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주표묘록-13화 (13/360)

13화

제1장. 만족의 주인 (12)

목려가 눈썹을 치키며 그를 쳐다보았다.

“그럼 칼을 한 자루 골라보십시오.”

아소륵은 목려 뒤편의 칼 수십 자루를 보며 망설이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는 허리춤에서 청사를 풀어 목려 앞에 놓았다.

“아버지께서 주신 겁니다.”

“이건 칼이라 할 수 없습니다. 정교한 장난감에 불과하지요.”

목려가 오른쪽 칼걸이에서 무거운 칼을 한 자루 잡아 꺼냈다. 칼등이 곧고 칼날은 굽어진 칼이었다. 칼등의 굵기도 족히 손가락 반만 했다. 그는 휙 손목을 휘둘러 칼끝이 하늘을 향하게 칼을 세웠다. 목려는 완력이 엄청났다. 칼 몸은 한 치도 떨리지 않고 바위처럼 가만히 있었다. 칼 몸은 조금의 광택도 없이 거무스레했다.

“화족처럼 장식용이라면 허리칼도 괜찮겠지만 우리 초원인은 칼을 전쟁에서 씁니다. 말을 타고 적을 향해 돌진할 때 손을 쓸 수 있는 시간은 눈 깜빡할 새만큼도 없습니다. 짧은 칼은 적을 베지도 못할뿐더러 전쟁에 패했을 때 자기 목밖에 못 긋지요. 진정한 칼은 이 칼처럼 몸통이 묵직해 휘둘렀을 때 힘이 있고 칼등이 두꺼워 칼날끼리 부딪쳐도 부러지지 않는 것입니다. 칼날은 호선이어야 하고요. 칼날이 곧은 칼은 도보전에서만 사용할 수 있습니다. 기마전에서 곧은 칼은 적의 뼈에 박히면 뽑히지 않아 다른 적에게 도리어 죽임을 당하게 되지요!”

목려가 칼등을 잡고 아소륵에게 칼자루를 건넸다. 아소륵은 무수한 선혈을 실컷 마셨을 날카로운 칼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는 손으로 가볍게 날밑을 만져보며 저도 모르게 살짝 떨었다. 아소륵은 입술을 감쳐물며 칼자루를 꽉 쥐었다.

“두 손을 쓰십시오!”

목려가 낮게 소리쳤다.

아소륵은 황급히 두 손으로 바꿔 칼자루를 단단히 잡았다.

“왼손은 칼자루의 가장 아래쪽을 잡고 오른손은 날밑에 바짝 붙이십시오. 그렇게 두 손을 맞잡고서 칼을 휘두를 때 어찌 힘을 쓸 수 있겠습니까?”

아소륵은 대충 할 수 없어 그가 시키는 대로 했다.

목려가 갑자기 칼등을 쥔 손을 놓았다. 칼 몸을 공고히 잡아주던 거대한 힘이 사라지자 아소륵은 이 칼의 무게를 실감했다. 칼끝에 커다란 돌덩이가 지워져 있는 것 같았다. 손목에 힘이 풀리면 칼은 그대로 비스듬하게 기울어질 터였다. 그가 다시 힘을 주려 하는데 문득 손이 가벼워졌다. 목려가 어느새 손을 뻗어 칼을 가져갔던 것.

목려가 고개를 내두르며 말했다.

“세자의 힘으로는 이 칼을 제어하지 못합니다. 여기 있는 칼 중에서는 무거운 편도 아니지만요. 세자는 힘이 너무 약해 칼을 배우기에 적합하지 않습니다.”

접질린 손목을 움켜쥔 아소륵은 햇빛 속에서 무쇠 같은 커다란 손으로 수월하게 그 칼을 쥐고 있는 목려를 보았다. 어쩐지 그 칼까지의 거리가 까마득하게 느껴졌다.

목려는 칼을 거둬들여 물고기 비늘로 된 가죽 칼집에 집어넣었다.

“장군!”

아소륵이 갑자기 일어나 목려에게 허리를 굽히며 정중하게 절을 올렸다.

“장군, 다시 해볼게요.”

아연해진 목려는 실눈을 뜬 채 잠자코 있었다. 아소륵도 엎드려 머리를 양탄자에 조아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참의 정적이 흐르고 목려가 마침내 아소륵을 부축해 일으켰다.

“제게 이런 큰절을 올리지 마십시오. 당치않습니다. 과거 양을 치던 노예였던 제가 여씨 가문을 위해 힘을 보탤 수 있는 것만으로도 행운입니다. 정말 칼을 배우고자 결심하셨다면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왜 칼을 배우려고 하시는 겁니까?”

아소륵이 고개를 들었다. 목려는 그의 눈동자를 언뜻 스치고 지나가는 대담함을 보았다. 9왕의 개선 의례에서 그가 호표기를 막아설 때와 같은 눈빛이었다. 이토록 유약한 소년에게 이런 결연함이 있다니 믿기지가 않았다.

“저도 제가 쓸모없다는 거 압니다. 하지만 더는 쓸모없는 사람이고 싶지 않아요!”

“쓸모없다고요? 청양의 세자이면서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아소륵은 고개를 숙이고 입술을 달싹였지만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참을 침묵하던 목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습니다. 우선 칼에 대한 지식부터 가르쳐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아까 그 칼 ‘석치’는 쓸 수 없습니다. 다른 가벼운 칼도 있으니 가벼운 것부터 무거운 순서대로 연마해 나가도록 하죠.”

그가 다른 칼 하나를 천천히 뽑았다. 칼 몸은 암갈색에 어지럽게 떠도는 구름 같은 무늬가 나 있었다. 녹이 슬어 부식되는 바람에 사용할 수 없는 듯했지만 칼집에서 나오는 순간 챙 하고 나던 맑은 울림은 오래도록 사라지지 않았다. 목려가 손목을 한 번 털자 칼 몸이 매우 빠른 속도로 자잘하게 떨렸다. 칼끝도 몹시 빠르게 진동하며 흐릿한 형상만 보였다.

“이 칼은 20년 전 화족 상인에게서 산 것입니다. 석치처럼 묵직하고 힘이 있지는 않으나 화족은 칼 주조 기술이 탁월합니다. 몸통의 무늬는 강철을 두드려 단련하며 생긴 것이고 칼등은 부드러우면서 질기고 칼날의 쇠는 극도로 단단하지요. 칼을 질깃하게 주조하면서 칼등을 팽팽하게 당겨 마치 활시위를 잡아당긴 것 같습니다. 매번 칼을 갈고 나면 칼날의 이가 조금 튕겨져 나가지만 이런 칼이 더 예리합니다. 적을 벨 때 칼 몸이 살짝 구부러져 무쇠 갑옷을 베더라도 칼이 부러지지 않으며 사람 살을 가볍게 긋기만 해도 뼈까지 벨 수 있죠.”

그가 새끼 양가죽 반(半) 장을 칼날 위에 대충 던졌다. 양가죽은 저절로 두 동강이 났다.

아소륵의 경탄하는 눈빛 속에 목려가 또 다른 칼을 집어 들었다. 칼집에서 뽑을 때 칼 몸의 반사광이 눈부시게 빛났다. 칼에 나 있는 두 개의 혈조(血漕)는 차가운 별빛을 띠었고 몸통은 반들반들하게 갈아낸 은(銀) 같았다. 칼날은 곧고 날카로웠으며 칼 몸은 한 겹의 빛에 뒤덮인듯했다.

“이것은 창칼입니다. 베어 죽이는 용도가 아니라 틈으로 찔러 넣어 죽이는 용도지요. 일단 찔러 넣으면 피가 혈조 안으로 뿜어져 나와 적군은 즉시 힘이 빠집니다. 칼날은 요긴하지 않으나 의외로 칼등이 가장 곧고 단단해 아무리 힘을 줘도 구부러지지 않습니다. 과거 구남부의 한 장군이 이 칼로 우리 청양의 수많은 병사들을 죽였습니다. 끝내 그 장군이 화살에 맞아 죽고 마침 이 칼을 줍게 된 저는 그가 이 칼을 어떻게 사용했는지 알게 됐지요. 찔러 죽이는 것이 베어 죽이는 것보다 더 빠르다 보니 우리 병사가 칼을 들어 올릴 때 그가 한발 늦게 움직이더라도 먼저 가슴을 찌를 수 있었던 겁니다.”

목려는 세 자루의 칼을 차례로 아소륵 앞에 놓았다.

“전쟁에서 쓸 수 있는 칼은 이 세 가지뿐입니다. 석치는 진정한 벽도(劈刀)입니다. 힘으로 쓰는 칼이지요. 이 칼을 휘두를 수 있게 되면 적의 목을 단칼에 벨 수 있을 겁니다. 이 쇠칼은 아도(牙刀)라 하는데 이것을 쓰려면 힘을 쓰는 방법과 기술을 배워야 합니다. 말을 타고 지나갈 때 적의 동작을 똑바로 봐야 하죠. 칼을 맞부딪치지 말고 적의 공격을 재빨리 피하면 아도는 칼날이 가장 예리하기 때문에 뒷짐을 지고도 단칼에 해치울 수 있습니다. 이 은색 칼은 관도(貫刀)입니다. 이 칼을 쓰려면 세자의 속도가 얼마나 빠른지를 봐야 합니다. 눈 깜짝할 새에 적의 급소를 찌르지 못하면 적에게 목이 베일 수도 있지요. 어떤 칼을 쓰고 싶으십니까?”

칼을 만지는 아소륵의 손끝이 살짝 떨렸다. 원래도 창백했던 얼굴에는 핏기가 싹 가셨다.

“세자. 칼을 배우려거든 우선 세자께서 칼로 사람을 죽이고 싶은 것인지 알아야 합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는 저를 원망치 마십시오. 세자께서 피를 보는 것이 두렵다면 어떤 칼을 들어도 쓸모없는 쇳덩이일 뿐입니다. 아무리 뛰어난 검술이라도 사람을 죽일 때 마음이 약해진다면 그 또한 소용없지요.”

목려의 목소리가 엄격해졌다. 아소륵이 나직하게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근데 장군, 궁금한 게 있습니다. 이 칼들 중에 어떤 칼의 도술(刀術)이 가장 강합니까?”

목려가 미간을 구기며 잠시 생각하더니 자기 허리칼을 뽑았다. 낭봉도의 시퍼런 칼날은 처연한 냉기를 띠었다. 칼배와 접쇠무늬 부분에는 갈홍색 가느다란 것들이 끼어 있었는데 피가 스며든 것 같았다. 칼에는 자연스레 흉포함이 감돌았고 이내 달려들어 사람을 해치기라도 할 듯 조용했다.

놀란 아소륵은 몸을 바르르 떨었다.

“제가 가장 잘 쓰는 칼은 벽도입니다. 세자께서 검술을 익히는 데 심혈을 기울이시기만 한다면 형님이신 4왕자처럼 이 낭봉도를 다룰 수 있게 될 겁니다.”

아소륵이 칼날을 직시하며 말했다.

“그럼 목려 장군, 저는 낭봉도를 배우겠습니다.”

해질 무렵. 목려가 풀비탈에 앉아 마종금을 손질하며 작게 음을 하나 켰다. 며칠 내리 화창한 날씨가 이어져 악기 줄이 보송보송했고 음도 유난히 높았다. 그는 마종금을 켜며 잠긴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초원에서 입으로 전해져 오는 목가(牧歌)였다. 수십 년을 장군으로 지내면서도 그는 양치기 노예였을 때처럼 해질 무렵이면 석양을 보며 마종금을 연주했다.

저 멀리 양에게 풀을 먹이러 나갔던 노예들이 양떼를 몰아 돌아오고 있었다. 끝없이 이어지는 모습이 커다란 잿빛 구름 같았다.

“목려. 저녁 먹어.”

영씨 부인이 산비탈 뒤편으로 올라와 그의 옆에 앉았다. 그러나 밥 먹으러 가자며 그를 잡아당기지는 않고 가만히 앉아 그가 느릿느릿 마종금을 연주하는 소리를 들었다.

영씨 부인은 귀족 출신인데 노예 출신의 목려 장군에게 시집갔다. 말을 달리며 칼을 휘두르는 용맹한 모습이 좋았기 때문이라고. 그는 구속할 수 없는 수컷 야생마 같았다. 그런데 또 해질녘이 되면 유별나게 차분해지면서 마종금을 끼고 산비탈에 올라 느지막이 돌아오는 양떼를 구경했다. 수십 년이 흘러 목려도 장군이 되었고 집의 가축과 식솔도 셀 수 없을 만큼 많아졌다. 그러나 매일 저녁이면 목려는 여전히 장막 앞 풀비탈에 앉아 마종금을 연주했다. 그 모습에 영씨 부인은 옛날이 떠올라 마음이 저도 모르게 녹진해졌다.

목려가 마종금을 연주하며 먼 곳을 바라보았다. 영씨 부인의 시선도 그의 시선을 따라 움직였다. 양떼 뒤쪽 풀밭에서 아소륵이 칼을 휘두르며 사람을 베듯 말뚝을 내리치고 있었다. 석양 아래 그의 모습은 그림 속 먼 풍경처럼 작고 흐릿했다. 아소륵은 이미 매우 지친 듯 가슴을 살짝 웅크린 채 몇 번 내리치고 잠시 쉬었다. 그러나 땀을 닦고는 다시 두 손으로 칼을 받쳐 들고 단순한 내리치기를 반복했다.

쿵쿵. 칼이 말뚝을 내리칠 때 나는 소리가 아득하게 울려 퍼졌다.

“무슨 생각해?”

영씨 부인이 목려에게 물었다.

“세자를 봐.”

목려가 먼 곳의 소년을 가리키며 말했다.

“내일 맛있는 것 좀 만들어서 몸보신을 시켜. 체력이 아직도 안 좋아. 며칠 후에 말 타는 법을 가르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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