호는 펄쩍 뛰어오를 뻔했다.

“이 계집애가 날 깨물었어?”

단호는 손가락을 빼냈다. 두 줄의 잇자국에 어렴풋하게 피가 맺혔다. 심복들이 말채찍을 잡아채며 다가왔으나 단호가 그들을 제지했다. 그는 고개를 숙이고 표독스럽게 자신을 쳐다보는 소마를 보았다. 그녀의 입술은 점점 붉어졌고 양젖 같은 피부 아래는 은은한 분홍빛을 띠었으며 햇빛 아래 눈동자는 푸른빛을 머금은 듯했다.

“세자?”

단호가 아소륵 앞으로 돌아섰다.

“내가 말 10필에 세자에게서 사고 싶은 게 하나 있는데.”

“뭔데?”

아소륵은 단호의 입에서 풍기는 진한 술 냄새를 견딜 수 없어 뒤로 물러나 소마의 등에 바짝 기댔다.

“이 천한 계집.”

“안 팔아.”

아소륵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소마는 안 팔아. 아버지가 그러셨어. 소마는 팔아서도 안 되고 누굴 줘도 안 된다고. 영원히 나랑 같이 있을 거야!”

“말 10필인데!”

단호가 퉤 침을 뱉었다.

“난 이런 여자를 열 명도 살 수 있어! 팔아도 안 되고, 누굴 줘도 안 된다고? 그럼 내 장막에 좀 빌려줘. 네 계집이 나를 깨물어서 단단히 벌을 줘야 화가 풀릴 것 같으니까.”

“너… 대체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

아소륵은 심장이 옥죄어들었다. 그는 손을 내밀어 소마의 손을 꼭 잡았다. 단호가 웃으며 말했다.

“넌 아직 어려서 말이야, 히히. 말해도 몰라.”

단호가 손을 뻗어 아소륵의 옷깃을 움켜쥐었다.

“자. 우리 씨름 한판 하자.”

키가 크고 힘이 센 그는 아소륵을 통째로 들어 올렸다. 아소륵은 허둥대며 몸부림쳤지만 힘을 쓸 수 없었다. 그저 소마의 손을 꼭 그러쥐고 있는 수밖에는. 단호가 갑자기 힘을 주며 아소륵을 내던졌다. 소마를 붙잡고 있던 손도 놓치고 말았다. 수풀 속에 던져진 아소륵은 온몸이 안 아픈 곳이 없었다.

단호가 거칠게 소마의 팔목을 틀어쥐고 입안 가득한 술 냄새를 소마의 얼굴에 내뿜었다. 그는 고개를 돌려 자신의 심복들에게 외쳤다.

“세자를 포위해. 못 일어나게 하고!”

일고여덟 명이 재빨리 다가가 아소륵을 꽁꽁 둘러쌌다. 아소륵은 고개를 들었다. 햇빛이 전부 가려지고 파란 하늘밖에 보이지 않는 것이 꼭 우물 안에 있는 느낌이었다. 일어나려 했지만 머릿속에 벌떼가 웅웅 날아다니는 것 같았다. 아소륵은 버둥거리며 간신히 무릎을 꿇었다. 그런데 누군가가 어깨를 눌러 일어나지 못하게 했다. 아소륵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온몸이 무거워져 말도 나오지 않았고 그저 바닥에 쓰러지고만 싶었다.

단호의 웃음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발버둥 치는 소리와 뒤엉켜 싸우는 소리가 들렸다. 그 사이로 가는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무리에서 이탈한 기러기의 구슬픈 울음소리 같았다. 아소륵은 순간 당황했다. 소리가 몹시 귀에 익었다. 인적이 없어 고요한 밤, 소마가 무릎을 부둥켜안고 풀밭에 앉아 눈물을 흘릴 때 나직하게 나던 그 소리였다.

소마는 벙어리라 울음소리를 제대로 내지 못했다.

아소륵은 애써 단호의 심복들 틈으로 내다보려 했다. 그러나 건장한 무사들 사이로 틈을 벌릴 수가 없었다. 그들의 허리 사이, 빛이 새어드는 가느다란 틈으로 녹색 마보 치마가 펄럭이는 것이 보였다. 단호가 큰소리로 웃었다.

“하하하하. 보고 싶냐? 보고 싶어? 넌 본 적 없나 봐? 네가 못 본 걸 내가 먼저 봐주지.”

단호는 두 손으로 소마의 손목을 세게 눌러 두 팔을 벌리면서 그녀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바람에 헝클어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소마는 고개를 숙여 단호를 깨물려고 했지만 깨물 수 없었다. 단호의 술 냄새 나는 커다란 입이 다가왔다.

“아야!”

단호의 두 손에 힘이 풀렸다. 소마가 매섭게 그의 어깨를 깨물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소마를 꽉 끌어안았다. 거대한 힘에 소마는 질식할 지경이었다. 단호는 오만하게 웃으며 자신의 몸에 그녀를 감싸 넣으려는 것처럼 세게 소마를 부둥켜안았다. 단호가 소마의 엉덩이와 다리를 움켜쥐었다. 천 너머로 양의 젖가슴처럼 야들야들한 그녀의 피부를 어루만졌다. 소마의 몸에 푸른색으로 움켜쥔 흔적들이 하나씩 남겨졌다. 단호는 온몸이 숯처럼 달아오르는 기분이었다. 그는 갑자기 소마를 바닥에 눕히고 무릎으로 소마의 다리를 누르더니 거칠게 소마의 옷섶을 잡아당겼다.

단호는 잊지 않고 심복들의 틈새로 보이는 두 눈을 향해 한 차례 웃어 주었다.

아소륵은 갑자기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눈앞에는 온통 잔혹하고 흉악한 장면이 펼쳐졌다. 소마의 옷깃은 허리춤까지 잡아 당겨졌다. 발가벗겨진 등이 새하얗게 빛났다. 그녀는 움직일 수 없었다. 단호가 소마의 가슴팍에 제 얼굴을 묻었다. 소마가 아소륵이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했지만 표정은 없었다. 너무나도 고요한 얼굴에 아소륵은 가슴이 부들부들 떨렸다. 소마의 얼굴은 이미 죽어버린 사람처럼 황량했다.

아소륵은 가슴에서 팔딱거리는 무시무시한 열감이 느껴졌다. 불과 같았다. 그것도 아주 흉악한 불! 그는 있는 힘껏 가슴을 꾹 눌러 그 불을 진압하려 했다. 전에도 경험해본 적 있는 느낌이었다. 그날 저녁, 발병하기 전에도 딱 지금과 같은 증상을 느꼈다. 그는 물론이고 주위의 모든 것을 태워버릴 듯한 흉악한 불이었다! 아소륵은 열감을 억누를 수 없었다. 핏줄을 타고 온몸으로 흐른 불길은 강렬하게 요동치며 온몸을 잡아 뜯었다.

아소륵은 일어서고 싶었지만 그의 어깨를 짓누르던 여러 개의 커다란 손이 더 세게 힘을 주었다.

아소륵은 다시 한번 힘을 냈다. 일어나고 싶었다!

고개를 들자 한데 건장한 무사들은 온통 의아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소륵은 팔꿈치로 한 무사의 아랫배를 가격한 뒤 그의 종아리를 세게 걷어찼다. 무사의 다리뼈가 부러지는 듯한 소리가 났다. 고통에 한 걸음 물러난 무사는 약해빠진 소년을 보면서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소년은 실성한 사람 같았다. 갑자기 광포한 새끼 사자로 변한 듯했다. 아소륵이 그림자처럼 무사에게 달려들었다. 그는 무사의 허리띠를 잡아당기고는 주먹으로 아랫배를 연신 가격했다. 주먹으로 내리칠 때마다 화살이 소가죽에 명중하는 소리가 울렸다.

혈관의 불이 아소륵을 통제했다. 아소륵은 모종의 끔찍한 쾌감이 느껴졌고 강렬한 살기가 그의 정신을 지배했다……. 아소륵은 갑자기 이 무사를 죽이고 싶어졌다. 그의 아랫배에 피 구멍을 내고 싶었다.

무사가 뜨거운 피를 토하며 수풀 속에 고꾸라졌다.

단호와 소마가 아소륵의 시야에 들어왔다. 단호의 피둥피둥한 얼굴은 온통 놀라움과 의아함으로 가득했다. 단호가 미처 피할 새도 없었다. 그의 눈에 아소륵은 한 덩이 허영(虛影)처럼 변했다. 초원의 사내대장부들은 칼을 뽑을 때 칼이 사라져 안 보일 정도로 무척 빨랐다. 하지만 인영이 흐릿해질 만큼 빠른 사람은 없었다. 아소륵이 다리를 들어 단호의 얼굴을 세게 짓밟았다. 단호가 바닥에 넘어졌다. 아소륵은 훌쩍 뛰어올라 무릎으로 단호의 얼굴을 내리찍었다. 그리고 무심결에 그의 허리춤으로 손을 뻗어 칼을 뽑으려 했다.

그러다 불쑥 소마가 곁에 있다는 사실이 떠올라 단숨에 그녀를 끌어안았다. 소마의 보드라운 몸이 가볍게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아소륵의 어깨 위로 눈물을 떨궜다.

불은 더욱 세차게 타올랐다. 아소륵의 목구멍에서 야수가 울부짖는 듯한 괴성이 흘러나왔다.

“우두커니 서서 뭐 해! 어서 놈을 패! 패라고! 때리란 말이야!”

단호가 심복들에게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상대는 세자였다. 심복들은 속으로 잠시 망설였지만 그래도 제 주인의 명을 거역할 수는 없어 함께 달려들었다. 소마와 아소륵은 서로 부둥켜안고 있었다. 소마는 두려운 눈으로 새로이 그들을 에워싸는 인간 벽을 보았다. 아소륵의 시선이 이리저리 흔들리더니 심복들이 허리춤에 찬 칼자루에 시선이 꽂혔다.

그때 우레와도 같은 말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사람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고개를 돌렸다. 건강한 흑마와 백마 두 마리가 맹렬하게 질주해 다가오고 있었다. 철안과 철엽은 칼을 넣은 칼집을 들고 온 힘을 다해 내리쳤다. 철씨 집안 아들다웠다. 성년이 된 단호의 심복들도 그들의 흉포한 칼에 겁을 집어먹고 저도 모르게 몇 걸음 물러났다. 철안은 말 등에서 뛰어내려 단호의 심복 중 한 명을 머리 위로 높이 들어 올렸다가 있는 힘껏 바닥에 내던졌다. 철엽은 말머리를 돌리며 아소륵을 말 등으로 당겨 올렸다. 철안은 맨가슴을 드러낸 소마를 보고 순간 머리가 세 개는 되는 것처럼 많다고 생각했다.

철안은 민첩한 흑마를 한 바퀴 빙 돌려 왔다. 그는 이를 악물고 발을 높이 들어 가장 가까운 곳의 무사를 뻥 차버리고는 소마의 허리를 그러안고 몸을 돌려 말에 올라탔다.

단호의 심복들이 에워싸며 다가오려 하자 철안이 낮게 소리를 질렀다. 순간 칼 빛이 번개처럼 번쩍했다. 칼집에서 칼을 뽑아 든 철안이 몸을 내밀어 칼로 주위를 쓸어버린 것이었다.

누구도 철안의 칼끝을 막을 엄두를 내지 못했다. 사람들은 철씨 집안 자식들을 잘 알았다. 그의 칼에 무릎 꿇은 청년 무사의 수는 헤아릴 수도 없었다.

군마가 단호와 그의 심복들을 그 자리에 내버려둔 채 그들 사이로 곧게 달려 나갔다.

나태하게 풀을 뜯어 먹던 망아지 ‘무쌍’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그들을 쳐다보더니 “힝, 히잉.” 작게 한 번 울고는 재빨리 그들을 따라 달려갔다.

한참을 넋 놓고 있던 단호는 그제야 펄쩍 뛰며 소리쳤다.

“쫓아가! 쫓아가라고! 이 쓸모없는 놈들아! 이대로 우리 집안 망신을 시킬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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