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제1장. 만족의 주인 (15)
대군은 가슴팍에서 작은 칼을 뽑아 그 머리의 입속으로 찔러 넣더니 꼭 다물린 이 사이를 비틀어 열었다. 이미 죽어 뼈와 근육은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소름 끼치는 낮은 울림에 안정룡은 한층 더 불안해졌다. 그러나 시커먼 입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대군의 입가에는 뜻밖에도 미소가 살짝 걸렸다. 대군이 중얼거렸다.
“여기일 줄 알았네. 여기에 숨겼을 줄 알았어.”
대군이 두 손가락을 용격진황의 입속에 넣고 무언가를 끄집어냈다. 등불 아래, 그가 천천히 손바닥을 펼쳤다. 손바닥 가운데에 옅은 청색의 옥 단추 같은 것이 놓여 있었는데 영롱하고 귀여웠다.
“그해 내가 백로합에게 준 옥령롱이네. 액로가 몸에서는 못 찾았다고 하기에 입속에 있을 줄 알았지. 불어서 소리를 낼 수 있는 거라 백로합은 늘 입에 물고 있었거든.”
대군은 불 앞으로 바짝 다가가 그 옥을 들여다보면서 오래도록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소매로 옥령롱을 슥슥 닦더니 갑자기 입에 집어넣었다. 안정룡은 막으려 했지만 한발 늦었다. 느긋하고 길게 늘어지는 휘파람 소리가 장막 안에 울려 퍼졌다. 아득하고도 무척 아련한 소리였다. 이 옥에서 나는 소리는 유목민의 소뼈 호루라기 소리와 비슷했는데 그보다는 훨씬 부드러운 것이 물을 사이에 두고 멀리서 전해 오는 노랫소리 같았다. 안정룡은 대군이 부는 곡조를 처음 들어보았다. 하염없이 길게 이어지는 소리에는 가을바람 같은 서늘함이 묻어났다. 중간에 몇 번 음이 틀리기도 했는데, 그저 곡조가 끊어졌다 이어졌다 하는 것처럼 들렸다.
너무나도 진지한 대군의 연주에 안정룡은 곡이 끝날 때까지 찍소리도 내지 못하고 들었다.
“진안부의 노래다. 전에 백로합이 들려줬지. 아직도 기억이 날 줄은 몰랐군…….”
대군이 옥을 뱉어 손에 꼭 쥐었다.
장막 안으로 스며든 바람에 등불이 낮게 일렁였고 대합살은 사슴 다리뼈를 작은 탁자에 툭 던졌다.
“그런 우의가 있었다 한들 때늦은 후회입니다. 진안부는 이미 멸족됐고 용격진황도 죽었지요. 대군의 젊은 시절 벗은 이제 이 늙은이 하나 남았는데 저는 언제 죽이실 겁니까?”
대합살은 슬그머니 곁눈질을 하며 등불이 비추지 못하는 어둠을 바라보았다.
안정룡의 심장이 미친 듯이 쿵쾅댔다. 온몸에 맥이 풀려 무릎을 꿇고 주저앉기 직전이었다.
그러나 대군은 매우 담담하게 고개를 가로저을 뿐이었다.
“사한은 내가 진안부를 토벌하지 말았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인가?”
대합살은 두 손을 허리춤에 얹고 긴 옷을 단단히 그러쥐며 엉덩이를 옮겼다. 그는 몸을 틀어 대군에게서 등을 돌리고 말했다.
“알면서 뭘 물으십니까?”
“짐작일세. 그대가 말을 안 하는데 내 어찌 알겠나?”
대합살은 아무 말이 없었다. 몸을 구부린 모습이 꼭 말라서 오그라든 새우 같았다. 대군은 술잔을 흔들며 출렁이는 술을 쳐다보았다. 잠시 정적이 흐르고 대합살이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이며 말했다.
“안정룡. 나가 있어라. 이제 네가 할 일은 없으니.”
대군이 손을 저으며 끼어들었다.
“사한. 대합살의 자리를 안경룡에게 물려주려고 준비하는 것인가?”
대합살은 멍해져 안정룡을 한 번 쳐다보았다가 또 대군을 한 번 쳐다보더니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나가지 말고 있어라. 사한, 말해 보게.”
대합살은 고개를 숙이고 잠시 생각하더니 더듬더듬 문착 가죽으로 만든 작은 주머니를 꺼냈다. 안에는 담배가 들어 있었다. 담배에 불을 붙인 대합살은 푸른 연기를 뱉어냈다.
“몇 년 전 북풍이 세차게 불어 북방의 큰 초목장 몇 곳에는 풀이 드문드문해졌고 철선강 쪽에만 싱싱한 풀이 남았다고 들었습니다.”
낮고 거친 대합살의 목소리는 흡사 이야기를 하는 듯했다.
“당시 삭북, 란마, 사지, 구남 등 큰 부락들 중에 말과 양을 철선강 쪽 진안부 초목장에 풀어놓지 않은 부락이 없지요. 철선강의 초목장이 크면 얼마나 크다고 그 많은 가축을 다 수용할 수 있겠습니까? 풀을 다 뜯어 먹으니 풀뿌리를 먹어야 했고 풀뿌리를 다 먹어치우는 바람에 이듬해에는 새 풀이 나지 않았지요. 새 풀이 나지 않으니 모두 굶어 죽었고요. 하필 이럴 때 일개 작은 부락인 진안부가 반란을 일으키고 고리격 대회에 반기를 듭니다. 현재 진안부는 멸족됐고 부족민들은 북쪽으로 이주했지요. 마침내 초목장이 텅 비어 누이 좋고 매부 좋게 되었으니 오히려 아주 잘된 일이겠군요.”
“음.”
대군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차라리 장님을 속이십시오!”
대합살이 담뱃대를 침상에 세게 내려놓으며 희끗희끗한 눈썹을 높이 치켰다.
“용격진황이 어떤 사람입니까? 초원의 사자가 바보입니까? 고리격 대회에 반역한 자의 말로를 모르는 사람도 있습니까? 진안부의 몇 만 무사를 삭북, 란마, 사지 어느 부락이 멸족시키지 못하겠습니까? 그런데도 그는 모반을 일으켰습니다. 왜 그랬겠습니까? 반란을 일으키지 않으면 굶어 죽으니까요! 아소륵이 한 말을 대군께서는 들으셨습니까? 고기 죽도 먹지 못하는 이들도 역적입니까? 그런 이들이 역적이냐고요!”
안정룡은 대합살이 이렇게까지 화내는 모습은 거의 보지 못했다. 그의 수염도, 온몸도 바들바들 떨렸다. 주먹을 하도 꽉 말아 쥐어서 오그라든 피부가 찢어질 것 같았다.
“그렇지.”
대군은 여전히 담담하게 대꾸했다.
대합살은 깊이 숨을 들이마시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는 담뱃대를 툭툭 치며 고개를 저었다.
“용격진황이 모반하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그에게는 물러날 곳이 없었지요. 그의 초목장은 타 부족이 점거했고 뒤편은 바다였습니다. 바다로 물러나 가축을 방목해야 했단 말입니까? 저였어도 반역을 저질렀을 겁니다!”
안정룡은 눈앞이 캄캄해졌고 양쪽 귀에서는 웅웅거리는 소리만 났다. 스승이 반역을 하면 제자도 목이 잘리려나?
“내 생각도 그러네.”
대군은 뜻밖에도 고개를 끄덕였다.
“사한. 그대의 말이 맞네. 나도 백로합이 왜 반란을 일으켰는지 알아. 재작년 진안부에서 마지막으로 공물을 보내며 백로합이 서신으로 이야기했네. 진안부 사람들이 굶어 죽는다고 말이야. 일부 지역에서는 겨울에 사람이 소나 말처럼 건초를 먹고 그도 안 되면 말을 죽여 말고기를 먹는다 했네. 큰 부락들은 진안부 사람들이 자기네 소와 양을 훔치고 적지 않은 사람들을 죽였다고 했지. 하지만 그 숫자보다 진안부의 굶어 죽은 사람 수가 더 많았어. 그들이 정말 진안부를 멸족시키지 못해서 북도성에 사절을 보내고 청양부에 출병을 부탁했겠나? 그들은 진안부가 반역하도록 몰아붙이고 청양부의 병력을 이용해 진안부를 없앴네. 그러면 철선강의 초목장은 부락들이 공평하게 나누게 되니까. 대합살도 알아채는 모략을 나라고 몰랐겠는가?”
대합살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대군을 바라보았다.
대군은 쓴웃음을 지었다.
“백로합이 너무 어리석었네. 진안부가 소와 양을 훔치고 타 부족민 몇을 죽인 일은 별로 큰일도 아니지. 하지만 고리격 대회의 제도가 옳지 않고 7개 부족 연합이 옳지 않다고 생각한 것은 그의 잘못이었어. 아주 큰 잘못이었지. 고리격 대회는 수백 년이나 된 제도일세. 손왕이 이 제도를 세우고서야 우리 북륙의 7개 부족은 한 나라가 된 셈이지. 고리격 대회에 반대하는 것은 나라를 배반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야. 비록 작은 부락이 여전히 수탈을 당하지만 고리격 대회가 생겨서 수백 년 전 손왕의 시대보다는 살기 좋지 않은가. 그 전에는 너 죽고 나 죽자고 싸워서 초원에는 해마다 사람이 죽어 나갔어. 모두가 남의 아내를 빼앗아 아이를 낳고 그 아이를 키워 또 전쟁을 했지. 수백 년 동안 모두가 손왕을 신처럼 여겼어. 바로 그 때문에 나조차도 손왕이 세운 제도에 반대한다는 말을 할 수가 없는데 백로합은 어떻겠는가?”
대군은 술잔의 술을 비우고 등불을 쳐다보았다. 아득히 먼 곳을 바라보는듯한 눈빛이었다.
“그런 이유로 정말 진안부 전체를 멸해야 했습니까? 그보다 먼저 대군과 친분이 두터웠던 란마부의 달덕리 칸도 죽임을 당했고 구남부의 선대 주군도 아들에게 죽임을 당했지요. 청양부 내 소씨 가문의 가주들도 죽거나 강직(降職)되었고요. 용격진황마저 죽은 지금 이 초원에 대군을 지지하는 사람이 또 누가 있습니까?”
“백로합은 죽을 수밖에 없었네.”
대군이 나직하게 말했다.
“지금 고리격 대회를 해산하고 싶은 사람은 백로합뿐만이 아니네. 많은 사람이 제2의 손왕이 되어 초원을 통일하고 자기 자손에게 대대로 변치 않을 대군의 자리를 물려주고 싶어 하지. 그들은 부족민이 안심하고 방목할 수 있을 정도의 초원만 있으면 만족하는 백로합과는 달라. 초원에 자신들과 포로만 남을 때까지 모든 사람을 죽이고 싶어 해. 그러면 초원은 동륙처럼 진정한 하나의 나라가 될 테고 대군은 동륙에서 말하는 황제가 되겠지.”
대군의 목소리가 엄숙하고 묵직하게 변했다.
“그래서 누구도 이 초원에서는 고리격 대회를 해산하자는 말을 못 해. 말하면 내가 죽여버릴 것이야. 우리 만족은 두 번 다시 서로를 학살해서는 안 되네. 수백 년간 우리 모두가 형제였는데 다시 전쟁이 일어난다면 죽는 것은 결국 자기 형제가 아닌가!”
대합살은 갑자기 바로 앉더니 고개를 돌렸다. 대군은 눈도 깜빡이지 않고 그를 쳐다보았다. 시선을 마주한 채 대합살의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
“하지만…….”
대군이 조용히 탄식했다.
“사한. 그대는 십수 년이나 나를 외면했지. 그해 하늘을 점쳐 보고 한사코 나를 대군의 자리에 추대했는데 대군이 된 나는 그대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을 많이 했으니까. 하지만 대군이 정말 하고 싶은 일을 다 할 수 있는 자리라 생각하는가? 내가 왜 달덕리 칸을 죽이고 백로합을 죽여야 했겠나? 우리가 진안부와 결전을 치를 때 삭북부의 백랑이 북도에서 200리 떨어진 곳에 있었단 말일세.”
“백랑단이오?”
대합살의 안색이 변했다.
“루염이 모반을 일으키려는 겁니까?”
백랑단은 무시무시한 이름이었다.
삭북부는 초원에서 두 번째로 큰 부락이며 루 씨 가문의 가주 루염은 삭북의 주군이었다. 그는 언제나 거대한 늑대를 탄 1만 명의 무사를 데리고 다녔고 그들을 백랑단이라 불렀다. 초원을 통틀어 삭북부인들만 늑대를 길들이는 재주가 있었다. 그들은 호답강 서쪽의 설원에서 하얀 늑대를 잡아다가 어릴 때부터 키워서 탈것으로 만들었다. 청양의 호표기가 가장 기피하는 기병이 바로 백랑단이었다. 보통의 군마는 흉악하게 커다란 늑대 앞에서 두려움에 떨었다. 백랑 기병의 군도는 살인 무기일 뿐만 아니라 백랑의 발톱과 이빨도 말의 뱃가죽을 찢고 내장을 꺼낼 수 있었다. 농후한 늑대 냄새가 초원 한쪽에서 흩날려 올 때면 모든 군마가 흡사 종말이라도 다가온 것처럼 공포에 질려 울부짖었다.
대군이 자리를 물려받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삭북부가 반역을 꾀한 적이 있었다. 그들은 북도성 아래까지 쳐내려왔지만 끝내 누구도 승리를 가져갈 수 없게 되자 그제야 삭북부의 깃발을 넘기며 대군의 신하로 복종한다는 뜻을 비쳤다. 또한 딸 두 명을 바쳐 대군의 연지로 삼게 했고 대군은 루염을 장인어른이라 존칭했다. 이후 삭북부는 다시 고리격 대회에 돌아왔고 그로부터 20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다. 그때의 혈전을 청양부 사람들은 생생하게 기억했다. 치열한 전투가 끝나고 성문 가득 두껍고 찐득하게 묻어난 피가 뚝뚝 흘러내리는 모습은 흉물스럽기 짝이 없었다.
“삭북뿐만이 아니라 구남, 사지 등 큰 부락들도 기병을 북도성 부근에 배치해 두었더군. 내가 백로합을 토벌하지 않았다면 그들이 연합해 우리 청양부를 공격했겠나, 안 했겠나? 나는 잘 모르겠군. 사한, 그대는 아는가?”
대합살은 묵묵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누구도 알 수 없겠지. 하지만 나는 그 위험을 감수할 수 없었네.”
대군의 목소리는 작지만 힘이 있었다.
“나는 만족의 대군이자 청양의 주군일세. 선택의 여지가 없었어.”
대군이 몸을 일으켰다. 옥 조각을 손에 꼭 쥐고 천천히 장막 입구로 걸어간 그는 양가죽 휘장을 걷고 뭔가를 던지듯 힘껏 손을 휘둘렀다. 안정룡은 목을 길게 빼고 내다보았다. 처량한 달빛 아래 옥빛이 한 번 반짝하더니 작디작은 옥 조각은 모래 알갱이 한 알이 너른 바다에 가라앉듯 수풀 속으로 사라졌다. 만족 대군과 진안부 우두머리의 친분도 망망한 초원 위로 사라졌고 한바탕 꿈처럼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게 됐다.
“그래서 백로합은 죽은 것이네. 한창때의 나 같으면 목숨을 내던지고서라도 백로합을 지키겠다고 그자들을 하나하나 죽였겠지. 그게 무슨 대수겠는가? 말을 타고 달리는 초원에서 사람들이 나를 공격한다 한들 또 뭐가 두렵겠는가? 하지만 나는 그럴 수 없었네. 초원의 대군이니까.”
대군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을 이었다.
“이것은 운명이네. 타고난 운명.”
대합살은 대군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오랫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술을 담았던 옹동이를 들어 잔 가장자리를 툭툭 치면서 작게 말했다.
“비었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