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제1장. 만족의 주인 (16)
대군이 돌아와 자리에 앉으며 말을 꺼냈다.
“내 일이 좀 있어 그대를 찾아왔네. 실은 도와주지 않을까 봐 이렇게 긴말을 늘어놓았던 걸세. 사한, 그대는 내가 가장 믿는 사람이네. 이 일은 그대만 도와줄 수 있어.”
대합살은 놀라 멍해졌으나 이내 풀어진 표정을 바로 했다. 그는 옷을 더욱 단단히 여미며 고개를 갸웃했다.
“거짓말 마십시오. 제가 해야만 하는 일이 뭐가 있으려고요? 말 타고 출정하는 일은 목려만 못하고 대군(大軍)을 지휘하는 일은 9왕만 못하죠. 왕자들도 저보다 훨씬 강하고요. 이 늙은이는 그저 죽은 뒤 반달 천신께서 거둬 천상의 복을 누리게 해주시길 기다릴 뿐입니다. 대군의 거짓말은 안 들으렵니다.”
대군은 아랑곳하지 않고 홀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사한. 우리가 왜 화족과 싸워 이기지 못한다고 생각하나?”
“말해 뭐 합니까? 군마 외에는 투구와 갑옷, 칼과 검, 활과 화살, 이동 수단까지 한참 못 미치지요. 사람 수도 그들보다 적은데 어떻게 화족을 쳐부숩니까?”
대군이 고개를 저었다.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네. 화족만큼 장비가 좋지는 않지만 우리에게는 대지가 있고 최고의 기마병이 있네. 우리 전사들은 가장 용감하고 한 사람이 열 명의 화족을 해치우지. 화족은 여전히 우리를 두려워해. 그러나 우리가 흩어져 있다는 것이 문제일세. 만족 인구가 몇백만이나 되겠는가? 동륙의 제후국 하나가 초원인만 못한데도 우리는 굳이 일곱 개 부락으로 나뉘어 서로 인정하지 않고 다툰다네. 얼마나 많은 사내들이 이 전쟁 속에 죽어 나가야 하는가? 우리가 군대를 조직했다면 동륙은 벌써 물리치고도 남았을 걸세! 마음이 하나로 모이지 않는 것이 우리의 가장 큰 폐단이야.”
대합살은 고개를 갸웃한 채 대군을 쳐다보며 잠자코 있었다.
대군은 목을 가다듬고 말을 이어갔다.
“즉위한 이래 줄곧 생각해 봤네. 왜 우리 초원에는 이리도 많은 전쟁이 일어나는 것일까? 그해 손왕께서 일곱 개 부락을 하나로 통일한 것은 큰 업적이지만 이리저리 따져보면 손왕의 20년 전쟁 후 남은 부족민은 1할이 안 된다네. 9할의 죽음으로 세워진, 피로 얼룩진 업적인 것이지. 나는 책을 뒤적여 셈해 보았네. 40~50년마다 한 번씩 큰 전쟁이 있었더군. 남쪽 해안에서 북쪽 산자락까지 무수한 사람이 죽고서야 한동안 평온해졌지. 그래서 이전에는 대군의 자리를 각 부족이 돌아가면서 맡았는데 40~50년이 지날 때마다 항상 다른 부족이 북도성을 점령했다네. 우리 청양이 북도성을 70년간 점거할 수 있었던 이유는 동륙의 풍염 황제 덕분이라 할 수 있겠지. 풍염의 철려 부대가 북방으로 두 번이나 출정해서 40년 전 우리 일곱 부락의 수십만 명을 죽였기에 청양이 지금까지 유지될 수 있었던 걸세.”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대합살이 눈을 휘둥그레 뜨며 물었다.
“화족이 우리 사람들을 죽이는 것이 도리어 우리에게 좋다는 말입니까?”
동륙의 풍염 황제 백청우, 시호는 무제(武帝)다. 그는 군의 사기를 진작해 변방에 위협을 가하고 끝내 7해(海)를 호령했으며 16국 군대를 연합해 북쪽의 만족을 쳤다. 동륙 왕조에서 보기 드물게 종횡을 두루 다스린 황제였다. 풍염철려는 두 번의 북벌에서 우수한 병기와 전술로 만족 무사들을 죽여 피바다를 만들었고 만족 아이들의 마음에 동륙의 악마로 자리 잡았다.
안정룡도 마음속으로 대합살과 같은 생각을 했지만 입을 열 엄두가 나지 않았다.
대군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맞네. 그때 수십만 명이 죽어 우리 청양의 지위가 보전될 수 있었지. 오랫동안 생각했네. 40~50년마다 일어나는 전쟁은 대재앙처럼 잔재가 사라지지 않았어. 결국 근본적인 문제는 우리 북륙이 척박하기 때문이지. 당장 7개 부락민들만 해도 500만 명인데 우리 한주가 정말 500만 명이나 먹고살 수 있는 땅인가? 귀족들은 새끼 양을 먹고 술을 마시지만 목민들과 노예들은 쥐도 잡아먹지 못하고 굶어 죽어야 해. 이때가 되면 전쟁뿐이네. 전쟁이 일어날 때마다 살아남는 사람은 절반에 불과하지. 200여만 명은 이 땅이 먹여 살릴 수 있는 숫자이고 남은 이들은 전부 여인과 아이들이네. 그러나 또 40~50년이 흐르면서 두 세대가 태어나면 또 이 땅은 그들을 먹여 살릴 수 없게 돼. 그래서 서로의 물과 풀을 빼앗고 소와 양을 약탈하지. 그렇게 또 전쟁을 하고 사람이 죽어간다네. 초과된 인원이 죽어야 나머지가 살아갈 수 있어. 백로합의 반란도 그 예지.”
대합살은 저도 모르게 앉은 자세를 똑바로 고쳤다.
“그대가 대군이라면 어찌하겠는가?”
“저요?”
대합살이 세차게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저는 대군이 될 수 없습니다.”
“동륙!”
대군이 대합살의 손목을 세게 붙잡았다. 순간 그는 통증을 느꼈으나 팔을 빼지는 않았다.
“사한! 동륙일세! 동륙은 곡창 지대네. 모두가 쌀과 밀을 먹을 수 있고 광활한 토지에는 소와 양도 방목할 수 있지. 우리 만족의 기병이 동륙 땅을 밟을 수 있다면 더는 두려울 게 없네! 생각해 보게. 우리 기마병이 천척해협의 남쪽 기슭을 계속 공격했지 않나. 우리는 말이 빠르니 살살 달려도 한 달이면 동륙의 황성에 당도할 테고 그 무엇도 우리의 기마병을 막지 못할 걸세. 검문소를 피해 가장 부유한 지역을 바로 치고 들어갈 수 있어. 왜 우리는 초원을 지키고만 있어야 하는가? 만족도 천하의 주인이 될 수 있네!”
대합살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대군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마치 모르는 사람을 보는 것 같은 얼굴이었다. 안정룡도 대군의 이런 모습은 처음 보았다. 갑자기 대군의 가슴에 불똥이 튀어 맹렬한 불길을 지핀 듯했다. 대군의 눈은 위협적으로 빛났고 창백하던 얼굴에는 혈색이 돌았다. 그는 목소리를 낮췄지만 극도의 흥분감은 감춰지지 않았다. 전쟁을 갈망하는 청년처럼 그의 혈관에 피가 세차게 흘렀다.
“사이에 바다가 있잖습니까!”
한참을 멍하니 있던 대합살이 간신히 외쳤다.
“대군. 잘 생각하십시오. 바다가 아니었다면 대군의 아버지이신 흠달한왕께서 벌써 동륙을 치셨을 겁니다. 바다라고요. 100리 너비의 대해협이란 말입니다. 말은 날개가 없어 하늘을 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배도 없어요. 없다고요!”
“아니! 있네! 우리도 배가 있어! 우리도…….”
대군이 갑자기 말을 멈췄다. 인영 하나가 장막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대군은 허리춤의 칼자루를 잡고 차디찬 검을 검집에서 절반쯤 빼내며 맹렬하게 덮치려 했다.
“대… 대군!”
달려 들어온 사람은 깜짝 놀라며 냅다 무릎을 꿇었다.
안정룡도 번득 정신이 들었다. 무릎을 꿇은 사람은 영씨 부인이었다. 그녀는 두 눈이 빨갛게 부은 채 안절부절못하며 벌벌 떨었다.
“일어나게.”
대군이 검을 거뒀다. 한데 영씨 부인은 일어나지 않았다.
“대군. 세자가… 세자가… 죽을 것 같습니다.”
퍽. 대합살의 손에 있던 담뱃대가 바닥에 떨어졌다.
대군이 황급히 장막의 휘장을 걷었다.
커다란 장막은 사람들로 꽉 차 있었다. 노예들은 소리치며 뜨거운 물과 약, 붕대를 건넸다. 장막 안에는 코를 찌르는 약재 냄새가 자욱했다. 수많은 사람이 침상 주위를 에워싸고 서서 머리를 내젓고 있었다.
“모두 조용히 해라!”
대군이 낮게 소리쳤다.
장막 안은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노예들은 겁에 질려 무릎을 꿇고 길을 비켰다. 대군은 침상 위의 아소륵을 보자마자 안구가 튀어나올 것처럼 눈을 부릅떴다. 그는 황망히 달려가 아들을 부둥켜안았다. 아소륵의 온몸에는 선혈이 낭자했다.
“왜 이런 것인가? 어찌 이렇게 될 수가 있어?”
대군이 분노해 소리쳤다.
아소륵의 얼굴은 무시무시한 적홍색을 띠었고 두 손을 가슴 앞에 꽉 끌어안은 채 쉴 새 없이 몸을 떨었다. 창백한 피부 아래로 혈관이 붉은색 실뱀처럼 불룩 튀어나와 계속 불끈거렸다. 전신이 피투성이였는데 모공에서 배어 나온 피가 커다란 핏방울로 알알이 엉겨 붙어 있었다.
영씨 부인은 두 다리에 힘이 풀려 바닥에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
“저희도… 잘 모르겠습니다. 칼 연습을 하다가 갑자기 이렇게 되셨어요.”
“가서 육 의원을 데려와라! 어서!”
대군이 크게 외쳤다. 그리고 영씨 부인을 가리키며 말했다.
“부인도 의술을 할 줄 알지 않나. 대체 왜 이러는 것이야? 어떻게 이리될 수 있어?”
살짝 일그러진 그의 얼굴은 냉혹하고 무시무시했다.
“육 의원이 왔습니다! 육 의원이 왔어요!”
어린 하녀가 다급히 들어와 보고했다.
“어서 들라 해!”
대합살이 소리쳤다.
남루한 행색의 육자유가 늘 몸에 지니고 다니는 약자루를 들고 장막 안으로 달려 들어왔다. 명의(名醫) 도기진의 제자인 그는 이렇게 당혹스러운 경우는 또 처음이었다. 침상에서 잠들어 있던 그를 누군가 잡아당겨 깨웠던 것. 육자유는 장막에 들어설 때만 해도 불쾌한 기색이었으나 침상의 소년을 보자 안색이 싹 바뀌었다. 침상 가로 달려가 대군을 밀어낸 그는 두 손을 덜덜 떨었다. 소년을 만지고 싶지만 귀한 보물을 깨뜨리기라도 할까 봐 두려운 사람처럼 손도 대지 못하고 아소륵의 몸에서 몇 치 떨어져 있었다. 그가 소리쳤다.
“혈궐… 혈궐입니다!”
“혈궐?”
“온몸의 혈맥이 극도로 왕성해져 체내에서 피를 밖으로 눌러내는 것입니다. 의술에서는 ‘핏방울은 구슬 같고 몸은 붉은 숯 같으며 치아 색은 검푸르니 찰나에 사망에 이른다’고…….”
육자유는 순간 멈칫했다. 대군의 표정이 돌연 망연자실해졌다.
“그럴 리가! 그럴 리 없어!”
대합살이 그의 옷깃을 틀어쥐며 소리쳤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멀쩡했단 말이야!”
“거짓말이 아닙니다.”
육자유가 탄식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의술을 행하는 자가 혈궐 환자를 만나는 일은 어쩌면 평생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하지요. 당대 가장 희귀한 질병을 보는 것이 본디 의원에게는 기쁜 일인 것을, 무엇이 아쉬워서 거짓으로 사람을 놀라게 하겠습니까? 구슬 같은 핏방울과 붉은 숯 같은 몸은 다들 이미 보았겠지요. 이제 입술을 열어볼 테니 보시지요.”
그가 소년의 입술을 헤집어 열자 검푸른 색의 치아가 또렷하게 드러났다. 대합살이 깜짝 놀라 소리쳤다.
“어떻게… 어떻게 이럴 수 있지? 중독된 것인가?”
“아닙니다! 혈궐 증세가 있는 환자는 중독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혈맥이 극도로 왕성해 독성분을 손쉽게 씻어낼 수 있지요. 일반 독극물에 중독되거나, 뱀에 물리거나, 마취약을 복용하는 것도 세자께는 거의 아무런 효과도 내지 못합니다. 치아 색이 검푸른 빛을 띠는 이유는 혈액이 잇몸을 통해 치아에 스며들면서 어혈이 많아져 그런 것입니다.”
“그…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
대군이 마침내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
“저도 3할밖에 장담할 수 없습니다…….”
육자유가 곰곰이 생각하며 말했다.
“지금 침으로 피를 뽑아내지 않으면 늦을지도 모릅니다.”
“피를 뽑는다고?”
“반드시 가장 왕성한 혈맥을 골라 피를 대부분 뽑아내야 살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가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잘못하면 동맥을 벤 것처럼 피가 솟구쳐 나와 살릴 방도가 없습니다!”
“나는…….”
대군이 일어나 장막 안을 초조하게 거닐었다.
“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어떻게 갑자기 혈궐을 앓게 된 것이야…….”
“이전에도 지극히 적은 사례이지만 극도로 지친 상태에서 도리어 혈맥이 왕성해져 혈궐 증세가 나타났던 병례가 있었습니다.”
“극도로 지쳐?”
대군이 홱 고개를 돌려 사람들을 쳐다보며 물었다.
“아까 세자가 뭘 하고 있었느냐?”
“칼 연습을…….”
영씨 부인의 목소리가 떨렸다.
천둥 번개가 정수리에 내리치기라도 한 듯 대군이 비틀거리며 몇 걸음 물러나 침대 한쪽에 털썩 앉았다.
“빨리 결정하지 않으면 가능성은 점점 줄어들 겁니다!”
육자유는 이미 약자루에서 은침을 꺼냈다.
대군이 그의 옷깃을 붙잡고 말했다.
“의원! 내 아들을 살려주게!”
그는 아소륵을 끌어안았다.
“피를 뽑는다 했는가? 나도 본 적 있네. 내가 안고 있을 테니 육 의원이 침을 놓게.”
“알겠습니다!”
육자유가 꺼내든 은침은 두껍고 길었으며 속에 구멍이 나 있었다. 그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아소륵의 미간에 침을 꼿꼿하게 고정했다. 그러고는 다시 한번 숨을 들이마시고 두 손으로 천천히 침을 밀어 넣었다. 그의 손에서 밀려 나가는 은침은 흡사 무사의 검 같았다.
은침이 미간을 찌르고 들어갔다. 은침 한가운데의 구멍에서 핏방울이 폭풍처럼 뿜어져 나와 육자유의 눈에 그대로 쏘아졌다. 그는 통증을 견디지 못하고 소리를 지르며 뒤로 물러났다.
뜻밖에 대군도 아소륵을 품에서 놓치고 말았다.
죽음의 문턱에 이른 소년은 갑자기 눈을 번쩍 떴다. 그의 눈은 악귀처럼 새빨갰다. 그는 두 팔을 휘둘러 주변 사람들을 쓸어버리고는 적홍색 번개처럼 장막 밖을 향해 달려 나갔다. 쓸려 넘어진 사람들 중 어린 하녀 하나는 팔뼈가 부러져 “아야.” 하고 소리쳤다.
“못 달아나게 잡아요!”
육자유가 눈을 움켜쥔 채 큰 소리로 외쳤다.
그러나 핏빛 인간 아소륵은 어느새 장막 입구에 다다랐다.
갑자기 그가 멈춰 섰다. 그는 고통스럽게 경직된 자세로 그곳에 멈춰 있었다. 온몸의 골격이 잘게 바스라지는 소리가 들렸다. 모든 사람의 귀에 그의 무시무시한 심장 박동 소리가 또렷하게 들렸다. 그야말로 북을 치는 것 같았다. 곧이어 전신의 피부가 갑자기 갈라지더니 삽시간에 안개처럼 변한 피가 그 틈에서 뿜어져 나왔다. 아소륵에게서 다섯 자 이내에 있던 사람들은 온몸에 피를 뒤집어썼다. 아소륵의 몸에는 칼자국 같은 무수한 균열이 생겨났고 전신의 피가 한 번에 다 뿜어져 나간 것처럼 몸은 완전히 창백해졌다.
그리고 아소륵은 둔중하게 바닥으로 고꾸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