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제1장. 만족의 주인 (19)
“무방… 무방지경!”
그가 마지막 남은 힘을 다해 소리질렀다.
“이것은 환상이다!”
온몸의 모공이 활짝 열리며 땀이 한꺼번에 다 빠져나왔다. 그는 완전히 무너진 듯 고개를 쳐들고 뒤로 나자빠졌다.
누군가가 그를 부축했다.
그는 여전히 손에 거울을 든 채 밤하늘 아래의 초원에서 모닥불을 마주하고 앉아 있었다. 대군은 대합살 옆에 앉아 두 손을 그의 어깨에 얹고 있었다. 대합살이 정신을 차리기 전 대군이 죽을힘을 다해 그를 흔들었지만 그는 전혀 느끼지 못했다.
“무방…….”
대합살이 숨을 몰아쉬었다.
“무방지경이더군요!”
“역시 초원에서 가장 지혜로운 분답습니다.”
산벽공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맞습니다. 밀라의 심환술, 무명류의 ‘무방지경’이지요. 대합살이 간파하셨으니 제 술법도 실패로군요.”
“사한! 무… 무엇을 보았나?”
대군이 다급하게 물었다.
대합살이 숨을 고르며 대군의 눈을 쳐다보았다. 한참을 침묵하던 그는 완전히 지쳐 고개만 내저었다.
산벽공이 모닥불에 나뭇가지를 하나 더 넣으며 말했다.
“물으실 필요 없습니다. 대합살께서 본 것과 지난번 대군께서 본 것은 다른 광경입니다. 이는 당연한 일이죠. 무방지경 자체는 마술이지만 비추는 것은 그 거울을 보는 사람의 본심이니까요. 대군의 가장 큰 두려움이 거울에 비치게 되지요. 대합살의 두려움은 무엇이었습니까?”
산벽공이 느릿하게 물었다.
대합살은 대답하지 않고 그의 눈만 빤히 쳐다보았다.
“사람의 몸과 마음을 마비시켜 허상의 밀랍 마술에 완전히 빠져들게 할 수 있는 자가 이 세상에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정말 무서운 힘이군요.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이 마술을 이용해 얻을 수 있겠어요. 그런데 대체 우리 청양에 뭘 원하는 겁니까? 이 마술로 우리를 속여서 화족의 발아래 무릎 꿇게 하고 싶은 겁니까?”
산벽공이 고개를 저었다.
“우리는 세상의 주인입니다. 우리가 다루는 힘을 속세의 사람들은 영원히 이해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죽은 자를 살릴 수도 있고 산 자를 죽일 수도 있지요. 대지를 가를 수도 있고 설산을 녹일 수도 있습니다. 태양과 같은 광명을 불러올 수도, 끝없는 어둠에 빠져들게 할 수도 있지요. 우리는 별이 인도하는 대로 이곳에 와 만족의 위대한 미래를 대군께 알려드리려는 것뿐 절대 다른 음모 따위는 없습니다. 대합살, 방금 전 밀랍 마술의 진상을 꿰뚫어 보셨지요. 그런데 제가 마술을 멈추지 않았더라도 스스로 환상에서 벗어날 수 있었겠습니까?”
대합살은 잠시 침묵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간파는 했지만 벗어날 수는 없었습니다. 산 선생께서는 환상 속에서 날 죽일 수도 있었어요. 이런 경우는 처음 보는군요. 알아채기는 했어도 나는 선생의 힘에 통제된 채로 선생이 환상을 풀어주었다는 걸 느낄 수 있었습니다.”
“세상의 모든 마술은 간파되거나 혹은 홀린 사람의 지혜가 시술하는 자를 뛰어넘을 때 저절로 와해되는 것이 불변의 이치지요. 그러나 대합살께서 알아채고도 제 마술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은 제가 당시 대합살의 몸에 두 개의 환상을 중첩시켰기 때문입니다. 대합살은 그중 한 가지만 알아본 것이고요.”
자리에서 일어난 산벽공은 몇 걸음 물러나더니 대군과 대합살을 말없이 응시했다.
그는 팔을 들어 올리고 하늘을 향해 작게 한마디 외쳤다.
갑자기 별빛이 사라졌다. 하늘은 여전히 먹구름으로 뒤덮여 있었다. 놀란 대합살은 의아해하면서 일어나 주위를 둘러보았다. 모닥불, 호표기, 검은 말의 무사들 모두 그대로였다. 그러나 검은 말을 탄 무사들의 몸에 서려 있던 제왕 같은 위엄이 사라지고 동륙식 철제 갑옷을 걸친 무사들만 남아 있었다.
산벽공은 깊이 허리를 숙이며 예를 갖췄다.
“대군께서는 사람들을 이끌고 이곳에 도착했을 때 이미 제 환상에 들어오셨습니다. 곧 비가 내릴 듯 음침한 날씨는 우리의 중요한 회합에 어울리지 않기에 별을 환히 빛나게 해둔 것이지요. 제 수행원들도 전부 평범한 무사들이지만 마술로 태곳적 무신(武神)의 추종자인 신비로운 ‘철황’처럼 보이게 해두었고요. 대합살의 말씀을 보완하자면 가장 위대한 마술은 한 사람의 몸과 정신을 봉쇄하는 것이 아니라 온 세상의 몸과 정신을 봉쇄하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진실한 존재를 느낄 수 있지요.
대군과 대합살께 사죄드립니다. 기만할 의도는 없었습니다. 제 힘을 증명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저는 사기꾼이 아니라 위대한 힘과 사명을 가지고 온 사람입니다.”
산벽공은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정중하게 예를 올렸다.
대합살과 대군이 서로 시선을 맞췄다. 대합살은 살며시 침을 삼켰다. 그제야 온몸에 배어 나온 땀이 식으며 얼어붙어 부르르 몸서리가 쳐졌다.
대군이 일어서며 말했다.
“방금 죽은 자도 살려내고 산 자도 죽게 할 수 있다 했는가?”
“네.”
산벽공은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그럼 마법 외에 진정한 힘이 있는지 보여주게. 내 아들이 중병에 걸려 곧 죽게 생겼는데 산 선생이 구할 수 있겠는가?”
“그것이 대군께서 저희를 믿기 위한 조건입니까?”
대군은 입을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벽공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좋습니다. 신의 사명을 위해 제 신분을 낮추고 세상 사람들 앞에 얼굴을 드러내도록 하죠. 세자를 뵈러 가시지요.”
깊은 밤. 목려의 장막에 불이 환하게 밝혀졌다.
하인들은 멀찍이 밖으로 내몰렸다. 호위 무사들이 장막을 철통같이 에워싸 목려와 영씨 부인도 들어가지 못하고 멀리서 쳐다볼 뿐이었다. 한 무리의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시위 무사들의 인도 아래 세자의 장막으로 들어갔고 대군과 대합살이 그 뒤를 따랐다. 마지막으로 대합살이 들어가고 나자 장막의 휘장은 단단히 여며졌다.
밖에 남겨진 검은색 기다란 깃발이 밤바람 속에서 펄럭펄럭 나부꼈다. 사람들은 멀리서 깃발을 바라보았다. 은으로 수놓은 달과 별의 광채가 깃발 위를 이리저리 흘러 다녔다.
“내 아들일세.”
대군이 아소륵의 몸에 덮인 비단을 걷었다.
산벽공은 살짝 미간을 찡그리며 자신의 제자들을 쳐다보았다.
한 청년이 인파 속에서 소리 없이 걸어 나와 침상 가로 왔다. 그가 손가락으로 아소륵의 가슴을 가볍게 누르자 즉시 핏빛이 붕대에 스며들었다.
청년은 눈을 감고 말없이 한참을 서 있었다. 입으로 중얼중얼 송가(頌歌)를 읊조리며 손으로 가볍게 아소륵의 몸을 잡았다. 섬세하고 나긋한 여인이 아름다운 칠현금을 연주하듯 부드러운 손길이었다. 그의 얼굴에 차츰 기이한 표정이 떠올랐다. 저도 모르게 눈을 뜬 그는 아소륵의 몸에서 손가락을 뗐다. 몸을 일으킨 그는 침상 옆에서 물러났다.
“어떠하냐?”
산벽공이 나직하게 물었다. 청년이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처음 보는 상처입니다. 모종의 힘이 내면에서 전신의 피부를 폭파한 듯한 것을 보아 분명 혈관도 찢어졌을 것입니다. 그리고 세자의 내장과 경락(經絡)1)도… 대체 어떻게 다친 것입니까?”
산벽공이 대군을 쳐다보았다.
대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산벽공은 고개를 끄덕이며 청년에게 말했다.
“살릴 수 있겠느냐?”
“방도가 없어 보입니다. 이미 죽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아니면…….”
청년은 무언가 주저하는 듯했다.
“살려내야 한다.”
“네.”
청년이 고개를 숙여 인사하더니 정중하게 무릎을 꿇고 앉아 산벽공의 신발에 입을 맞췄다.
산벽공이 옷자락을 말아 올렸다. 하얗고 매끈한 그의 손목은 세파에 찌든 얼굴과는 사뭇 달랐다. 하인들이 즉시 맑은 물을 대령했다. 산벽공은 두 손에 물을 묻혀 물방울을 청년의 머리 위에 튀겼다. 그는 침상 둘레를 느릿느릿 걸으며 작은 목소리로 송가를 읊조리기 시작했다. 청년은 산벽공을 따라 송가를 읊조리며 침상 한쪽에 앉아 아소륵의 손을 붙잡았다. 두 사람의 노랫소리에는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밀약이 담겨 있었다. 아무도 알아듣는 이가 없는 것으로 보아 절대 동륙의 언어는 아니었다.
대합살은 대군을 잡아당겨 한 걸음 물러났다. 두 사람 모두 어쩐지 편치 않은 기분이 들었다. 송가가 자신의 두개강에서 흘러나오는 것 같았다. 아주 나지막하지만 머리뼈가 마비될 정도로 머릿속이 진동했다.
아소륵의 몸이 살짝 떨리기 시작했다. 청년도 그와 함께 부들부들 떨었다. 원래도 아소륵의 피부는 하얬다. 그런데 지금은 그의 몸 안에서 빛이 내비치는 것처럼 전신의 피부가 투명하게 변했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기이함이었다.
음송 소리는 고대의 저주처럼 더 낮게 가라앉았다. 작은 천둥소리 같기도 했다. 청년은 아소륵의 손을 움켜쥔 채 점점 더 심하게 떨었다. 대합살은 온몸이 마비될 것 같아 저도 모르게 귀를 틀어막고 싶어졌다. 그때 산벽공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더니 가볍지도, 너무 세지도 않게 발을 한 차례 굴렀다. 그러자 모든 소리가 사라지고 장막 안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고요해졌다.
“되었습니다. 환자의 휴식을 방해하지 말고 다들 저와 함께 나가시지요.”
산벽공은 옷자락을 털어 펼치고는 앞장서 나갔다. 청년도 묵묵히 그의 뒤를 따랐다.
오래 기다렸던 영씨 부인은 지체 없이 장막을 향해 달려 들어갔다.
놀라 멍해졌던 대군은 황급히 산벽공을 따라 나갔다.
“산 선생! 산 선생!”
산벽공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가 장막 밖에 멈춰 서자 청년이 그의 발아래 무릎을 꿇었다. 산벽공은 손을 뻗어 청년의 머리를 지그시 눌렀다.
“나의 아이야. 신의 위엄이 너와 함께할지니. 너의 영혼은 소멸하지 않고 영원히 하늘을 거닐며 별과 운명을 함께 할 것이다.”
산벽공이 천천히 손을 거뒀다. 청년의 환희에 찬 미소가 그대로 굳어졌다. 청년의 몸이 갑자기 오그라들었다. 피부는 삽시간에 하얘졌다가 잿빛으로 변하더니 쭈그러들며 뼈를 단단히 감쌌다. 모두가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었다. 나무 한 그루가 단숨에 말라 죽는 것 같았다. 청년은 가죽으로 덮어 씌워진 해골이 되었고 우묵하게 팬 눈구멍에는 생기를 잃은 눈알이 말없이 하늘을 향해 있었다.
산벽공의 손에 짤막한 지팡이 하나가 나타났다. 그가 앞으로 나와 청년의 어깨를 두드리자 해골은 갑자기 허물어졌다. 산산이 부서져 재가 된 표피는 미풍을 타고 사방에 흩날렸다. 회백색 해골은 죽은 지 천 년쯤 된 것처럼 피와 살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세자…. 세자께서 깨어나셨습니다! 깨어나셨어요!”
영씨 부인이 기쁘게 소리치며 장막 안에서 달려 나왔다. 그런데 모두가 경악한 얼굴로 한 무더기의 백골을 쳐다보고 있었고 산벽공은 해골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작게 무언가를 읊조리고 있었다.
대군이 휘장을 걷어 올렸다. 침상 위의 아소륵이 눈을 뜨고 힘겹게 그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하녀들과 의원들이 황급히 몰려 들어갔다. 대군이 장막 밖으로 다시 발을 내디뎠을 때 해골은 이미 수습이 된 후였다. 산벽공은 그곳에서 제자들에 둘러싸인 채 대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동료가 방금 죽었는데도 그들은 슬퍼하는 기색이 없었다. 그중 한 명이 청년의 유골이 담긴 것으로 추정되는 주황색 나무함을 들고 있었다.
“고맙네. 산 선생.”
대군이 다가가 인사했다. 산벽공도 인사에 답했다.
“저희가 위대한 힘을 가지기는 했으나 생명은 신이 내려주신 은혜인지라 사람을 죽음의 손아귀에서 빼앗아오면 언젠가는 그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대군께서도 보셨겠지만 제 제자가 자신을 희생해 세자의 목숨을 구했습니다. 저희는 성의를 갖고 머나먼 동륙에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절대 기만할 뜻은 없으니 대군께서도 같은 성의를 보여주시겠습니까?”
“그대의 성의는 진즉 알았네. 천계성에서 좋은 소식을 기다리고 계시게.”
“별의 신들께서 대군의 머리에 신성한 위엄을 더해 주셨나이다. 대군께서 보내실 사절. 그리고 금서가 바로 증거입니다.”
산벽공은 제자의 손에서 말고삐를 받아들며 말을 이었다.
“여기는 저희가 오래 머물 곳이 아니니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산 선생! 산 선생! 잠시만 기다리시오!”
대합살이 장막 안에서 쫓아 나왔다.
산벽공은 살짝 고개를 까딱하며 물었다.
“더 물어보실 게 있습니까?”
대합살은 몇 번 숨을 고르더니 목소리를 낮추고 물었다.
“선생은 죽을 지경에 놓인 사람도 살리고 경외할 만한 환상도 만들어내는 대단한 힘을 갖고 있으면서 정녕 권력과 한 가문의 존망을 위해서까지 애를 쓴단 말입니까? 대체 무엇이 선생을 백씨 황족에게 충성토록 하는 겁니까?”
산벽공은 잠시 말이 없었다.
“대합살의 눈빛은 매처럼 예리하군요! 우리는 백씨 황족에게 충성하는 것이 아닙니다. 작은 새는 평생 독수리의 마음을 알지 못하지요. 독수리보다 높이 날지 못하고 넓게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어떤 사람의 신하도 아닙니다. 그저 위대한 사명을 가지고 별을 섬길 뿐입니다.”
“위대한 사명?”
“누군가가 이 세상의 종말을 보게 되는 날, 별과 달의 빛무리는 정오의 태양만큼 커다랗게 팽창하고 신들이 벌이는 마지막 전쟁의 빛에 모든 생명이 묻힐 겁니다. 그때 우리의 믿음과 희생을 세상 사람들도 알게 될 것입니다.”
산벽공은 무사의 부축을 받아 말에 올라타고는 고개를 돌려 대합살을 보았다.
“평온한 세상은 없습니다. 신은 이 세상을 그들의 전쟁터로 창조했으니까요.”
넋을 놓고 있던 대합살이 갑자기 그를 몇 걸음 쫓아갔다.
“신들의 최후의 전쟁은…….”
“그만하십시오.”
산벽공은 돌아보지도 않고 말을 이어갔다. 그의 목소리는 말발굽 소리와 함께 멀어져갔다.
“거울 속에서 보신 것들을 저도 예전에 보았습니다. 대합살께서는 만족에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인지라 이미 너무 많은 것을 알아버렸습니다. 영웅 없이 멸망하는 세상을 어떻게 구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모두는 그저 신들의 장기판에 놓인 말일 뿐이지요. 너무 많이 아는 것은 어리석음만 못합니다.”
안정룡은 제 스승의 넋 나간 모습을 그때 처음 보았다. 대합살은 무언가를 깨달은 듯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완전히 어리둥절한 얼굴로 검은색 대오가 지평선 끝으로 사라져갈 때까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 * *
1) 몸의 기혈을 운행하는 통로인 경맥과 낙맥을 아울러 일컫는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