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제1장. 만족의 주인 (17)
“대군, 대군.”
누군가가 작게 소리쳤다.
“아소륵! 아소륵!”
대군이 벌떡 일어났다.
“아소륵은 괜찮습니다…. 괜찮아요.”
대합살이 황급히 그를 부축해 침대 한쪽에 앉혔다.
“육 의원이 계속 함께 있었습니다. 지금은 피도 멎었고 이마에 열도 내렸습니다.”
두 사람 모두 나이 든 노인이다 보니 언제까지 버텼는지도 기억하지 못했다. 끝내 피로에 지친 대군은 장막 안 의자에 앉았다가 잠깐 선잠이 들었다.
대군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힘껏 마른세수를 하고는 침착함을 되찾았다.
“어떤가? 피를 뽑았는데 어떻게 저리될 수 있어?”
“육 의원도 설명하지 못했습니다. 그저 오랫동안 의술을 행하며 이렇게 피를 흘리는 경우는 처음 보았다고 합니다. 피가 말라버리는 것 같았다더군요. 하지만 세자의 혈기가 아직은 왕성해 잠깐은 버텨낼 수 있다고 합니다. 다만 육 의원이 ‘간양이 항진1)되어 기력이 쇠한다’고도 했는데 무슨 말인지는 못 알아들었습니다.”
“살 수는… 있다던가?”
대합살이 놀라 멍해지더니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살 수 있나?”
두 사람 모두 침묵했다. 한참이 지나고 대군이 조용히 말했다.
“육 의원에게 전하게. 어떤 좋은 약을 쓰든, 품이 얼마나 들든 아소륵을 살려만 달라고 해. 아소륵만 낫게 해 주면 2천 가구의 식솔을 그에게 내릴 것이야.”
“네.”
대합살이 잠시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대군의 어릴 적 성정을 생각했을 때 이렇게까지 아들을 신경 쓸 줄은 몰랐습니다. 솔직히 즉위하고 지난 몇 년 간 피가 차갑게 식은 줄 알았거든요. 달덕리 칸을 죽이고 용격진황을 죽이는 걸 보면서 가끔 생각했습니다. 언젠가는 나도 죽이겠구나 하고요.”
대군이 고개를 들고 장막 천장을 바라보며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한. 그대는 이해하지 못할 걸세. 아소륵은 불쌍한 아이야.”
“불쌍하다고요?”
“애당초 이 세상에 태어나서는 안 되는 아이였어.”
대군의 안색이 돌연 창백해졌다.
“태어난 자체가 잘못이었단 말이네.”
대합살도 낯빛이 변했다.
“설마 대군께서도 현일 어쩌고 하는 당찮은 소리를 믿으십니까? 그 말을 믿는 자들은 모두 무지하고 어리석은 자입니다!”
대군은 완전히 지쳐 손을 휘휘 내저었다.
“아니네, 사한. 그만 묻게. 지금 때가 얼마나 되었지?”
대합살은 장막의 휘장을 걷어 하늘의 색을 보고 대답했다.
“밤이 되었습니다. 저는 아직 버틸 만하니 오늘 밤은 제가 여기서 아소륵을 지켜보겠습니다. 대군께서는 돌아가 쉬십시오.”
“벌써 밤이 되었다고?”
대군이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 일이 남으셨습니까?”
“그렇네!”
대군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보통의 일이라면 그게 무엇이든 아들보다 중요하지는 않겠지. 그러나 이 일은 아닐세. 사한, 내가 그대를 찾아온 것도 원래는 이 일 때문이었어. 아무것도 묻지 말고 당장 나와 출발하세!”
칠흑 같은 밤. 음침하고 어두컴컴한 날씨였다.
기병 소부대가 북도성 성문에 근접해 왔다. 밤바람에 그들의 새카만 외투가 뒤로 곧게 펼쳐졌다. 웅장한 기세의 군마가 전력 질주했지만 일말의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거대한 나무와 암석으로 지어진 성은 밤하늘 아래 뜬금없이 생겨난 큰 산처럼 평탄한 삭방원에 소리 없이 우뚝 솟아 있었다.
“누구냐? 앞으로 한 발짝만 더 떼면 화살을 쏘겠다!”
성루 위에서 갑자기 횃불이 열을 이루며 불을 밝혔다. 성을 지키는 무사의 우두머리가 칼을 한 번 휘두르자 성가퀴 뒤편의 궁수들이 절반의 몸을 드러냈다. 이미 활에 장착된 화살 위로 얼음처럼 차디찬 쇳빛이 반짝였다.
군마가 낮게 울부짖고 기병 부대는 성문 아래에 급히 멈춰 섰다. 대략 40~50명 정도 되는 인원은 전부 까만 외투를 걸쳐 옷차림을 감췄다. 머리에 뒤집어쓴 쓰개 탓에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허리춤의 칼집이 말안장을 두드리며 나는 소리가 불안감을 조장했다.
성을 지키는 무사들은 대오를 지어 성 아래로 달려 나갔고 긴 창을 나란히 일렬로 놓으며 성문을 단단히 봉쇄했다. 우두머리인 백부장이 기다란 칼을 들고 경계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가 칼로 기병대의 우두머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대군의 명령 없이는 그 누구도 밤에 북도성을 드나들 수 없다! 관문을 뚫고 나가려는 자는 그 자리에서 처결될 것이다!”
검은 말 두 마리가 기병 부대 속에서 소리 없이 질주해 나오더니 백부장이 미처 대응하기도 전 그의 목에 칼을 교차해 들이밀었다. 무사 둘은 자신들의 우두머리를 몸으로 가로막은 채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쌍방이 팽팽하게 대치했다. 백부장은 비틀비틀하며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음산하고 차가운 칼에 시선이 닿은 그는 칼날의 세밀한 톱니들을 발견하고 경악했다. 수많은 송곳니가 한데 맞물린 것 같은 톱니가 갈고리처럼 목의 살가죽을 꿰었고 그 때문에 몹시 아팠다.
“호… 호표기!”
그가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초원을 통틀어 이런 톱니가 달린 칼을 능숙하게 사용하는 자들은 청양의 정예 기병뿐이었다. 가죽 갑옷은 물론 적의 몸을 손쉽게 벨 수 있는 칼이었다.
“칼을 내려라!”
기병대 우두머리가 나직하게 외쳤다. 그는 얼굴의 반을 가리던 검은색 쓰개를 털어서 펼치며 희끗희끗한 머리칼과 예리한 칼날 같은 눈을 드러냈다.
두 명의 호표기는 교차해 들이밀었던 칼을 거두고 말을 잡아당겨 조용히 우두머리 뒤로 물러섰다.
“나를 아는가?”
기병 부대의 우두머리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백부장을 직시했다. 눈동자의 흰색 반흔이 어두운 밤 은은하게 빛을 밝혔다.
“대… 대군!”
백부장이 놀라며 무릎을 꿇었다.
“일어나라!”
대군이 나직하게 외치며 그를 제지했다. 백부장은 찍소리도 하지 못하고 빠른 걸음으로 대군의 군마 앞으로 다가갔다.
“성문을 열어라. 그리고…….”
대군이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오늘 밤. 성을 나간 사람은 없다. 너는 아무것도 못 본 것이다. 알겠느냐?”
백부장은 순간 멍해졌으나 재빨리 대답했다.
“네!”
기병 부대가 소리 없이 성문을 통과했다. 백부장은 경외의 눈빛으로 그들의 뒤를 쫓으며 눈으로 배웅했다. 뜻밖에도 호표기 소부대는 횃불 하나 켜지 않았고 말굽도 부드러운 양가죽으로 감싸고 있었다.
초원의 주인인 대군이 자기 성에서 신분을 감추고 밖으로 나가다니 얼마나 중요한 일이기에 이토록 신중을 기하는 것일까?
“바로 여기네!”
대군이 마침내 말고삐를 잡아당겨 말을 멈춰 세웠다. 그는 채찍을 휘둘러 발아래를 가리켰다.
초원을 얼마나 오래 질주했는지 알 수 없었다. 대합살은 그저 기병 부대가 동남쪽으로 달리다가 서쪽으로 방향을 틀어 제법 큰 둘레를 돈 것 같다고 짐작할 따름이었다. 호표기 병사들은 잇달아 말에서 내리며 만일의 습격을 대비해 주위로 방어선을 구축했다.
모닥불에 불이 붙자 대군은 손을 흔들어 대합살을 부르더니 함께 앉아 불을 쬈다.
대군은 생각에 잠긴 듯 말이 없었다. 대합살도 그의 사색을 끊기 곤란해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어디인지 알 수 없었다. 우묵하게 파인 이곳은 주위로 온통 풀이 높다랗게 자란 비탈이 있었으며 바람조차 없을 만큼 고요했다.
“여기까지 끌고 오다니 이상하다고 생각하겠지?”
대군이 갑자기 말문을 열었다.
“전에는 종종 이상한 일을 하시고는 했지요.”
대군이 껄껄 웃었다.
“사한. 내 아버지와 동륙의 풍염 황제가 두 번의 결전을 치를 때 그대가 계속 아버지 곁에서 문서를 처리했지. 안 그런가?”
대합살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벌써 50여 년 전의 일이군요.”
청양부에서 동륙 문자에 정통한 사람은 몇 없었는데 대합살이 그중 하나였다. 점성술에 관한 고서들을 깊이 연구하기 위해 그는 어렸을 때부터 각종 문자를 익히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동륙의 황제가 아버지께 항복을 권하는 서신을 보냈을 때 아버지는 한 문장으로 회신하셨다지. ‘전쟁에서는 죽음뿐, 항복은 없다.’”
“흠달한왕께서는 언제나 짧게 선전포고를 하셨지요. 동륙 황제의 항복을 권하는 서신도 그리 길지는 않았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몇 문장 정도였어요. ‘짧디짧은 인생, 군대란 상서롭지 못한 것이라 쌓여가는 시신은 백성뿐이로다. 왕이 된 자로서 수하들이 저승에서 참형을 받으면 마음이 편하겠는가?’ 두 통의 친필 서신을 두고 동륙의 학사들은 풍격은 다르나 모두 자손에게 교훈이 될 것이라 하였지요.”
대군이 낮게 탄식했다.
“오랜 시간이 흘렀는데도 초원에는 화족과 마주하고 교섭할 영웅이 나타나지 않았어…….”
대군은 침묵했다. 대합살은 고개를 돌려 장엄한 그의 옆얼굴을 보았다. 불현듯 그는 깨달았다.
“동륙에서 사람이 오는군요!”
대군이 손을 들어 올려 그를 제지하며 말했다.
“그렇네. 누가 오긴 오는데 평범한 사람은 아닐세.”
대군이 목소리를 낮췄다.
대합살은 그의 눈에 어린 두려움을 보았다. 대군과 그는 어린 시절부터 친구였다. 당초 삭북부의 기병이 북도성 성문을 쳐부수고 들어왔을 때 수천수만의 군마가 금장궁을 에워싸며 무수히 많은 횃불을 던지는 바람에 대군은 황금 장막과 함께 불바다가 될 뻔했다. 그러나 대군은 언제나처럼 그의 검을 들고 겨우 살아남은 심복 무사들을 지휘해 결전을 치렀다. 만족 대군이 누구를 두려워했던가? 대합살은 아는 바가 없었다. 그가 누군가를 두려워한 적 있다면 손왕과 흠달한왕 같은 역사상의 영웅뿐이었다.
대합살은 담뱃잎을 담뱃대에 꾹꾹 눌러 담고 한 모금 빨아 불을 붙인 뒤 대군에게 올렸다.
“한 모금 하시겠습니까?”
대군은 말없이 받아들고 힘껏 한 모금 빨아들였다. 푸른 연기가 그의 콧구멍에서 솔솔 흘러나왔다. 길게 숨을 내뱉은 대군은 표정을 되찾았다.
“사한. 무엇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힘이라고 생각하는가?”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힘요?”
대합살이 잠시 머뭇거렸다.
“반달 천신의 두 손이 아닐는지요? 왼손에는 천지를 쪼갠 도끼를 쥐고 오른손에는 세상의 모든 생명을 죽일 수 있는 보검을 쥐고 있지요. 두 손으로 도끼와 보검을 잡고 움직일 때마다 천지가 탄생하고 멸망하니까요.”
“내가 그걸 몰라 물었겠는가? 청양의 세자 중에 반달 천신의 이야기를 안 들어본 사람이 어디 있으려고…. 그들은 별이 가장 위대한 힘이라고 하더군. 별의 운행이야말로 천지의 주재자이며 신도 바꿀 수 없다고. 사한도 그리 믿는가?”
“별의 운행요? 그러나 모든 것은 반달 천신의 손에…….”
대합살이 돌연 말을 멈추고 뒤쪽에 귀를 기울였다. 잠시 후 그는 몸을 일으켜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몇 걸음 달려갔다. 마침내 소리가 또렷하게 들렸다. 한 남자의 노랫소리가 어두컴컴한 밤하늘에 울려 퍼졌다. 작은 악기 소리도 함께였는데 피리 같았다. 하지만 피리 소리는 이렇게 낮고 묵직하지 않았다. 호드기 같기도 했는데 그런 것치고는 소리가 너무 웅장하고 힘이 넘쳤다.
“왔구나!”
대군이 일어섰다.
호표기 무사들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더니 대군과 대합살 앞에 반달 모양으로 펼쳐 섰다. 그리고 대군 맞은편으로 손에 든 각궁을 반쯤 잡아당겨 겨눴다.
대합살은 가슴의 단도를 손으로 더듬었다. 전대 대합살이 전해준 ‘웅도’였다. 칼 안에 웅왕의 영혼이 머무른다고 전해지는, 악을 쫓는 신성한 칼이었다. 매일 칼을 지니고 다니면서도 손을 대는 일은 매우 드문 그였지만 지금은 다소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아득한 노랫소리에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것 같았다.
“모두 진정해라!”
대군이 소리쳤다.
대합살은 그 사내의 노랫소리에 주의를 집중했다. 가사는 전혀 알아들을 수 없지만 유독 기괴한 느낌이 들었다. 어디선가 이런 오래되고 심오한 노래를 들어본 것 같았다. 먼 옛날 세상이 생겨나기 전에 고대 돌기둥에 새겨진 상징 문자 같았다. 신이 세상을 창조하기 전 홀로 읊조릴 때 사용했던 것 같은 그런 언어처럼 들렸다.
노랫소리가 가까워질수록 대합살의 마음은 바짝 긴장되었다. 그는 문득 소리가 어디에서 들려오는 것인지 도통 가늠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동서남북. 소리가 들리지 않는 곳이 없었다. 흡사 사방에서 수많은 사람이 훈2)을 불며 낮은 목소리로 고대의 신비한 노래를 부르는 듯했다. 구름을 뚫고 나온 둥근 달이 하늘 한가운데 걸려 있었다. 검은 구름 조각들이 신속하게 걷히며 별이 모습을 드러냈고 온 하늘이 환하게 빛났다. 한없이 넓은 초원 위로 풀잎 가닥마다 달과 별의 서늘한 빛이 반사됐다.
한없이 넓은 초원……. 이 초원에서 나고 자란 대합살이었지만 처음으로 초원이 한없이 넓다는 생각을 하며 저도 모르게 경외감이 생겨났다.
검을 쥔 대군은 꿈쩍도 하지 않고 남쪽만 쳐다보았다. 눈에는 만족의 대군다운 강하고 날카로운 기세가 어려 있었다.
그가 바라보던 지평선이 하늘색 옅은 빛을 띠었고 미약한 빛무리 속에서 그림자가 떠올랐다. 검은 말 그림자 하나가 소리 없이 빛무리 속에 섰다. 말등 위의 무사는 커다란 깃발을 높이 들고 있었다. 그는 거대한 신처럼 체격이 건장했고 몸에는 가시투성이인 무거운 갑옷을 걸치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흡사 고대 벽화 속에서 걸어 나온 듯했다. 윤곽일 뿐이었지만 대합살은 그자의 시선을 느꼈다. 그는 높은 곳에서 굽어보는 제왕처럼 내려다보고 있었다.
더 많은 검은 그림자가 떠오르며 그의 주위로 모여들었다. 모두 비슷한 모습이었다. 군마들은 하얀 김을 뿜어냈고 무사들은 질주하기 시작했다. 바람에 새카만 외투가 펄럭이고 무거운 갑옷 조각들이 서로 부딪치며 촤르륵촤르륵 간담이 서늘해지는 소리가 났다. 선두에 선 무사가 검은 깃발을 높이 들자 그 위로 맑고 시린 은빛이 너울거렸다.
대합살은 물러나려 했지만 걸음을 뗄 수가 없었다. 그는 눈도 깜빡하지 않고 멀리서 달려오는 기병 부대를 맞이했다. 살짝 흐릿했던 노안은 어느새 매우 예리해져 불끈대는 군마의 근육, 말이 뿜어내는 하얀 김, 무사들 갑옷의 조각들이 오르락내리락하는 모습들이 또렷하게 보였다.
무형의 위압감이 벽처럼 그들 앞에 밀려왔다. 대합살은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우두머리 무사가 검은 깃발을 흙바닥에 세게 꽂자 대지가 흔들린 듯했다. 몸을 돌려 말에서 내린 무사들은 묵묵히 가운데 통로를 남기고 두 줄로 갈라져 섰다.
오래 멈춰 있던 구슬픈 소리가 다시 울리기 시작했다. 대합살은 가슴을 짓누르던 힘이 돌연 가벼워진 느낌이 들었다. 거대한 검은 깃발이 갑자기 펄럭였다. 검은 깃발 뒤로 검은 옷을 입은 손님이 서 있었다. 그는 둥그런 훈을 손에 들고 있었으며 머리는 온통 은발인 노인이었다. 후리후리하고 꼿꼿한 체형에 무사들과 같은 검은 외투를 걸쳤는데 그 외투는 끝없는 밤처럼 까맣디까맸다. 그는 깃을 높이 세워 얼굴의 절반을 가리고 있었다.
호표기도 무시무시한 압력을 느꼈다. 누가 명령하지도 않았는데 그들은 어느새 활시위를 팽팽하게 당겼다.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대열은 뒤집힌 반달 형태로 바뀌었다. 지금 화살을 쏘면 저 신비한 부대는 달 모양의 한 가운데에서 수십만 화살에 박혀 죽을 것이었다.
“활을 거둬라! 어서 물러나 우리의 귀빈에게 길을 내어 드려라.”
대군이 호표기를 제지하며 외쳤다.
* * *
1) 양항(陽亢)이라 하여 간의 양기가 높아지는 증상.
2) 큰 홍시 모양의 관악기. 아래는 평평하고 위는 뾰족하며 구멍이 6개가 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