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제1장. 만족의 주인 (18)
“또 보는구려. 산벽공 선생.”
대군이 노인을 향해 몸을 살짝 구부리며 예를 갖췄다.
“감사합니다, 대군. 저희가 늦었습니다.”
산벽공은 만족의 예법에 따라 가슴을 누르며 허리를 숙였다.
“오는 길에 강가에서 물을 마시는 한 무리의 사불상을 만났습니다. 달빛이 부드러운 사불상의 등을 비추는데, 한없이 묘원한 것이 어머니의 가슴을 보는 것 같더군요. 초원의 절경을 감상할 욕심에 조금 늦고 말았습니다.”
그는 검은 외투를 털어 뒤로 펼치고는 모닥불 가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았다.
대군은 대합살을 잡아당겨 산벽공의 맞은편에 앉았다.
“사절이 며칠 전 해협을 넘어 동륙 황제의 친필 서신을 보내왔습니다.”
산벽공이 손짓을 하자 무사들 사이에서 용모가 빼어난 청년 하나가 걸어 나왔다. 그도 산벽공처럼 갑옷을 입지 않았는데 까만 도포 위에는 금색 장미꽃 그림이 수놓아져 있었다. 진홍색 옻칠을 한 함을 든 청년은 대군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고개를 숙이고 함을 높이 들어 올렸다. 대군이 함을 열었다. 안에는 얇은 편지봉투가 한 장 들어 있었다.
대군은 봉투 안에서 금색 편지지를 꺼냈다. 그는 편지지를 손에 들고 거듭 만지작거리더니 대합살에게 건넸다.
“사한. 무슨 내용인지 보게.”
편지지를 받아 든 대합살은 흠칫 놀랐다. 그것은 종이가 아니었다. 달빛 아래 부드러운 빛을 띠는 얇은 황금이었다. 그는 의아한 기색을 억누르며 조심스럽게 황금 서신을 펼쳤다. 맞접혀 있던 두 면의 황금이 떨어지면서 정교한 화족 문자가 드러났다. 황금 표면에 지극히 세밀한 솜씨로 글자가 새겨져 있고 정중앙에는 손바닥만 한 크기의 인장이 찍혀 있었다.
“하늘은 지극히 높고, 땅은 아득히 머니, 황제의 서신이 구주를 군림하노라.”
대합살이 손을 떨었다.
“이것은…….”
“진짜인가?”
대군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진짜입니다!”
대합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고개를 들고 말을 이어갔다.
“제 기억이 틀릴 리 없습니다. …젊었을 때 풍염 황제가 흠달한왕께 보낸 투항 권유 서신을 보았는데 그 인장과 동일합니다. 이지러진 부분까지 똑같습니다. 전대 왕조가 멸망할 때 마지막 황제가 나라의 국새를 대윤의 개국 황제에게 던져서 반 토막이 났지요. 후에 황금으로 잘 메웠지만 그 흔적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고 남았습니다.”
산벽공이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이리도 박학하신 분이라니 분명 존경하는 대합살이시겠지요? 이 금서(金書)는 동륙 천계성 대윤 황제의 국서입니다. 황제 폐하께서 친필로 쓴 서신을 소부(少府)1)의 장인이 새기고 국새를 찍은 것입니다. 저는 황제의 사절이고요.”
“동륙 황제의… 밀사입니까?”
대합살은 더욱 놀랐다. 산벽공이 정중하게 말했다.
“밀사일 뿐만 아니라 미래를 바꾸어 초원의 만족에게 위대한 번영을 안겨줄 수 있기를 바라는 동맹의 사절이기도 하지요.”
“동맹?”
“그렇네.”
대군이 입을 열었다.
“산벽공 선생은 스스로 동륙 황제의 밀사라 칭하지만 사실 제후국의 이름으로 우리 청양부와 맹약을 맺고자 온 것이네.”
“우리는 만족의 강대한 철기병이 동륙 땅에서 종횡무진 달리는 모습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말도 안 됩니다!”
대합살이 단호하게 말했다.
“절대 믿을 수 없는 말입니다! 당신이 화족의 사절이라면 어찌 나라를 배반하는 말을 입에 담을 수 있단 말입니까?”
산벽공은 대합살의 반응을 진즉 예상했다는 듯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풍염 황제 시대에는 당연히 불가능했지요. 그러나 오늘날…….”
그가 잠시 망설이다 말을 이었다.
“두 분도 위무왕 영무예에 대해 아시겠지요? 월주 남만족의 땅을 받은 리국의 제후 영무예는 황제 폐하께서 줄곧 의지하던 충신이었습니다. 과거 좋지 않은 소문들이 돌았으나 그가 여러 차례 왕실을 구했고, 나아가 반란을 도모하던 진국 제후를 섬멸한 공도 있어 폐하께서 거듭 포상을 내리셨지요. 그런데 올해 4월 영무예가 5천 뇌기병과 불쑥 제도에 나타나 천계성을 통제하더니 곧이어 4만 적려군을 안팎에서 공격해 제도의 방벽(防壁)인 상양관을 뚫었습니다. 이제 영무예는 완전한 모략가의 얼굴을 드러내고 황제를 협박해 동륙 전체를 호령하려 하고 있습니다.”
대군과 대합살은 서로를 쳐다보았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영무예뿐만 아니라 패권 장악을 도모하는 제후들이 적지 않다는 사실은 딱히 부인할 일도 아닙니다. 황실의 실질적인 힘이 약해진 지 오래되어 더는 제후들을 탄압할 방법도 없지요. 영무예가 군을 일으키지 않았더라도 다른 제후가 그리하였을 겁니다. 지금 황실이 의지할 수 있는 제후라고는 하당국의 백리 공뿐이지만 하당국의 병력은 다른 제후들에 비하면 참으로 보잘것없습니다. 바로 그 때문에 제가 폐하께 하당국의 이름으로 청양부와 동맹을 맺고 수년간의 속박을 타개하자고 상소를 올린 것입니다. 만족 철기병에 하당의 재력을 더하면 굴복하지 않는 제후들에 대한 걱정 없이 황실의 위엄을 다시 세울 수 있습니다.”
대합살은 여전히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동륙 황제께서는 걱정이 안 된답니까? 만족 철기병이 동륙 땅을 밟는 것은 역대 왕들이 가장 꺼렸던 일이잖습니까?”
산벽공은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
“어쩌면 대군과 동륙의 국토를 나눠야 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제후들의 반란으로 백씨 황족이 수십 대에 걸쳐 쌓아온 근간을 무너뜨리느니 우리를 도와줄 수 있는 동맹국에 국토의 일부를 내주는 편이 낫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10년 후에는 백씨 가문이 자기들의 종묘를 지킬 수 있을지도 장담하기가 어려운 상황이죠. 더욱 두려운 것은…….”
그가 두려운 기색을 드러내며 가슴을 손으로 살며시 눌렀다. 그는 고개를 들고 별을 바라보더니 묵묵히 무릎을 꿇고 앉아 오래된 예를 행했다. 그가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저희가 무시무시한 예언을 들었습니다. 이 세상을 이끄는 주재자가 더는 우리 동륙의 제국이 아니라더군요. 동륙은 분열될 것이고 북쪽에서 강대한 적이 와 제국의 영예를 나눠갈 것이라 했지요. 과보족과 우족은 강한 군대를 지닌 우리 동륙에 큰 위협이 되지 않으니 그 적은 초원인뿐이겠지요.”
“그래서 자발적으로 땅을 내놓겠다는 거요?”
대합살이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웃기는 소리!”
대합살이 언성을 높였다.
“사기꾼 같은 말이군. 대체 누가 그 먼 미래의 일을 예측할 수 있다는 겁니까? 나는 청양의 대합살입니다. 나 역시도 별자리를 보고 길흉을 점칠 수 있으니 산 선생은 그런 공허한 운명 따위를 핑계로 삼지 말고 말해요. 찾아온 진짜 목적이 뭡니까?”
산벽공은 여전히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대합살께서 의심할 줄 알았습니다. 보통 사람은 아득한 미래를 예측할 수 없지요. 하지만 대합살, 저희의 힘을 간과하지는 마십시오.”
그가 갑자기 몸을 일으키더니 하늘을 향해 두 팔을 벌렸다. 황제처럼 그는 별빛 속에 당당하게 섰다.
“우리는 별의 신이 보낸 사자입니다. 신의 귓속말을 들을 수 있고 그분의 위대한 힘을 가졌지요. 대합살은 정말 우리가 이익을 얻기 위해 거짓말까지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가 원하는 것은 다 얻을 수 있는데도 말입니다!”
그가 주머니에서 물건 한 가지를 꺼내 대합살의 손에 건넸다.
“손을 보십시오. 그게 무엇입니까?”
“거울이잖습니까.”
대합살이 의심하며 묵직한 동 거울을 이리저리 뒤집어 보았다. 동륙의 골동품 같았으나 어느 시대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뒷면에 새겨진 기(夔)2) 문양에 두껍게 녹이 슬어 있었지만 정면은 매끈하고 투명하게 광이 나 사람의 머리카락 한 올까지도 또렷하게 비췄다. 산벽공이 미소를 지었다.
“거울이 아닙니다. 만족 청양부의 대합살 사한 소덕랍급이지요.”
“어떻게… 내 이름을 압니까?”
대합살은 화들짝 놀랐다. ‘사한’이라는 이름을 아는 자는 청양부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였기 때문이었다. 산벽공이 조용히 웃으며 말했다.
“대합살의 이름이 아니라 그 사람의 이름입니다. 거울을 보면 보일 겁니다.”
대합살이 거울을 뒤집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자신의 모습이었다.
“산 선생. 대체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겁니까? 내 얼굴이 비친 건데 이게 거울이지 뭡니까!”
그는 말을 뱉고서야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어째서 자신은 명백한 사실을 두고 산벽공과 언쟁을 하는 걸까?
“아닙니다. 그대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청양부의 대합살 사한 소덕랍급은 당신의 손에 있지요!”
대합살은 산벽공의 말이 허무맹랑하다고 생각하며 시선을 거울에서 옮기려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거울 안 넘실거리는 물결 속의 얼굴은 너무나도 낯이 익었다. 그는 희끗한 눈썹 아래로 묘한 눈웃음을 짓고 있었다. 시선이 부딪치자 그자는 대합살을 향해 가볍게 웃어 보였다.
어마어마한 공포에 휩싸인 대합살은 거울을 내던지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나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게다가 대합살이 있는 곳은 초원이 아닌 금장궁이었다!
모든 것이 맞지 않았다. 깨질 듯한 두통이 밀려왔다.
금장궁을 뛰쳐나갔지만 동쪽의 웅장한 동운산이 보이지 않았다. 주변에 울타리도, 다른 장막도 보이지 않았다. 장막을 둘러싼 화로도 없었다. 모든 것이 사라졌다. 남은 것은 수면처럼 평평한 초원과 하늘 가득한 별과 달뿐이었다. 그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몇 걸음 내달렸다. 하지만 아무 소용없었다. 여전히 주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고개를 돌려 보았다. 어느새인가 장막도 사라졌다. 한쪽 면이 환하게 빛나는 거울만이 풀밭에 덩그러니 놓여 하늘을 가득 채운 별빛을 비추고 있었다.
그 사람이 거울 속에서 천천히 일어나 하늘을 향해 두 팔을 펼쳤다. 바람에 그의 흰색 도포가 부풀어 올랐다. 그는 가슴 앞에 청양의 신성한 웅도를 건 채 하늘에 기도했다. 그 사람이야말로 청양의 대합살 여장천 사한 소덕랍급이었다. 그는 오래된 예를 행한 뒤 별하늘에 대고 외쳤다.
별빛이 반짝이기 시작하더니 뜨겁게 불타오르며 눈부신 연하늘색으로 변했다. 주위가 끓는 물에 휩싸인 것처럼 뜨거워졌고 온몸의 모공이 바짝 수축되기 시작했다. 그는 휘청거리며 하늘을 보았다. 눈부신 빛에 순간 눈이 완전히 불타버렸음에도 세간에 없는 그 빛을 또렷이 볼 수 있었다. 기골(氣骨)이 장대한 무사들은 온몸이 밝은 화염으로 가득했다. 그들은 하늘 뒤에서 팔을 마구 휘둘렀다. 천궁을 쳐부술 만한 위력으로 매 일격을 가했고 하늘은 그들의 격투로 인해 갈라지고 불탔다.
온 하늘의 빛이 흘러내렸다. 징벌의 불이 폭우처럼 쏟아지는 듯했다. 모든 빛방울이 대합살에게 떨어지며 그의 몸을 불태워 한 덩이 불로 바꾸려 했다. 하늘은 점점 더 낮게 내려왔고 대지는 녹기 시작했다. 이제는 대합살도 거울 속에서 일어난 사람이 진짜 사한 소덕랍급이라고 믿었다. 그는 동서남북으로 각각 열 걸음씩 갔다. 빛의 발자국은 신성한 낙인이 되어 용암 같은 대지에서 맹렬한 흰빛을 내뿜었다.
푸른색 형상으로 변한 그는 수천수만 배로 부풀어 오르더니 갑자기 몸을 돌렸다. 대합살은 그제야 그의 얼굴이 어느새 산벽공으로 변해 있음을 알았다.
“사방은 위아래가 있고 천지는 높고 둥그노니. 내가 이 세상의 주인이로다!”
산벽공이 손을 대합살의 머리에 얹고 말했다.
“그대를 파멸에서 구해주길 바랍니까?”
대합살은 벌써 무릎에 힘이 풀려 꿇어앉기 직전이었다. 그는 그자의 위엄에 완전히 굴복하고 말았다. 그것은 제왕의 위엄이 아니라 신의 위엄이었다!
대합살은 이를 악물었다. 어쩌면 벌써 이도 화염에 불타 없어졌는지도 모른다.
이가 느껴졌다. 아직 이도 있고, 입도 있었다.
* * *
1) 황실의 기물이나 공예품 등을 제작하는 관청.
2) 산해경에 나오는 용을 닮은 외발 달린 전설의 동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