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주표묘록-21화 (21/360)

21화

제1장. 만족의 주인 (20)

9월 초닷새.

비가 내린 밤하늘은 유달리 맑고 깨끗했다. 별빛은 마치 빗물에 씻긴 듯했다.

대군은 금장궁의 휘장을 들추고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며칠 가물더니 마침내 비가 내렸군. 마초를 다 수확한 지금 비가 내리다니 참으로 때를 잘 맞췄어.”

금장궁 안. 좌상에 앉은 대합살이 그의 말을 이어받았다.

“올해 마지막 비였을 겁니다. 북풍이 벌써 불기 시작했으니 곧 눈이 내릴 겁니다.”

“올해는 참 좋은 해였네.”

“좋은 해였지요.”

“요 며칠 아소륵이 빠르게 회복하더군.”

좌상으로 돌아와 양반다리를 하고 앉은 대군이 은잔을 들어 올렸다.

“상처에 앉은 부스럼 딱지도 다 떨어졌고 며칠만 더 있으면 흉터도 거의 없어지겠더군. 다만 몸이 아직 허해서 며칠간 고기죽으로 보양할 수밖에 없었다 하네. 그래도 어제 보러 갔을 때는 나와 잠시 대화도 했어.”

대합살이 술잔을 들어 술을 한 모금 마시고는 뻐끔뻐끔 담배만 피웠다.

“모든 것이 좋아지면 좋겠군.”

대군이 대합살의 눈을 쳐다보며 말했다.

“아소륵도 괜찮아졌으니 사한도 마음 놓게. 동륙에 사절로 가는 일에 대해 내내 대답해 주지 않았잖나. 언제쯤 대답해 줄 텐가?”

대합살은 잔을 돌리며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단숨에 술잔의 술을 비웠다.

“오늘 저녁에 잘 생각해 보고 내일 아침 금장궁에 알현하러 와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대군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한이 걱정하는 것은 안다네. 청양의 대합살이고 반달 천신의 사자인 그대는 본디 속세의 위에서 한가로이 지내야 마땅해. 그러나 여기에 발을 들이면 빠져나갈 수 없을 테고 목숨까지 걸어야 할지도 모르지. 강요하지는 않겠네. 일체의 의장(儀仗)은 내가 준비해 두었어. 그럼 답을 기다리겠네.”

대합살이 일어나 엉덩이를 툭툭 털었다. 그는 무겁게 킁, 콧소리를 내며 말했다.

“지금 이게 강요지 뭡니까?”

그는 간다는 인사도 없이 어깨를 움츠리고 등을 구부린 채 밖으로 나갔다.

대군은 잔을 들어 멀어져가는 대합살의 뒷모습에 건배를 하고는 고이심 독주를 비웠다.

바람이 풀잎 끝을 스치는 미세한 소리가 들릴 정도로 몹시 고요한 밤이었다.

장막 앞은 사람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을 만큼 조용했다. 화로 안의 숯이 맹렬히 타오르며 아소륵의 창백한 얼굴을 비췄다. 아직 몸에 붕대를 감고 있었지만 주위를 돌아다닐 수 있을 정도는 회복됐다. 그는 손에 풀로 만든 메뚜기를 들고 있었다. 초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장난감이었다. 빳빳한 청색 풀을 엮어서 만든 것으로 멀리서 보면 진짜 메뚜기와 별 차이가 없었다.

아소륵은 손을 대기만 해도 산산이 부서질 정도로 말라비틀어진 풀 메뚜기를 잠자코 바라보았다. 화염이 그의 눈동자 속에서 약동했다.

그는 풀 메뚜기를 불더미에 내려놓으며 조용히 말했다.

“날아가렴.”

“아소륵.”

아소륵이 놀라 고개를 돌렸다. 대합살이 달빛 아래 말없이 서 있었다. 흰 삼베 도포가 바람 속에 춤추듯 펄럭였다. 대합살은 아소륵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함께 불타는 풀 메뚜기를 눈으로 배웅했다. 불빛에 메마른 두 날개가 거의 투명하게 비쳤다. 타버린 재는 춤추듯 날뛰는 화염과 함께 날아올랐다. 풀 메뚜기가 정말 날아가 버린 것처럼.

“예쁘게 잘 엮었구나. 직접 만든 게냐?”

대합살이 물었다.

“철감의 막내아들이 만들어준 거예요. 제가 남겨두었던 마지막 물건이었죠.”

“기억하려고 남겨두었으면서 왜 태워버렸어?”

“제가 너무 나약한 것 같아서요.”

“누가 또 네게 그런 멍청한 소리를 지껄였느냐?”

“아니에요. 제 생각이 그래요. 진안부 일들을 다 잊고 싶었어요. 잊어야 몰두할 수 있었거든요. 하지만 그러지 못했어요. 이 메뚜기를 보면 철감이 생각나고, 가륜첩 유모가 생각났어요. 매일 이런 것들을 생각했어요. 낮에도, 밤에도, 칼을 연습할 때도 생각했죠. 다시는 생각하지 않고 열심히 칼을 배우려고 태웠어요. 아버지께서 저는 파소이 가문의 아들이라고, 강해져야 한다고 하셨거든요.”

“칼? 그건 배워서 뭐 하게?”

대합살이 투덜거렸다.

“그 망할 놈의 검술 연마하다가 병까지 난 게 아니냐. 앞으로 칼 같은 건 잡지도 마라. 우유나 열심히 마시고, 노예들이 해주는 재미있는 이야기나 듣고, 부인이 만들어주는 한타 고기 구이나 먹으면서 유유자적 보내란 말이다.”

대합살은 반질반질한 이마를 긁적였다.

“참. 세자. 내가 점성학을 가르쳐주마! 너는 아마칙 그 맹추보다 똑똑하니 금방 배울 게다.”

아소륵이 미소를 지었다. 거절할 때마다 짓는 아소륵 특유의 미소였다.

“감사합니다, 대합살. 그래도 저는 칼을 배울래요. 아버지께서 그러셨어요. 제가 사내가 되었다고요.”

“네 아버지가 널 놀린 게다…….”

대합살은 말실수를 할까 봐 얼른 입을 꾹 다물었다.

“아소륵. 너는 세자다. 여씨 파소이 가문의 막내야. 네 선조들의 용기와 영광을 네가 다 물려받을 것이야. 앞으로 수천, 수만 명의 용사들이 너를 따르며 너를 도와 전쟁을 할 거다. 남들이 하는 헛소리는 듣지 마. 검술은 뭐에 쓰려고? 검술 실력이 뛰어난 네 아버지라고 적을 몇이나 죽여 봤겠느냐? 하물며 너는 몸도 이제 막 회복했지 않니. 더 쉬렴. 혹시라도 갑갑하면 내가 파태를 며칠 보내줄 테니 데리고 놀아라. 단, 먹이는 제때 챙겨줘야 한다. 배곯아서 살 빠지면 안 돼.”

아소륵이 돌아섰다. 그는 깊이 숨을 들이마시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의 목소리가 유난히 멀게 들렸다.

“대합살은 기억하세요? 내가 처음 돌아왔던 날, 부인을 유모라고 부르려 하지 않았잖아요.”

“기억하지. 영씨 부인이 많이 속상해했어.”

“싫어서가 아니었어요. 유모라는 그 두 글자를 듣는 게 너무 무서웠거든요.”

아소륵이 고개를 돌렸다.

“대합살. 나는 무서워요.”

“무섭다니…….”

대합살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진안부에 있을 때도 유모가 있었어요. 예쁜 분이었죠. 이름은 가륜첩이었어요. 9왕이 병사들을 데리고 진안부에 쳐들어왔을 때 가륜첩 유모는 죽었어요. 칼을 연습하던 날, 많이 힘들었어요. 근데 유모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리더라고요. 너무 무서워서 연습을 멈출 수가 없었어요. 유모가 죽던 장면이 반복해서 떠올랐어요. 유모가 죽는 모습을 제 눈으로 직접 봤거든요. 뭐라도 치지 않으면 진정이 안 될 것 같아서, 그래서 죽기 살기로 힘을 냈던 거예요.”

아소륵은 조용히 말을 이어갔다.

“대합살. 너무 무서워요. 그 장면을 다시 보게 될까 봐 정말 무서워요. 그렇게 큰 화재가 나고, 내가 아는 사람들이 하나하나 죽임을 당하는데 그들을 구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어요. 나는 그들을 구하고 싶었지만 그럴 능력이 없었고요. 대합살, 나는 파소이 가문의 아들이에요. 나는 우리 용사들을 믿을 수 있다지만…. 그들은 누구를 믿을 수 있을까요? 그들이 믿고 기댈 사람이 없다면 내가 그들에게 희망이 되어주고 그들을 구해줄 거예요! 많이 부족한 거 알아요. 하지만… 그때와 같은 일을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아요.”

대합살은 넋을 잃었다. 그는 소년을 품에 끌어안고 싶었지만 앳된 얼굴에 어린 표정을 함부로 모독할 수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합살. 나 엄청 바보 같죠?”

“바보 같지 않아.”

대합살은 가볍게 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멍청한 놈들 말은 듣지 마라. 우리 아소륵은 영웅이 될 거다. 초원의 대단한 영웅이! 그때 내가 말을 타고 깃발을 흔들며 너를 위해 길을 열어주마!”

아소륵이 고개를 숙이며 웃더니 이내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목려 장군을 찾아오셨어요? 밤이 늦어서 장군은 주무실 텐데.”

“아, 아니다. 물건을 좀 찾으러 왔어. 며칠 전에 여기 덤불 어딘가에 떨어뜨렸는데 내내 찾으러 올 시간이 없었거든. 다행히 아까 찾았단다.”

대합살은 잠시 침묵하더니 소년의 손을 잡아당겨 토닥였다.

“아소륵. 내가 멀리 어디를 좀 다녀와야 한단다. 오랫동안 보러 오지 못할 거야. 하지만 이런 네 모습을 보니 마음이 놓이는구나.”

대합살은 허리 뒤에서 청색 가죽 칼집에 든 단도 한 자루를 꺼내 아소륵의 손에 놓아주었다.

“네 아버지가 주는 것이다. 사자왕의 칼이지. 네게 주려고 내가 가져왔다. 자, 꼭 쥐고 있어라. 내가 돌아올 때면 너도 네 형들처럼 건장해져 있을 게다!”

대합살은 그대로 일어나 떠났다. 무슨 결심을 한 듯 뒤돌아보지 않았다.

아소륵은 하얀 옷을 입은 대합살의 뒷모습이 어둠 속으로 사라질 때까지 쳐다보다가 고개를 숙이고 수중의 청색 칼을 보았다. 칼자루의 번지르르하던 가죽은 청색 비단으로 바뀌었고 청색 비단 끈에는 새파란 옥령롱이 매달려 있었다. 밤바람이 옥령롱의 구멍을 통과해 지나가자 한숨 같은 소리가 울렸다.

안정룡은 장막 밖의 무시무시한 소리에 놀라 잠에서 깼다.

처음에는 꿈을 꾸는 줄 알았다. 감히 누가 대합살의 장막 근처에서 이렇게 소란을 피운단 말인가? 그런데 소리가 너무 진짜 같았다. 무기들끼리 맞부딪치는 소리, 고함 소리, 말 울음소리가 한데 뒤엉킨 듯했다. 그는 삭북의 백랑단이 또 북도성을 쳐들어온 줄 알았다. 단도를 쥐고 달려 나가야 할지, 아니면 은신처로 파고들어 귀를 막아야 할지 몰라 장막 안에서 한참을 벌벌 떨었다.

“아마칙, 아마칙! 일어나라, 일어나!”

뜻밖에도 징이 깨진 것 같은 대합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정룡은 이를 갈며 바지춤을 들어 올리고 밖으로 나갔다. 그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대합살을 쳐다보았다. 건장한 청마를 탄 노인네는 제사나 큰 제전 때 입는 화려한 예복을 갖춰 입고 가슴 앞에는 신성한 웅도를 걸고 있었다. 그는 한 손에 철로 된 말등자를 들고서 두꺼운 횃불을 쥔 다른 손으로 말등자를 두드렸다. 불똥이 튀고 소리는 귀를 쩌렁쩌렁 울렸다.

“아마칙, 가자!”

대합살이 청마의 말고삐를 잡으며 큰 소리로 외쳤다.

“게으른 놈아, 죽을 때까지 자려고 그러냐?”

안정룡은 어리둥절해져 물었다.

“가다뇨? 어디를요? 저 방금 잠들려던 참이었어요. 내일 아침에 금장궁에 들어가 대군을 뵈어야 하지 않습니까?”

대합살이 자신의 뒤편을 가리켰다.

“대군? 신경 쓸 것 없다! 우리는 이대로 출발한다. 의장과 군대는 이미 데려왔다. 방금 누군가가 아주 맞는 말을 하더구나. 저들이 누구를 믿을 수 있겠느냐? 저들이 누구도 믿을 수 없다면 내가 나서야지! 청양에는 내가 없으면 안 된단다! 아마칙, 이 스승의 능력을 경험하게 해 주마. 삭북부가 청양의 성 아래 쳐들어왔을 때 나도 귀궁(鬼弓) 무사들을 데리고 성 위에서 활을 쏘았단다!”

대합살의 뒤편으로 정말 50여 명의 날쌔고 용감한 귀궁 무사들이 서 있었다. 호표기 소속 정예병인 그들은 화려한 갑옷으로 무장하고 울부짖는 군마를 탄 채 검치표가 그려진 흰색 깃발을 높이 쳐들고 있었다. 대군이 출행할 때의 의장이었다. 순간 안정룡은 스승이 술에 취해 겁도 없이 대군의 의장을 함부로 사용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대합살이야 취했다고 해도 무사들까지 취했을 리 만무했다. 그들이 탄 말 뒤로 예비용 말이 각각 두 마리씩 비끄러매져 있었다. 분명히 먼 길을 가는 모양새였다.

안정룡은 다가가 대합살의 말재갈을 붙잡고 물었다.

“하지만… 대체 어디로 가는데요?”

“남쪽, 계속 남쪽으로 간다! 바다 남쪽에 대윤이라는 나라가 있지. 아느냐?”

“대윤요?”

안정룡은 놀라 입이 쩍 벌어졌다.

“동륙 황제의 나라잖아요!”

“맞다! 우리는 대윤에 간다! 그곳은 도처에 황금과 옥석이 널렸고 수확철에는 목화와 밀이 산보다 더 높이 쌓인다지. 방목을 하면 말이 1년 내내 달려도 바닷가에 닿지 못할 정도란다! 그곳은 황금의 나라다. 우리 만족이 천 년간 얻지 못했던 땅이지. 하지만 지금은 달라졌다. 우리가 곧 그곳에 갈 것이다. 내가 없이 그들은 안 된다! 내 직접 청양을 위해 황금의 나라로 향하는 문을 열 것이야!”

남쪽을 바라보는 대합살의 눈동자에는 안정룡이 한 번도 본 적 없던 빛이 번뜩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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