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제1장. 만족의 주인 (10)
귀족들이 모두 물러가고 9왕만 남았다.
“액로. 더 볼일이 남았느냐?”
대군이 관자놀이를 꾹 누르며 말했다.
“요 며칠 네가 승리하고 돌아온 후로 일이 많아서 좀 피곤하구나.”
9왕이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제가…… 이 아우가 잘못했습니다. 용격진황을 살려서 형님께 데려왔어야 했습니다! 부디 무지한 아우를 용서하십시오. 저는 정말 몰랐습니다…….”
대군은 두 손으로 그를 붙잡아 일으켰다.
“액로. 오해했구나. 백로합이 죽었어도 괜찮다. 마음은 몹시 아프지만 그렇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네가 백로합을 생포해 왔다고 해도 내가 그를 죽이지 않을 수 있었겠느냐? 고리격 대회의 군주인 내가 그를 죽이지 않는다면 나머지 부락에서 그를 죽이라 나를 몰아세웠을 것이다. 백로합은 죽어야만 했고, 나 대신 네가 그를 죽여 내 손에는 피를 묻히지 않았으니 마음이 조금 편하구나.”
대군은 얕게 한숨을 내쉬었다.
“세상 민심은 빠르게 변한다. 지난해 나는 란마부의 달덕리 칸을 죽였고 올해는 백로합을 죽였다. 액로, 이렇게 큰 초원에서 진정으로 나를 지지해 주는 사람의 수는 점점 줄어드는구나. 청양의 궁수인 네가 나를 도와 청양의 적들을 제거해야 한다. 네게 거는 기대가 크다. 그리고 호표기는 돌려줄 필요 없다. 오늘부로 그들은 네 휘하의 군사다.”
아연해진 9왕은 황급히 무릎을 꿇었다.
대군은 그를 다시 부축하며 물었다.
“이번엔 또 왜 그러는 것이냐?”
“호표기는 청양에서 가장 강한 부대로 북도성 수호의 근간입니다. 어떻게 그런 호표기를 친왕의 장막으로 이동시킬 수 있습니까? 저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수군댈까 봐 그러느냐? 액로가 칸에 봉해지더니 병권까지 점거했다는 소리를 할까 봐? 누군가는 액로 칸이 강한 군대를 장악했으니 반란을 일으킬 거라고 할 수도 있겠지?”
대군은 9왕의 손등을 툭툭 치고는 그의 손을 힘주어 잡았다.
“액로. 초원의 영웅은 뒷말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우리는 검과 전쟁의 공적으로 명성을 쌓지. 네게 호표기를 준 이유는 네가 이 강한 군대를 자유자재로 지휘하기 때문이다. 호표기를 부릴 수 있는 장군은 우리 청양에 많지 않아. 나는 네가 이들을 데리고 북도성을 지켜주길 바란다. 남들이 뭐라 하든 나는 너를 믿는다!”
9왕이 깊게 숨을 들이켰다. 대군이 잡고 있던 손을 힘껏 빼낸 그는 무릎을 꿇고 힘껏 머리를 조아렸다.
“제가 형님을 저버리는 일이 생긴다면, 죽어 마땅할 것입니다!”
“일어나라, 일어나.”
대군이 그를 붙잡아 일으켰다.
“액로. 네가 비록 내 친동생은 아니지만, 최근 몇 년간 너는 내 친형들과 비교가 안 될 만큼 많은 전쟁에 나가 승리를 거뒀다. 어떤 말들은 우리 사이에 굳이 꺼낼 필요도 없지. 참, 용격진황의 몸에서 내가 주었던 그 옥은 못 찾았느냐?”
“네. 제가 다 뒤져봤습니다.”
“아……. 그럼 다른 말은 없었느냐?”
“반드시 자기 목을 북도로 가져가 대군께 잘 보여드리라고만 했습니다.”
“그래? 백로합, 죽기 전에도 나를 보고 싶었던 것이냐?”
잠시 말이 없던 대군이 손을 저으며 말했다.
“그만 가봐라.”
9왕이 장막을 나오자 대합살이 아소륵의 손을 붙잡고 장막 안으로 들어갔다. 9왕은 눈도 깜빡하지 않고 소년을 쳐다보았으나 소년은 고개도 들지 않았다. 두 사람은 조용히 서로를 스치고 지나갔다. 아소륵이 금장궁 안으로 들어가자 9왕은 고개를 돌렸다. 맞은편에서 여수우가 다가오고 있었다.
“세자가 좀 나아진 듯하구나.”
9왕이 여수우의 귓가에 낮게 속삭였다. 여수우도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그 일을 아버지께 먼저 말씀드리고 잘못을 고해야 하지 않을까요? 어쨌든 난군 속에 있었던 것이 숙부와 제 잘못도 아니니 아버지께서도 크게 나무라지 않으실 겁니다. 행여나 아소륵에게 듣고 아버지께서 저희를 탓하실까 봐 걱정입니다.”
9왕이 고개를 저었다.
“아소륵은 말하지 않을 게다.”
“어떻게 아십니까?”
“내 느낌이 그렇구나.”
여수우가 나직이 웃었다.
“저희 다섯 형제 중에서는 어릴 때부터 아소륵이 가장 말이 없었지요. 형인 저희들도 녀석의 생각을 알 수 없었습니다. 뜻밖에 숙부께서 아소륵의 마음을 이해할 줄은 몰랐네요.”
9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녀석의 눈빛을 못 봤느냐? 네 아우는 어쩌면 지금 속으로 나를 죽이고 싶을지도 모른다. 너를 죽이려는 적을 이해하지 못하면 죽음을 자초하는 꼴이 아니겠느냐?”
“아소륵이요?”
여수우가 실소를 금치 못했다.
“숙부. 걱정이 지나치십니다. 아소륵은 어릴 때부터 허약해 칼도 제대로 들지 못했습니다. 성격도 물러서 병아리 한 마리 못 죽였죠. 다른 사람이 숙부를 죽이려 한다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겠지만 아소륵은 절대로 그럴 배짱이 없는 놈입니다.”
9왕도 웃으며 말했다.
“웃자고 해본 소리다. 참, 비막간. 네가 보기에 대군께서 세자를 총애하는 것 같으냐?”
여수우가 고개를 저었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아소륵이 몸이 안 좋아 내내 아버지와 함께 살았으니, 아무래도 좀 더 좋아하시기는 하겠지요.”
“여전히 세자에게 대군의 자리를 물려줄 생각이실까?”
여수우는 놀라 멍해졌다.
“그럴 리가요. 말을 타고 전쟁에 나가지도 못하는 아들에게 어찌 자리를 물려주시겠습니까?”
“나도 그럴 리 없다 생각한다.”
9왕이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그를 흘끗 쳐다보았다.
“하지만 왜 대군께서는 세자를 진안부에 보내 요양하게 했을까? 진안부는 대군이 자란 곳이 아니더냐. 등가아 초원은 대군을 길러낸 땅이란 말이다!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며 절을 올린 아소륵은 일어나 고개를 숙이고 서 있었다. 대군은 좌상에 비스듬히 기댄 채 고개를 끄덕였다.
떨어져 지낸 지 오래라 어떤 말부터 해야 할지 모르겠는 듯 부자는 내내 침묵을 지켰다. 금장궁 안에 흐르는 견디기 힘든 적막감에 대합살도 맨머리를 긁적일 뿐 달리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아소륵. 네가 북도에 돌아오니 좋구나. 남쪽에서 지내는 동안 키가 많이 큰 것을 보니 이 아비는 무척 기쁘고 안심이 된다.”
“감사합니다, 아버지. 저도 아버지와 어머니를 자주 생각했어요.”
“너도 이제 다 커서 금장궁에서는 지낼 수가 없다. 이 아비가 영씨 부인을 네 유모로 삼았다. 네가 태어날 때 너를 직접 받은 사람이라 네 어미를 제외하고 널 가장 아끼는 여인이지. 그러니 목려 장군 장막에서 지내면서 부족한 게 있으면 말해라.”
“감사합니다, 아버지. 유모도 제게 잘해주고 부족한 것은 없습니다.”
“오느라 힘들었을 텐데 어제 또 놀라 쓰러지기까지 했지. 지금은 좀 괜찮아졌느냐?”
“괜찮아졌어요.”
또 기나긴 침묵이 이어졌다. 대합살은 낮은 탁자 위에 올려둔 대군의 손이 꿈틀거리는 것을 보았다. 아들을 불러 옆에 와서 앉으라고 말하고 싶은 듯했지만 결국 그는 손을 도로 눌러놓고 말았다.
“그럼 네 어미를 만나러 가려무나.”
대군의 목소리에 피곤한 기색이 묻어났다. 아소륵은 잠자코 그곳에 서 있었다.
“아소륵. 아버지께 가보겠다고 인사드려야지.”
대합살이 급히 다가와 그의 손을 잡아당겼다.
“어서 측연지를 보러 가자.”
좌상 위에서 대군이 반쯤 감고 있던 눈을 천천히 떴다. 눈동자의 흰 반흔이 오싹하게 반짝였다.
“아소륵. 하고 싶은 말이 있거든 하려무나.”
대합살은 흠칫하며 아소륵의 손을 잡아당겼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표정을 하고서 아소륵을 향해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아소륵은 자그마한 손을 애써 빼며 제지하는 그에게서 벗어났다.
“아버지. 왜 진안부를 멸하셨나요?”
결국 세자는 그 질문을 던지고 말았다. 대합살이 가장 우려하던 일이 벌어졌다. 벌 수만 마리가 그의 머릿속을 날아다니는 것처럼 머리가 웅웅 울려댔다.
대군은 화를 내지 않고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진안부의 주군 용격진황은 손왕께서 정한 고리격 대회를 배반했다. 초원 사람은 모두 반달 천신의 자식이지. 손왕은 반달 천신의 가르침에 따라 우리를 위해 고리격 대회를 세우고 다시는 다투지 말라 하셨다. 진안부는 다른 부락의 군대를 습격하고 그들의 소와 양을 빼앗고 부족민들도 죽였다. 부락의 주군들은 내게 반란을 일으킨 진안부를 토벌해 달라고 청했고 네 아비인 나는 초원의 대군으로서 그리 할 수밖에 없었다.”
잠시 말이 없던 아소륵이 입을 열었다.
“소자는 아버지 말씀이 잘 이해가 안 됩니다. 백로합 형님은 제게 정말 잘해 주셨어요. 진안부의 유모도 제게 무척 잘해 줬고요.”
“계속 말해 봐라.”
“백로합 형님은 어느 할머니를 시켜 매일 저녁 제게 말젖을 짜 주라 했습니다. 전쟁에 나가는 전날까지도 당부를 했지요. 그 할머니는 제게 말젖을 짜 주었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네 아들을 우리 청양인이 죽였습니다. 나중에는 그녀도 죽고 마을도 폐허가 됐죠. 할머니는 그 암말을 쫓아 보내려 했지만, 암말은 거듭 돌아왔어요. 계속 말을 보내려던 할머니는 청양 기병이 쫓아와 단칼에 베어 버렸어요. 모두 제가 직접 보았습니다. 여기저기에서 모두가 살인을 했어요. 진안부의 숙부가 다친 다리를 끌고 와 저를 죽이려 했지만 유모 가륜첩이 저를 데리고 도망쳤어요. 하지만 결국 청양의 병사들이 쫓아왔고 유모가 제 앞을 가로막자 그들은 유모를 죽였습니다. 저는 진안부의 숙부들을 탓하지 않아요. 제게 다들 잘해 주셨거든요. 호적염이라는 숙부는 멋진 개를 갖고 있었어요. 제가 그 개가 낳은 새끼들을 좋아하자 저를 데리고 가 몰래 한 마리 훔쳐 주셨죠. 그 개가 쫓아오자 숙부는 개가 쫓아오지 못할 때까지 저를 데리고 말을 몰아 도망쳤어요. 호적염 숙부는 제가 마음 편히 새끼 개를 키울 수 있도록 말을 방목하는 장막에 어미 개를 데려갔고 그 개는 다시는 제 새끼를 찾으러 오지…….”
아소륵의 목소리는 높지 않았지만 그리 구슬프지도 않았다. 크나큰 금장궁 안에서 소년의 나직한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그는 물보라도 일으키지 않고 천천히 흘러가는 개울물처럼 조용히 하소연했다. 그러나 대합살은 보았다. 소년의 눈꼬리에 눈물이 맺히더니 천천히 얼굴을 타고 흘러내리는 것을. 소년은 있는 힘을 다해 옷자락을 그러쥐었다.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했다.
“아버지!”
아소륵은 무릎을 꿇고 두 손으로 바닥을 짚었다.
“소자는 정말 이해가 안 됩니다. 그들은 좋은 사람들이었단 말이에요……. 하지만 이제 다 죽었지요. 왜죠, 아버지? 좋은 사람도 반역자가 될 수 있나요? 고기죽도 배불리 못 먹는 사람들이 반역을 꾀할 수 있는 거예요?”
대합살이 낮게 탄식하며 한 걸음 물러났다. 이제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아는 까닭이었다. 대군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좋은 사람과 반역자는 별개의 문제다. 너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이 아비 역시 네가 이해하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하지만 너는 우리 여씨 가문 자손이다. 강하고 단단해져야 한다. 그깟 피 좀 봤다고 겁쟁이가 되어서는 안 돼. 너는 청양의 세자다. 장래 어쩌면 초원의 대군이 되어 많은 사람에게 명령을 내려야 할 테지. 그러니 울면 안 된다. 매우 강해져야 해. 네가 유약하면 너의 부족인이 더 많이 죽는다. 알겠느냐?”
아소륵이 고개를 저었다.
“소자는…… 모르겠습니다!”
“몰라도 괜찮다. 대답해 봐라. 너는 네 숙부 앞에서 칼을 들고 백로합의 딸을 지켜냈지. 칼을 드는 것과 여기서 눈물을 흘리는 것. 무엇이 그 아이를 지키는 방법이겠느냐?”
아소륵은 고개를 들고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연기 속 흐릿한 제 아버지의 얼굴을 보았다.
“칼을 드는 것이겠지. 안 그러냐? 아비에게 감히 이런 말을 할 배짱도 있으니 목려 장군에게 검술을 가르쳐주라 하마. 울지 말고 행동을 보여다오. 내게 칼이 한 자루 있다. 아비가 어렸을 때 백로합이 선물해준 것인데 네게 주마.”
대합살이 조심스럽게 앞으로 나가 대군이 하사한 허리칼을 받았다. 가늘고 긴 비수였다. 칼날은 1척 길이에 진녹색 상어 가죽 표면에는 금색 실로 조잡하고 이상한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대합살이 비수를 뽑자 표면에 투명한 푸른 광채가 감돌았다. 낙족이 만든 유명한 칼로 이름은 ‘청사(靑鯊)’, 대군이 몸에 늘 지니고 다니는 칼이었다.
“이 칼을 가지고 내가 안심할 수 있는 사내대장부가 되어라. 그럼 이만 네 어미에게 가봐.”
“어서 인사 올려.”
대합살이 청사를 아소륵의 허리춤에 끼우고 그를 잡아당겨 무릎을 꿇렸다. 그리고 다시 그를 잡아당겨 금장궁을 떠났다.
장막 입구에 다다랐을 때 아소륵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휙 돌아섰다.
“아버지. 한 가지 더 여쭙고 싶습니다.”
“말해라.”
“아버지께서는 저를 진안부로 보내시고 또 군대를 보내 진안부를 치셨죠. 제가 남쪽에서 죽어도…… 괜찮으셨던 겁니까?”
대합살은 잡고 있던 아소륵의 손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소년은 애써 얼굴을 굳히고 있었지만 엷게 묻어나는 슬픔은 감춰지지 않았다.
오랜 침묵이 흐르고 대군이 연기 속에서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참으로 어리석구나. 전쟁을 하는데 어떻게 사람이 죽지 않을 수 있겠느냐? 네 조상님들도 모두 전쟁터에서 돌아가셨다. 네가 정말 돌아오지 못했다면 나는 반달 천신께 너를 천상으로 인도해 달라고 빌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아소륵은 한참을 잠자코 있더니 고개를 돌려 장막 밖으로 나갔다.
금장궁에는 마침내 대군 혼자만 남았다. 그는 살며시 용격진황의 머리가 든 함을 어루만지며 돌조각처럼 침묵했다.